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2월6일 수요일 [(자)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수도회] 너울을 벗기시고 눈물을 닦아주시는 주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25,6-10ㄱ
† 복음 마태 15,29-37
◈ 오늘의 묵상
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신
다음,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습니다(마태 15,21).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을 고쳐 주시자 군중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사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은 이방인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통해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돌보시는 예수님을 부각시키고, 두
번째의 빵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을 유다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돌보시는 착한 목자로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영혼과 육신을 치유하려고 먼 길을
걸어온 사람들에게 ‘측은지심’을 가지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군중에게
주신 일용할 양식은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을 만큼
풍족하였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하고 즐거운 탄성을 올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희망을 갖고 사는 신앙인입니다. 그 희망이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누려야 할 몫은 넘치는
하느님의 자비와 치유를 체험하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그 체험으로
우리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의 기적은 함께 하는 사랑의 마음에서 시작
2017년 나해 12월6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제1독서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잔치를 베푸시고, 그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25,6-10ㄱ
복음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빵을 많게 하셨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29-37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원인은 바로 ‘비교’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없는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하지요. 그러나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특정한 관심이나 활동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을 구축해 주는
온라인 서비스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만 봐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안에서 하고 있는 많은 말들이 자기 자랑과 남을 비하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비교를 통해 남보다 우위에 있고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물론 비교를 통해 개인의 발전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것을 갖게 되고, 더 높은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행복의
길로 가는 것이라 말할 수가 있을까 싶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길, 함께
행복해지는 길은 어떨까요?
1995년 10월,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한 병원에 산달을 채우지 못한
쌍둥이 자매가 일찍 세상에 나왔습니다. 다행히 언니는 인큐베이터에서
건강을 회복했지만, 동생은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의료진이 더 이상의
치료방법이 없다고 생각할 때, 한 간호사가 동생의 인큐베이터 안에
언니를 함께 넣습니다. 그러자 언니가 동생의 어깨에 자신의 작은 손을
얹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글쎄 동생이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으면서 각종 생명 수치들이 정상수치로 돌아온 것입니다.
함께 하는 것은 편안함을 가져다주며. 이 자리에 주님을 초대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함께 하는 것이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갖가지 병을 앓고 있는 병자들을 주님께 데려옵니다. 병자들
혼자서 왔을까요? 이 병자를 데리고 온 누군가가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빵의 기적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누군가가
봉헌한 일곱 개의 빵과 약간의 물고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배불리 먹고서 남은
조각이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필요한 만큼만
먹었다는 것입니다. 남는 것이니까 가지고 가고 싶지 않았을까요?
더군다나 이는 주님의 놀라운 기적의 증거가 아닙니까? 나중을 위해서
가지고 가려는 마음도 있을 수 있고, 또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가져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은 조각이 있다고 하지요. 즉,
필요한 만큼만 헤아려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께 했기에 주님의 놀라운 기적이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병을
앓고 있는 병자를 고쳐주신 것, 빵의 기적 모두가 사람들의 함께 하는
모습에서 나왔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욕심과 이기심을 통해서는
주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의 기적은
함께 하는 사랑의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슬픔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이 흐른다고 슬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시간에 맞서기보다 그것이 우리를 새로운 삶의 순환으로
이끄는 길에 함께 발맞춰야 한다(개리 코왈스키).
감동적인 인큐베이터 안의 쌍둥이 자매.
제자리 지키기
누구나 잘 하지 못하는 것이 한두 가지는 있을 것입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제 주변에 정말로 완벽해 보이는 신부님이
계십니다. 신학생 때부터 공부, 운동, 그밖에 다른 부분에서도 남다른
모습을 보였지요. 여기에 성실하고 늘 웃으면서 주위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이렇게 완벽할 수 있을까 싶었지요. 그런데 우연히 그분의
사제관에 갔다가 못 하는 것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리정돈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분 역시 자신의 지저분한 방이
부끄러웠는지 이렇게 말씀하세요.
“다른 것은 다 노력하면 되는데, 정리정돈은 도대체 되지를 않네. 이런
모습을 보여줘서 정말로 부끄럽다.”
그러자 다른 것은 잘 못해도 깔끔하기로는 세계 1위라고 부를 정도로
정리정돈을 잘 하는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냥 놓았던 제자리에 두면 되는 거야. 물건들이 자기 자리에 있지
않으니 이렇게 지저분한 것이라고.”
맞습니다. 제자리에 있으면 정리가 저절로 되겠지요. 책이 책꽂이가
아니라 바닥에 놓여 있으니 지저분하고, 쓰레기가 쓰레기통이 아니라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있으니 지저분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삶이 복잡하고 힘들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좋아 보여서 욕심과 이기심을 늘리다보니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에 있기 때문에 지저분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일까요?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한 곳이
아니라, 사랑과 희망이 가득한 주님의 품이 아닐까요?
오늘은 의정부교구 화정동 성당에서 저녁 8시부터 대림 특강을 합니다.
제가 언제 어디서 특강을 하는지 알고 싶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으셔서
이렇게 공지합니다. 화정동 성당에 가까이 사시고, 시간되시는 분들은
오세요.
계속해서 대림특강이네요. 강의하는 제 모습이랍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너울을 벗기시고 눈물을 닦아주시는 주님 -
기 경호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나해 12월6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이사 25,6-10ㄴ; 마태 15,29-37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잔치를 베푸시고, 그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신다.”(이사 25,6.8)
너울을 벗기시고 눈물을 닦아주시는 주님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바빌론 유배와 로마의 지배를 겪으며 자신들을
해방시켜 주고 하느님 나라를 세워줄 메시아를 고대했습니다.
예언자들은 그러한 구세주를 약속하였습니다. 이사야서의 묵시록
(24-27장)에서 모든 백성이 참여하는 메시아의 축제가 예고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25,6)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저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땅위의 사람들을 위해 베푸시는 잔치는 하느님 자비와
구원의 표지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에 상관없이 마련하신 잔치는 구원의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며,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실 것입니다.”(25,7-8)
애도의 표시로 얼굴을 가리는 ‘너울’은 얼굴에 씌워져 보면서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또 눈물을
닦아주신다는 것은 지금까지 겪었던 온갖 설움을 위로해 주시고 새로운
시작을 열어주심을 뜻합니다. 이로써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정의의
하느님이요, 위로와 자비의 하느님임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의 너울을 벗겨 내고, 눈물을 닦아주시면서
사람을 사람답게 해주십니다. 서로를 가로막고 있던 걸림돌과 경계가
완전히 허무시고 모두 한 마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도록 이끄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잔치에 초대받은 모든 사람은 슬픔에서 벗어나고,
수치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을 비롯해 수많은 이들에게 건강을 되돌려주십니다
(마태 15,30). 그리고 당신을 따라왔다가 광야에서 사흘 동안이나
먹지도 못한 군중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이는 예언자들이 예고한
메시아의 축제가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려주는 표징입니다.
오늘 우리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그리고 이 세상 한복판에서 해방과
치유의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이미 고통을 희망으로 바꿔주시고,
아픔을 치유해주시며,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주시는 주님의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슬퍼하시며, 우리가
거기서 벗어나도록 이끄시는 메시아이십니다.
우리네 삶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구원의 잔치를
열어주시고 인간답게 해주시는 주님을 믿고 사랑으로 기다려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사야 예언자와 더불어 다음과 같이 고백했으면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희망을 걸었고,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이사 25,10)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마태 15, 34)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나해 12월6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마태 15, 34)
허기지고 굶주려 보았던 사람이 굶주린 이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빵을 나눈다는 것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으로 밥으로 우리들과 함께하십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언제나 생명입니다.
생명을 돌보는 것또한 생명이었습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함께 머뭅니다.
빵이 되는 성체성사는 우리의 생명이 무언지를 깨닫게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생명은 당신 친히 빵이 되심으로 우리의
생명을 키워주시고 지켜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제일 빨리 가는 길은 빵이 되는 길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생명이 되고 호흡이 되는
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생명에 감사하는 대림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또한 예수님의 생명을 닮아가는 빵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원] 빵과 물고기의 기적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나해 12월6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15,29-37: 많은 병자를 낫게 하시고, 빵의 기적을 베푸심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가시어 병든 이들을 기다리신다. 사람들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온다. 그분의 옷자락을 잡는데 그치지 않고 그분의 발치에까지
온다. 그들은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다리를 저는데도 불구하고 산으로
애써 올라왔고, 산에 오른 다음에는 그분의 발치에 있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으로 치유된 것이다.
사람들은 비록 외딴 곳이었지만,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에 지칠 줄
몰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나약성과 우리 육체의 건강을
위하여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예수님은 그들이 사흘 동안이나
당신 곁에 있었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32절)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더라도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배불리 먹일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33절) 하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북돋우고 그들이 더욱 동정심을 느끼도록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34절)고 물으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주린 자를 먹여 주신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자비, 불쌍히 여겨주시는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유대인과 다른 민족을
차별하시지 않고 골고루 대하셨다. 이 차별 없고 순수한 사랑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변화뿐 아니라 세상의 변화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는 삶이 우리는 진정 은총의 삶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다.
많은 군중에게 빵을 먹이신 기적사화는 두 가지 형태로 전해졌다.
하나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으로 더 오래 된 것으로 마태오는 이 두
가지를 다 전하고 있다. 복음은 이 기적사화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구약에서 엘리야가
사렙다의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 주었다는
사화(1열왕 17,8-16)를 알고 있으며, 엘리사가 보리떡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다는 기적 이야기(2열왕 4,42-44)를 알고 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엘리야나 엘리사보다도 더 훌륭한
분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모세와 같은 예언자라는 사상도
들어있는 것 같다. 그 옛날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로
먹인 것처럼 예수께서는 외딴 곳에서 백성을 먹이신다. 예수님은
기도하신 다음 빵을 나누어 주신다. 이제 우리는 이웃에게,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갖고 우리와 같은 형제로
대해주는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 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자.
- 수원교구 상하 성모세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대림 제1주간 수요일
1999년 8년간의 보좌신부를 마치고 본당 신부가 되어서 부임한 곳이
적성 성당입니다. 재정적으로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참 행복했고,
즐거웠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저는 일산 지역에 있는 성당 신부님들에게
매달 조금씩 도움을 청했습니다. 5개의 본당에서 매달 도움을
주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참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지냈습니다. 지역
사제회의에서 25인승 버스를 구입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여름에 가뭄이 심했을 때는 교구 사회복지회에서 양수기를 보내 주기도
했습니다. 성당의 땅이 넓었고, 교우들 대부분이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저도 기꺼이 나눌 수 있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도움을 주었던 본당에
꿀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가을에는 배추를 보내 드리기도 했습니다.
여름에 주일학교에서 농촌 체험을 올 때는 아무런 비용을 받지 않고
본당의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주어진 현실에
실망하였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들이었습니다.
예전에 돌계단 틈으로 새싹을 보이는 민들레를 본 적이 있습니다. 좋은
곳이 많은데 어쩌다 돌계단 틈으로 씨앗이 떨어진 것입니다. 단단한
돌에, 물도 없는 곳에서 싹을 내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힘들게 꽃을
피우려는 민들레가 애처롭게도 보였고, 작고 여린 줄기를 세상에
내보내려는 민들레가 대견하게도 보였습니다.
한 젊은이가 찾아왔습니다. 2006년도 신학교엘 다녔다고 합니다.
본인의 실수로 신학교에서 나왔지만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 하고 싶어서 일본어를
배웠고, 일본신학교에 가기 위해서 추천서를 받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동창들은 이미 사제가 되었지만 그 친구는 앞으로 더 많은 시간 공부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배워야 하고, 문화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일본에서 신학공부를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될 것입니다.
사제의 길을 가려하는 그 친구의 열정을 보았습니다. 마치 돌계단
틈에서 힘들게 뿌리를 내리려하는 민들레 같았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 친구의 열정이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화답송은 시편 23장입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온 몸에 큰
화상을 입었던 이지선 씨는 시편 23장의 내용을 묵상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나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두려움이 없네. 주님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를 깊이 묵상했다고 합니다. 사고 전에 찍었던
사진은 앳되고 아름다운 여대생이었습니다. 40번을 넘게 수술을 한
지금의 얼굴은 많이 불편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지선 씨는 절망 중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녀의 홈페이지를 방문한
사람들은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겪고 있는 시련과 아픔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십니다. 가난한 이, 굶주린 이, 아픈
이, 장애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절망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끝까지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새로운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지길 바랍니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나해 12월6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마태15,29-37)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이른 아침에 잠을 깨면서 ‘살아있구나’ ‘오늘 하루를 또 허락 하셨구나’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날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고, 기대하시는
바가 있는데 얼마나 알아듣고 그에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있을지? 그리고
하루의 끝에서 어떻게 감사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새로워지면
매일이 새 날인데 새날을 만들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안고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왜 오늘날엔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냥 버려두십니까?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지 않으시는 주님이 야속합니다.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체적인
질병도 고쳐 주셨고 육체적인 굶주림을 채워주셨던 주님께서 오늘도
여전히 당신의 능력을 밝히 드러내시길 기도합니다.
사실 세상의 굶주림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베풀면 세상의 기아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무리 큰 기적을 하신다 해도 내가 베푸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굶주림은 여전히 계속될 것입니다. 더 나눌 수 있는 사람,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질 때 예수님의 빵의 기적은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 주변에 음식쓰레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한 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도 여전히 넘쳐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가끔 우리 식당의
음식분배를 살펴봅니다. 먹을 수 있을 만큼만 가져가면 좋은데 잔뜩
가져가서는 버리게 됩니다. 다 큰 성인인데도 절제를 못하고 아무
생각 없는 이를 보면 안타깝습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신 의미를 품어 생각하면 능력의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매여 있게 되면
언제든지 풍요롭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은 뵙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총 덩어리보다도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감사를 드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에 새겨야겠습니다.
예레미야서 31장 33-34절을 보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게 된다고 하시며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하고 말합니다.
이스라엘백성의 하느님이 되신 그분이 오늘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켜주시고 용서하시며 앞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를
위해 기적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도구 삼아 당신의 할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고 제자들이 다시 군중에게 나누어준 행위는 바로
나눔의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은 자기들끼리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모든 이와 함께 나눠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적을 보지 말고 오히려 주님의 능력에 응답하여 기적을
이루는 사람, 기적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먹고도 남는
일곱 바구니는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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