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1월23일 [(녹)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수도회] 오늘도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마카 2,15-29
† 복음 루카 19,41-44
◈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에서 마타티아스가 신앙을 지키려고 투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시리아의 임금이 유다인들을 모질게 박해하자,
마타티아스를 중심으로 무력으로 대항할 것을 결의합니다. 그는 이교도
제단을 헐어 버리고 이교 신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려던 배교자
유다인까지 죽여 버립니다. 그러고는 무리를 이끌고 산으로 달아나
저항 운동을 시작하지요.
마타티아스 사후, 그의 아들인 마카베오가 성전을 되찾고 하느님께
봉헌하면서,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립니다. 그러고는 하느님께 충실할
때만이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징표를 정확히 보십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측하시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시지요.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70년경에 예루살렘은 로마군에 의해 함락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
폐허가 되고, 무수한 사람들이 학살당하지요.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합니다. 지금은
무엇이 필요한 시기인지, 이 혼탁한 사회를 보시며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절박한 문제는 많기만
합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느님의 뜻을 외면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나부터 하느님의 뜻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의 뜻과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2017년 가해 11월23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제1독서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 마카베오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2,15-29
복음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41-44
예전에 신부님들과 단식기도회를 처음 함께 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사제서품을 막 받았던 해였는데 난생 처음으로 하는 단식이라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지요. 사실 하루 이틀은 괜찮았지만
사흘째가 되니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배고파서 힘들었을까요? 그보다는
각종 음식 냄새를 참기가 쉽지 않더군요. 코를 심하게 자극하는 음식
냄새를 맡으면서 나중에 단식기도를 마치고나면 꼭 먹어야지 라고
다짐하면서 하루하루를 참았습니다. 먹고 싶은 것들이 참 많아집니다.
통닭, 떡볶이, 튀김, 불고기 등등.... 먹고 싶은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늘어났습니다.
단식기도회를 마치고 나서 이 먹고 싶은 것들을 찾아서 먹었을까요?
단식하고 있을 때에는 그렇게 먹고 싶었지만, 막상 자유롭게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에는 그렇게 관심이 가지지 않더군요. 어쩌면 그렇게
먹고 싶었던 것은 먹을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막상
맘껏 먹을 수 있는 여건이 되면 그러한 관심들이 별 것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사람들은 재산이 없어서, 능력이 없어서, 인정받지 못해서 힘들다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주어진다고 한들 과연 행복할까요?
어쩌면 지금 내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하고 또 누리지 못한다는 강박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러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면
분명히 별 것 아닌 것이 됩니다. 실제로 무엇인가에 집착하면 다른
것들에 대한 관심은 급속하게 떨어지게 되지요.
저는 자전거 타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데 신부님들과 함께
볼링에 빠지게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볼링을 매일같이 치다보니 관심이
자전거에서 볼링으로 바뀌면서 자전거 타는 것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더군요. 이 점을 생각하면서 이 세상 것에 대한 관심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바로 세상 것이 아닌 주님께
관심을 갖는데 온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폐허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는 것을 미리
보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차피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가 아닙니까? 어떻게든 죽음을 겪으면서 주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우리인데 굳이 이스라엘의 멸망에 우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신의 눈에 감추어져 있는 것들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가올 마지막 순간을 바라보지 못하면서
이 세상 것들에 대한 관심과 집착으로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구원의 길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무엇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할까요? 세상의 것이 아닌 주님의 뜻과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에 관심을 두게 될 때, 세상의
것은 별 것 아닌 것이 될 것입니다.
성공을 결정하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즐기고 싶은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고통을 견딜 수 있는가?’이다. 행복으로 가는 길에는 고통과
시련이 널려 있다.
우리나라의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무엇을 가장 염두에 두고 있나요?
사막 교부 중에 기원 후 5세기경에 활동했던 압바 아가톤이 계십니다.
사막에서 수도생활을 하는 그에게 다른 수도승이 찾아와서 말합니다.
“당신이 간음한 자이고 교만한 자라고 일컬어지는 그 아가톤이오?”
“그렇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이 항상 엉뚱한 말을 하는 그 아가톤이오?”
“맞습니다.”
이번에는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이단자 아가톤이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나는 이단자가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묻습니다.
“어째서 우리가 당신에게 던진 모든 모욕은 받아들이면서도 이 마지막
모욕만은 거부했는지 말해주시오.”
“앞선 비난들은 내 영혼에 유익하기 때문에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이단은 하느님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되고 싶지 않습니다.”
아가톤의 말을 보면서, 하느님과 분리되는 것을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느님과 상관없는 것들에 더 많이
집중하고 있지 않나요? 다른 이들로부터 약간의 부정적인 말만 들어도
어떻게든 복수하려는 마음을 간직하지요. 이로써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일치만을 염두에 둔다면 어떤
부분에서 거부해야 할지가 명확해집니다.
무엇을 가장 염두에 두고 있나요?
압바 아가톤에 관한 일화 하나를 더 전해드립니다. 압바 아가톤은
자기가 본 어떤 것을 판단하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답니다.
“아가톤, 판단하는 것은 네 일이 아니다.”
이렇게 판단을 내 일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늘 그의 영혼은 고요했다고
합니다.
어느 음식점 식당 주인의 마음을 볼 수 있는 글귀.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오늘도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 - 기 경호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11월23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루카 19,41-44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루카 19,42)
오늘도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
기원전 6세기에 예언자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예루살렘에 큰 재앙이
내릴 것임을 거듭 선포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느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의 존재의 뿌리였던 예루살렘은
함락되어 처참하게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예수시대 사람들은 기원전 587년의 처참했던 예루살렘 파괴와 뼈저린
바빌론 유배를 잊은 채 살았습니다. 그들은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의
예루살렘 함락의 아픔조차 잊은 채 깊고 깊은 망각의 늪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들의 눈에는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19,42).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과 현세의 탐욕으로 눈이 멀어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한 그들이 당할 재앙을 내다보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를 알아보지 못한 예루살렘은 결국
서기 70년 철저히 파괴되고 맙니다. 주님과의 단절은 그렇게 모든 것을
혼란에 빠뜨리고 파멸로 이끕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예루살렘이 평화를 가져다주는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람이 되심, 예수님의
오심이 바로 평화이신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임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평화이신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가운데, 그리고 내 안에
살아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탐욕과 교만, 하느님에 대한 망각,
주님과의 단절로 겪었던 쓰라린 아픔을 망각 때문에 주님을 보지 못한
채 살아가는 때가 많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우리의 모습과 태도를 보시고 슬피 우시는
것이지요. 우리는 주님을 잊고 그분의 말씀을 멀리 하며, 내가
주인인양 착각하여 다른 이들의 재판관처럼 살아가고, 주님을 외면한
채 불평불만과 절망 속에 살아가며, 죄에 무감각한 채 살곤 하지요.
예수께서는 오늘도 나의 이런 모습을 보시며 눈물 흘리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를 오르시는 당신을 보고 통곡하던
예루살렘 여인들을 보며,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23,28)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슬퍼해야
할 것은 나와 우리 자신의 죄입니다. 평화의 샘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회개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기꺼이 함께하며 나눔을
실천해야겠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벌어진 수많은 사건들을 보시며 눈물
흘리고 계실 것입니다. 4대강 사업으로 인한 생태 파괴, 세월호 참사,
인간생명과 존엄을 경시한 채 벌어진 밀양 송전탑 공사, 제주 해군기지
건설로 인한 강정마을의 파괴와 고통, 거대자본에 의한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실직과 비정규직으로 인한 고통 등. 부패한 권력과 탐욕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본가들로 인해 많은 이들의 아픔은 깊어가고,
예수님의 눈물은 그치지 않는 듯합니다.
탐욕을 버리고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고, 고통과 시련 중에도 절망하지
않으며, 인간생명과 자연을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존중하고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의 눈물을 닦아드려야겠습니다. 우리 때문에
눈물 흘리시는 주님을 잊어버리는 망각의 늪에 빠지지 말았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신앙의 고수되는 법|전삼용 요셉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11월23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복음: 루카 19,41-44
신앙의 고수되는 법
상대를 이겨야하는 모든 게임이나 스포츠에서는 ‘타이밍’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축구를 할 때에도 순간적으로 패스해야 할 타이밍,
혹은 슛을 때려야 할 타이밍을 놓치면 1초도 안 되어서 그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게 됩니다.
1초만 늦게 패스를 하고 슛을 날려도 볼을 빼앗겨 버리거나 막히고
맙니다. 왜냐하면 상대에게 방어할 시간을 주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테니스를 칠 때에도 혹은 더 정밀한 골프를 칠 때에도 0.1초 차이로
공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방향이나 거리로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강호동이 진행했던 무릎팍 도사에서 그가 씨름할 때에 경기가 시작하기
이전에 미리 다섯 개에서 일곱 개의 기술을 생각해 놓는다고 하였습니다.
한 기술이 먹히지 않았을 때, 다음 기술을 생각한다면 그 사이에 역습을
당하고 맙니다. 그래서 바로바로 이미 계획해 놓은 다른 기술로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 상대에게 역습을 당하지 않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운동을 잘하기 위해서는 머리 회전도 빨라야합니다. 모든 것을
미리 예상하고 준비하고 있어야 몸의 반응속도가 가장 중요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축구가 대세입니다.
너도나도 그들의 패싱 게임을 찬양하고 지향합니다.
어떻게 하면 패스를 잘할 수 있을까요?
패스할 곳을 못 찾았는데 상대방이 달려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패스 하다 빼앗길 경우엔 어떤 식으로 대응하는 게 좋을까요?
세계 축구의 ‘보물’ 안드레스 이니에스타(29, 바르셀로나)는 키도 작고
몸무게도 63킬로밖에 되지 않는 자신이 어떻게 해서 패스의 달인이
되었는지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볼을 받기도 전에 나는 패스를 연결할 동료부터 찾는다.
항상 내 주위에 누가 있는지 인지하고 있다.
킬러 패스를 내주는 타이밍을 간파해야 한다.
바르셀로나는 오랫동안 정해진 전술로 호흡을 맞춰왔기 때문에
모든 선수가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를 잘 알고 있다.
볼이 어디로 움직일지를 상대보다 먼저 안다면 그만큼 유리해진다.
볼을 잡은 상태에서 어떻게 할지 생각하면 바로 빼앗기고 만다.
최고의 선수들은 생각의 속도가 무척 빠르다.
동료가 어디로 달려가는지, 오프사이드에 걸리진 않을지, 누가 충분한
공간을 갖고 있는지, 누가 볼을 받고 싶어 하는지, 발 앞으로 받고 싶어
하는지 또는 앞 공간으로 받고 싶어 하는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항상 주위에 누가 있는지를 인지해야 한다.”
바둑이나 장기를 두어도 얼마나 먼 앞 수를 미리 보느냐가
고수에 속하느냐, 이제 갓 입문한 사람이냐가 판결이 납니다.
당구를 칠 때도 눈에 보이는 공을 치는 것은 하수이고, 고수는 치고 난
다음에 공들이 흘러서 어떻게 모이게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관광버스를 타고 가다가 누가 멀미를 하면, 그 멀미하는 사람을 버스
맨 앞자리에 앉힙니다. 그 이유는 앞 유리창으로 버스가 달리는 길이
미리 보이기 때문입니다. 미리 보이면 좌회전을 할 것인지 우회전을 할
것인지 미리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몸이 놀라지 않아 멀미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운전하는 사람은 절대 멀미를 하지 않습니다.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리 예상하고 있지 못하다면 닥치는 모든
상황을 헤쳐 나갈 때마다 멀미가 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미리
예상하고 있다면 대처하는 것이 매우 간단해집니다. 모든 것의 하수와
고수를 판단하는 방법은 이것입니다.
“준비가 되어 있느냐, 그때그때 닥치는 대로 살아가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십니다. 미래에
로마인들에게 완전히 파괴될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그렇게 멸망하게 될 처지가 된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정말 그 때를 위해 가장 잘 준비가 되어있었던 삶의 고수가
계셨는데 바로 성모님입니다.
성모님은 즈카르야처럼 자신에게 닥쳐 온 운명에 대해 주저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듯이 바로 받아들이십니다.
혹은 카나의 혼인잔치에서도 보십시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를 바꿀 때가 아니라고 하시지만 성모님은 바로
그 때가 예수님이 기적을 하셔야 할 때임을 알아차리십니다.
그래서 첫 번째 기적을 얻어내신 것입니다.
때를 아는 것, 이것이 고수의 특징입니다. 만약 사제나 수녀님이 되려고
할 때 이미 결혼해 버린 상태라면 어떻게 할까요?
이미 때가 늦어버린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에 하느님이 성소의 길로
불러주실 때를 미리 알고 있었어야 합니다. 일단 기차가 떠나면
그만입니다. 그렇다면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내가 관심이 없으면 보이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준비한다는 의미는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차를 타고가다가도 그 꽃이 보이지만,
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걸어가면서도 그 꽃을 보지 못합니다.
성경을 읽어도 자신이 관심 있는 것만 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가
각자 성경을 다르게 해석해서 수많은 종파로 나눠지게 된 것입니다.
물론 가톨릭교회는 개인의 해석을 규제하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가르침 안에서 성경을 보려 합니다. 개인의 관심사가 어떻게 그동안
성인들을 포함한 교회의 관심사를 넘어설 수 있겠습니까?
어쨌건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에 관심이 없다면 나에게 주어질 소명이나
구원의 시기를 놓쳐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의
관심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나 세상에 두게 만드는
방법을 쓰는 것입니다. 나의 관심이란 하루 중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매 순간이 하느님의 뜻만을 생각할 때, 신앙에 있어서는 가장 완전한
고수가 되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는 주님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11월23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19,41-44: 네가 평화를 가져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신다. 이것은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참
행복에 대해 당신이 가르치신 것을 몸소 증언하신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1”(마태 5,5) 그분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고 하셨다. 그분은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 그분은 “우리의 평화”이시며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신”(에페 2,14-15),
그래서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신 분이시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마태 5,10) 그분은
우리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분만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은 사람은 없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말씀하신 모든 참된
행복을 몸소 보여주셨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1)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신 것이다.
그분은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42절)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44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장차 일어날 일을
미리 내다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복음사가들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두고 하신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 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게 만들어버릴 것이다.”
(43-44절) 이 일은 말씀하신지 40년 후 서기 70년에 그렇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루카 21,23-24) 또한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루카 21,20)고 하셨다.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도 예루살렘과 똑같은 운명에
떨어지고 만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그분의 뜻을 실천하려 노력하여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매 순간 우리를 당신의 사랑에로 초대하신다.
이 순간은 우리에게는 참으로 은총의 순간이 된다. 이 초대에 올바르게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본 모습이며, 그리스도를 맞이하고 그분을 닮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매 순간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그분께
문을 열어드려 우리에게 오실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을 갖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자.
- 수원 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2017년 가해 11월23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루카 19,41-44
예술의 전당에서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았습니다.
사이먼 래틀은 지휘자였습니다. 그의 지휘는 때로는 시냇물이 흐르듯이
경쾌하였고, 때로는 폭포수처럼 웅장하였고, 때로는 작은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정교하였습니다. 지휘자의 손짓, 몸짓, 눈짓에 따라서
연주를 하는 단원들의 모습은 감동이었습니다. 공연에는 한국인
작곡가 진은숙 씨의 작품도 있었습니다. 지휘자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진은숙 씨의 작품은 신중하게, 마치 아이를 돌보는 엄마의
손길처럼 지휘를 하였습니다. 한국에서 하는 첫 번째 공연이었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평생 지휘를 했던 명지휘자도 처음 공연하는
작품은 좀 더 신중하게, 집중해서 지휘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진은숙 씨의 작품도 그의 특유한 개성으로 지휘를 할
것 같습니다.
내년 서품식을 앞둔 신학생들의 면담이 있었습니다. 석사 논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부제직과 사제직을 앞둔 본인들의 각오와 다짐을
들었고, 의지가 되는 성경 말씀이 무엇인지 들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직을 준비하는 신학생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도움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이들도 사이먼 래틀처럼 사목의
현장에서 영적인 에너지를 나누어 줄 것입니다. 본당의 각 단체들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분들에게 힘을 주고, 본당이라는 공동체에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하도록 지휘할 것입니다. 어느덧 오래 입은 옷처럼, 오래
신었던 신발처럼 사목이 익숙해지겠지만 처음 먹었던 그 마음을 늘
간직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며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기뻐하고, 항상
감사하며, 어떤 처지에서도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요즘 우리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종말에 대한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도, 건강도, 목숨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것은
종말에 대한 신앙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참된
신앙을 잊지 않으시고 보답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일곱 아들을
순교의 제단에 바친 어머니도 그렇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용감하게
일어서 마타티아스와 그 아들들도 그렇습니다. 진리 앞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 앞에 두려움도, 근심도 걱정도 없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욱 깊은 이야기를 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 중에 10명 중 2명은 교회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현실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어쩌면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일지도 모릅니다.
커다란 건물의 교회, 엄숙한 전례, 아름답고 화려한 행사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교회는 이 땅의 빛과 소금이 될 수는 없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오늘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지진으로 일주일 연기되었던 수학능력 시험이 오늘 있습니다.
수험생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주님의 눈물을 닦아드리자|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11월23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루카19,41-44)
눈물을 닦아드리자.
수능에 임하는 이들이 마음껏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비시는 분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며 청한다고 하지만 그분은 우리 모두의 구원을
바라고 계시며 그 범주에서 벗어날 것을 염려해 우리를 위해 빌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바라시는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뜻 안에 머물지 않고 있으니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십니다. 부모가 자식을 염려하는 바로 그 마음입니다.
예루살렘도성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아프셨습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길을 걸어야 할 사람들, 평화를 갈망해야 할 사람들이
그 본연의 것에는 관심이 없고,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 평화의 길을 걸었으면 좋으련만 그들의 완고한 마음은 자신의 삶을
돌이킬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멸망의 길을 자초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완고함 때문에 우십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소리에 우십니다. 평화를 말하면서도 정작 평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자기
잇속을 차리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자니 눈물이 납니다. 이기심으로
가득 차서 주님을 생각할 틈이 없으니 참된 평화는 영영 멀기만 합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먼저 마음의 무질서를 바로 세워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해 주신다”는 약속을 믿는 이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마음의 고요를 누립니다.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구애 없이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것을 기뻐합니다. 그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주님의
참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 평화를 일찍 알았더라면 그렇게 사사건건
마음의 혼돈을 가져오지는 않았을 텐데 …. 주님께 대한 믿음은 모든
것을 이겨내게 하고 또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미움은 미움을 낳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되고 마침내 구원을
갈망하며 구원을 살게 됩니다. 주님의 눈물을 씻게 됩니다. 참으로
올바르게 주님을 믿는 이에게는 참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서 평화를 갈망합니다.
재물이나 명예, 건강, 외모, 자식 등이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전력투구하며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그건
것들은 영원하지 않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합니다. 결국 그것이 참
평화를 줄 수는 없습니다. 참 평화를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그것을 믿는 이는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오늘은 근본에로 돌아가서 믿음으로 주님의 눈물을 씻겨드리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주님의
눈에서 눈물을 그치게 해드리고 웃음꽃이 피게 할 수 있는 새 삶이
지금 여기서 시작되기를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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