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1월10일 금요일 [(백)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수도회] 슬기롭고 최선을 다하는 주님의 집사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로마 15,14-21
† 복음 루카 16,1-8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부정직한 집사의 비유입니다. 어느 부자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가 재산을 멋대로 낭비하자, 주인은 그를 불러 해고하겠다고
통보합니다. 이에 집사는 오히려 더 뻔뻔스러운 일을 하지 않습니까?
부자에게 빚진 이들을 불러서 그 빚을 줄여 주며, 대신 집사인 자신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한 것이지요.
따라서 집사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은 조만간 그가 해고된 다음에는,
그 신세를 어떤 모양으로든지 갚아야 했던 것입니다. 정말로 약고
뻔뻔스러운 집사입니다.
그런데 복음 후반을 보면 주인은 이상하게도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지요.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했기 때문이라지만, 상당히 어색해
보이기만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까? 그것은 집사가 착하거나, 나쁘다는 것을 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위기에 처한 집사가 자신의 미래에 대한 대책을
민첩하게 세우는 행동을 본받으라는 것뿐입니다.
이처럼 세속의 자녀들은 자신의 앞날을 위해 약고 재빠르게 행동합니다.
그렇다면 빛의 자녀들인 그리스도인들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지금부터 계획을 잘 세워야 하겠습니다. 특히 주님을 받아들이려면
여러 가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고, 편리한 것을 포기해야만 하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불필요한 것들을 손에 꽉 쥔 채, 이를 놓지 않으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까? 더 큰 것을 얻으려면 작은 것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지혜로운 사람
2017년 가해 11월10일 금요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제1독서
"이 은총은 내가 다른 민족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되어,
그들이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제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5,14-21
복음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8
부모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고, 부모가 기울인 노력에 보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효도하는 훌륭한 자녀라고 할 수 있지만,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대리인 삶을 사는 것이기에 어리석은 자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무기력증과 우울증을 갖게
되는 이유가 이렇게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데 있다고 하네요.
누군가를 대신하는 삶은 온갖 걱정과 무기력으로 채워집니다. 어떤
신학생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부모가 신부님 되라고 해서 신학교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행합니다. 부모도 너무 싫습니다.”
부모는 왜 신부님이 되라고 했을까요? 자녀가 잘못되라고 그런
것일까요? 아니지요.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행복한 길이라고
생각했고 아이를 그렇게 이끌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삶이 아니라 대리인의 삶이었기에 결국 무기력해졌고 더 나아가 부모를
원망했습니다.
결국 이 신학생은 얼마 못 가 신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지금 현재 사회복지 자격증을 취득한 뒤에 사회복지 기관에서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그리고
기쁘게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만약 신학교를 계속 다녀서 사제가
되었다면 과연 행복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본인이 행복하지 못하니
다른 사람에게도 행복을 전하지 못할 것이고, 이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아픔과 상처를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 살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 산다면 결코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없게 합니다. 특히 이 세상 안에서 욕심과 이기심을 채워나가는데
집중한다면 의미를 찾지 못해 후회만 남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불의한 집사의 이야기를 전해주십니다. 솔직히 세상
물정에 밝은 이 집사의 약삭빠른 행동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분명히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동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십니다. 그 이유를 영리하게 대처했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주인의 재산을 축낸 사람이 어떻게 칭찬 받을 수 있을까요?
단순히 주인의 입장에서는 아주 못된 집사이지만, 이 집사의 영리한
행동을 통해 혜택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고마운 집사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잠시 빌려 받은 하느님의 재물을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는 모습이 칭찬받을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진정으로 이로운 일을 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보이기 위한 삶이 아니라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잠시
빌려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자신에게 진정 이로운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려보시길 바랍니다.
당신이 사막이 되지 않고 사는 것은 누군가 당신의 가슴에 심은 나무
때문이다(양정훈).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결정 장애
셰익스피어의 희곡인 ‘햄릿’의 명대사를 뽑으라고 하면 열이면 열
모두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를 가리킬 것입니다. 스스로
결정을 하지 못하는 햄릿의 모습처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갈등을
한다고 해서 나온 말이 바로 ‘햄릿 증후군’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현재 ‘결정 장애’라는 새로운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식사 할 때 메뉴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영화를 보는데도 어떤 것을
볼지 결정하지 못하는 등 결단을 내려야할 때 갈팡질팡하면서 고민만
하고 스스로 주관적인 결단을 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어렸을 때의
성장과정 때문이라고 합니다. 선택권이 없는 성장과정을 통해 성인이
되어서도 결정을 스스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정보의 홍수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많은 정보가 쏟아지지요. 무엇이
옳고 틀린지 판단이 되지 않으면서 결정의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국내의 한 정신의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결정에 대한 만족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직관을 믿어라.”
솔직히 자신의 잘못된 결정을 통해 불만족스러운 결과를 보게 될까봐
아예 결정을 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더군요. 그러나 누군가는 결정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분명한 사실은 완벽한 결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를
마음껏 발휘해서 무언가를 선택했을 때, 그 이후가 무척 중요해집니다.
최선을 다해 그 길을 정답으로 일궈나가도록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어떤 것이든 최고의 결정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기억하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와 늘 함께 계시면서 힘과 용기를 주시니까요.
햄릿의 한 장면.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슬기롭고 최선을 다하는 주님의 집사 - 기 경호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11월10일 금요일.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루카 16,1-8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슬기롭고 최선을 다하는 주님의 집사
예수께서는 ‘집사의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의 심판 앞에서 사라져 버릴
세상 것을 얻으려고 몰두하지 말고 지혜롭게 최선을 다해 영원한
생명의 길을 준비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함부로
다루어 낭비함으로써, 비열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주인은 집사에게
해고를 통보합니다(16,2ㄴ).
생존의 위기를 맞게 된 집사는 ‘영리하게’ 주인의 권위를 이용하여
소작인들의 빚을 탕감해줍니다. 불의한 그는 또다시 문서위조까지
감행한 것입니다. 아무튼 그는 나중에 밥줄이 끊어질 때 자기를
환대해줄 사람들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는 위기 상황에서 탈출구를
찾으려 지체 없이 결단을 내리며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합니다.”(16,8)
예수께서는 이 집사의 구체적인 행동을 칭찬한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기 전에 지체하지 말고
‘하늘나라를 위하여 빨리 결단을 내리라'는데 있습니다. 이 집사는
거지 신세나 일꾼으로 전락하지 않으려고 무슨 일이든 하려고 덤빈
것입니다.
나의 삶의 현주소를 직시하면, 그리고 하느님의 뜻과 동떨어진 모습으로
변해가는 사회를 바라보면, 우리 또한 해고통보를 받은 또다른 집사일
수 있음을 알아차려야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돈의 자녀들 못지않게 지혜로워야 하고 훨씬 뛰어나게 기지를 발휘할
줄 알아야겠지요. 하느님나라의 현명한 집사로서 머뭇거리지 말고
결단하여 자신의 재물을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사용하며,
하느님께로부터 영원한 미래를 보장받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죽어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혹시 주님의 해고통보를 받았음을 알아채지 못한 채 무엇을
이루기 위해 허둥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뜻밖의 죽음을 맞고 주님 앞에 서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무엇을
많이 하고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맞아들이며 그분과
일치하여 그분의 일을 하는 것들이겠지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과 은총의 선물을 관리하는 집사들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근심과 장사에 열중하고 있는 “세속의 자녀”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의 놀라운 선물들을 잘 관리하며 구원에
마음을 쓰는 “빛의 자녀”로 살아가야 할 우리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세속의 자녀들만큼 부지런하고
현명한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민첩하게
그리고 온힘을 다해 준비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집사처럼 현세적 가치들을 위해 창의성과 기지, 적극성과
민첩함에 못지않은 노력을 영적인 가치 추구를 위해 쏟아야겠습니다.
내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존재가 되는 것,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죽음이란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듯 지금 구원을
위한 준비도 나의 몫이지 않습니까?
지금부터라도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의 만남, 그분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고, 주님의 영의 활동을 지니기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이런 노력은 개인 차원에 그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교회공동체도 이 사회도 하느님의 심판 앞에 놓여 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교회와 세상이 되도록 민첩하고 현명하게 행동하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오늘을 충실히 살아야!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11월10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복음: 루카 16,1-8: 약은 집사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사는 교활한 사람이었다. 노예이기는 하였지만,
주인의 큰 재산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아 일했던 사람이었다. 오늘
복음의 집사는 자기가 맡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횡령을 하고
있다. 그런데 청지기뿐 아니라 빚진 사람들 역시 교활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시 지주들에게 지불되는 빚이란 흔히 임대료를 말하는데
그것은 돈으로 내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나는 소출로 지불되었다.
이 때 주인은 자기의 부정을 알아차리고 이제 자기를 해고하겠다고
통고한다. 그래서 그는 그야말로 기발한 생각을 해낸다. 그는 장부를
조작하여 빚진 자들에게 실제로 빚진 액수보다 훨씬 적은 액수로 고쳐
쓰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두면 자신에게 해고라는 최악의 불운이
닥치더라도 빚진 자들에게서 자기가 또 받아낼 수 있는 좀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러한 처사에 주인은 충격을 받았지만, 그 약은 청지기의 교활한
처사에 감탄을 하며 그 집사를 칭찬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들이
세속적인 삶을 위해서 얼마나 교묘한 수단 방법을 짜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약은 집사의 비유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즉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는 이 청지기와 같이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면서 오늘을
잘 살아야 한다는 종말론적 가르침이 담긴 말씀이다.
세상의 이익을 위해서 이들이 이처럼 갖은 재주, 갖은 꾀를 다 동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들 자신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위해서 무엇을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즉 사람들이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 돈이나 부귀영화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만큼 하느님과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삶, 신앙생활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집사가 횡령을 하고 사기를 쳐가면서 준비한 그래서 그토록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삶은 언젠가 끝나고 말 삶이다. 그러니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우리의 육체적인
삶을 위해서 노력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도 모든
노력을 다 할 수 있는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도 언젠가는 하느님 앞에 우리가 책임을 갖고 관리하던 우리
자신의 집사 일에 대한 셈을 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셈을 바치는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날에 대비하여 언제나
준비되어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고, 항상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주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항상 지금 여기에서부터 구원을 체험하고 그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그래서 우리도 그만한 준비를
갖출 수 있도록 하여야 우리가 맡은 집사 일을 잘 하는 것이다. 언제나
깨어있는 삶을 살도록 하자.
- 수원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2017년 가해 11월10일 금요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 루카 16,1-8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행동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스마트 폰을 보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뉴스 검색을, 어떤
분들은 게임을, 어떤 분들은 메일을, 어떤 분들은 문자를, 어떤 분들은
음악을, 어떤 분들은 통화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 스마트 폰이 없다면
지하철에서 우리들은 무척이나 무료한 시간을 보낼 것 같습니다. 저도
지하철에서 스마트 폰을 자주 보는 편입니다. 페이스 북을 통해서
지인들의 소식을 접하기도 합니다. 뉴스를 검색하거나 음악을 듣기도
합니다. 신부님들의 강론을 읽기도 합니다.
이제 곧 자율 주행 자동차도 등장 할 것이고, 인공지능 로봇들이 등장
할 것이고, 사물인터넷이 등장 할 것이고, 유전공학과 생명 공학은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업그레이드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추구하는
이상과 철학과 가치와 윤리도 새롭게 정립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변화하는 세상을 선도하기 보다는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가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세상을 예견하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사실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우리에게 마르코 복음서만 있었다면 요한이 말하려는 진리에 대한
갈망을 채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루가가 이야기 하려했던 하느님의
자비를 느끼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마태오가 보았던 하느님나라에
대한 신비를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삼천년 기를 맞이하는
교회는 이제 이해의 지평을 더욱 넓히려고 합니다. 율법을 뛰어넘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에 머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담의 죄를 씻어
주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희생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에 머물려 하지
않습니다. 인간, 생물, 지구, 은하계와 온 우주를 관통하시는 구원자
예수님을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바로 우주론적인 그리스도임을
말하려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노년을 준비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고 말씀하십니다.
노년을 대비해서 연금과 보험을 들기도 합니다.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많은 부담이 들어도 외국으로 연수를 보내기도 합니다. 더 낳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는 밤을 새워 공부를 하기도 합니다. 이런 노력은 짧은
인생을 보다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기울이는 노력들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현실의 짧은 삶이 아니라, 천상에서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현실의 삶을 위해 준비하는
것보다 더 큰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젠가 다가올
죽음은 너무나 멀다고 느끼기 때문에 하느님께 가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위한 노력은 소홀하게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나가기 위해서 보험을 들거나, 연금을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밤을
새워 공부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주 작은 것들을 충실하게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째, 기도입니다. 아침기도, 저녁기도, 묵주기도를 자주하면 기도의
힘으로 우리는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차를 타면 간단하게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도 안전 운전에 큰 도움이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둘째, 선행입니다. ‘선행을 베푸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시오.’라고
하셨습니다. 보답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하는 선행도 좋지만, 보답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하는 선행을 하느님께서는 더 좋아하십니다.
셋째, 성사생활입니다. 자주 미사에 참례하고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시는 사람은 말씀의 양식과 성체를 함께 받게 됩니다. 혼인성사로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하느님의 커다란 축복입니다. 내 마음에
쌓인 죄와 분노, 미움과 시기들은 고백성사를 통해서 버려야 합니다.
기도와 선행 그리고 성사생활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나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께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 속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만큼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나의 신앙도 키워나가도록 해야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영리한 선택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11월10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루가16,1-8)
영리한 선택
앞날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현명합니다. 재물에 투자하는 것보다
사람에게 배려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성공하려면 인재를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온갖 정성을 쏟는 것보다 하늘의 영광을
헤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내일을 준비하되
약속된 미래, 영생, 천상행복을 생각하면서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그가 정직하지 못해‘해고 통지’를
했습니다. 해고 통지를 받은 집사는 고민 하다가 자신의 장래를 보장
받기 위한 부정을 또 저질렀습니다.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다가 빚을 탕감해 주고 훗날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것을 보고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세속적인 사람이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려 애쓰는
모습은 칭찬할 만합니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되었으니 결국
세속적입니다. 세상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 그 권력에 기대어 잇속을
챙기는 사람들은 하늘 앞에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어쩌면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현세적인 이득이나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 자녀교육이나 재산의 축적과 같은 일을 위해서는
위장전입이나 탈법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오히려
잘나가는 사람으로 생각하니 말입니다. 아파트 청약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소문난 좋은 유치원에 등록하기 위해 길바닥에
텐트를 치고 밤을 지새우는 모습을 보면 정말 감동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세상일에는 정말 많은 수고와 땀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고위
공직자들의 자녀들은 너나할 것 없이 병역면제를 받는 것을 보면 참
약삭빠릅니다. 유전 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듯이 재물은 사람을
부리고 그래서 거기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죽는 줄 모르고
죽습니다.
세상일에도 이렇게 정성을 쏟거늘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더 해야 하겠습니까? 세속의 자녀도 막다른 골목에서
돈을 팔아 사람을 사거늘 마지막 날 주님의 대전에서 서게 됨을 알고
있다면 그 준비를 미리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행복합니다(루가12,43).
그리고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가12,4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혜로운 덕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이며, 마땅히 피할 바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님께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다 둘 수 없습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따라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을 잘 이용하여 주님 마음에 들게 미래를
대비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은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길 기다리는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제 삶을 일구는 능동의 삶입니다.
사실“많은 일을 해도 해야 될 일을 안 한 사람은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해도 해야 될 것을 한 사람은 많이 일한 것입니다. 그러니 말만
앞서거나 부산함만 피우지 마십시오”(성 요한보스코) 세속 일도
중요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한 일,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일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적 가치는
이 세상 안에서 실천해야 할 삶의 원리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만큼 큰 수고와 정성으로 복된 날 만드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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