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2월13일 수. [(홍)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수도회] 내 짐을 함께 져 주시는 주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40,25-31
† 복음 마태 11,28-30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그들이
짐을 내려놓고 쉬도록 부르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외면이나
내면의 짐을 지게 됩니다. 외면의 짐은 질병과 가난, 가족의 생계를
꾸리는 부담 등 외적인 결핍으로 생기지만 우리가 노력하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내면의 짐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성격의 차이,
마음의 황폐함과 강박감, 우울증 등 내적인 결핍으로 평생을 달고
다녀야 하는 어려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마음, 겸손한 마음이 인간의 멍에를 가볍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짐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짐의 강도는 달라집니다. 우리의 재산을 재벌과 같은 수준으로
놓고, 백세의 무병장수를 찾는다면 대다수의 사람은 매우 불행합니다.
우리 마음의 갈등과 고통을 이상 세계에 올려놓고 보면 우리는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는 평범한 일에도 감사하게 됩니다. 거룩한 신성을 감추시고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 살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는 행복한 추억을 많이 갖게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는 삶의 고통과
십자가를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지치지 않는 힘,
독수리처럼 하늘 높이 올라가는 생명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연약한
성녀 루치아 동정녀는 우리에게 그러한 삶을 보여 줍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을 제대로 알고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2017년 나해 12월13일 수.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0,25-31
복음
<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8-30
저는 인터넷 안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했습니다. 2001년부터 글을
쓰면서 활동했기 때문에 벌써 17년이라는 시간을 ‘빠다킹 신부’라는
이름으로 인터넷 안에서 산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인터넷 안에서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카페에는 16,000명이
넘는 사람이, 페이스북이나 밴드 그리고 카카오스토리 등의 SNS
사이트에서도 몇 천 명의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는데 이들과 과연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요? 솔직히 전혀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종종 E-mail을 통한 상담을 청하십니다. 처음에는 이에 대한 답변도
해드리면서 도움을 드리려고 했지만, 상담이 메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상담은 서로 마주 앉아 주고받는 대화가 있어야
하는데, 메일은 한쪽의 일방적인 말을 듣고 저 역시 일방적인 대답을
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요즘에는 메일을 확인조차 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고 채팅 창을 열어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지요.
성지에서 미사를 마치고 가시는 분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어떤 분께서
제게 “신부님, 제가 신부님 글을 15년째 보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이 분을 알고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15년이면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닌데도 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런 부분들이 참으로 아쉬운 부분입니다. 많은 연결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정작 전혀 알지 못하는 혼돈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예전의 박해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또한 정보의 홍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약간의 검색만으로도 주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넘쳐납니다. 그런데 얼마나 주님을 알고 있을까요? 단순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일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라는 위로의 말씀을 해주십니다. 분명히 우리와 주님은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주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커다란 힘이
되는 분들이 많지 않다고 합니다. 연결되어만 있을 뿐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연결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일방적인 연결만으로는
절대로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 삶에서 커다란 위로와 힘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제대로 알고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분의 말씀을 삶 안에서 실천하면서 진정한 연결의
관계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렵고 힘든 세상 안에서 위로와
평화의 한 줄기 빛으로 오시는 주님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한 개의 촛불로서 많은 촛불에 불을 붙여도 처음의 촛불의 빛은
약해지지 않는다.(탈무드)
루치아 동정 순교자.
너 자신을 알라.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 많은 말을 합니다. 그런데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너무나 어색해 하는 것 같습니다. 내 자랑을 늘어놓는 것은
아닌지, 자기 PR 시대라고는 하는데 나를 숨기는 것은 아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당황스러워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내
자신이 어떤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한 번은 친한 친구가 제게 이렇게 묻더군요.
“나는 어떤 사람이야? 내 장점이 뭐 인 것 같아?”
“너에 대해 왜 내게 물어보니? 네가 너를 모르면 누가 너를 알아?”
이 친구는 솔직히 자기가 어떠한 지를 잘 모르겠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남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이 친구의
행동이 조금 이해가 됩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다는
것을 저 역시 종종 깨닫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지만, 이는 가장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런데 이렇게
내 자신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잘 아는 것처럼 판단하고 단죄할
수가 있을까요?
오늘은 의정부교구 화정동 성당에서 두번째 대림 특강이 있습니다.
어제 강의를 했던 청주 금천동 성당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내 짐을 함께 져 주시는 주님 - 기 경호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나해 12월13일 대림 제2주간 수, 마태 11,28-30
“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내 짐을 함께 져주시는 주님
이사야 예언자는 유배의 시련과 고통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주님께서는 “능력이 크시고 권능이
막강하시어”(이사 40,26),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으며,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40,28-29)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가고,
뛰어도 지칠 줄 모르며,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 40,31) 이처럼
이사야는 비참한 유배생활에서 해방시켜주시고 빛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선포합니다. 주님을 굳건히 믿고 그분께 다가감으로써
고난과 역경 중에도 안식을 얻을 수 있음을 알려준 것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져주시러 오신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이르십니다. "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11,28) 예수
시대에 사랑의 법은 율법은 인간을 구속하는 ‘무거운 짐’이
되어버렸습니다. 짐을 덜어주어야 할 율법과 종교지도자들이 오히려
짐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들의 탐욕과 교만은 차별과 소외를
조장하는 잘못된 법과 제도를 만들어냈습니다.
백성들은 각자의 무거운 짐에 더해 이러한 굴레들로 더욱 짓눌렸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실존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 나에게로
오너라”(11,28) 하십니다. 당신에게 오기만 하면 그 짐을 ‘함께’
져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선물하러
오신 사랑이십니다. 따라서 그분께 다가간다는 것은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이신 예수님께 다가가서 함께함이 곧 ‘안식’(11,28. 29)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는 수많은 고통과 시련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그 무게를 견뎌내고 인생의 짐을 질 수 있는 힘은 나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짐을 질 때 인생 십자가의
무게는 훨씬 가벼워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신 분께서 사랑으로
내 십자가를 함께 져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11,29)
우리는 ‘하느님의 법’(예레 2,20; 호세 10,11)인 멍에를 짐으로써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따라서 주님의 제자인 우리는 멍에를 피하려고 하지
말아야겠지요. 오히려 말씀을 실행하고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어떤 처지에서도 우리의 힘과 희망이 되어주시는 주님을
굳게 믿어야겠습니다. 그 믿음의 바탕 위에서 삶의 십자가를 지고
사랑이신 분 앞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받아들여
감당해야 할 멍에를 회피해선 안 되겠지요. 매순간 주어지는 신앙의
멍에, 고통의 멍에, 절망과 불의의 멍에를 유연한 사고, 열린 마음,
관대한 태도, 사랑으로 견뎌냄으로써 행복의 길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노인은 짐이나 문제가 아니라 아주 풍요로운 자원입니다!
2017년 나해 12월13일 수.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 마태 11,28-30
노인은 짐이나 문제가 아니라 아주 풍요로운 자원입니다!
한국 사회의 노령화 현상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그에 따른 많은
어르신들의 고통도 점점 커져만 갑니다. 잘 준비되지 않은 노년기로
인한 괴로움은 당장 저희가 모시고 있는 원로 회원들, 그리고
부모친지들의 모습만 봐도 잘 알수 있습니다.
어르신들이 푸념삼아 툭툭 던지시는 말씀이 늘 마음에 걸립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왜 빨리 데려가지 않으시는지? 지금 이렇게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럴때 마다, ‘절대 그런 말씀 하지 마시라, 모든 것에 때가 있다, 마음
크게 잡수시고, 보속이라 생각하시라.’ 당부드려도, 그도 잠시, 어느 새
똑같은 말씀들을 수시로 반복하십니다.
사회 뿐만 아니라 교회, 수도회와 수녀회들도 노령화로 인한 다양한
도전들이 만만치 않기에, 나름 대처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하고 계십니다.
최근 살레시오 수녀회 양성부에서는 수도자들의 노년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살것인가에 대한 오랜 연구 끝에,
참으로 의미있는 결과물을 도출했습니다. ‘한 세대가 다른 세대에게
이야기를 전하다’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발간했는데, 노년기
수도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노인은 짐이나 문제가 아니라 아주 풍요로운 자원입니다. 노년기는
인간 실존을 냉혹하게 표현하는 인생의 종착점이 아니라, 집중적으로
살아야 할 단계이며, 영적 성장을 위한 좋은 시기요, 기회로 여기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살아온 대로 늙어갑니다. 성숙하고
충만하고 행복한 노년기는 젊은 시절부터 준비해가야 합니다.”
“노년기를 원의와 욕구가 충족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하게 사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십시오. 노인들은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의 현존을 가치화 하십시오. 점점 없어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보다, 더 중요한 것, 불변하고 결정적인 가치들과 임무를
간직하면서, 자신의 품위를 새롭게 하는 능력을 기르십시오.”
“노인들의 마지막 적은 고통이나 병고, 혹은 장애가 아닙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의미의 부재입니다. 노인들에게 진정 두려운 것은 자신이
쓸모 없는 사람, 보탬이 되지 않는 사람, 의미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자각입니다.
보십시오. 노년기는 기울어져 가는 시기, 소멸되어 가는 시기가 절대로
아닙니다. 노년기에 접어들었을 때, 자주 우리가 느끼는 유혹, 삶이
짐이요, 족쇄요, 고통으로 느껴질 때 마다, 더 집중적으로 노력할
측면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삶, 인생에 대한 적극적인 의미
추구입니다.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모든
날들, 모든 순간들은 단 한 순간도 예외없이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꼭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겠습니다. 내 삶은
소중하다는 것, 내 인생은 가치가 있다는 것, 나는 존재 자체로
존귀하다는 것.
그래서 중요한 것이 신앙 안에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주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자녀임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양 어깨에 짊어져야 할 가장 크고 무거운
멍에 노년과 죽음, 생각할수록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 안에 머무를 때, 그 무거운 멍에도 잠자리나 나비
날개처럼 가벼워질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 28)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나해 12월13일 수.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 28)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것은 분명 봉헌입니다.
소중한 삶을 소중하게 하는 것은 소중한 봉헌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봉헌에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안식또한 우리의 봉헌입니다.
우리를 다시 살리고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또한 봉헌입니다.
빛이란 다름아닌 빛이신 주님께 우리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의탁함으로 진정한 생명의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깊이 사랑한 사람만이 삶의 전부를 봉헌합니다.
성녀 루치아는 가장 깨끗한 사랑의 마음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야하는 사랑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삶또한 성녀 루치아처럼 맑은 봉헌이길 기도드립니다.
매순간 봉헌이 되십시오.
봉헌이 참된 빛이며 봉헌이 진정한 안식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원] 구속된 자유?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나해 12월13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11,28-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28절) 하느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는 데, 힘이 들고,
허덕인다는 것은 참으로 알아듣기 힘든 모습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평화와 기쁨을 주시는 분인데 그분 때문에 불편해진다든지
어려워진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인의 삶을 벗어난 것임이 틀림없다.
이는 율법에 매여 그 참 뜻을 알지 못하고 허덕이는 사람들을 말한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멍에를 멜 힘조차 없는 지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악마에게 시달리며 무거운 짐을 지고 무수한 죄에 억눌린
우상 숭배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29절) 우리는 그분에게서 기적을 일으키거나 죽은 이를 되살리는
법을 배울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29절)한 것을
배우라고 하신다.
높이 올라가려면 밑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건물을 세우려면 터부터
닦아야 한다. 건물이 높으면 높을수록 터를 더 깊게 파야 한다. 건물을
세우려면 먼저 기초를 닦기 위해 아주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분의
겸손을 배울 때, 그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벼워진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는 ‘그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하셨을까?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좁은 길이다. 그러나 잘 배운 이들에게는 그 계명이
가볍다.
설사 잠시 동안 육체적 고통이 따른다 해도, 지금 희망 안에 양육되고
있는 사람은 그 고통을 쉽게 견디어 내는 신심이 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어렵게 보이는 것을
요구하시는가? 이것이 어렵게 보이는 것은 그 멍에를 메고 그분의
말씀을 믿는다면 얼마나 편하고 가벼운 짐인지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분의 짐은 관습과 규정이 아니라, 영혼의 결심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원하고 좋은 날들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정과
악의의 멍에를 벗어버려야 한다. 모든 악덕의 불쏘시개인 부정이라는
멍에를 벗어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편하고 가벼운 멍에를 멜 수
없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힘들다고 여기는 것은 세상에 물든 마음으로
하늘의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아직 그리스도께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짐 진 이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참으로
기분 좋은 무게임을 알려주시는 말씀이다. 세상의 주인들의 짐은
힘을 점점 더 빠지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그 짐을 진 이들을
오히려 도와준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며,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라고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주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도록 하자.
- 수원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2017년 나해 12월13일 수.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 마태 11,28-30
어린아이에게 칼을 주면 위험하기 때문에 어른들은 어린아이에게는
칼을 주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는 칼의 용도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칼은 잘 쓰면 유용한 도구가 됩니다. 과일을 깎을 수도 있고, 요리에는
꼭 필요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칼은 날카로움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잘못 다루면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불도 비슷합니다. 잘 사용하면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기도 하고, 음식을 할 때는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불 역시 잘못 다루면 화상을 입을 수도 있고, 화재로 많은
피해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용법을 잘 알고, 위험을 알아야
합니다.
군사적, 경제적으로 가장 강한 나라의 대통령이 연일 뉴스에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는 권력이라는 칼과 권력이라는 불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마구잡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가 권력이라는 칼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뉴스에 보도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권력이라는 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약간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상식과 원칙에 벗어난 그의 말과 행동은 마치 불가에서
화약을 가지고 노는 것 같아서 누군가는 꼭 말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나라에도 깨어 있는 시민들의 힘이 있어서 잘못된 칼춤을 추는
사람을 자리에서 내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우리는 위로와 평화를 주는 성경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유배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와 안식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지내고 있지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는다면, 주님께서는 우리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주실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새로운 나라에서는 높은 산은 평평해지고, 골짜기는
메워질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온갖 편견과 차별은 사라질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세대 간의 갈등도, 계층 간의 대립도, 신분의 벽도,
이념의 틀도 깨질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마치 사막에 꽃이 피듯이
희망과 기쁨이 샘솟을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권력이라는
칼과 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 위에서 드러난다고 이야기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안식을
주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가볍습니다.” 정말 듣기만 하여도 감사하고 행복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으셨지만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참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간다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삶의 기준을 ‘하느님의 영광’으로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은총이요, 모든
것이 축복입니다. 십자가도, 부활의 영광도 다 축복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 죽음을 넘어서지 않는 부활은 없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이렇게
노래를 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고달픈 삶의 여정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나해 12월13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마태11,28-30)
고달픈 삶의 여정
몸은 고달프고 힘이 들지만 본연의 일을 하고 있으면 기쁩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일이 되면 무거운 짐이요,
멍에가 될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 꼭 해야 할 일을 즐기면서
기쁘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11,28)고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무거운 짐과 멍에를 메고 괴로워했습니다. 무엇보다 억눌리고 고된
가난의 생활이 짐이 되고 힘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수많은
규정을 지켜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지키기만 하면 살
수 있는 구원과 생명을 위해 주어졌던 율법(에제키엘 20,13)을
율법학자들은 수백 가지의 특수한 규정을 만들어 견딜 수 없는 짐이
되게 하였습니다. 법을 만든 그들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율법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11,28).
하시며 산상 설교를 통해 참된 행복과 율법(마태5장-7장)을 철저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법에 사람을 맞추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위한 법을 확인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으로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1요한5,3).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의 모습으로 겸손하게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며 스스로 모든
이의 종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주어진 짐이요, 멍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스스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기꺼이
받아들이셨기에 편한 멍에요, 가벼운 짐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은 결코 넉넉한 삶의 편안함에서 오는
무사태평함이나 악과 공존하기 위해 놓여 진 안일한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여정도 고달픔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삶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면 내적인 평화와 기쁨,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사실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로마13,10). 주님의 계명을 준수하고 계명의 의미를 살려고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예수님의 멍에는 위로의 원천이 되고 인간적인
욕심을 포기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세속의 멍에를 벗고 예수님의
멍에를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게 하고 주님의 법은 참되어
어수룩한 이를 슬기롭게 하네. 주님의 규정은 올발라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은 맑아서 눈에 빛을 주네’(시편19,8-9). 고달픈
삶의 여정 안에서도 주님의 멍에를,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짐을
기꺼이 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홍해를 없에러 오신
것이 아니라 함께 도행하십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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