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1월25일 토요일 [(녹)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수도회] 죽어도 죽지 않는 영원의 호흡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마카 6,1-13
† 복음 루카 20,27-40
◈ 오늘의 묵상
오늘 몇몇 사두가이들은 죽은 다음의 삶에 대해 예수님께 묻습니다.
일곱 형제가 차례로 한 여자를 아내로 삼았을 경우,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부활을 믿는 바리사이들과
달리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지요.
물론 당시 죽은 다음의 삶에 대해 많은 의견과 주장이 있었습니다.
‘죽은 다음에는 불사불멸의 형태가 된다.’ ‘육체가 부활하여 이 세상에서
산다.’ ‘심판을 받은 다음에 다른 곳에서 산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는 부활하면 빛과도 같은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을 뜻하지요. 언젠가 우리도 부활하면 지금과 같은 육신의
형태를 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육신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육신의 부활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육신의 부활이란 육신까지도 포함하여 인간의 전 존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육신 때문에 죄도 짓지만, 육신을 통해
선행도 많이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육신의 부활이란 지상에서 육신을
통해 쌓은 행위들을 함께 지니고 부활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선행을 더욱 베풀며 영혼을 단련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럼으로써 부활의 영광을 얻고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집증
2017년 가해 11월25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제1독서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 때문에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죽어 가네.>
○ 마카베오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6,1-13
복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7-40
‘빠다킹’ 신부라고 불리는 제 별명을 참 잘 지었다는 말씀을 하시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별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거의 20년 가까이
사용한 별명인데 왜 마음에 들지 않지 않을까요? 빠다킹 신부라는
이름이 알려지면서 괜히 인터넷 안에서 제 별명을 검색하는 고약한
습관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조명연’이라는 이름으로 검색하면
찾을 수 있는 정보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빠다킹’으로 검색하면
저의 글들이 쫙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저의 대한 평가까지도 나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글과 댓글들을 너무나 자주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제가 한심하게도 느껴지고, ‘빠다킹 이라는 별명만 없으면...’이라는
생각으로 별명이 싫어진 것이지요.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유혹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궁금해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름을 검색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속속들이 죄다 찾아서 끝까지 읽거나,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아무것도 보지 말아야 한다.”
궁금하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의 평가를 아예 보지 말자는 다짐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댓글도 읽지 않습니다. 그러자 삶이 훨씬
자유로워지고, 더불어서 빠다킹 이라는 별명도 다시 마음에 들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평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는 가슴이 아프거나 또는
화를 동반하지만. 자기 스스로의 평가는 가슴이 아프지도 화를
동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에 의해서 억지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어떤 평가를 얻었을까요? 대중으로부터는 큰
지지를 받았지만, 당시의 실세라고 할 수 있는 종교지도자들로부터는
전혀 지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흠집을 내려 했고,
예수님의 말씀에서 꼬투리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그들의
평가에 신경을 쓰셨다면 과연 그런 모습을 보였을까요? 즉,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주고,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위선자라고 혼을 낼 수
있었을까요?
그들의 평가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집중했기 때문에, 그들이 반대하는 행동 역시 사랑의 길이라면
눈치 보지 않고 행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당시 종교지도자로서 큰 힘을 가지고 있었던 사두가이들의
부활이 없다는 의견을 단호하게 거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신경을 쓰지 않았으면 합니다. 대신 하느님 아버지의
평가는 어떨지 여기에 더 집중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같은 실수도 누군가는 감추기 바쁘고, 누군가는 내면의 키가 한 뼘쯤
자란다(박광수).
주님의 뜻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꼭 정답은 아니다.
며칠 전에 길을 가는데 어떤 중년의 형제님께서 어느 술집 앞에서
담배를 태우는 한 자매님을 바라보면서 “예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는데,
저렇게 대놓고 여자가 담배를 피우네.”라고 큰소리로 말씀하시더군요.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담배를 피우는 여자는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우리의 섣부른
판단이 얼마나 잘못으로 나아가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판단이 꼭 옳지 않음을 이 문제를 풀면서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남자는 과연 어떨까요?
1.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다.
2. 여성 편력이 전혀 없고, 결혼은 죽기 전에 한 번 할 정도로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지고한 사랑을 가졌다.
3. 채식주의자이다.
어떻습니까? 괜찮은 남자일까요? 바로 이 사람이 제2차 세계대전의
원흉으로 게르만 민족주의와 반유태주의로 많은 사람을 학살했던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좋은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보이는 부분을 가지고서는 ‘좋다, 나쁘다’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우리의 생각은 항상 정답을 향하지 않습니다.
어제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죽어도 죽지 않는 영원의 호흡 -
기 경호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11월25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루카 20,27-40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루카 20,38)
죽어도 죽지 않는 영원의 호흡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사두가이 사이에 있었던 부활 논쟁입니다.
예수님 당시 사두가이들은 이스라엘의 순수 종교와 동떨어지게
살았으며 외적 신심에는 충실했지만 조상들의 전통은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바리사이들과 달리 부활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두가이들은 모세 율법을 근거로(신명 25,5-10), 어떤 사람이 아내를
남기고 죽어 그의 형제들이 차례로 형수를 맞아 대를 이으려다가 모두
죽으면, 부활 때에 그녀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지 예수께
묻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 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율법을 근거로 부활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반박하십니다(20,35-36).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20,35-38)
부활이란 육신의 소생이나 영혼의 상태 변화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그분의 생명과 영원성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살아계신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하여 산다면, 육신의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하느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은 육체와 시간,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들에 묶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일상의 순간마다 영원하신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도록
깨어있어야겠습니다 지금 여기서 영원하신 하느님을 만나려면 세상의
헛된 것들에 죽어야 합니다. 부활은 신비스런 환상이나 죽음 이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정의와
생태적 공생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지금 여기서 드러나며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누구든 사두가이처럼 부활, 곧 하느님의 영원성을 부인한다면 스스로를
물리적 시간과 눈에 보이는 것들에 매이고 말 것입니다. 그 결과
지상생활에서 모든 만족을 찾으려 하고 물질 소유와 건강, 쾌락, 세속
명예에 집착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스스로를 현세의
우상과 일시적 만족에 가둬버리는 그런 인생이야말로 비참하다고
아니 할 수 없겠지요.
우리 모두 삶과 죽음의 주인이신 영원하신 하느님을 굳게
믿어야겠습니다. 부활신앙 안에서 순간 안에서 영원성을 발견하며,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삶의 의미를 읽어내도록 해야겠지요. 이는
내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구체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에 맞서고, 절망스런 현실
앞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어떠한 시련이나 고통도 기쁜
마음으로 견디어 내며 기쁘게 살아야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천국의 삶의 모습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11월25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20,27-40: 천국에서는 장가드는 일이 없다
“사두가이”란 보상을 바라고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의로운 자”라는 뜻으로 불린 명칭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도 하나의 보상심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은 유대인들 가운데 부활을 믿지 않는 특별한 분파였다.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던 사두가이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로 모여들었다.
이 사두가이들이 한 여인이 일곱 남편을 맞게 되는 경우를 들어 예수께
질문을 한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3절).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마태22,29-30) 고 하셨다. 하느님의 권능은 너무나 크시다.
어째서 그럴까? 그들은 두 번 다시 죽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주님께서는 다가오는 세상의 ‘새로운’ 상황을
알려주신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34-36절).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삶의 모습’이란, 부활 자체가 결혼의
목적성을 상실해 더 이상 자손을 낳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부활
때에는 사람들이 ‘천사들과 같아지기 때문에’(36절) 죽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36절)라고
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하도록 되어있고 또 그 부활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에 연결되고 있다. 즉 부활로써만이 완전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지금부터 ‘하느님의 자녀’이다. 지금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분의 생명에 결합되어있기 때문에 장차 부활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루가는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35절)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므로 모든 일상의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로 가는
진실한 ‘하느님의 자녀’임을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이라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체험하기 시작한 사람만이 마지막
부활을 믿을 수 있고 또 갈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37절)이라고 한 것은 모세는
그 순간에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그 선조들과 ‘생명의’ 관계에 있고,
신비스러운 친교를 통해 계속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육체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과
우리를 만나게 하는 그분과의 ‘일치된 생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38절).
즉 그리스도인은 현재 이 순간부터 그분과 사랑의 일치 속에 살아가야
하며, 그 일치가 죽음을 넘어 우리의 육신까지도 살려줄 마지막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기를 기다리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분과의
사랑의 일치 속에 사는 것이 참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이며
하느님의 영광이 되는 인간이다. 이러한 삶을 살도록 결심하며
기도하자.
- 수원 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2017년 가해 11월25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루카 20,27-40
요즘 몸에 대해서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몸은 가끔씩 신호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 내 몸을 사랑하지 않고 무리하게 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나친 음주, 수면 부족, 근심과 걱정, 욕심이 앞서면 몸은
잠시 쉬라는 신호를 보냅니다. 잇몸이 아프기도 하고, 머리가 아프기도
하고, 통풍이 재발하기고 하고, 치질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것은 몸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의지와 마음의 문제입니다.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각종 모임이 있고,
마무리해야 할 일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일수록 여유를
가지고, 몸에게도 휴식의 시간을 줄 필요가 있습니다.
200년 전 조선시대의 사람이 2017년 11월의 한국에 온다고 생각을 해
봅니다. 조선시대의 사람은 아마도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과학혁명을 통해서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는 도구들을 조선시대에서 온
사람에게 설명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땅 속에서 달리는 지하철, 땅
위에서 달리는 자동차,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의료, 금용, 주택, 교육, 방송, 통신, 사회복지와 같은 조직을
설명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어두운 밤을 환하게 밝혀주는 전기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에서 온 사람에게 이곳은
분명 같은 공간이지만 새로운 세상이고, 꿈속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일 것입니다. 그것이 조선시대에서 온 사람에게
낙원으로 여겨질지, 혼란스러운 세상으로 여겨질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죽음 이후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두가이파
사람은 200년 전 조선시대의 사람들의 모습으로 마치 현대 우리들의
모습을 이해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생각으로는 죽음 이후의 삶을
이해하기도 어렵고, 설명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세상을 만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이후의 삶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
갈 것이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지금 우리들의 상식과 기준으로
부활이후의 삶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의 삶이 또한 부활이후의 삶에도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부활’이란 말의 뜻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어서다. 다시
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낡은 관습과 습관을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 잘못된 틀을 벗어버리고 사랑과 희망의 날개를 얻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갈릴래아로 가라!’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던
곳입니다. 절망 중에 있던 사람들에게,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람들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십자가의 끝은 절망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에 대한
용서입니다. 분노와 원망을 던져버리고, 화해와 용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몸의 변화가 부활이기도 하지만,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부활의 시작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믿으면 아나니, 그때 아는 것은 예전에
아는 것과는 다르다. 사랑하면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는 다르다.” 하느님을 믿으면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분노와 미움, 증오와 불만에서 사랑과 용서, 겸손과 친절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천상에서 우리가 살아갈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언제나 생명을 주시는 분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11월25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루카20,27-40)
언제나 생명을 주시는 분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더
소중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과거에 묶여 삽니다.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에 잘못
집착해서 오늘을 인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약속된 미래가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미래가 없이 오늘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밝아 자기 잇속을
챙겼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2,9)하며 약속된 부활의 삶을
확인시켜줍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몸소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도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희망 안에 있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생명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활을 믿는 이에게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견디어
냅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기에 현세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희망하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리십시오. 눈물로 씨 뿌리면 곡식 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손길을 막지 못한다”(집회39,18)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믿고 사는 이에게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산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결국 깨어 있는 이에게
능력의 하느님으로 다가오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지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흔들비쭉일 뿐입니다. 이
시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하느님을 모시듯 하느님의 피조물들을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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