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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9월5일 화요일 [(녹)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수도회] 삶의 터를 생명과 해방의 터로 바꿔주시는 주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테살 5,1-6.9-11
† 복음 루카 4,31-37
◈ 오늘의 묵상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하루를 마치고 잠이 들 때 과연 다음 날
내가 온전하게 일어날 것이라 믿지만, 정작 눈을 뜨고 주님을
마주보는 순간이 닥친다면 과연 그 순간이 내게는 기쁨의 순간일지,
두려움의 순간일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라면, 그리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다면, 우리
인생에 갑자기 어둠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저자의 말씀대로,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고, 그분 안에
머무는 한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신 말씀의 권위는 화려한 말솜씨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하느님의 창조의 말씀이자 치유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더러운 마귀의 영에 들린 사람들도 그분의
한 말씀으로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오히려 마귀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고백할 정도로 예수님의 말씀은
망가진 세상을 치유하고 조화롭게 만드시는 권위를 보여 주십니다.
권위란 권력의 자리로부터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권위는 나의 무지를 깨우쳐 주고, 두려움에서 해방시키며, 자유와
평화의 삶을 보여 주는 사람에 대한 존경과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예수님의 권위처럼 세상의 힘에 타협하지
않고, 악에 굴복하지 않으면서도 악의 굴레와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는 사랑의 권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부모로서, 교사로서,
지도자로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참된 권위를 얻을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좀 더'
2017년 가해 9월5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말씀입니다. 5,1-6.9-11
복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1-37
저는 지금 현재 강아지(‘개’라고 하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너무
커서요.) 3마리를 키우고 있습니다. 사실 밖에서 키우기 때문에 하루
종일 이 개들과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저 역시 해야 할 일이 있고,
또 어떤 때에는 외출을 나가야하기 때문에 겨우 하루에 두 번 정도
함께 산책하면서 놀고 난 뒤에 밥을 주는 정도입니다. 작년 초에
먼저 두 마리를 성지로 데려오게 되었는데, 이 개는 누군가 키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즉, 제게 왔을 때에는 이미 다 커서(현재 6살,
3살입니다) 전 주인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남아 있을 때였지요.
그래서일까요? 틈만 나면 도망을 쳤습니다. 그리고 제가 불러도
본체만체하고 가까이하지 않아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다 큰 개를 키우기란 쉽지 않다는 누군가의 말에 깊이 공감을 하게
되었지요. 그래도 워낙 귀엽고 예뻐서 더 많이 안아주고, 눈을
마주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전에는 앞발만 잡아도
“깨갱”대며 질색을 하던 개가 오히려 이제 제게 다가와 꼬리를
흔들면서 몸을 제 다리에 비비면서 친밀감을 표시합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요? 자그마치 18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떻게 보면 긴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좀 더’라는 관심이 이렇게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는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종종
주님을 느끼기가 힘들다고 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납니다. 성당에
가도 왜 가야하는지도 모르겠다고 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주님과
가까운 사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을
느끼기도 힘들고, 미사를 비롯한 성사 생활에서 기쁨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몇 번 시도를 해보고서는 “나와는 안 맞아.”
라면서 포기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알아보고는 소리를 지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마귀도 알아보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괜히 슬퍼지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제는 예수님을
알아보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좀 더’
라는 관심을 갖고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성사와 기도 생활에 ‘좀 더’ 충실해보고, 성경 읽기에 ‘좀 더’
집중해보고,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랑도도 ‘좀 더’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권위와 힘으로 더러운 영들도 힘을 잃고 나가버립니다. 우리
곁에 있는 악 역시 주님께 다가가 주님의 권위의 힘으로 쫓아내야
합니다. ‘좀 더’ 노력하면 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듯한 상황에서도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자신의 세계를 바꿀 수 있다(엘리너 루스벨트).
새벽님께서 보내주신 사진입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먼저 움직이면 됩니다.
젊은 농부 한 명이 배를 타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앞쪽에서 배 한 척이 빠른 속도로 강물을 따라 그의
배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농부는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방향을 바꾸세요. 그러지 않으면 제 배와 부딪쳐요.”
문제의 배는 농부의 배를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왔고 결국 두 배는
부딪쳤습니다. 젊은 농부는 “멍청이 같으니라고! 이렇게 넓은
강에서 어떻게 내 배와 부딪칠 수 있어! 내가 그렇게 방향을
바꾸라고 소리쳤잖아!”라면서 화를 냈습니다.
농부는 책임을 물기 위해 배의 안쪽을 봤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닙니까? 계류용 밧줄이 풀려서 강물을 따라 표류해
내려오던 텅 빈 배였던 것이지요.
농부는 소리를 질러 경고했고 자신의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맞습니다. 농부가 먼저 자신의
경로를 바꿔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부딪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대방에게만 늘 책임을 묻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내가
먼저 움직이면 어떨까요?
새벽님께서 보내주신 사진입니다. 멋지죠?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삶의 터를 생명과 해방의 터로 바꿔주시는 주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9월5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루카 4,31-37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으십니까?”(루카 4,34)
삶의 터를 생명과 해방의 터로 바꿔주시는 주님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첫 번째 활동은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내쫓는 일입니다. 옛 사람들은 인간을
괴롭히는 모든 악, 특히 질병은 마귀의 짓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병을 고치려면 마귀를 쫓아내야 했지요. 예수님께서는 병의 치유로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생명을 가져다주는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몹시 놀랍니다. 왜 놀랐을까요? 그것은 율법학자들의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가르침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사람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가르침과 선포를 구체적인 해방의 실천에
적용하셨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억압과 차별, 질병과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끼어드시어 해방을 가져다주는 말씀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과 인간을 소외시키는 그 삶의 관계에 파고드시어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시고 해방의 길로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하게 가로막습니다.
다시 말하면 관계를 단절시키고, 소외와 차별을 불러일으키는 온갖
행동과 활동이 마귀의 영의 작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유혹하고, 비인간화 하며, 국민을
속이고 조작하는 이념, 거짓 뉴스와 선전, 인간을 억압하는 구조와
체제 안에 마귀의 영이 꿈틀거립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자가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하고 크게 외칩니다(4,34).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거라.”(4,35)하고
꾸짖으시자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마귀에 들린 이에게서
나갑니다.
오늘날 ‘더러운 마귀의 영’은 누구일까요? 마귀의 영은 하느님의
뜻을 무시하고 거스르는 모든 실체입니다. 마귀는 하느님과 우리,
나와 이웃, 나와 피조물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서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오늘의 마귀는 어떤
형태로든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과 백성을 속이고 짓밟으며
착취하는 이들입니다.
나 자신이 관계를 단절시키고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더러운 마귀의
영’이 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겠습니다. 그러려면 사랑의 원천이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며 그분의 말씀의 진리에 따라 행동하고,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을 드러내야만 하겠지요.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도외시하지 않고 첫 자리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처럼 마귀의 영에 들린 사람과 권력, 불의한 자본
권력 등 기승을 부리며 비인간화를 재촉하는 오늘의 마귀가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한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의 부패, 초자본과 빈곤층의 극심한 양극화
속에 인간의 삶을 비참으로 내모는 마귀의 장난을 방치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 삶의 터가 마귀의 영이 아닌 예수님의 사랑의 혼과
구체적인 개입을 허용함으로써 소외를 극복하고 더욱더 인간답고
자유로운 ‘생명과 해방의 터’가 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말의 권위를 주시는 성령 /
전삼용 요셉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9월5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제1독서 : 테살로니카 1서 5,1-6.9-11
복 음 : 루카 4,31-37
제가 한 선교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있는데 그 소재를 얻기 위해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평신도로서 목사님 4분을 세례 받게 하신
것을 비롯하여 일 년에 적어도 10분 이상은 선교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그 비법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분은 다소 김빠지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전 성당 나오라고 안 그럽니다. 그것이 강요해서 되는 일인가요?
그냥 식사 전후에 성호경을 정성스럽게 긋고 기도한 것뿐입니다.
그러면 함께 있던 사람들 중에서 세례를 어떻게 하면 받을 수
있느냐고 저를 찾아옵니다. 그러면 교리에 인도해 주고 도와 줄
뿐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저의 출신 본당 선교 왕이 생각났습니다.
그 분은 옷가게를 하시는데 들어오는 손님마다 “찬미 예수님!”하고
인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뿐인데도 어떤 때는 일 년에 40분이나
선교를 하셨습니다. 다만 자신이 가톨릭교회의 신앙인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드러내는 것뿐인데, 천주교에 관심이 있었어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에게 좋은 연결 고리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 단순한 ‘성호경’과 ‘찬미예수님!’이라고 인사하는 것이 그렇게
큰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그 단순함 안에, 누구와 함께 있건
자랑스럽게 “성호”를 그을 수 있는 당당함, 또 기분 나빠서 옷을
사지 않고 나가건 말건, “찬미 예수님!”이라고 인사할 수 있는
믿음이 보통사람과는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하여 그 분들이 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성령의
힘이 감싸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로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그러나 아무나 마귀보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소리친다고 마귀가
도망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말이라도 예수님의 말씀엔 보이지
않는 힘이 있고 그만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도
저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하며 놀라워합니다.
선교의 열매를 많이 맺으시는 분들도 특별한 말로 설득하는
것보다는 단순한 말이라도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위와 힘”을
물려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권위와 힘은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권위와 힘을
물려받는 데는 ‘믿음’만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쫓아내지 못한 제자들에게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종류의 마귀를 쫓아낼 수 없다고 하십니다. 기도는 성령님을
우리 마음 안에 담는 방법입니다. 즉, 성령님이 휘감기지 않은 말은
권위도 힘도 지니지 못하여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를 점령하고 마음에 드는 땅을 발견합니다.
그는 “여기 나의 이름을 딴 도시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라고 말을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신하들은 지금의 뉴욕과 같은 새롭고 커다란
도시를 만들고 그 이름을 ‘알렉산드리아’라고 붙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싶다고 말만 한다고 집이
지어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그만한 권위와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계 제일의 부자가 그런 말을 하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 보이지 않게 우리 말에 힘을 주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신 안에 충만히 계시는 성령님을 통해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병이 고쳐지라고 하면
고쳐지고 사람이 살아나라고 하면 살아납니다. 이것은 그 분 안에
성령님이 충만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우리보고도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산이 바다로 옮겨지라고 해도 그렇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은 하느님이고 하느님은 죄와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만큼 올바로 사는 사람에게 성령님이 충만히 오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말의 권위와 힘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행위로써
하느님과 일치되고 그 분으로부터 영적인 권위와 힘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이
변화되고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에 마귀가 도망치는 것입니다.
정직한 부모님만이 자녀들에게 정직하라고 할 때 그 말에 힘이
있게 됩니다. 부모님이 매일 싸우면서 형제들에게 우애 있게
지내라는 말은 하나마나입니다.
권위를 위해 거만하고 무섭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권위는 내가
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신앙의 삶과 그것을 통해
오시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영성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루카 4, 34)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9월5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루카 4, 34)
아는 것은 단지 알아가는 시작일 뿐입니다.
아는 것은 함께하는 것으로 나아가야합니다.
삶이란 함께하는 기쁨입니다.
함께할 때 더더욱 뜨거워집니다.
함께할 때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아는 것으로 끝날 때 우리는 수시로 주님까지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외면하는 쪽은
언제나 안다고 착각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아시기에 깊어지는 사랑을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함께할 때 더욱 빛날 수 있음을 가르쳐주십니다.
함께하는 이 여정에 너무나 많은 것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당신 자신의 모든 것까지 우리에게 주시며 함께하길 원하십니다.
함께하는 사랑의 힘을 믿는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2017년 가해 9월5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 루카 4,31-37
작년 12월에 교황청에서 ‘사제양성지침’을 개정해서 발표하였습니다.
기존의 사제양성 지침의 핵심이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었다면 새로이
개정된 사제양성 지침의 핵심은 그리스도와 동화되는 것입니다.
비슷한 면도 있지만 좀 더 강화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는 교황청의 요청에 따라서 기존의 ‘한국 사제양성 지침’을
개정해야 합니다. 몇 번의 준비모임이 있었고, 지난 토요일부터
사제양성지침 소위원회가 출범하였습니다. 사제양성의 책임을 맡고
있는 신학교와 예비 신학생을 선발해서 신학교로 보내는 성소국이
함께 준비하기로 하였습니다.
사제양성은 ‘예비과정, 철학과정, 신학과정, 사목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성소국은 예비과정을 담당하기 때문에 이번 모임에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도 사제는 양성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제평생 교육원’에서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1년 6개월 동안 한국교회의 사제양성 지침을 위한 모임이 있을
것입니다. 교황청의 사제양성 지침을 수용하면서도 한국적인 상황에
합당한 사제양성 지침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제는 본당에서 신자 분들과 함께 지내기 때문에 ‘인성, 지성, 영성,
식별’의 덕과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학생들과 함께 지내는 신학교의 사제들이 좋은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신학생들이 따르고 배워야할 본당 신부님들이 바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사제양성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아무리 좋은 지침서가 있다고 해도 사제들이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권위가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새로운 권위와 힘을
보여주셨다고 놀라워하였습니다. 사제는 물론이고 신앙인들은 모두
예수님의 새로운 권위와 힘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동화되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은 이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에게 ‘대비와 준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태풍의 진로와 크기는 예측할 수 있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악한
영들과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악의 세력도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악의 세력도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하느님의
능력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과 악의 세력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신앙인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따라 갑니다. 하지만 악의 세력은 하느님의 뜻을 알고 하느님의
능력을 알면서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반대 방향으로 향합니다.
이것이 신앙인과 악의 세력이 하느님을 알지만 서로 다는 점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이 누구인지, 예수님께서 누구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은 어떠한가요? 참된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는지요? 아니면 하느님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알면서도 악의 세력처럼 정 반대의 길을 걷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세속의 유혹 앞에, 돈과 명예 앞에, 자존심과 욕심
앞에 눈이 멀어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참된 식별이 필요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하느님 능력의 소유자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9월5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루카4,31-37)
하느님 능력의 소유자
“등불 하나가 천년 어둠을 물리친다.” 는 옛 말이 있습니다. 빛을
가지고 있으면 어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빛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둠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물론 빛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 악의 세력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권능으로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고 그분의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숨어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생명의 숨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빛을 선택하면 어둠이 물러나고 어둠을 선택하면 빛이 물러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빛은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빛을 발하게 됩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며 대항을
시도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4,34. 35). 하시며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 내셨습니다. 그리고 분명 그 능력을 사도들을 비롯한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루카10장 17이하에 보면 제자들이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인정하고 잘 관리하고
성장시켜야 하겠습니다.
오늘 날의 시대는 너무나 시끄럽고 번잡하고 자극적입니다.
마귀들이 더는 일할 데가 없을 정도로 모든 삶의 자리를
점령했다고도 합니다. 유혹이 많고 번잡한 시대에 하느님의 권능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 먼저 침묵과 고독으로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침묵 속에서 절망과 혼란을
이겨내는 능력을 드러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 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야고4,7-8) 하고 말하였습니다.
알게 모르게 다가오는 어둠의 세력, 곧 하느님보다는 인간의 욕심을
부추기는 마음에서 자유롭기를 희망합니다.
20세기의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자신을
채울수록 텅 비어가니. 많은 것을 움켜쥐면서 나는 오히려 모든
것을 잃었다. 쾌락과 즐거움에 사로잡히면서 나는 오히려 실망과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세상 것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결국 그 끝은
파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6-8). 우리가 하느님의 숨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잠시 침묵가운데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을 챙겼으면
좋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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