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0월21일 토요일 [(녹)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수도회] 내 안의 성령께 모두를 맡기며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로마 4,13.16-18
† 복음 루카 12,8-12
◈ 오늘의 묵상
우리가 하는 말이나 몸짓은 자신의 내면을 드러냅니다. 그 내면이라는
것이 때로는 단순히 생각이나 느낌에 관계된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자신의 전 존재나 정체성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사랑한다는 고백,
충성하겠다는 맹세, 신앙의 고백은 어찌 보면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내 삶의 방향을 정해 주고, 내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전 존재와 삶이
예수님께 속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교회의 울타리 안에 속하게 되는데, 그분을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그분에 대해 구체적인 관심을 갖고, 그분과의 인연을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고, 그분과의 만남의
역사가 됩니다.
자신의 내면 전체가 예수님으로 가득 찬 사람은 그것을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그 향기를 뿜어냅니다. 그 향기는 세상의 풍파와
박해 속에서 더욱 진하게 뿜어져 나올 것이고,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순교의 빛나는 영광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날 바쁜 세상살이에서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 나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내 삶의 결단이 따르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 삶의 방향과 정체성이 온전히 정립되어
있을 때는, “내가 어떻게 답변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 안에
계시는 그분께서 대신 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2017년 가해 10월21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제1독서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4,13.16-18
복음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8-12
많은 이들이 ‘행복 아니면 불행, 또는 성공 아니면 실패’ 등으로
이분법적인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해,
나는 불행해, 나는 성공했어. 나는 실패했어.” 식으로 말을 합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둘을 나눌 수는 없습니다. 결국 긍정적인 평가가
절반을 넘게 되면 긍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이고, 부정적인 평가가
절반을 넘게 되면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결론이 전혀 바뀌지 않을 것처럼 고정화시킨다는 것이지요.
특히 부정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이 고정화가 더욱 더 심한 것 같습니다.
즉, 불행하면 앞으로도 계속 불행할 것처럼, 실패했으면 앞으로도
계속 실패할 것으로 불안해하고 또 걱정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문제는 지금의 행복이나 성공이 사라질 것 같은 불안감 역시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분법적 사고에서 나오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플러스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요? 지금의 행복이나
성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행복하고 더 큰 성공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행복이나 성공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도
조금만 더 기도한다는 마음, 사랑의 나눔 역시 조금만 더 실천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된다면 분명히 풍요로운 나의 삶을 만들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학습으로
인해서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있습니다. 가진 것이 없다고요?
또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요? 전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태어났을
때에 어떠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을 가지고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셨습니까? 아무것도 없이 두 주먹 움켜쥐고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말도 하지
못해서 울기만 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태어난 그 순간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얼마나 많은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따라서 ‘지금보다 더’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괜히 과거에
연연하면서 후회할 필요도 없고, 괜히 미래를 걱정하면서 불안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묵묵히 ‘지금보다 더’를 만들어 가면 됩니다.
주님께서는 박해의 상황을 말씀하시면서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불안해하지도 또
절망에 빠지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행복에 대해서 관심이 더욱 더 많아진 요즘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보다 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어느 순간 행복한 내가 저절로
되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각자가 자신의 삶을 통해 세상에 중요한 차이를
만든다는 것을(제인 구달).
이렇게 멋진 숲을 걸으며 쉬고 싶어요. ㅋㅋㅋ.
가을은 독서의 계절.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덥지도 또 춥지도 않기
때문에 책 읽기에 딱 좋은 계절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말씀을 많이 하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좋은 날씨에 방구석에 앉아서 어떻게 독서나 하고 있을 수
있는가? 당장 나가야지.”
그렇다면 왜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책을 읽게 독려하고
있는 것일까요? 독서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책에 특별한 힘이 있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책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으며, 내 삶의 훌륭한 조언자 역할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서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저 역시 신학교 강의를 가서도 빼놓지 않고 말하는 것이 독서입니다.
책 읽지 않으면 도저히 좋은 신부는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훌륭한
신부는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직 와 닿지 않는지,
또 바쁜 신학교의 생활 때문인지 그렇게 많은 독서를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스페인의 로욜라를 갔다가 이냐시오 성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성인께서는 병상에 누워 있을 때, 한 권의 책을
읽었는데 그 안에서 프란치스코 성인과 도미니코 성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나도 할 수 있다.”
책을 통해 변화될 수 있었고, 또 자신감도 얻었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새로운 삶을 살면서 교회의 영성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을 변화시켜줄 책을 찾고 있습니까? 우선 성경부터
시작하면 어떨까요?
올 가을 제가 읽을 책들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내 안의 성령께 모두를 맡기며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10월21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루카 12,8-12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루카 12,12)
내 안의 성령께 모두를 맡기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12,8-9)
예수께서는 이어 박해를 겪더라도 성령께서 해야 할 말을 알려주실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 비춰보면 우리
신앙의 목표는 주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곧 우리의 소명은 하느님의
말씀과 생명, 정의와 자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도
방향도 오직 주님을 따르는 것이지요.
제자의 길은 결코 내 힘으로 홀로 수행될 수 없는 어려운 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그분의 전 인격에 동화되려는 몸짓
없이 신앙을 고백하거나 실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떠나
주님과 온전히 일치할 때,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나를 도구삼아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데는
반드시 고통과 박해가 따르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을 모시고
있기만 한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통해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자체가 강력한 복음선포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과 사랑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과 일치하여 성령 안에 머무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참
제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언제나 내 안에 예수님을 모시지 않고,
예수님과 동화되지 않고 그분을 안다고 증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두려움 없는 신앙고백은 주님과의 일치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오늘 잠시 자신을 돌아보며 과연 나의 시선과 마음의 지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되돌아봐야겠습니다. 내 영혼의 주파수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행동방식에 맞춰져 있는지
성찰해봐야겠지요. 자신을 다른 것들로 채우며 만족해 하는 태도를
바꾸어 발걸음을 주님께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며 겪는 고통과 박해 앞에서도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 자신을 맡기는 ‘거룩한 여유’를 지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참 신앙은 늘 고통과 시련 중에 빛을 발합니다. 어려움
가운데서 그 사람이 참된 주님의 자녀인지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성령의 이끄심보다는 ‘더러운 영’의 유혹에
쉽게 휘말려 주님을 등지고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마저도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한 채 세상 금력과 권력에 굴복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오늘도 어떤 어려움 중에도 주님께서 함께 해주심을
믿으면서, ‘그분이 원하는 선택과 결단’을 하고 꿋꿋이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시련이 다가올 때 마다
2017년 가해 10월21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루카 12,8-12)
시련이 다가올 때 마다
장차 도래할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이면서,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모범이자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 성조(聖祖) 아브라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브라함의 굳은 신앙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희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로마서 4장 18절)
하느님의 언약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참으로 순수했고
우직했습니다. 즉시 식솔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라 하시니, 지체없이
떠났습니다. 거짓말 같은 말씀을 믿으라니 그저 믿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니 두말 않고 바쳤습니다.
갑작스레 고향을 떠나게 된 식솔들의 불평이 하늘을 찔렀지만,
아브라함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후손들이 바닷가 모래알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그의 확신에 주변 사람들이 다들 ‘맛이 갔구나!’ 하고
수군거렸지만, 그는 굳게 믿었습니다. 아들 이사악을 장작더미 위에
꽁꽁 묶는 그의 모습에 아들조차 ‘드디어 아버지가 미쳤구나’
생각했지만, 그는 하느님께 철저히 순명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했습니다. 온갖 현실적 희망이
여지없이 무너질 때도, 하느님의 언약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전 밀라노의 대주교 마르띠니 추기경님께서는 아브라함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아버지’, ‘하느님을 찾는 모든
이의 아버지’, ‘우리에게 인생을 가르치는 아버지’, ‘신앙의 나그네
길에서의 아버지.’
또한 아브라함이 걸어갔던 신앙여정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짙은 안개
속에서도 묵묵히 하느님을 향해 걸어갔던 여행길’, ‘하느님을 알고
있다고 믿었으나, 사실은 거의 아는 바가 없었던 답답했던 여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하고 또 희망하면서 하느님을 알고자 노력했던
여정.’
아브라함의 성소 여정을 단계별로 꼼꼼히 살펴보면 위대한 신앙인의
아버지로 우뚝 서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절대로 순탄치 않았다는 것을
즉시 알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수시로 하시는 말씀이 ‘일어나라!’ ‘떠나라!’ ‘믿어라!’
‘맡겨라!’는 것인데, 많은 경우 단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 그런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희망을 주셨지만, 그 희망이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언약하셨지만,
그 무엇하나 순순히,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 오랜 기다림에서 오는 실망과 좌절이 컸습니다.
지속되는 여독으로 인해 삶이 늘 힘겹고 고달팠습니다. 마치도
우리들의 신앙여정, 성소여정처럼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느님께서는 기쁨과 영광도 주셨지만, 다양한
시련도 함께 주셨습니다. 때로 그 시련은 우리를 극한의 고통과
좌절에로까지 몰고가기도 합니다. 때로 그 시련이 우리를 여지없이
허물어트리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길고도 긴 여행길에 나선 우리 모두에게도 시련은
필수과목입니다. 시련이 다가올 때 마다 신앙의 아버지 아브라함에
어떻게 시련을 극복했었는지를 눈여겨봐야겠습니다.
때로 시련은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그릇된
하느님상, 그릇된 신앙관, 왜곡된 인생철학을 수정하고 쇄신시키는
차원에서 시련처럼 유용한 도구는 다시 또 없습니다.
시련이 다가올 때 마다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시련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시련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우리가 비록 시련
속에 있을지라도 그분께서는 우리를 당신 손 안에 넣고 계심을.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하느님의 사랑을 믿어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10월21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12,8-12: 어떻게 항변할까 걱정하지 말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순수한 신앙의 힘에 대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8-9절) 영원한 생명은 구원을 주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복음이란 것은 어떤 부분은 흔들리고 어떤 부분은 굳건한 것은 아니다.
만일, 복음이 없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순교자들은 아무 은총도 입지
못한다. 반대로 복음이 깨어질 수 없는 것이라면 순교자들이 복음과
반대되는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순수한 신앙의 힘은 위대하다. 자신의
믿음과 희망과 덕과 영광을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둔 사람은 누구도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8절)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을 증거하면 받는 보상이 바로 이 말씀이다.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알까?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고 그분의 명령을
따르고, 입술로만이 아니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아는 것이며, 그것이 증언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죄라고 가르치셨다. 당신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겠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인간이
저지르는 어떠한 죄들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며, 이는
그분의 자비와 크신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을 거스르는,
그래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무엇인가?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를 말한다. 이 사랑은
인간의 모든 것을 받아주시고 품어주시는 사랑이며, 그래서 항상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주시는 사랑인데 그것을 믿지 않아 하느님
앞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모독죄이다.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12절)
성령께서는 순교자들에게 그 위험한 순간에도 당신을 증언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자로서 그분을 증언할 수 없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그러니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야 누가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겠는가?
우리는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이끌어주실
것을 믿고 이 사회에 신앙을 전파하고 생활로써 증거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하며 기도하자.
- 수원 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2017년 가해 10월21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 루카 12,8-12
1988년 겨울입니다. 저는 군에서 제대를 하였고, 본당에서 학생들에게
예비자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고3이었던 학생이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습니다. 교리를 가르쳤던 제게 저녁을 사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친구들과 천마산을 갔었는데 저녁
약속이 있었던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당시에는 삐삐도, 핸드폰도 없을
때였습니다. 저는 3시간이나 늦게 약속 장소로 갔습니다. 너무 늦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 친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약속 장소에 있었습니다. 제가 올 줄 알았다고 합니다. 저는
약속시간에 늦어서 미안하기도 했지만, 저를 믿고 끝까지 기다려준
그 친구가 고마웠습니다.
2005년 겨울입니다. 저는 캐나다로 연수를 갔었습니다. 처음에 머물던
집이 교통이 불편하고, 추웠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캐나다에서 알던 분이 저를 데리러 와 주신다고 했습니다. 약속시간이
30분 지났는데도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무슨 사정이 생긴 줄
알았습니다. 택시를 불러서 새로운 집으로 떠났습니다. 제가 떠난 후
그분은 도착했지만 이미 저는 없었습니다. 나중에 기다리지 않고, 먼저
떠난 것 때문에 서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돌아보면 성격이
급하기도 하지만 저는 누군가를 믿고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이나 계명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게 되고, 그 믿음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율법이나 계명으로 생각하면 그
친구는 약속 시간이 지났으니 약속 장소를 떠나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율법이가 계명으로 생각하면 약속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제가 장소를 옮긴 것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저를 믿어 주었고 끝까지 저를 기다려 주었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저는 그 친구와 더 좋은 만남을 이어 갈 수 있었습니다.
목욕탕엘 가면 열탕, 온탕, 냉탕이 있습니다. 온탕에서 열탕으로 가면
당연히 뜨겁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냉탕에서 온탕으로 가면 온탕이
뜨겁게 느껴집니다. 뜨겁다는 것이 상대적인 것이 됩니다. 불가에서는
무엇인가를 취하기보다는 버리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내가 깨달을
수 있다면 부처도 버릴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그런 면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도 주라고
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율법, 믿음, 실천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뿌리, 줄기, 열매가
하나의 나무를 형성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율법을
잘 지킬 것이고, 이웃 사랑을 실천할 것입니다. 다만 상황에 따라서
강조하는 부분은 달라 질 것입니다. 율법에 얽매여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믿음의 대상인 하느님을 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실천은 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버려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농부는 땀을 흘려 농사를 지을 때,
가을의 결실을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는 작물에
거름을 주고, 물을 주려는 농부는 없기 때문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교통법규를 어긴다면 믿음은 있지만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교통법규는
나와 이웃의 생명을 지켜주는 약속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하늘은 지상에서 열립니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10월21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루카12,8-12)
하늘은 지상에서 열립니다.
가끔 낯선 곳을 가면 다른 사람이 먼저 나를 알아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라는 것을 먼저 소개하며 인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적극적으로 자기를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편안해 합니다. 그리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당당히 자기를 알리고 그 이름에 걸 맞는 품위를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신자로서 신자임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간다면 나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손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루카12,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면 예수님께서도 그를 안다고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잇속을 차리려고 누구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다고 하는 것은 손해가 오더라도 그를 안다는 마음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른다고
한마디만 하면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목숨을 걸었습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드리지 않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 놓았습니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무안을 당할 수도 있고 자존심을 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믿음을 드러낼 때입니다.
간혹 식당에서 보면 십자성호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볼까 조심스럽게 가슴에 열 십자를 긋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표현은 확실히 해야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고 성호경을 하면서 십자가를 긋는 것은
신앙의 고백입니다. 따라서 십자성호를 할 때 믿음을 담아 바르게
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늘나라가 결정된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이미 이
세상에서의 삶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순간을 놓치지
않길 바랍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16,27).
하늘은 이미 지상에서 열립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지상에서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한다면 바로 그 순간이 성령을
모독하는 때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품위를 지금
여기서부터 지키며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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