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0월18일 수요일 [(홍)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수도회] 행동과 말로 항구히 열정적으로 선포하는 복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2티모 4,10-17ㄴ
† 복음 루카 10,1-9
◈ 오늘의 묵상
안티오키아 태생으로 직업이 의사였다고 알려진 루카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높고, 그리스도의 온유하심에 초점을 맞춘 복음사가입니다.
이방계 그리스도인이었던 그는 자신의 출신답게 모든 민족들의
구원에 관심을 갖고, 옛 율법이 배제하였던 가난한 이들, 죄인들,
여인들과 이방인들도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받았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의 협력자로서 그의 서간에 자주
기억되는 동료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은 안타까운
현실에서도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시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시려는
당신의 소명을 수행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제자들은 비록 가진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지만, 예수님께 파견을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평화를 전할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이면 충분합니다. 복음 선포를 위해 파견을 받는 것은
자신을 온전히 벗어 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입는 것입니다.
물도 설고 말도 서툰 이국땅에 가서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묵묵히
수행하는 많은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머나먼 오지에서
예수님의 이름만 가지고 전혀 다른 문화의 사람들과 살아갑니다.
그들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예수님의
참평화를 전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품어
안을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을 선물받은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2017년 가해 10월18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 4,10-17ㄴ
복음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9
매년 UN(국제연합)에서는 소득, 건강한 수명, 사회복지, 관용, 인생을
스스로 결정할 자유, 부정부패로부터의 자유 등의 항목으로 각
나라의 순위를 매긴 세계행복보고서를 발표합니다. 거의 북유럽의
나라들이 상위권을 차지하는데, 올해에는 노르웨이라는 나라가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살펴보다가 주목할
만한 기사 하나를 볼 수 있었습니다. 글쎄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이나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나 임금 차이가 별로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이 기술을 배우거나 또는
산업현장에 곧바로 취업해서 일을 한다고 합니다. 정말로 대학에
들어갈 사람은 학문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이지요.
문득 우리나라는 가능할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기만 합니다. 무조건 대학은 가야지만 생각하는
사회이지요. 더군다나 학문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되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만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직업에도 어떤 순위가 매겨진 듯한
느낌입니다.
사실 중요하지 않은 직업은 없습니다. 소위 3D(어렵고 힘들고 더러운
직업) 직종을 사람들이 피하지요. 그렇다면 이 직업이 필요하지 않은
것인가요? 남들이 알아주지는 않지만 반드시 일하는 사람이 있어야
모두가 편안히 생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자신이 해서는 안
되고, 남이 해야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즉,
자신은 쉽고 편하고 깨끗한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부터 사제, 수도 성소가 줄어든다는 말이 심상치 않게
들립니다. 저 역시 성소국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성소자들이 줄었다는
현실이 더욱 더 와 닿습니다. 왜 성소자가 줄어들까요? 3D 직종을
피하는 것처럼, 이 길이 겉으로 볼 때에는 개인의 욕심과 이기심을
모두 내려놓아야 하는 어렵고 힘든, 그리고 때로는 사람들의 욕을
많이 먹어야 하는 더러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없어집니다. 이는 교회 안의 봉사자들 숫자가
줄어드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시대를 미리 말씀하신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더욱 더 어렵고 힘든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참 행복으로 이끌어
주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일꾼들이 더욱 더 필요합니다.
그런데 남에게만 맡기지 마시고 내 자신부터 주님의 일꾼이 되기
위해 노력해보면 어떨까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해봤자 소용없다. 필요한 일을 함에서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윈스턴 처칠).
우리나라 순위는 56위입니다.
지혜로운 사람.
어느 마을의 지혜롭다는 사제에게 한 청년이 찾아가 물었습니다.
“오늘 당신 침대에 미녀 한 명이 누워 있다면, 당신은 그 미녀를
여자로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욕망을 자제할 수는 있을 겁니다.”
청년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사막을 지나가다가 금 조각을 본다면, 그 금 조각을 조약돌인
양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가지고 싶은 마음을 참고 그 금 조각을 줍지 않을
수는 있을 겁니다.”
또 물었습니다.
“두 형제가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 중 한 명은 당신을 싫어하고,
다른 한 명은 당신을 좋아합니다. 당신은 그 두 형제를 공평하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속으로는 괴롭겠지요. 하지만 나를 좋아하는 형제와 싫어하는
형제를 똑같이 대할 것입니다.”
계속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욕망에서 벗어난 사람이 아니라, 욕망을 억누를 줄
아는 사람입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책 ‘마크툽’에서 본 글입니다. 이 글을 읽고 참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욕망에서 벗어나야 지혜로운
사람처럼 생각하지요. 그러나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욕망을 억누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왜 주님께서 어려움 자체를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시고, 이를 이겨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셨는지를 어렴풋이 깨닫게 됩니다.
오늘은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행동과 말로 항구히 열정적으로 선포하는 복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10월18일 수요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루카 10,1-9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행동과 말로 항구히 열정적으로 선포하는 복음
에우세비우스와 예로니모에 따르면, 루카는 시리아의 교육
중심지였던 안티오키아 출신으로서 그리스인 의사였습니다
(콜로 4,14). 그는 바오로에게서 믿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51년경 사도 바오로의 제2차 전교여행에 수행하였고, 57년까지
필리피에 머물며 그곳의 공동체를 지도하였습니다.
루카는 사도 바오로의 제3차 전교여행 때에도 수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듯 루카는 사도 바오로의 제자로서 스승의 거의 모든
복음선포 여정에 함께 하였습니다. 루카는 데마스가 현세를 사랑하여
바오로에게서 떠나가고, 알렉산드로스가 바오로에게 해를 입히고,
첫 변론 때에 모두가 바오로를 저버렸음에도 유일하게 스승 곁을
지켰지요(2티모 4,11).
또한 그는 바오로 사도가 로마로 호송될 때에 함께 하였고, 수감
중이던 61-63년까지 로마에 있었으며, 다시 투옥되었을 때에도 함께
있었습니다. 67년 바오로가 순교하자 그는 그리스로 건너가서
“아카이아”에서 전교합니다. 그는 “복음을 선포하는 일로 모든
교회에서 칭송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2코린 8,18)
루카는 오직 복음선포에 전념하는 사도 바오로의 여정에 동참하면서
그 고통을 함께 겪어냈습니다. 그는 복음을 기록하기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기쁨과 사랑을 전하는 고난의 길을 바오로 사도와 더불어
걸었지요. 이렇게 복음선포는 선과 사랑을 위해 고난을 함께 겪어냄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성 루카 복음사가의 삶을 통해 우리는 행동의 복음선포가 말로 하는
선포에 앞서며 더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보고,
듣고, 체험했던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특히 그는 차별 없이 모두에게
향하는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 가난한 자를 우선 선택하시는
예수님의 구원 행적을 생생하게 전해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10,3)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모든 이에게 행동과 말로 기쁜소식을 전파할 소명을
받았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루카 복음사가처럼 열정과 항구한 정신으로 복음을 선포할 필요가
있겠지요.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낭만적인 일도 아니며 자신을
선전하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모든 이가 정의롭고 자비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행복한 순례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항구함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또한 루카 복음사가처럼 말에 앞서 행동으로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행동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공허한 말과 세상의 허황된 소리로 가득 채워지는 오늘, 하느님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행동이 더욱 절실할 때입니다. 특히 루카 복음에
따라 우리도 가난한 자로서 가난한 자를 우선 선택하며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모두를 사랑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배우고 전하라 / 전삼용 요셉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10월18일 수요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 티모테오 2서 4,10-17ㄴ
복 음 : 루카 10,1-9
로마 유학시절 제 논문 이태리어를 교정해주시던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말 위대한 신학자들이 그런 말들을 했어요? 마리아면 그냥
마리아지, 세상 첫 피조물이라느니, 그리스도의 신부라느니,
교회라느니... 휴~ 성모님이 직접 이 글들을 보시면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물어볼 것 같네요. 마리아는 그저 우리 보통 신자들이
믿는 그 마리아가 제일이에요.”
물론 보통 신자들이 말하는 마리아도 마리아고, 신학자들이 어렵게
이야기하는 마리아도 마리아입니다. 사실 신학적으로 깊이 들어가면
마리아만큼 어려운 분도 없습니다. 개신교는 그저 의인 중 한 명으로
치부하지만, 가톨릭에선 예수님 다음으로 중요하신 분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그저 성모상 모셔다 놓고 묵주기도 열심히 바치고,
하느님의 어머니라느니, 평생 동정으로 사셨다느니, 원죄가
없다느니, 하늘로 승천하셨다느니 하는 교리들은 이해하기 힘드니
그저 가르치는 대로 믿으면 그만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왜 이해되지도 않는 그런 교리들을 만들어내서 개신교와
자꾸만 멀어지려 하느냐 라는 비판을 하기도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런 것들을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설명해
주려면 누군가는 그저 믿으면 그만인 것들도 머리에서 쥐가 나도록
연구하고 묵상해야합니다. 과거에 이런 노력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런 교의들도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끝까지 탐구하고
찾아내고 후대에 전해 주어야 하는 일을 해야 하는데, 이런 일은
복음전파에 없어서는 안 되는 과정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사가 루카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루카가 쓴
복음에는 다른 세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별히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 어떤 대화를 나누었고 어떻게
처녀의 몸으로 성자께서 사람이 되시는지가 나옵니다.
이 사건은 가브리엘 천사와 성모님, 두 분의 비밀스런
에피소드였습니다. 성모님은 당신이 원죄 없으심을 1858년에야
루르드 발현으로 벨레뎃다에게 알려주셨던 것처럼 당신의 비밀을
좀처럼 드러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카는
베일에 쌓여있던 성모님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었고 그것을 적어
후대의 사람들도 그것을 읽고 그리스도 잉태의 신비를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루카는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었으면서 이 깊은 비밀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일까요? 루카는 나중에서야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이었지만, 집요하게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했을
것이고, 성모님도 직접 만나 귀찮을 정도로 그 비밀을 알려달라고
졸랐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굳이 그런 것들을 알려고 하세요? 그냥 알고 있는
것이나 잘 지키며 살면 되지. 때 되면 안 알려 주시겠어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루카가 그렇게 넋 놓고 앉아만 있었다면
감추어진 예수님의 잉태 비화는 성경에 실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더 알려고 한 루카의 열정이 감추어진 비밀을 열리게
했고, 이웃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 비밀을 글로 기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루카는 성령강림이나 사도들의 복음전파 한
내용들을 정리해서 사도행전을 썼습니다. 사도들의 행적도 기록에
남겨놓아야 후대에 초대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성장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했을 것입니다.
만약 자신만 복음전파를 열심히 하고 그런 것들을 글로 남겨놓지
않았다면 현 시대에, 교회는 후대에 제자들이 작당하여 만든
집단이라고 해도 그것을 반박할 증거가 희박했을 것입니다. 루카는
이렇게 끝까지 알아내고, 그것을 후대에 전하는 사명을
완수하였습니다.
신학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철학이 어렵다면, 신학은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학문이기에 더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들도
교리 신학원과 같은 곳에서 신학을 접해 보기도 합니다. 어떤
신자들은, 그저 단순하게 믿으면 되지 뭐 하러 돈 버리고 시간
낭비하며 평신도가 그런 것을 배우느냐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공부가 하느님을 더 알고 사랑하게 하고, 그렇게 깨달아
감으로써 다른 이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당연히 시간도 버리고 돈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멀리 나가야만 선교가 아닙니다. 오늘 루카
성인은 진리를 열심히 찾아내고 다른 이에게 전달해 주는 것도 커다란
선교라는 것을 당신의 복음과 사도행전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 수원 교구 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성 루가 복음사가 축일
2017년 가해 10월18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 루카 10,1-9
오늘은 루가 복음사가의 축일입니다. 저는 오늘 루가복음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루가복음 1장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라고 축복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처럼 상대방을 축복하고, 상대방을
위해서 기도하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순명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루가복음 10장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율법학자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주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율법학자의
시선의 중심은 ‘나’입니다. 나와 관련된 것들로 세상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강도를 당한 사람의 이웃입니까?’라고
질문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시선의 중심은 ‘강도를 당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위한 삶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상대방을 위한 헌신과 배려를 한다면
세상은 참된 평화와 자유가 가득할 것입니다. 누군가 지옥과 천국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지옥은 긴 수저로 자신의 입으로 음식을 넣으려
하지만 결코 넣을 수 없는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천국은 같은 긴
수저이지만 상대방의 입에 음식을 넣어줌으로써 모두가 맛있게
음식을 먹는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우리가 내미는 사랑의 손길이
있다면 이 땅은 지금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루가복음 15장은 하느님의 자비를 이야기합니다. 렘브란트는
‘돌아온 아들’이라는 그림으로 루가복음 15장을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둘째아들처럼
회개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 때문에 구원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큰 아들처럼 지내곤 합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으면서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돌아온 동생을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봄이 왔음에도 꽃을 피우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루가복음 19장은 회개는 행동으로 드러나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높은 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우리들 역시 주님을 만나고 싶다면 믿음의 나무로,
사랑의 나무로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자캐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루가복음 24장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엠마오는
어느 시간과 장소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이 엠마오입니다. 주님의 성체를 모시고,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 엠마오입니다. 구원은 어느 곳을 향한 여정과 목적지가
아닙니다. 구원은 지금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고, 주님과 함께 삶을 살아가면 그것이
바로 순례이고, 그것이 바로 구원의 시작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축복과 은총, 사랑과 기쁨이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길의 끝은 부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들은 죽음의 길도
감사하면서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나의 삶에 주어지는 ‘십자가’
그것은 바로 은총의 길, 구원의 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한 눈 팔지 마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10월18일 수요일 성 루가 복음사가 축일(루가10,1-9)
한 눈 팔지 마라.
고등학교를 다닐 때 자취생활을 하였습니다. 신부가 된 후에도
특수사목에 종사하다 보니 자취 아닌 자취생활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안타까웠는지 많은 분들이 맛있는 반찬도 해 주시고, 곰국도 끓여
주셨고 좋아하는 미역국도 준비해 주셨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가끔 냉장고에 있는 국을 꺼내보면 국물에 기름이
엉겨있었습니다. 따뜻하게 데우면 기름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랑이 뜨거울 땐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콩깍지가 씌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상대편의 단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잔소리가
시작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열정도 그렇습니다. 뜨거운
열정이 있을 땐 미사참례를 자주하고 기도시간도 많이 챙기며 성경도
읽고 활동도 적극적입니다. 열정이 식으면 내 것 먼저 챙기고,
하느님의 몫을 뒤로 밀치게 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다하고 그
다음에 하느님의 것을 챙기려 하니까 찜찜하기도 합니다. 사랑의
열정을 다시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뽑아 파견하시면서 분부한 말씀을
기억합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 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가10,3).
이 말씀은 온전한 투신을 위해서는 한 눈 팔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명을 받았으면 그것에 충실해야지 돈 주머니나 식량자루,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장황하고
의례적인 인사에 허비할 틈도 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리떼
가운데’보내는 것처럼 안쓰러운 마음이 있지만 내 사랑이 그 안에
함께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면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요한15,9-10).
일상 안에서도 내 본업이 무엇이고 그것에 충실하고 있는가? 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 다른 부업에 마음을 더 쏟는 것은
아닌지…….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그리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본분이 있고 윗사람은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으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각기
자기의 위치가 있습니다. 사실 근본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입니다. 한 눈 팔지 말고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나 혼자만의 구원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을 구원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루카10,2).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 일꾼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는 능력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선교의 사명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기왕이면 돈 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않은 채 더욱이
길에서 인사하느라 지체함도 없이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또 그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일꾼이 나오길 희망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한, 잘난 사람에게나 못난 사람에게나
가난한 이에게나 부자에게나 모든 계층과 연령의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온갖 뜻을 꾸준히 전파하도록
합시다!” (성 그레고리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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