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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10월11일 수요일 [(녹)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수도회] 참 기쁨으로 이끄는 사랑의 기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요나 4,1-11
† 복음 루카 11,1-4
◈ 오늘의 묵상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이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면, 기도는 호흡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앞서 사랑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루카 10장),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중요하게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 신앙의 요약이며
압축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의 핵심은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오시도록 기도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구하는 것입니다.
한편 기도의 중요성은 잘 알지만, 그리 쉽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고, 그분의 뜻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그분의 뜻대로 내 삶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려면 먼저 나 자신을 온전히
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안의 미움과 좌절뿐만 아니라, 내가
바라는 희망과 기쁨마저도 온전히 주님과 일치하고자 그분께 내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중에서 바로 첫걸음은 용서입니다. 내 마음 안에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긴 이웃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하는 것이 우리가 용서받기 위한
출발점이고, 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화해와 평화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구원
의지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응답이어야 하고, 우리의 모든 윤리적
행동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그분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2017년 가해 10월11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제1독서
"네가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 요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4,1-11
복음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4
2015년 우리나라 국민 1명이 1년 동안 읽는 책이 평균 9.3권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한 달에 한 권도 되지 않는구나 라고
생각되지만, 글을 모르는 영유아나 병중에 있거나 나이가 들어 책
읽기가 힘든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그래도 괘 많은 책들을 읽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긴 대형서점에 가면 정말로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더군요. 그만큼 책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저 역시 꽤 많은 책을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일주일에 7권 읽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이 목표를 채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읽은 것 같은데 2~3권 겨우 읽을 때가 많았지요.
그래서 하루 읽을 분량을 정해서 도표화 시킨 뒤, 표시를 하면서
읽으니 7권의 책 읽기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무턱대고 행하는 것보다는 목표를 잡고 체계적인 계획대로 하면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어쩌면 신앙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래서 시간경인 성무일도에서 알 수 있듯이, 초대교회 때부터
시간에 맞춰서 규칙적으로 기도를 하게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를 소홀히 하다가 점차 아예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기도가 잘 되지 않는다는 분이 참 많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기도
모습을 되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는데 있어서
어떤 계획도 세우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냥 막연하게
기도해야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절대로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어느
시간대에는 다른 것을 모두 내려놓고 기도에만 사용하겠다는 계획은
어떨까요? 성경책은 하루에 이만큼은 꼭 읽고 묵상하겠다는 식의
계획을 세워보면 어떨까요?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자주 기도하시러
산으로 올라가셨고,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그 기도가 바로 우리들이
매 미사 때마다 바치고 있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만큼 기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주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 신앙의 요약이라고 하지요.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올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달라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모든 기도를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나의 필요만을
채우는 기도를 할 때가 많습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내용이 참
많습니다. 철저하게 주님의 뜻이 배제된 나의 뜻만이 드러나는
기도를 바칩니다. 그래서 기도를 힘들어 하는 것입니다.
이제 제대로 된 기도를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계획을 세워보시면 어떨까요? 계획에 맞춰서 규칙적으로
기도하다보면 분명 주님의 뜻을 조금씩 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내 뜻이 먼저가 아니라 주님의 뜻이 먼저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은 읽기와 쓰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없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어찌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칠
수 있겠는가?(레프 톨스토이)
이스라엘 주님의 기도 성당에 붙어있는 우리말로 된 주님의 기도.
집중하는 삶.
독일의 심리학자인 에빙하우스에 의하면, 기억의 칠십 퍼센트는 이틀
뒤면 잊히지만 즐겁게 배운 삼십 퍼센트의 기억은 언제까지나
기억한다고 합니다. 좋아서 하는 일은 집중해서 잘 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런 생각 없이 그
일을 하루 종일 즐길 수가 있으며, 그렇게 흔하지는 않지만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밤을 새우면서도 공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디에 집중할 수 있느냐가 아닐까요? 단순히 재미없으니까
집중하지 않는다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즉, 좋아서
하는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뇌는 아주 특별한
능력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주 사소한 생각이라도 예외 없이 두뇌의 구조를 변화시켜서
흔적을 남긴다. 생각 하나하나가 뇌 구조를 쉬지 않고 바꾼다. 같은
생각을 여러 번 반복하면 습관으로 굳어 버린다. 성격도 생각하는
방향으로 바뀐다. 그러니 생각을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고 그 상태를
단단히 유지해 새로운 습관을 들여라. 그러면 뇌 구조가 거기에 맞게
변경될 것이다.”
정말로 흥미 없는 부분이라 할지라도 집중의 시간이 길어지고
반복되면 자신이 하는 일에 가치를 부여하게 되면서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집중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흥미도 느끼게 됩니다. 성적도 당연히
올라가겠지요?
이처럼 우리가 어디에 집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기도에 집중하고,
주님의 뜻이 담긴 사랑의 실천에 집중하는 것, 기타 등등 중요한
가치에 집중하게 된다면 분명히 우리의 삶은 풍요롭고 의미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쉽게 포기했었던 것은 아닐까요?
“나는 안 돼.”가 아니라 “나는 분명히 돼.”라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포기하고 싶을 때, 한 번 더 집중해서 몰입해 보십시오. 분명히
됩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에 앉으셔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셨다고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참 기쁨으로 이끄는 사랑의 기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10월11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루카 11,1-4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루카 11,2)
참 기쁨으로 이끄는 사랑의 기도
한 제자가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을 ‘아빠’라 고백하고 그분께 찬미를 드리며,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실현되기를 갈망하는 부분과 지금
우리의 필요를 청하는 부분으로 되어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아빠’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신앙고백이자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인식하는 정체성의 확인이며, 하느님과의 관계맺음입니다.
'아빠’라고 부름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본성과 관계를 맺어 그 본성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 결과 내 삶의 방향과 목적이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이렇듯 ‘아빠’라는 부름은 비참한 인간을 자녀로 삼아주시는
하느님의 엄청난 은혜와 축복이 담긴 고백인 셈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아빠’라고 부를 때마다 그분의 본성을 살라는 소명을
받았음을 기억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행동하고 그분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느님의 생명을 더 충만히 실현하기 위해
날마다 양식을 필요로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과 일치하여 그분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죄의 용서와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주님의 기도의 세 가지 청원 모두가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바로 사람들이 죄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길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가 이 땅에서 실현되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영혼에 장애가 될 뿐이며, 비인간적인
세상으로 내몰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려면 날마다 일용할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 양식은 생명 유지에 필요한 빵을 가리키지만, 그보다도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이 바로 가장 중요한 양식입니다. 사랑과 진리, 정의와
평화, 선과 지혜, 믿음과 희망, 절제와 애정 등 주님의 본성에 속하는
것들이 바로 우리를 살리는 양식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죄의 용서를 청해야 하지만 그에 앞서 나에게
잘못한 사람의 죄를 용서하도록 초대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하는 마음 없이 용서 받을 수 없음을 가르치십니다. 죄 중에 사는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자비 안에 머물 때에 다른 이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청하는 사람은 남을 ‘먼저’ 용서해야만
할 것입니다.
끝으로 예수님께서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 하십니다. 늘
다가오기 마련인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혹은 지나간 유혹과 다가올 유혹, 드러난 유혹과 감추어진 유혹,
갑작스런 유혹과 끈질긴 유혹 등 때때로 얼굴을 바꿔가며
도전해옵니다. 우리는 그러한 유혹에 빠져들지 말고 그것을 통해
오히려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처럼, ‘아빠’라 부름으로써
주님의 본성 안으로 들어가 그분과 관계를 맺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을 양식 삼아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서 실현되어
그분의 거룩함이 드러나도록 기도하고 실천하는 우리이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기도하는 법 / 전삼용 요셉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10월11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요나 예언서 4,1-11
복 음 : 루카 11,1-4
기도는 마치 숨과 같아서 숨 쉬지 않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듯이
기도하지 않는 신앙인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기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제가 깨달은 것은 기도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마치 애인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애인 만나서 무엇을 해야만
하는 법은 없습니다. 만나는 것이 중요하고 그 다음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됩니다. 그저 말하고 싶으면 말하고 하기 싫으면 바라만 봐도
되고 어깨에 기대어 자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둘 사이에 사랑만
있으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 둘이 만나면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둘 사이에 오고가는 사랑의 마음과 표현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없이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도 제자들이 기도하는 법을 여쭈어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법’ 대신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기도하는 법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 안에 있는 내용이 내가
하고 있는 기도 안에 들어있어야 합니다. 바로 주님의 기도가 둘
사이를 오고가는 사랑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기도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나 들여다볼까요?
- 하늘에 계신 ; 하느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땅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 하늘처럼 깨끗하지 않다면 하느님이 계시지 않고 따라서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먼저 기도하기 전에 우리 마음이
깨끗한지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지 먼저 성찰하고
그렇지 못하다면 죄를 뉘우치거나 고해성사를 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주님께서 사시는 하늘로 들어 올리지 못한다면 주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 분이 계신 곳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시나이 산에 오른 것처럼 우리도 우리 마음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것이 기도의 시작이고 기본입니다.
- 우리 아버지 ; 기도는 인격간의 만남입니다. 하느님과 만나는 내가
누구인지 또 하느님이 누구인지 먼저 인식하지 못하면 기도는
추상적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누구이고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정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과연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살아가고 있는지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하나 되어 아버지께 기도하기를
원하셔서 당신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 기도의 출발을 항상 감사와
찬미가 되어야합니다. 내 자신의 영광만을 바라면서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기를 입으로만 되뇌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이집트를 탈출하였듯이 기도의
시작과 완성은 감사와 찬미입니다.
기도가 하나의 관계이고 만남이고 사랑이라면 그 분 앞에서 갖아야
하는 마음자세는 겸손이고, 겸손한 사람이라면 자연적으로 하느님께
감사하고 그래서 찬미를 드리게 됩니다.
-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 기도는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행복해지지 않으면 기도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힘들고
고통스럽다면 그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던지 참으로 만나고 있지
않던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이신 분을
만나면 당연히 행복해집니다. 이 행복이 바로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인간은 교만해져서 아버지께 불순종하고 그래서 그 분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그래서 행복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이와
반대로 행복을 되찾는 과정입니다. 기도가 일이 되거나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 이것이
사랑을 고백하는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여 당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따랐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상대의 뜻을 따르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당신의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아버지께 불순종하여
행복을 잃었다면 다시 행복을 되찾는 것은 다시 겸손하여져서
아버지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뜻을 따르는 것도 그
분의 도움 없이는 될 수 없습니다. 기도는 내 자신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하여 아버지와 다시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고 그로 인해
행복을 다시 회복하게 하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 마치 밥을 굶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에너지를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들임을 인정합시다. 매일 양식을 먹어야 하듯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는 것은 ‘매일’ 기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
우리가 다른 이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면 하느님도 우리 죄를
용서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러나 용서도 기도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를 지향합니다.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사랑의
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 유혹거리에 스스로 가까이
가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고 있지는 않은지 뒤돌아봅시다.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교만해지면 죄를
짓게 됩니다. 아니 스스로 유혹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교만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유혹에 떨어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유혹을 이기는 힘을 줍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죄에 떨어지면 모든 관계가 끝장나고 행복도 잃게 됩니다. 양식이
몸을 지켜준다면 기도는 영혼을 지켜줍니다.
- 악에서 구하소서 ; 물 위를 걷다가 물속으로 빠져들어 가던
베드로는 예수님께 손을 뻗어 건져줄 것을 청합니다. 반대로 유다는
손을 내밀기 싫어 자살을 선택합니다.
죄 없는 인간이 없습니다. 기도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하느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는 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힘도 주지만 죄에 떨어졌더라도 다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기도에 특별한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내용은 있습니다.
어떤 내용으로 기도해야 하는지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에 다 넣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는 기도의 내용이기도 하고 동시에
기도의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2017년 가해 10월11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 루카 11,1-4
10월은 묵주기도 성월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빛의
신비를 제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묵주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탄생, 예수님의 공생활, 예수님의 수난, 예수님의 부활’을
묵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묵주기도의 힘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적성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당시에는 운전을 참 많이
했습니다. 운전을 하면서 묵주를 찾으려고 잠시 차를 세웠습니다.
바로 그때 제 앞에 큰 트럭이 지나갔습니다. 제가 묵주를 꺼내려고
차를 세우지 않았다면 큰 사고가 날 뻔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묵주를 꺼내기만 했어도 제게 큰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정성껏 기도를 한다면 우리 앞에 놓인 시련은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주실 것이고, 묶인 것을 풀 수 있는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기도는 우리의 소망을 청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기도는
공동체의 염원을 청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기도는 평화와 용서를
구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진정한 의미는 해야 할
일을 깨닫는 것입니다. 또 깨달은 것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서말씀에서 요나와 하느님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요나는 불평을 하였습니다. 자신의 기준과 가치에 따라서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도시인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을 섬기지
않았고 하느님께 잘못을 하였습니다. 요나의 생각에는 니네베
사람들이 벌을 받아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니네베 사람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께서는
잘못한 이들을 조건 없이 용서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외롭게
죽음을 맞이할 때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였습니다.’
본당에서도 ‘분노와 원망’ 때문에 힘들게 사는 분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분노할 만한 이유도 있고, 원망할 만한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분노와 원망은 참된 자유와 치유를 주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오직 용서와 화해만이 참된 자유를 줄 수 있고,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지금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십시오.
행복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보십시오. 참된 자유가 방긋 웃으며 들어올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기도생활의 반석|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10월11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루가 11,1-4)
기도생활의 반석
주님의 기도는 너무 자주, 흔하게 바치는 기도이기에 고루하고 낡은
기도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단순하고 간결하면서도 완전한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미사여구와 성경말씀을 덧붙여 길게
늘어놓아야 기도를 잘하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그저 입으로 외우는 것으로 만족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분명
주님의 기도는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가장 완전한 기도이면서도
깊이 있는 기도이니 입술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사랑을 담아서 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 기도생활의 반석"
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자녀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아버지'에게서 받는데 성령의 은총 없이는 누구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하시며 '아버지'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나 도전의 순간에 언급하셨는데 만약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고 느끼지 않거나 그분의 자녀라고 여기지 않아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믿음이 없거나 어휘의
나열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신 시선을 느끼게 해 줍니다. 아버지께 향하는 기도의 말은
미신에서 하는 주문처럼 소용없는 말들이 아닙니다. 나를 당신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주신 분에게 향하는 목소리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녀임을 깨닫고 동시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시는 아버지가 계심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기도는 모두를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잊는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친밀한 아버지로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반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희망하고 후반부는 우리 서로간의 용서와 화해를
청하며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청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과 땅이 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도록 비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챙겨주게 될 때 주님의 기도는 완성됩니다.
그때 하늘 아버지를 당당하게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 자신이 아버지의 품위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고,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고 또 이것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사실“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샤를 드 푸코). “기도란? 사랑의 행위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닙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사랑과 사랑이 통하는
관계를 이루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깊은 기도를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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