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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8월30일 수요일 [(녹)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수도회] 진실하고 책임 있는 사랑의 선포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테살 2,9-13
† 복음 마태 23,27-32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이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하고 거침없이
비난하십니다. 이렇게 섬뜩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예언자들을 박해한
유다인들’에게 머지않아 죽임을 당할 것을 감지하셨기 때문입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바알 신을 숭배하는 예언자들을 대항하여
싸웠으므로 아합 왕과 이제벨 왕비에게 쫓겨 다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느님의 제단을 허물고 주님의 예언자들을 쳐
죽였습니다. 엘리야는 “이제 저 혼자 남았는데, 저들은 제 목숨마저
없애려고 저를 찾고 있습니다.”(1열왕 19,14) 하고 주님께 아룁니다.
여호야킴 왕궁의 사제들과 예언자들은 예레미야 예언자를 단죄하며
“이 사람은 이 도성을 거슬러 예언하였으니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예레 26,11)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으로 이방인에게 구원의 은총이 전해졌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의 수난과 죽음’을 통한 하느님의 심오한 구원 계획이 온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믿음을 칭찬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순응하여 구원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신앙인이 됩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행복 선언의 주인공으로
2017년 가해 8월30일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제1독서
<우리는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말씀입니다. 2,9-13
복음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27-32
1951년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과 다트머스 대학의 풋볼 경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두 대학은 시작부터 과열된 양상을 보였는데,
이는 치열하게 경기에 임했던 선수의 부상으로 이어졌습니다.
프린스턴 팀 선수 중 한 명은 코가 부러졌고 또 다른 선수는 뇌진탕
증세를 보여서 급하게 들것에 실려 간 것입니다. 이로 인해 더욱 더
경기는 과격해졌고, 다음 쿼터에서는 다트머스 선수 한 명의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경기는 프린스턴 대학의 승리로 끝났지만, 씁쓸함을
남겼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일주일 뒤, 각 대학의 학생들에게 경기 녹화 영상을
보여주면서 이 거친 경기의 책임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물었습니다.
먼저 다트머스 대학의 학생 중에서는 35%가 자기 대학 선수들이
거친 경기를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상대 대학인 프린스턴
대학의 학생 중에서는 자기 대학 선수들이 거친 경기를 시작했다고
말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상대팀에 책임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자그마치 86%에 달했습니다.
객관적으로 이 영상을 평가한 사람들은 양 팀 모두 책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다트머스 대학의 35%와, 프린스턴 대학의
0%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맞습니다.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상대 학교의 잘못은 크게 인식하고,
반대로 자기 학교의 잘못은 작게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옳고 남은 틀리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지금 사회에서 특히 만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의
댓글 창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치 전쟁터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요즘 문제시되는 ‘묻지마 범죄’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바로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으로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고 하십니다.
의인들의 몸 안에는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마땅히 성전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선으로 차 있는 사람의 몸 안에는
하느님께서 계시기가 힘듭니다. 따라서 죽은 자의 무덤과 같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무덤은 닫혀 있는 한 겉모양은 아름다울 수
있겠지만, 무덤 안을 열면 참혹할 수밖에 없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은 이렇게 끔찍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할 때, 우리는 겉과 속이 다른 모습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즉, 자신에게는 끊임없이 자비롭지만 타인에게는
너무나도 엄격한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적대적으로 상대를 대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야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아닌,
행복선언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앞은 볼 수
있으나, 비전이 없는 것이다(헬렌 켈러).
어제 아침 산책을 하면서 바라 본 하늘입니다.
중독
1984년, 그때 저는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했습니다. 지금이야
컴퓨터가 삶 안에서 뗄 수 없는 소중한 물건으로 자리 잡았지만,
당시에는 솔직히 이 컴퓨터로 무엇을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 바로 위의 형이 어디선가 컴퓨터 게임 프로그램을
가지고 와서 설치를 하고 실행을 했는데, 완전히 다른 세상이 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 있었던 전자오락실의 게임보다 훨씬
재미있었기 때문이지요.
처음에는 공부하기 전에 기분 전환 삼아 가볍게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멈춰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는 공부를 해야 하는데 ‘한
판만 더...’를 외치면서 하다 보니 게임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엄청나게 나쁜 시험 성적을 받은 뒤에야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요.
이처럼 중독은 황폐한 상처를 남기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게임
중독만이 아니지요. 알코올, 니코틴, 도박 등의 중독을 보십시오.
몸과 마음의 황폐함을 겪고 나서야 겨우 벗어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누구는 중독을 일컬어서 느리게 진행되는 자살 시도라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런데 정말로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나쁜 습관들은 쉽게 중독되고
벗어나기도 힘든데, 왜 좋은 습관은 쉽게 중독되지 않을까요?
주님께 중독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데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성지를 방문해주신 김포지구 가톨릭성서모임 팀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진실하고 책임 있는 사랑의 선포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8월30일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마태 23,27-32
“너희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8)
진실하고 책임 있는 사랑의 선포자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질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23,27-28)라고 하십니다.
유다인들은 무덤이 죽음과 닿아 있어 부정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유다인들의 3대 명절 때는 순례자들이 붐벼 무덤에 몸이나 옷이
닿곤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불결해져서 축제에 참여할 수 없으므로
이를 피하려고 길가의 모든 무덤에 회칠을 해두곤 했지요. 사람들은
밤에도 무덤이 보이도록 무덤에 횟가루를 칠한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들은 맑은 날에는 하얗게 빛나 보였고 멀리서 보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예수시대부터 유다인들은 성인들과
예언자들을 기억하고 예언자들이 당하던 박해를 보속하는 뜻에서
기념관과 같은 무덤을 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겉으로는
의로운 체하지만 실제로는 율법에 불충하고 위선적인 그들을
질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섯 번째 질책과 같은 맥락에서, 자신들은 흠잡을 데
없는 사람들이라 자처하는 그들을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그렇게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23,29-30).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위선적인 행동으로 예언자들을
박해하던 이스라엘인들 편에 서 있었지요.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은 조상들의 잘못과 무관하고 흠도 없다고 합니다. 나 몰라라
하는 뻔뻔함이 그들의 덫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범죄하고도
회개하지 않은 조상의 후손들인 그들의 무책임과 위선을
책망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썩어가는 시체의 악취로 진동하고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질책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름답게 치장하고 유창한 말솜씨로 하느님에
대해 말하고 인생의 참된 길에 대해 말할 때가 많지요. 그러나 그
화려한 말을 하는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미움과 거짓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을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 표리부동의 모습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 부정적인 생각과
자기비하, 열등감, 절망, 포기를 붙들고 있을 때에도 드러나지요.
세상으로 눈을 돌리면, 이 사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처럼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고 IT강국으로 주목받는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결코 인간다운 사회, 더불어 행복한
나라라 할 수 없습니다. 속은 빈부격차와 부패, 자본의 권력화 속에
인간이 도구화 하고 있고, 자살률 최고라는 불안정하고 비참한
실상을 보이고 있지요. 속빈 강정과 같은 실상입니다. 어디서나
바리사이와 같은 위선과 탐욕이 문제입니다.
또한 바리사이들에게서 드러났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뻔뻔함과 왜곡된 의인의식과 무책임의 늪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
누구든 잘못할 수 있지요. 그러나 진정한 사랑을 하려면 잘못을
인정함으로써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나는 흠도 티도 없다는
자만과 무책임은 교만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오늘도 내 속에 악취 나는 것들은 없는지 살펴보고, 안에 품은
아름다운 하느님의 선물을 행동의 향기로 뿜어내는 진실한 우리가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그렇게 영혼을 바꾸고,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여 책임을 짐으로써 죽음의 십자가를 생명의 샘터로 바꿔가는
정직한 사랑의 선포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마태 23, 27)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8월30일 연중 제21주간 목요일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마태 23, 27)
세상을 보기 전에 먼저 제 내면을 보게됩니다.
내면을 만나지 않고서는 행복할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내면을 향해 말씀을 던지십니다.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어 발 디딜 자리조차 없습니다.
우리 내면을 구원하실 분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내면을 살리시는 분께서 추악하고 흉칙한 내면을 보여주십니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는 바리사이들을 향해
일침을 가하십니다.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것은 분명 우리의 내면입니다.
내면의 치유는 죽어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시작됩니다.
회칠한 무덤에서 나오는 은총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 내면이 살아나기를 애타게 바라십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2017년 가해 8월30일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이다.>
† 마태 23,27-32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흔든다고 합니다. 반면에 고양이는 화가
나면 꼬리를 세운다고 합니다. 같은 모습으로 보이지만 감정은 다른
것입니다. 개가 꼬리를 흔들면 가까이 해도 좋지만 고양이가 꼬리를
세우면 조심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꼬리가 아닙니다. 개나
고양이의 모습입니다. 꼬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표시일 뿐입니다.
서울교구는 89년부터 사제서품식을 체육관에서 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도 고척동에 있는 돔구장에서 서품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명동 성당에서 서품식을 하셨던 신부님께서 체육관에서 서품식을
하는 것은 신비감도 떨어지고, 전례적으로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외국에서 오신 신부님들은 체육관에서 서품식을
하는 것을 보면서 무척 놀라기도 합니다. 사제서품을 받는 신부님이
많다는 것에 놀라고, 많은 신자분들이 축하해 주는 것에도 놀랐다고
합니다. 서품식을 주관하는 저는 장소에 대해서 크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현실적으로 많은 인원이 함께 할 수 있는 성당이 없기
때문에 체육관에서 서품식을 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었습니다. 성당에서 서품식을 했을 때의
엄숙함과 분위기를 기억하는 것을 존중하면 되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부득이하게 체육관에서 서품식을 하는
것을 이해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이야기하기 전에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들에게는 무척
관대하셨습니다.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밤을 새운다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면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따듯하게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지치고 힘든 이들은 모두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짐은 가볍고, 멍에는 편하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꾸짖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규정들을 이야기하면서
베짱이처럼 자신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키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인으로서 충실하게 살지
못한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주일미사에 참례하지 못하는
사람, 본당에서 준비한 피정, 교육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데 인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하기 때문에 곧 신앙이 식어버리곤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주 근면하고 성실한 사도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뜨거운 열정도 있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자 여러분에게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이
증인이고 하느님께서도 증인이십니다.”
우리가 경제적인 풍요를 얻기 위해서 근면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복음을 위해서,
하느님께 나가기 위해서도 근면하고 성실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사람, 좋은 말씀을 듣기 위해서 피정과
교육에 자주 참여하는 사람,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적극적인
사람들은 신앙생활에서도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여름에는 베짱이처럼 살아도, 개미처럼 살아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겨울이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우리 모두는 언젠가 삶의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가 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개미들은 추운 겨울을
위해서 식량을 준비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나의 영혼과 이웃들을 위한 기도를 준비했다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을 도와주는 봉사를 준비했다면, 우리는
삶의 마지막이 온다 해도 아무 걱정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이 그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겉과 속이 다른 삶은 불행하다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8월30일 연중 제21주간 수요일(마태23,27-32)
겉과 속이 다른 삶은 불행하다.
저는 어려서 남모르게 아버지 옷 주머니에 손을 대서 돈을 꺼냈고,
불장난을 하다가 작은 댁의 사랑채를 다 태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울타리를 엮은 구리철사를 풀러 엿을 사 먹기도 했으며 길에서
주운 돈을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개인적으로 쓴 적도 있습니다.
선생님 서랍에 있던 시험문제를 몰래 보기도 했고, 교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안 그런 척 했습니다.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숨긴 적이 여러 번입니다. 지금도 여전합니다. 사람들은 속아주었고
저자신은 뻔뻔스럽게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두를 알고 기다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꾸중을 하였습니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그 회칠한 무덤이 바로 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부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한다고 성덕이 출중한 것도 아닙니다.
그에 상응하는 마음가짐과 정성을 담지 않으면 거룩한 것을 더 많이
접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불경한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알면 아는
만큼 더 잘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짐이
무거워집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사실 신부이기
때문에 더 많은 위선을 떨고 이중적으로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불행합니다.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묻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고
눈치 보며 사는 삶은 불행합니다.
신자들에게는 기도를 많이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을 하지만 최소한의
의무인 ‘성무일도’조차 거르고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성체조배는
물론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기본이거늘 일반 신자보다 더 많이
기도한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이러저러한 인간적인 욕망에
대해서도 절제 있는 기쁨을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닌 척 하고 목을 빳빳이 세우고 다닙니다. 이런
모습에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생각하면서도 몸은 여전히
육정을 따르고 맙니다. 그야말로‘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얘기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내 눈 안에 들보를 지닌 채 남의 눈의
티를 빼주겠다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 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하셨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하며 위선과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에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청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허물을 용서하소서. 구원을
허락하소서. 아멘.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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