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0월22일 주일
[(녹)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수도회] 모든 피조물을 향한 복음 선포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2,1-5
○ 제2독서 로마 10,9-18
† 복음 마태 28,16-20
◈ 오늘의 묵상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내려진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소명은 그분께서 남기신 가장 큰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명을 주시기 전에 당신께서 받으신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권한은 악마가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예수님께 보여 주며,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주겠다고 했던 세속적 권한이 아니라,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 부활의
영광을 통하여 하느님께 직접 받으신 권한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십자가와 죽음을 실천함으로써,
파스카 잔치에 참여하여 함께 얻게 될 하늘 나라의 권한입니다.
오늘날의 선교는 내가 가진 진리를 일방적으로 전하는 개념을 넘어
이웃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이웃에게 전하고,
이웃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함께 발견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인간이 되시어 우리 안에 들어오셨던 하느님의
모습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도 먼저 다가가고, 먼저 이해하고, 먼저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서로의 일상적인 삶 안에서, 희생과
수난과 죽음을 통해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신앙의 진리를 찾아 나가는
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2017년 가해 10월22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제1독서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산으로 밀려들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2,1-5
제2독서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0,9-18
복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8,16-20
종종 외국에 나갈 기회가 있습니다. 교우들과 함께 하는 성지순례
때문에, 한인교회에서의 초청으로, 성지순례, 그밖에 친한 동창
신부들과의 여행 등의 이유로 외국을 나갑니다. 물론 언어 소통이 잘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와 다른 환경과 문화를 접하면서
새로움이라는 힘을 얻곤 합니다. 그런데 하나의 기억이 떠올려집니다.
여행 중에 아주 예쁜 아이를 보게 된 것입니다. 영어로 몇 살이냐고
물어보니 다섯 살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제게 계속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짧은 저의 영어 실력으로는 이 아이와 긴
시간 대화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아이와의 짧았던 만남을 지금 되새겨 봅니다. 참 영어를 잘하는
아이였습니다. 당연하다고요? 그런데 이 아이는 불과 몇 년 배우지
않았습니다. 이제 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 배웠던 6년간의 시간을 포함해서, 대학에서
교양과목으로 들었던 시간, 또 개인적으로 공부했던 시간들을
생각해보니 분명 더 많은 시간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처럼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아이가 저보다 더
똑똑하고 잘 나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영어가 그들의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잘하지 못하는 것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분명히 나의 생활이 아닌
것들입니다. 일상의 생활처럼 반복되고 훈련된다면 분명히 잘 할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명령하신 계명들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특별히 선교에 대한 것은 오늘 복음인 마태오
복음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것으로,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시간에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그런데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것이 선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제게 피정 강의 주제로 ‘선교’를 부탁하실 때가 참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기는 해야 하겠는데 너무나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힘들까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나의 생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혀 시도도 않고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으로 선교에 대해
소극적이 되게 한 것이지요.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몇몇 개신교 신자들의 공격적인 선교를
따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생활로서 직접 보여주는 것은
어떨까요? 주님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그 뜻에 맞게 살아가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선교가 됩니다.
이것이 나의 생활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집착하는 모습이 아닌,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을 따라갈 때 선교가 내 자신도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잘 안 될까봐 걱정되신다고요?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께서 늘 함께 하기에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생에는 서두르는 것 말고도 더 많은 것이 있다(간디).
아이들은 너무 예뻐요.
운명을 바꾼 책(‘좋은생각’ 중에서)
고등학생 ‘장 포로 라코스트’는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살았다.
책을 좋아했지만 형편이 어려워 마음껏 공부할 수 없었다. 그는 한
도서관에서 심부름하며 틈틈이 책을 읽었다.
하루는 한 번도 손대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먼지 쌓인 책 한 권을
뽑았다. ‘에밀 드 페브리에’가 쓴 동물학이었다. 동물에 흥미가 있었던
그는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맨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빨간
잉크로 쓴 글을 발견했다.
“책을 읽어 줘 고맙습니다. 나와 깊은 인연을 맺은 당신에게 성의를
전하고 싶습니다. 로마 법원으로 가서 엘제이(L.J)14의 보관 서류를
가지시오.”
그는 당장 법원으로 달려갔다. 담당자가 건넨 봉투에는 문서가 있었다.
“이것은 나의 유언장입니다. 나는 평생 동물을 연구하고 한 권의 책을
썼습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내 책을 끝까지 읽어 주었습니다. 그런
당신에게 전 재산을 드립니다. 나는 하늘에서나마 기쁠 것입니다.”
그는 4백만 달러를 얻어 부자가 되었다. 이후 가난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곳곳에 도서관을 세워 누구나 책을 읽게 했다. 사연을 들은
사람들이 말했다.
“비록 라코스트처럼 큰돈을 약속하는 유언장은 없지만 책에는 그보다
값진 지혜가 있다. 한 권의 책이 때로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이 글을 보면서 누군가를 인정하거나 지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습니다. 아마도 이 유산을 물려준 ‘에밀 드 페브리에’는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을 찾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그 한 사람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넘겨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인정하고
지지하는 것,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행동 하나가 인생 자체를 바꿀
수도 있네요.
어제 피정 강의를 들으신 수원교구 오전동성당 자모회.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모든 피조물을 향한 복음 선포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10월22일 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이사 2,1-5; 로마 10,9-19; 마태 28,16-20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마태 28,19-20)
모든 피조물을 향한 복음 선포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28,19-20)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존재이유이자 으뜸 사명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산으로 밀려들고 주님의 길을
걷게 되며(2,3),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2,4)
구원의 상황으로 초대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신다.”(로마 10,12)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시고 교회가 기쁘게 선포하는 이
구원은 모든 이를 위한 것”(복음의 기쁨, 113항)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당신 자비의 활동입니다.”(복음의 기쁨, 112)
이렇게 복음선포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며, 하느님의 자비를
공유하고 나누고 전하는 것이지요.
오늘날 세상의 가장 큰 위험은 온갖 극심한 소비주의와 더불어
개인주의적 불행입니다(복음의 기쁨, 2). 현대는 거센 세계화의 흐름과
다문화, 종교다원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종교의 상대화, 과학 기술의
급속한 발달, 정보화사회 등으로 드러나는 복잡성과 혼란의
시대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현대인은 물질적인 풍요와 편리를 누리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자주 불안과 공포를 느끼지요. 나아가 오늘의 시대와
문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 자체가 복음화의 엄청난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는 복음을
나르고 나눌 수 있을까요?
복음을 선포하려면 내 안에 복음이 있어야 하니 먼저 우리 자신이
복음이 되어야겠지요. 또 복음이 되려면 복음을 담을 빈자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빈자리는 자신에 대해 죽는 회개요 쇄신으로 생겨날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 앞에 자신을 두고 빈그릇을 마련하는 선포
준비는 필수적이라 할 것입니다.
가치관의 혼돈 시대, 다양한 사회적 갈등과 소외의 소용돌이 속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요한 14,6) 그분이 내 안에서 살아 꿈틀거리며
나의 생각과 마음과 혼을 움직여주지 않으신다면 복음은커녕 어둠을
증폭시킬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내 영혼의 정갈한 빈그릇에
담아주신 사랑으로 “복음에서 삶으로 삶에서 복음으로” 나아감으로써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해야겠습니다.
사실 복음 선포의 첫째 목적은 복음으로 사람들이 새로워지는 데에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새롭게 하려면 전하는 나부터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삶으로 보여 주는 복음의
증거를 통해 복음이 참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삶을 통해 정의롭고 형제애 넘치는
세상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나아가 복음 선포자인 우리 모두 사람들에게 복음을 말로만 전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복음이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환경과 각 민족
문화의 깊은 근원에까지 생명력 있게 스며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하나의 문화적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참모습을
간직하고 복음 선포와 교회의 전통에 변함없이 충실하면서도,
그리스도교가 받아들여지고 뿌리내리는 문화와 민족들의 다양한
모습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복음의 기쁨, 116). 주님께서는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해주실 것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마태 28, 20)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10월22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 주일).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 20)
사람은 복음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복음이 있듯이
민족과 민족사이에도 복음이 있습니다.
모든 민족들은 저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하느님을 향해 있습니다.
우리모두를 향해 오시는 하느님 사랑을 우리가 막을 수는 없습니다.
복음은 모든 민족들을 하나로 만들어줍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발자국을 통해
하느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전교주일을 통해 우리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돌아서는 은총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믿으라는 말 대신 먼저 사랑을 실천하지 못했던
제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복음화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반성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서로의 숨소리 안에서 복음을 전하는
복음화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원] 정체성과 선교 | 전삼용 요셉 신부 /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10월22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복음: 마태오 28,16-20
정체성과 선교
2006년 나와서 큰 히트를 쳤던 ‘미녀는 괴로워’란 영화를 보셨을
것입니다. 너무나 뚱뚱하고 예쁘지 않은 ‘강한나’란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는 외모 때문에 사랑도 못해보고 무대 뒤에서 가수 대신으로
노래를 불러주는 얼굴 없는 여자가수입니다.
그녀는 감독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감독은 그를 이용합니다.
둘이 함께 있을 때 우연히 한나의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한나의 아버지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를 외면합니다. 모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좋아하던 감독에게 이용당한 것을 우연히 알게
되어, 그녀는 죽음을 각오한 성형수술로 예뻐지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진짜 고통은 그 때부터 시작됩니다. 가수가 되어 인기도
올라가고 감독의 사랑도 받게 되었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유명해진 ‘제니’는 사람들 앞에서 정신병이 있는 아버지를 나 몰라라
해야 하고, 친구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은 강한나인데 감독이
좋아하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제니란 이름의 가수인
것입니다. 한나는 감독이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그런데 첫 콘서트 때 한나의 아빠가 또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봅니다. 더 이상 아빠를 외면할 수 없었던 한나는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
“전 제니가 아니에요. 저는 한나에요,
강한나. 강한나는 되게 못생기고 뚱뚱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저 뒤에서 다른 사람의 노래를 대신 불러주곤 했어요.
그래서 저 수술했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그렇게 해서 이뻐지니까,
이렇게 노래도 하고 사랑도 해보고 제니가 돼서 정말 행복했었는데.
근데 미안해요. 내가 망쳐버렸어요.
내 친구도 버렸구요. 아빠도 버렸구요. 나도 버렸어요.
지금은 진짜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나, 하나도요. 강한나, 보고싶다.”
그러면서 정말 보잘 것 없이 되어버린 아빠를 품에 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것입니다. 정체성은 나의 원천을 찾음으로써
세워집니다. 이제 사람들은 제니를 잊고 강한나를 사랑해줍니다.
물론 감독도 강한나를 더 사랑하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 명확히 알아야 사랑할 수도 사랑받을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정신분석가 에릭 에릭슨(Erick Erickson)은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한 사람은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합니다.
‘나’가 확실해야 ‘너’가 확실해지고 ‘나와 너’가 확실해야 두 사람 사이에
인간관계가 이루어지고 친밀한 관계도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가 애매하면 상대방과의 관계도 애매해지는 것입니다.
이무석 교수가 군의관으로 있을 때 자해를 하는 한 청년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는 툭하면 면도칼 같은 것으로 자신의 배를 그었는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문득 어두운 우주에 혼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너무 두려워서 면도칼로 배를 그어요. 통증이 오고 새빨간
피가 팍 솟으면 그 순간에 마음이 진정돼요.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오면서요.”
정체성이 온전히 성립되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우주공간에 홀로 떠
있는 듯한 느낌, 죽은 건지 살아있는 건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너무 힘들어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인도에서 동물에게 키워진 늑대인간 아이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늑대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부모가 늑대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정체성을 지닌 아이들을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몇 년 새에 둘 다 죽어버렸습니다.
늑대가 인간과의 통교를 강요받는 상황에서 오는 정체성의 갈등을
견뎌 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자해를 하는 것도 내가 사람임을 확인하려는 노력입니다.
그러나 내가 진정 사람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제니가 한 것처럼 자신의 부모님을 받아들여야합니다.
자신의 원천을 인정하지 않으면 영원히 정체성의 방황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동물이 자신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면, 육체적으로만 살아갈 것이고
그러면 세상에서 짐승 취급을 받습니다. 부모님을 인정하면 비로소
인간이 되지만, 이 사람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정하는 사람들과는
같은 수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고,
우리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는 인간 수준에서 관계 맺자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오셨듯이, 우리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관계 맺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비티(중력)’란 영화가 있습니다.
딸을 잃은 아픔으로 지구에서 아무 의미도 없이 살아오던 주인공,
그 여인은 공기도 없고 중력도 없는 지구 밖 세상에서
사고로 인하여 우주미아가 되어 우주 속으로 사라져갑니다.
이것이 지구에 살고 있더라도 아무 의미 없이 누구 한 사람과도 친밀한
관계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 때 한 사람이 목숨을
걸고 그를 도우러 옵니다. 물론 그녀를 돕다가 그는 죽고 맙니다.
그러나 적어도 참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죽어서도 그녀의
꿈에 나타나 끝까지 포기하지 말도록 힘을 줍니다.
결국 그녀는 온 힘을 다하여 지구로 돌아오게 되고,
그 때 처음 딛는 발걸음은 예전의 무의미한 걸음이 아닙니다.
비로소 중력을 느끼고 발이 땅에 닿는 기쁨을 느낍니다.
그리고 땅에 키스를 하며, ‘고맙습니다.’라고 합니다.
나의 근원이 지구입니다. 지구를 떠나서는 참 내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가끔은 부정하고 싶기도 하지만 나의 원천인 하느님과 부모를
인정하지 않으면 누구와도 온전히 관계 맺을 수 없는 무중력 상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제니가 정신병을 앓고 있는 부끄러운 아버지를 끌어안을 때
비로소 온전한 강한나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끌림을 받아들임이 곧 중력이고,
그 중력을 벗어나서는 어떤 온전한 관계도 맺고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무중력 상태에서도 어떤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줄 알았던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비록 무중력 상태에 있지만
실제는 뿌리가 확실한 사람이고, 그 사람만이 누군가를 다시 하느님
품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한 사람의 삶의 이유를 가르쳐 준 것이고, 이것이 곧 선교인
것입니다. 따라서 선교란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인지 온전히 밝히기 위해서는 나의 원천을
부정하지 말아야합니다.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육신을 받고, 영혼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제니가 자신의 아버지를 인정하고 사람들 앞에서 끌어안을 때
비로소 강한나의 정체성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이 누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안다고 해야 온전한 내가 되는 것인데,
그 과정이 바로 선교인 것입니다.
즉 선교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선교왕이 두 분 계십니다. 한 분은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한
뒤 항상 성호를 긋고 식사전후 기도를 잘 하십니다. 그분은 그것만
제대로 해도 많은 이들에게 선교를 할 수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한 분은 옷가게를 운영하시는데 들어오는 손님 누구에게나
‘찬미예수님!’으로 인사한다고 합니다.
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그분들이 성당에 대해 물어보고 그렇게
입교시키는 분이 일 년에 적으면 10명, 많으면 30명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묵주반지를 끼고 경기에 출전했던 김연아 선수나,
자신이 성당 다니는 것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김태희,
또 오진혁과 기보배 양궁 커플 들. 이들은 밖에 나가 선교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두고 있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드러낼 뿐입니다.
이것이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고, 이것이 곧 선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부끄럽게 여기면,
당신도 하느님 앞에서 그를 부끄럽게 여기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은
아직도 내 뿌리를 온전히 내리지 못한 무중력 상태에 있는
불편한 두려움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는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하느님을 나의 원천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곧 선교입니다. 그분으로부터 와서 그분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명확히
아는 사람임을 떳떳이 드러내는 것이 선교인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곧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2017년 가해 10월22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 마태 28,16-20
지난 추석 연휴 중에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동생 수녀님이
어머니를 병원으로 모셨고, 형수님이 병원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셨습니다. 저는 가끔 찾아뵙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어머니는 지난 목요일에 퇴원을 하셨습니다. 대견하면서도
감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새 어른이 된 조카가 잠시 시간을 내서
할머니를 집으로 모셔갔습니다. 늘 어린아이처럼 생각했는데 듬직하게
자라준 조카들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부축해서 식당으로 가는데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괜찮다. 내가 할머니냐!” 어머니는
이미 할머니시고, 곧 증조할머니가 되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할머니냐!’라고 말씀하시니 기력이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아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문득 작년에 많이 들었던 노래가 생각납니다. “그대여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에 깊이 묻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하세요.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 버렸죠. 그대 슬픈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15년 전에 교구 사목국의 교육담당으로 3년간 있었습니다. 교구는
2000년대 복음화 운동을 1992년에 시작하였고, 제가 함께 했을 때는
‘소공동체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교구,
지구에서 소공동체 교재를 통해서 복음화에 대한 강의를 하였고,
함께하는 여정을 통해서 예비자 교리를 위한 강의도 하였습니다.
참으로 바쁘게 지낸 3년이었습니다. 15년이 지난 지금, 후배
신부님들이 더 큰 열정으로 사목을 하는 것을 봅니다. 소동동체 운동
25년에 대한 평가를 하였고, 새로운 방법으로 교구와 지구 그리고
본당을 연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강물은 흘러 바다로 가지만,
어딘가에서 새로운 강물이 자리를 채우는 것을 봅니다.
2000년 전에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이 지금 교회의 모습을 보면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실 것 같습니다. 유럽의 문화와 문명은 바로
교회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삶의 위로를 얻고 있으며, 예수님 때문에 절망에서도
희망을 찾고 있으며,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벽돌은 한 장씩 쌓이지만 아름다운 건물이 되는 것을
봅니다.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제가 사목국에 있을 때입니다. 11월이면 구역장, 반장님들 중에서
복음을 전한 ‘체험사례 발표’가 있었습니다. 각 지구의 모임에서
선정된 분들께서 체험사례를 발표하였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자매님은 시집와서 20년 동안 시부모님을
정성으로 섬기고, 아이들에게 헌신하였고, 남편을 사랑으로
대하였습니다. 남편은 결혼 20년이 되는 날에 아내에게 선물을 하나
주었습니다. ‘예비자 교리 신청서‘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수고와 헌신을
보았고, 그런 아내가 믿는 하느님이라면 자신도 믿고 싶어졌다고
합니다.” 또 다른 자매님의 이야기입니다. “자매님은 동네에 이사 온
사람들이 있으면 작은 선물이라도 가져다주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큰
비가 내려서 동네에 피해가 몹시 컸습니다. 자매님은 손녀를 등에
업고, 피해를 입은 집을 찾아가서 청소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마침
방송에서 자매님의 모습이 방영되었고, 부산에 사는 며느리와 아들이
’왜 그런 일을 하시느냐‘고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자매님은 아들에게
’나는 손녀에게 신앙 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못 마땅하면
데려가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자매님의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성당을 찾았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체계적인 이론 교육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학적인 지식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향기가
좋은 꽃에는 벌과 나비가 오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람들에게는 진리에 목마른 사람들이 오기 마련입니다. 지치고, 아픈
사람들이 찾기 마련입니다.
저도 체험이 하나 있습니다. 적성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가정 방문을
하였고, 태권도 사범을 하였던 자매님을 만났습니다. 자매님께
본당에서 태권도를 가르쳐 줄 것을 부탁하였고, 자매님은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7명이 시작하였지만 나중에는
100명이 넘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도복을 무료로 주었고, 수녀님께서는
교리를 가르치셨고, 간식도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적성성당 이름이
있는 도복을 입고, 학교에도 가고, 동네에서 놀았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성당을 찾아왔습니다. 교리를 배운 아이들이 세례를 받을 때면
아이들의 가족들도 성당을 찾았습니다. ‘관찰, 판단, 실천’이 있다면
결실은 맺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며칠 전,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행복은 좋아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짧은
글인데 제게는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자선을 베푸는
것, 사랑을 나누는 것, 이웃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좋아하는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꼭 해야 할 일이라면 그 일을 좋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행복은 시작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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