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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9월20일 수요일 [(녹)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수도회] 지혜를 따라가는 신앙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티모 3,14-16
† 복음 루카 7,31-35
◈ 오늘의 묵상
진리란 누구에게나 타당한 삶의 지혜를 뜻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보편적이고 타당해도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그 가치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한 복음의 진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온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나 이 진리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태도는 사뭇 다릅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는 말씀은 세상과 무관하게 자기 편견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단식하고 고행할 때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고 하고,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먹고 마시자,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라고 빈정대는 태도는, 어떤
일이든 비난과 반대를 위하여 자기주장을 절대화하는 독선과 아집의
끝판을 보는 듯싶습니다.
진리에 눈을 감고 거짓을 일삼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진리를 외면하다 보면 자기 합리화와 위선의 늪에
빠지고, 그런 거짓을 집단적인 이익과 관심을 위하여 진리로
위장하면 결국 거짓을 진실로 믿게 되는 망상에 빠집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가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가 결국 옳다는 것은, 삶으로 신앙을 증언한
작고 보잘것없는 이들에게서 밝히 드러납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매일의 삶 안에서 십자가의 진리를 실천하여,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임을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순교
2017년 가해 9월20일 수요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3,1-9
제2독서
<죽음도, 삶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31ㄴ-39
복음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3-26
아마 제주도에 갈 일이 있으신 분들은 대부분 자동차를 빌리실
것입니다. 섬인 제주도에 자동차를 가지고 갈 수가 없으니까요.
더군다나 우리나라 최대 관광지라고 할 수 있는 제주도에는 렌터카가
아주 많기 때문에 쉽게 빌릴 수 있고 또 가격도 저렴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제주도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탈 일이 아니라면 자동차를
빌려서 운전을 합니다. 그래서 올 초, 제주도에 갔을 때에도
자동차를 빌려서 운전했습니다. 그런데 운전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나더군요. 분명히 제가 적당한 가격을 지불해서 자동차를
빌렸지만 이 자동차가 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고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안전 운전을 해야 합니다. 또한 깨끗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빌린 자동차는 분명히 제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만큼 사용하고
반납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빌린 자동차를 마치 자기 것인
양 함부로 다룬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중에 반납할 때에 이에 따른
배상을 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몸 역시 언젠가는 주님께 반납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살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 것인 양 아무렇게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으로부터 잠시 빌린 우리의 몸을 언젠가는
주님께 잘 반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주인이신 주님께서
보시기에 엉망진창으로 사용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함부로 다룬
것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우리 스스로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주인처럼 살 수 있는 자유를 주셨지만, 진짜
주인은 아니지요. 언젠가는 주님 앞으로 가서 이 세상에서 살도록
맡겨놓은 이 몸을 주님께 반납해야 합니다. 반납 조건은 주인이신
주님의 뜻에 맞게 잘 사용했느냐가 아닐까 싶습니다.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삶, 주님의 뜻에 맞게 철저하게 살았는지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조건에 맞게 자신의 몸을 사용하고 계십니까?
오늘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인
것입니다. 이분들은 주님을 이 세상에 증거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생명까지 봉헌하신 분들이지요. 주님을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의 무서운 칼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생명을 내어 던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즉, 순교자들은
주님께 자신의 몸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되돌려 드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현재 과거의 박해시대처럼 피의 순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에는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사랑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삶을
통해 순교를 할 수 있다고 하지요. 바로 백색 순교인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백색 순교자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주님 앞에 자신의 몸을 반납할 때에 잘 사용했다면서 칭찬
받지 않을까요?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티베트 속담).
순교자들처럼 우리의 몸을 가장 아름답게 반납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열매
농사를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한 청년이 밭에 고구마를
심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 고구마를 너무나도 좋아했기
때문이지요. 좋아하는 고구마를 직접 생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더욱
더 열심히 고구마를 키웠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이 고구마는
줄기만 옆으로 계속 뻗어가기 때문이지요.
고구마니까 당연히 줄기가 옆으로 계속 뻗어나가야 하겠지요.
그러나 농사가 처음인 청년은 고구마가 나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즉, 싹이 나고 잎이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나무가 될 줄
알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자라는 고구마를 보면서 결국 잘못 심었다면서
그 밭을 떠나 버렸습니다. 하지만 청년의 생각과 달리 땅속에서는
고구마가 가득 열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 청년처럼 보이지 않는다면서 쉽게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의 뜻은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늘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지 마십시오. 우리가 미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님께서는 주시는 커다란 선물이 나타날 것입니다.
어제 강의를 갔던 수원교구 평촌성당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지혜를 따라가는 신앙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9월20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루카 7,31-35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루카 7,35)
지혜를 따라가는 신앙
우리는 좋고 싫은 것에 따라 처신할 때가 있습니다. 내 기준과 성향에
맞지 않으면 피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내 생각과 경험을 믿고
다른 이들의 소리를 가벼이 여기기도 합니다. 영성생활에 있어서도
이런 모습은 쉽게 드러납니다. 사제가 싫고 강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성경말씀은 좋은데 상업화되고 부패한 교회가 싫어서
신앙생활을 중단하거나 포기해버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백성의 불신을 지적하십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거부하는 그들은 마치 장터에서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7,32)라고 말하는 아이들 같습니다. 결혼식 놀이를 하려는
아이들과 장례식 놀이를 하려는 아이들이 서로 서로 호응하지 않고
어깃장을 놓으며 버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완고함을
지적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아닌 자신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스스로 구원을 거부하는 가장 어리석은
처사임을 알려주십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좋고 싫음에 따라’,
‘내 마음에 들면’이라는 행동의 동기들은 결국 자기중심주의의
표현입니다. 하느님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요 궁극적인 목표임을
인정하지 않는 이는 결국 자신의 힘에 의존하고 기분에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지요.
기분에 따라 신앙생활이 흔들리고, 다른 사람이 잘 해주고
인정해주면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도 오해를 받거나 인정받지
못하면 그만 두는 신앙생활이 영원하신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감상적이고 어리석은 태도를 버려야 참
하느님을 만나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있다가도 사라져버리는 현세 재물이나 내 마음을 파고들어
감정의 파도를 일으켜 흔들어놓고 떠나버리는 일시적인 정서 반응에
속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럼에도’ 늘 그 안에서,
그것을 통하여 늘 우리를 구원과 행복과 해방의 길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영원하신 손길’을 믿고 그분께 맡길 줄 알아야겠지요.
한마디로 지혜롭게 변덕부리지 않고 늘 항구하게 주님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지혜로운 사람답게 내 안의 육의 경향에서 벗어나 주님의 영을
갈망함으로써, 나의 관점이 아니라 그분의 눈으로 만사만인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나의 마음이나 기분, 그리고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떠하더라도 영의 눈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의미를 발견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무엇이든 받아들여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계획을 알아차릴 수 있는 온유한 마음을
지녔으면 합니다.
오늘 바쁜 일상에서 멈춰 내 안에서 변덕을 부리는 마음의 뿌리가
무엇인지 살펴야겠습니다. 잠시만 방심하면 굳어져가는 사고의
틀과 기준, 선입견과 편견에 따라 판단하는 완고함에서 벗어나도록
힘써야겠지요. 온유한 마음과 따뜻한 사랑, 타자를 향한 헌신과
구원의 열정을 지니신 예수님께로 초점을 맞추고 그분의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는 지혜의 여정을 시작하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주님 제자의 조건!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9월20일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
복음: 루가 9,23-26: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주님 제자의 조건!
오늘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피를 흘려 순교하신 이 땅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날이다. 순교라고 하는 것은 신앙이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죽음을 당하거나 중형을 감내함을 뜻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형벌이 순교자를 만들지 않고 원인이
순교자를 만든다.”고 하였다. 즉 당하는 고통 그 자체보다는 그
지향하는 바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 순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만물 위에 사랑하는 애덕에 근거를 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완전한 신앙의 행동이다. 현 지금의 상황은 우리 선조들이 박해를
받던 그러한 시절은 아니다. 지금의 참된 순교의 정신이란 내 자신을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온전히 없이할 수 있는, 그래서 참 부활의
기쁨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의 특징은 세계의 교회사상 유례없는 자생적 교회라는
것이다. 선교사에 의해서 전래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1779년 천진암 주어사에서 광암 이벽을 중심으로 시작된 강학회를
통하여 진리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어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첫
영세를 받은 후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올 때까지 두 분의
중국인 선교사가 잠시 활동했을 뿐 성직자 없이 오랜 기간 동안
신자들만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교회가 가꾸어져 왔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 후 100년 이상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여기에서 나온
순교자들이 만 오천여 위가 있다. 그 중에 많은 분들이 기록이 없이
순교하였기 때문에, 순교 성인의 반열에 들지 못한 분들이 많은
것이다. 지금 다시 교회는 순교자 시복 시성 움직임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거름이 되어 오늘의 교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자세를 말씀하시고
계시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조건은 바로 수난 당하고
죽으신 스승을 닮는 것이다. 그 한 가지는 “자기 포기”와 “십자가를
받아들임”이다. 자기 포기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귀중한 것이지만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그 귀중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성직자와 수도자의 서원이 바로 그것이다.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만일 나에게 필요 없는 헌신짝을 버리는 것과 같다면 그것은 포기가
아니다. 그냥 필요 없으니까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를 한 것이다.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이지만, 독신으로 하느님을
선택하기 위하여 다른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다. 또 이 자기 포기라는
말은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자기를 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주님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자아를 완성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중심적인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 당신의 영광에
들어가셨듯이 우리 인간은 우리의 십자가 즉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을 완성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하느님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 앞에 자신의 이기가 살려고 한다면 그는
생명을 잃을 것이며, 하느님의 뜻 때문에 자신을 죽이는 사람은 살
것이다(24절). 여기서 우리가 세속적으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얻지 못하고 망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25절).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거부하는 그것 자체로 이미 우리 자신이 구원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이다(26절).
우리가 오늘 기리는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오늘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즉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요소가 나에게 어떤 것이 있는가? 나 자신을 성찰하면서
나의 나약한 면을 과감히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는 삶이 바로 그들의 순교정신을 본받는
것이며, 그들을 올바로 기리는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순교자들을 공경한다고 하고, 모든 순교자들을
시성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성인이 되지 못하면, 오늘 기리는
우리 순교성인들과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들을
기리고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 그분들과 같은 성인이
되도록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 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 자신도 순교정신을 오늘 이
순간부터 살아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그들과 함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되기를 결심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또한
많은 우리 순교자들이 시성될 수 있도록 기도하도록 하여야겠다.
- 수원 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2017년 가해 9월20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 루카7,31-35
엉킨 매듭을 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위로 자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정답은 아닐 것입니다. 엉킨 매듭을 푸는 것은
시간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국제 정세를 잘은
모르지만 엉킨 매듭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난감할 정도입니다. 북한은 연일 미사일을 발사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남한에 사드를 배치하는 것에 대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국제 사회는 북한에 대해서
재재와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들이 엉킨
매듭을 잘 풀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하나는 혼배 미사 주례를 부탁하는
전화였습니다. 제가 직접 아는 자매님도 아니고, 누군가가 저를
소개 해 주신 것 같습니다. 혼인을 하는 신랑과 신부를 잘 모르지만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른 한통의 전화는 레지오 단원을
위한 피정 부탁 전화였습니다. 이 또한 누군가가 제가 잘 할
것이라고 소개를 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전화를 받고, 부탁을 받아들이면 그때부터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오후에 하려고 했던 일은 뒤로 미루고, 혼배 미사 강론
준비를 해야 하고, 강의를 위해서도 며칠은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이렇게 바쁜 시간들이지만 나중에 보면 다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매번 지혜를 주시고, 시간을
주시고, 건강을 주셨습니다. 강의를 준비하는 시간, 누군가를
도와주는 시간은 사실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텔레비전 보느라고, 술 마시고 노느라고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세상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상대방의 입장을 들어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엉킨 매듭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는데 시간을 보냅니다. 누군가를 비난하면서 본인들의 책임은
다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사제들이 모여서 회의를 해도 그럴 때가
종종 있습니다. 본당의 일은 신자들이 잘 하지 못해서, 교회의 일은
주교님들께서 잘 하지 못해서 안 된다고 합니다. 나중에 보면
본인들은 별로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 그런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힘과 폭력이라는 가위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편견과 욕심이라는 가위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온 우주를 품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미워하면 바늘하나 들어갈 곳이 없습니다. 새로운 방법으로
매듭을 푸셨습니다.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십시오.
왼 뺨을 때리면 오른 뺨을 내어 주십시오.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내어 주십시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도 행복합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 또한
행복합니다. 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도 행복합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어깃장을 놓지 마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9월20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루카7,31-35)
어깃장을 놓지 마라.
“제 눈에 안경이라” 는 옛말이 있습니다. 남은 우습게 보는 것도
마음에 들면 좋게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물론 자기는 좋게
생각하는데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모습을 인정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중심으로 사는 고집이 살아 움직일 때가 있어
걱정입니다.
고집 센 어린이들의 비유를 들으면서 남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2).는 얘기는 고집을
피우면서 상대편을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피리를
부니까 장례식 놀이를 하고, 장례식 놀이를 하려고 하니까 결혼식
놀이를 하며 피리를 부는 것은 어깃장을 놓는 행위입니다. 비딱 선을
탄 고집불통의 어린이들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남이 잘되면 축하해 주고 어려움에 처하면 같이 아파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질투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잘못되면 고소해 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나의
잇속을 챙깁니다. 그리고는 사람들로부터 현명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해
버립니다. 실은 내가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데
세상을 탓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세상을 예수님의 눈으로
본다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눈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은 우리를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너무 금욕적이라고 하여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룩하지도 않고 세리들이나 죄인들과 어울리는 세속적인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고
비판하며 자기 구미에 맞는 메시아, 구세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작 그분께서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1,11). 그러나 구원의 길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는데 있습니다. 완고한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구원의 길은 멀고도 멉니다.
아무리 은총이 크다 하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담지 못하고 준비된 사람에게서는 하느님의 지혜가 빛나게
됩니다. 지혜서를 보면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다”(지혜6,14-15).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득 차 있는 그릇에는 아무 것도 담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릇을
비울 수 있는 지혜를 얻어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기꺼이 누리시기
바랍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님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님께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 둘 수
없습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정채봉 @@
진짜와 가짜
진짜 사랑의 주머니 속에는 꿈이 들어 있고
가짜 사랑의 주머니 속에는 욕심이 들어있다.
장애물 경주
장애물 경주와 같은 것
출발보다 도착이 중요한 것
사랑의 경주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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