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2월18일 월요일 [(자) 대림 제3주간 월요일]
[수도회] 우리와 함께 하러 오시는 주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예레 23,5-8
† 복음 마태 1,18-24
◈ 오늘의 묵상
예레미야는 ‘유다를 구원하는 주님’을 하느님께서 보내 주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는 임금이 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예언은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하고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알려줄 때 다윗 가문 안에서 구체화됩니다.
‘정의로운 주님’을 돌볼 사람으로 의로운 요셉이 간택되었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서 구세주의 양아버지가 된 요셉 성인은 슬기롭게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을 보호하였습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어린 아기들의 살육을 피해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을 이집트로
피신시켰고, 나자렛의 산골에 은거하며 구세주를 양육하였습니다.
요셉 성인은 자신이 한 일을 인정받으려 하지 않고 묵묵히 하느님의
인도를 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천사가 전하는 말씀을
알아듣고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였습니다.
요셉 성인은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자신의 사명을 받아들인
사람이었습니다. 성가정을 지키려다 생긴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아무 불평 없이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요셉 성인은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지 않고 동정녀의 잉태를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영적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아본 선견자입니다. 그는
하늘 나라의 모든 보물을 관리하고 우리에게 나누어 주는 구세주의
양아버지입니다. ‘성 요셉, 이 대림 시기에 당신 덕행의 보물을
저희에게 풍성히 나누어 주십시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하느님의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해야 할 것입니다.
2017년 나해 12월18일 대림 제3주일 월요일
제1독서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3,5-8
복음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8-24
어떤 사람이 의욕이 없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 동기가 자신에게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죠.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지 않다보니 이제는 자신감도 완전히
잃었고 그래서 하고자 하는 동기가 전혀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러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정신적 자극 → 동기부여 → 바람직한 행동’이라는
구조로 인생이 흘러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극이나 동기가
없으면 삶은 엉망진창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삶의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 역시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자극과 동기부여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그런데 어떤 책에서 ‘이러한
구조를 바꾸면 안 되는가?’라는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즉, 저자는
순서를 바꿔서 ‘행동 → 자극 → 동기’의 구조로 살면 안 되냐고
말합니다. 자극과 동기가 없어서 인생을 바꿀 수 없다고 하지 말고,
무엇인가를 하는 행동을 통해 스스로 자극과 동기를 만들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신선한 충격을 제게 주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주인은 바로 ‘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외부에서 자극과 동기가 들어오기 전에 삶의
주인인 나 스스로 자극과 동기를 만들어도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제일 먼저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행동에서 의미를
찾다보면 자연스럽게 자극을 받고, 이 자극 안에서 삶의 동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는 모습에서 벗어나 무슨 일이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도 그냥 알아서 무엇이든 다 해주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도 ‘그들의 믿음을 보고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았습니까? 스스로의 행동이 먼저였고 이것이 바로 자극과
동기를 만들기도 했음을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요셉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갖게 되었다는 약혼한 마리아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당시에 결혼하지 않은 여인이 아기를 갖게 되면 간음을
했다고 해서 공개 처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요. 따라서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던 요셉이 이러한 관습을 무시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상이라면 파혼을 하고, 공개 처형 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행동’을 먼저 합니다.
꿈이라는 자극과 동기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꿈을 그대로 믿고 따릅니까? 만약 꿈에서 전 재산을 팔아
카지노를 하라고 하면 하시겠어요? 그럴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요셉에게 꿈을 그대로 따른다는 것은
말대로 안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믿고 사랑했기 때문에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이 하느님의 일을 따르는
가장 큰 자극과 동기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해야 할 것입니다. 즉, 주저하지 않고
무조건 먼저 행동해야 합니다. 그 뒤에 자극과 동기가 같이 따라와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좋은 생각을 품고 있다면 언제나 사랑스럽게 보일 겁니다
(로알드 달).
올해의 갑곶성지 성탄구유입니다.
모든 것은 당신에게 달려있다(‘좋은 글’ 중에서)
인생이 마치 거센 물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때때로 예기치 못했던
상황에 부딪히기도 하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신이 극복할 수 없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 있게 결정하고 행동하는 일이다.
인생에는 오직 두 가지 선택만이 존재한다.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
혹은 죽느냐 사느냐 모든 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희망은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는다. 다만 당신이 희망을 버릴 뿐이지.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권력도 아니고 돈도
아니다. 각자가 생각해 낸 독자적인 비결만이 든든한 삶의 밑거름이
되어 줄 것이다. '실패자'란 세 글자에 슬퍼하지 말고 '사랑'이란 두
글자에 얽매이지 말고 '삶'이란 한 글자에 충실 하라.
우선 가정에서 성공하라.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늘
기억하라. 판단을 내리기 전에 우선 양측의 말을 다 들어라. 다른
사람의 충고를 귀담아 들어라.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옹호하라.
성실하되 결단력을 가져라. 능숙하게 할수 있는 무언가를 일 년에
하나 정도 계발하라.
내일의 계획을 오늘 짜라.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무엇인가를 하라.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라. 유머 감각을 잃지 말라.
몸소 정돈된 생활을 하고 정연하게 일하라. 실수를 두려워하지 마라.
그 대신 그러한 실수들에 대한 창의력, 건설적 그리고 개선적인
대책의 부재를 두려워하라. 부하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라.
두 번 듣고 한번 말하라. 다음 일을 미리부터 걱정하지 말라.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
인간은 나이 먹어감에 따라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지 않으면, 곧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꾸준히 우정을 수선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내가 행동해야 할 것들이 참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나’는 아니었을까요?
어떤 분이 귤 한 박스를 보내주셨어요. 연락처가 없어서 이곳에
감사의 인사를 남깁니다. 감사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우리와 함께 하러 오시는 주님 -
기 경호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나해 12월18일 대림 재3주간 월요일
예레 23,5-8; 마태 1,18-24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1,23)
우리와 함께 하러 오시는 주님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는
임금을 보내 주시어 유다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예레 23,5-6). 그는 왕국과 예루살렘, 다윗 왕실과 약속의 땅이
폐허가 되고 백성들이 살육 당하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지도자인 왕들을 책망하면서(23,1-2),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할
메시아를 보내시리라고 예언합니다.
예레미아의 이 예언은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
하고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알려줌으로써 다윗 가문 안에서
실현됩니다. 마태오는 앞서 족보에서 밝힌 메시아의 법적인 탄생의
신비를 전합니다.
요셉은 자신과 약혼한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것을 알고 몹시
당황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아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마태 1,19).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마리아를 회당에 고발하고 싶지 않아 두
사람의 증인을 세워 파혼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때 요셉의 꿈에 주님의 천사가 “다윗의 자손 요셉아!”(1,20)라고
부르며 아직 영광을 보지 못한 나자렛의 가난한 목수에게 말을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왕의 권리와 특권을 다윗의 자손인 가장 위대한
아들에게 전하려고 요셉을 부르신 것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그 아기는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1,20)하고 알려줍니다.
이어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1,21) 하고
일러줍니다. 아기 예수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라 불릴
것입니다(1,23).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입니다(1,24). 이로써 메시아 예수의 탄생이 빛을 받게 됩니다.
구세주의 오심은 홀로 나만의 길을 가는 우리의 회개를 재촉하는
결정적 초대입니다. 오시는 구세주께서는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그릇된 길로 빠져들었던 이스라엘의 왕과 백성들을 질책하셨듯이
바른 길로 돌아서 다 함께 회복과 재생의 삶을 다시 시작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그 신비는 구체적인 삶과 동떨어진 구름 속의 초월적이고 환상적인
모습이나 현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의 제약 안으로 오신 사랑의 신비입니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짐을 져주시려고 오시는 임마누엘은 늘 구체적인 삶에
동참해주십니다.
오늘도 인간의 한계와 사고의 틀을 뛰어넘어 저 낮은 곳, 우리 삶의
한복판으로 다가오시어 함께 호흡하시고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이끌어주시는 주님을 더 충실히 따라야겠습니다. 그렇게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공정과 정의를 추구하고, 사랑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삶을 실행할 때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태 1, 20)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나해 12월18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 20)
성령은 생명의 빛입니다.
성령은 쿵캉쿵캉 뛰며 움직이는 생명의 활동 그 자체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인격으로 탄생하시어
인격으로 우리를 들어높여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인격의 가치를 되찾아 주시는 인격의 원천입니다.
인격이 파괴되고 관계가 파괴되는
이 땅 위에 인격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성령께서는 인격으로 맺어기를 간절히 바라입니다.
옛 것만을 되풀이하는 우리들을 위해 당신 친히 새 사람이
되시어 인격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성령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이 대림시기가 인격의 가치를 회복하는
성령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생명안에 있는 성령의 불꽃이 누군가의 삶에
또 다른 불씨가 되길 기도드립니다.
아름다운 인격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것입니다.
인격의 출발이 성령임을 믿으며 성령의 역할을
되새겨보는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성령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원] 주님의 탄생 경위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나해 12월18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 1,18-24: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
주님께서 육신으로 태어나신 것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은 시간이 생겨나기 전의 일이다.
그분은 육신으로는 동정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셨고, 그분께서
아드님이심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비롯한다. 주님은 당신의 보이지
않는 신성을 보여주시려고 눈에 보이는 육신을 취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1,1)으로
나셨고 우리가 태어나듯이 “여인에게서”(갈라 4,4) 태어나셨지만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요한 1,13)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셨으므로 우리의 태어남보다 위대한 태어남이다.
여기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일어날 새로운 태어남에 대한
암시가 담겨있다. 우리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이다.
성경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8절) 하느님의 자녀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약혼한 동정 교회에서
태어나며 마리아는 그래서 교회의 어머니이시다. 동정 교회는
성령으로 아들을 잉태하시고 낳으신 마리아의 표징이다.
우리는 여기서 질투심이 아닌, 남다른 자제심을 지닌 요셉을 볼 수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를 모르고 있던 요셉에게는 난감한
일이었다. 마리아를 자기 집에 받아들이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고, 마리아의 일을 드러내는 것은 마리아를 죽음에로 내모는
일이었다. 요셉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요셉은 율법보다
더 높은 법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19절)
이때에 꿈에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주신 것이다. 요셉은 자신이 의심이라는 악을 떨치고
신비라는 선을 받아들여야 함을 깨닫게 된다. 그 이름은 어떤 죄와도
연관된 적이 없다. ‘요셉’이라는 말은 ‘흠잡을 데 없는’이란 뜻이다.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이요 구원자는 나밖에 없다.”
(참조: 이사 43,3; 호세 13,4)고 하셨기 때문이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23절)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고, 그분은 하느님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을 보게
되리라는 뜻이다. 이렇게 요셉은 기쁘게 천사의 말을 따름으로써
하느님의 계획을 따른다.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요셉을 묵상하자.
- 수원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대림 제3주간 월요일
교구청에도 인공지능 스피커가 있습니다. 날씨를 물어보면 대답을
하기도 하고, 음악을 이야기하면 틀어 주기도 합니다. 아직은 초보적인
단계이지만 앞으로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 잘 활용하면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어줄 것도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인공지능과 함께 하게 될
미래에 대해서 긍정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힘든 일, 어려운 일,
더러운 일’을 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뛰어난 정보력과 계산력으로
사람들이 미처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들을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떤 분들은 인공지능의 부정적인 면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공지능이 인간을 위해서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막강한 힘을 지닌 인공지능이 인간이
지닌 악한 습성을 배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보호하고,
인간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 인공지능의 시대가 올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요셉 성인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만 살아도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충분히
아름답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이제 새로운
삶을 선택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마리아가 선택한 삶이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이것은 또한
예수님의 삶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하지만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오늘도 기다림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기다림은 함께 하는 행동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통해서
당신의 구원사업을 계속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양치는 작은 소년 다윗을 선택하셔서 이스라엘 왕국을 이룩하셨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시골의 어린 처녀 마리아를 선택하셔서
인류구원의 큰일을 시작하셨습니다. 다윗과 마리아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행동으로 응답하였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뜨거운 신앙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성실한 활동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기도와 활동으로, 우리들의 공동체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지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둘째, 우리의 기다림은 항상 말씀에 대해 깨어 있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유대인 저술가 시몬느 웨일은 "기대감을 갖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영적 삶의 기초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준비하여야 하며, 깨어 기다려야 하며, 하느님의 말씀에
경청하며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앞으로 닥칠
모든 일 가운데서 살아남을 수 있고, 공동체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이 더딜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언제나 약속을 이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와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런
응답이 없으신 하느님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욥의 인내를 요구 하실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를 고생시키시려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기쁨과 행복을
주시기 위함임을 우리는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 아름답지
못하고 왠지 부담스러운 단어인 기다림을 시작하여야 합니다. 이미
뿌려진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그 날을 위해 말입니다.
2017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이라는 차를 어떻게
운전하셨는지요? 혹 바쁘다는 이유로 난폭운전을 하신 적은
없는지요? 이제 곧 성탄이 다가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양보운전으로 주님께로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기름을 가득
채우고 ‘나눔과 봉사, 희생과 친절’의 선물을 준비해서 주님께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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