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2월10일 주일.
[(자) 대림 제2주일 (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수도회] 존엄한 인간의 길을 열어주시는 주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40,1-5.9-11
○ 제2독서 2베드 3,8-14
† 복음 마르 1,1-8
◈ 오늘의 묵상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영원한 생명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미리 세례자 요한을 보내시어
유다인들에게 죄를 뉘우칠 기회를 주셨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물의
세례를 주며 ‘죄의 용서의 은총을 받는 표지’를 보여 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생명과
은총을 넘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요한은 구세주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닦으려고 파견된 것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우리는 척박한 광야 생활 중에 주님의 은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황폐함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더욱더
갈망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 세상은 진정한 평화와
안식이 없기에 우리 영혼은 하느님의 은총을 목말라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가운데 오시도록 죄의 골짜기를 메우고 고집과
자만심이 가득한 언덕들을 낮추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찬란한 영광과 위로를 마음껏 누릴 수
있습니다.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는 목자’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오지만,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소박한 사람들은 회개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만, 이 세상의 권력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재산이나 명예에 집착하는
사람, 자만에 빠져 있는 사람은 마음속에 장애물을 만들어 예기치 못한
순간에 종말을 맞습니다. 그들은 놀라움과 공포, 절망과 후회로 가득한
종말을 맞게 됩니다. 주님의 날을 잘 맞이하는 지름길은 회개와 신심
생활에 있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이제는 생각을 바꿔야 할 때입니다.
2017년 나해 12월10일 대림 제2주일 (인권 주일 · 사회 교리 주간)
제1독서
<너희는 주님의 길을 닦아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0,1-5.9-11
제2독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베드로 2서의 말씀입니다. 3,8-14
복음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8
신학교에 들어가서 여러 동아리 활동을 할 수가 있었는데, 제가 선택한
곳은 산악반이었습니다. 산 정상에서 느끼는 성취감, 산이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경치는 일상 삶 안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여기에 보너스로 건강한 몸도 갖게 되었지요. 그러다보니
험한 산, 오르기 힘든 산을 가는 것도 너무나 즐겁고 유쾌했습니다.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가게 되었습니다. 신병교육대에서 유격 훈련을
받을 때 산을 오르는 것입니다. 워낙 좋아했던 산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때 오르는 산은 정말로 괴로웠습니다. 산에 빨리 오르지
않으면 알아서 하라는 조교들의 험악한 말을 들으면서 어쩔 수없이
강압적으로 오르게 된 산이었기 때문이지요.
똑같이 오르는 산이지만 이러한 차이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르는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을 내가 선택한 기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어쩔 수 없이 하는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지요. 어쩌면 고통과 시련이 주어지는 상황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무조건 괴롭고 힘든 고통과 시련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어떤 생각을 갖느냐에 따라서 기쁨과 행복의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이 아닐까 싶습니다. 강압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최선을 다해서 행하게 될 것이고 이것이 바로 내 삶에 대한
책임 있는 행동인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 있는 행동은 바로 생각의
전환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야 상황이 바뀔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들은 세례자 요한을 만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실
주님을 준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지요. 그래서 광야에서 사람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게끔 했습니다. 그리고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삽니다(마르 1,6 참조).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인간의 욕망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례자 요한이 이런 선택을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세례자 요한은 사제직에 있었던 즈카르야와 아론
가문의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지요. 이는 그가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것도 먹고 살 수 있는 집의 외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이렇게 어렵고 힘든 선택을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받은 사명에 충실한 것이 바로 책임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피하려고 하지 않고, 또 고통스러워하지 않으면서 그 길을 향해 묵묵히
걸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또 한 가지는 자신이 주님보다는
결코 높아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하지요.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마르 1,7)
세례자 요한의 이 모습을 보면서 내 자신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참으로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을 해 달라, 저것도 해 달라고 합니다. 마치 맡겨놓은 것을
되찾아가는 것처럼 말이지요. 잘 생각해보면 주인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종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주님보다
절대로 높아질 수 없는데, 온갖 불평불만 속에서 주님 탓을 외치면서
마치 종을 대하듯 했던 것이 아닐까요? 결코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이제는 생각을 바꿔야 할 때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 그리고 주님을 진정으로 나의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모습입니다(2베드 3,13 참조).
내 몸이 귀하다고 하여 남을 천히 하지 말고, 자기가 크다고 하여 남의
작은 것을 업신여기지 말고, 자기의 용기를 믿고서 적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명심보감).
1990년 인천교구 신학생 북한산 야유회 때
나이 듦에 대해...
어떤 모임에서 가장 나이 많은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자꾸만 잊어버리는 것이 많아요.”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다면서 시간의 흐름을 안타까워하십니다. 과연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나빠지는 것일까요? 이 점에 대해서
언어학자들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언어학자들은 조사를 해보니 교육받은 4~50대가 젊은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단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억을 떠올리는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있는 도서관이
젊은이들의 것보다 더 방대하기 때문이지요. 도서관이 크면 클수록
책을 찾는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리지 않겠습니까? 결국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찾는데 오래 걸릴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나이 듦이 그렇게 슬픈 것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오래된 도서관이 그리고 많은 도서를 보유하고 있는 도서관이
중요하게 평가되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 역시 나이 듦이 이러한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더욱 더 존중받고 사랑받아야 할 분들이십니다.
자꾸 잊어버린다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격하하지 마십시오.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단지 아는 것이 너무 많아서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니까요.
예수님의 기쁜 성탄을 잘 준비합시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존엄한 인간의 길을 열어주시는 주님 -
기 경호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나해 12월10일 대림 제2주일 (인권 주일 · 사회 교리 주간)
이사 40,1-5. 9-11; 2베드 3,8-14; 마르 1,1-8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르 1,3)
존엄한 인간의 길을 열어주시는 주님
오늘은 대림 2주일이며 인권주일이자 사회교리주간입니다. 우리는
성탄축제의 은총 가운데 주님의 첫 번째 오심을 바라볼 뿐 아니라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이 기다림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 여기에 오시는 주님을 의식하며 사랑으로 서로의 존엄한
인권을 존중하는 능동적 기다림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위로의 책’이라고 부르는 제2 이사야서(40─50장)
의 첫 부분입니다. 여기서 익명의 예언자는 바빌론의 종살이에서
백성들의 해방이 다가오고 있음을 기쁨에 가운데 선포합니다. 하느님
친히 종살이의 마침을 다음과 같이 알립니다.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40,1-2)
한 소리가 외칩니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라.”(40,3-5) 당신 백성을 승리로
이끄시려고 되돌아오시는 주님을 위해 길을 준비하라는 권고입니다.
이 외침은 인간을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건너야만 하는
마음의 길을 준비하라는 음성입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의 처지는 유배
중에 있는 이스라엘이나 비탄에 싸여 있는 예루살렘과 같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예언자를 통하여 해방의 기쁨과
희망으로 오십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곧 다시 오심을 고대했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시 오시기 전에 온 인류를 기다리시며, 당신을 믿는
이들이 당신의 다시 오심을 삶으로 세상에 선포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으로써 시작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립니다.
그런 세상은 인간의 고귀함과 존엄함이 온전히 드러나는 세상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렇게 오시는 주님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를
광야에서 행동과 말로 선포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마르 1,4) 율법을 준수하는 이스라엘 백성
외에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던 때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요한의 설교는 그 자체로 기쁜 소식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생명이요 구원이며, 자유와 희망의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려면 회개해야겠지요. 인간 생명을 경시하는 광야에 주님 생명의
길을 닦는 것이 회개입니다. 왜곡되고 편협한 사고로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고 가리는 사막에 인간을 존중하는 길을 곧게 내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차별과 무관심의 골짜기를 따뜻한 사랑으로 모두 메우며,
교만과 탐욕의 산과 언덕을 낮추는 돌이킴이 절실합니다.
우리 모두 회개하며 인간존엄과 공동선의 궁극적 원천이요 절대
희망이신 주님을 맞이해야겠습니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1,7)고 고백한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자세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사랑하며, 생명을 존중하고 인간을 도구화
하는 돈의 힘과 차별에 결연히 맞서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보다 더
낮은 곳으로 오시는 주님을 ‘지금, 여기서’ 맞아들이는 행복한
우리였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선 굵은 하느님의 사람, 세례자 요한
2017년 나해 12월10일 대림 제2주일 (인권 주일 · 사회 교리 주간)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 마르 1,1-8
선 굵은 하느님의 사람, 세례자 요한
대림시기 자주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한 분이신 세례자 요한은
생각할수록 존경스럽고 멋진 사람입니다. 그분의 삶과 죽음은 묵상하면
할수록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이며 길게 여운을 남깁니다. 이번
대림시기를 보다 의미있게 지내고 싶은 분들, 세례자 요한의 말씀과
삶에 시선을 한번 집중해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으면 예수님 조차도 그를
지목하며 이렇게 평가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마태오 복음 11장 11절)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유다 민족의 깊은 영적 침체기에 예수님에 앞서
등장해 물로 세례를 베풀면서 강력한 회개와 쇄신운동을 펼침으로써
유다 땅 전역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선 굵은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에 대한 신빙성 있는 증언이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
살짝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다 분봉왕 헤로데
안티파스는 세례자 요한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추종자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바라보면서 큰 두려움에 휩싸였다고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추종 세력이 점점 커져 그가 한 마디만 하면 그들은
목숨까지도 바칠 태세였습니다. 지지 기반이 빈약했던 헤로데
안티파스는 당연히 세례자 요한을 여차하면 쿠테타를 일으켜 자신을
몰아낼 힘과 능력을 지닌 인물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찾아 요르단 강으로 찾아온 모든
유다인들에게 종래와는 완전 다른 새로운 세계 질서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그가 유다인들에게 선포한 새로운
희망에 대한 호소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엄청난 숫자의 유다인들이
그를 찾아와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시 로마 식민 치하의 힘겹고 암울하던 시대,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약속은 군중들의 엄청난 호응을 얻기에
충분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부자이든 빈자이든,
금수저든 흙수저든 다들 세례자 요한에게 몰려왔습니다. 나중에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신하마저도 세례자 요한에게 달려와 세례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이토록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세례자 요한이었지만
자신이 물러 날 때, 그분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나서실 때가 오자,
손꼽만큼의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깔끔하게 무대 뒤로 물러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초롱총롱한 눈으로, 존경과 흠모의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때, 지극히 겸손했던 세례자 요한, 자신에게
부여된 신원과 사명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외치며 뒤에 오시는 주님께 바톤을 넘겨드립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마르코 복음 1장 7~8절)
옛 시대(구약)와 새 시대(신약)의 분기점에서 새 시대가 동터 오르자
예수 그리스도를 새 시대의 구원자임을 공포하면서 자신의 죽음으로
옛 시대의 종언(終焉)을 고한 위대한 구약 시대 대예언자 세례자 요한을
많은 분들이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리더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솔직히 딱 깨놓고 보면,
그들은 봉사자요 종, 신하요 졸병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하는 행실을
보면 왕도 왕도 그런 왕이 다시 또 없습니다. 백성들의 봉사자요
일꾼으로 살겠다고 공언한 사람들이 실제로는 무소불의의 황제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이번 대림 시기 높이 높이 올라갔지만, 스스로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한없이 겸손했던 인물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이 주는 교훈을 깊이
되새겨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마르 1, 7)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나해 12월10일 대림 제2주일.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마르 1, 7)
삶의 가장 큰 기쁨은 언제나 사랑받고 존중받는 기쁨입니다.
존중하고 존중받는 관계가 얼마나
가치로운 관계인지를 새삼 깨닫게됩니다.
서로를 풍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세례자와 예수님을 통해 나아갈 길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서로를 용서하는 용서의 길입니다.
어리석은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거짓된 자아를 내려놓고
서로를 진심으로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인간 존중과 용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우리자신을 존중하고 우리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십니다.
인권 주일을 통해 우리의 인간성을
긍정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올바른 길은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요한 세례자처럼 내면의 울림을 듣고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자신을 내맡기는 은총의 대림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고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우리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새로운 삶은 인권의 근본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2017년 나해 12월10일 대림 제2주일 (인권 주일 · 사회 교리 주간)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 마르 1,1-8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낙태죄 폐지에 대한 반대 100만인 서명운동을
하기로 했습니다. 계기는 청와대 홈페이지에 낙태죄 폐지를 청원하는
사람들이 20만 명을 넘었고, 청와대는 답변하는 과정에서 낙태죄에
대한 새로운 균형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고 하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발언을 인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하게 잘못 인용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물론 역대 교황님들은 일관되게 낙태에
대해서 반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생명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말은 못 해도, 몸이 약해서 어머니의 몸에
의지해야 하지만 태아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모두 고귀한
것이고, 생명은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개선하는 것은 필요할 것입니다. 사랑의
행위에는 책임 또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 없이 타인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주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아서 잘 키울 수 있도록 제도적인
지원과 재정적인 지원이 함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상황을 개선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 낙태를 합법화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서품자 면담을 하면서 논문의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였습니다. 한
신학생은 논문의 주제가 죽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자신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신학교에 입학하기로
했는데 어머니께서 사실은 낙태할 뻔했다고 얘기해 주었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는 미안하다고 말씀을 하셨지만 신학생은 자신을 낳아주신
어머니가 무척 고마웠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논문도 사람이
죽음을 결정할 수 없다는 주제로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연중
제33주일을 ‘가난한 이들을 위한 주일’로 선포하셨고, 작년에는
‘자비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회칙을 통해서 교회는 약한 이, 가난한
이, 병든 이, 외로운 이, 억울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2014년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는 세월호 유족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얼마 전 고통 중에 있는 미얀마 로힝야 사람들을
만났을 때는 깊은 위로를 주셨고, 함께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늘 속에서 살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날씨는
추워지는데 노숙자들은 늘어간다고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인데
직장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늘어난다고 합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불법체류를 한다는 이유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질적으로는 넉넉하지만 영적으로 메말라서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죽는 사람, 너무 힘들어서 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꿈을 이야기 합니다. ‘골짜기는
메워지고, 산은 깎아져서 평평하게 되리라.’ 교만과 욕망의 산을 깎아서
겸손과 온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어둠과 절망 그리고
고통과 걱정은 희망과 사랑 그리고 나눔과 봉사로 메워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이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고,
세상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처럼 그런
꿈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서 이사야 예언자의 꿈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제 누군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런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이것이 언제가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우리의 행동입니다.
사회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 외국인 노동자들, 누군가가 도와주어야만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희망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들 모두가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모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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