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월5일 [(백) 주님 공현 전 금요일]
[수도회] 영의 눈을 떠가는 여정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요한 3,11-21
† 복음 요한 1,43-51
◈ 오늘의 묵상
예수님을 구약에 예언된 예언자로 알아본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자신의 체험을 전했을 때, 나타나엘은 편견의 늪에 갇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고 반문합니다. 필립보는 자신이
체험한 것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라고 말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던
모습을 눈여겨보셨고 그의 흠 없는 인품을 알아보십니다. 자신의 내면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죄스러움을 가졌지만,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더 나아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한 사람의 진면목을 알아보려면 내 안에 편견과 선입견이 없어야
합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이 상대방과
공감할 수 없도록 벽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도 아벨과 비교당한 속상함을 넘어, 하느님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자기 편견에 사로잡혀 미움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우리
안에 미움과 분노가 커지면, 상상으로나 말이나 글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며 살게 되는지 되돌아보면 압니다.
요한 사도는 사랑은 자신뿐만 아니라 내 형제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는 힘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혹시 지금
내가 미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음의 고통
속에서 용서와 자비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 앞에 숨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2018년 나해 1월5일 주님 공현 전 금요일
제1독서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3,11-21
복음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3-51
어떤 드라마에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부부싸움을 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랍니다. 그만큼 결혼생활을 하면서
부부싸움을 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을 했고, 이 사랑의 관계 안에서도 상처를 서로
주고받는다는 것이지요. 이 정도로 상처는 우리의 삶 안에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내 자신을 먼저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내 자신을 먼저 바라보기보다 남을 먼저 바라봅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취약함을 드러내서 공격받지 않으려고, 반대로 상대방의 모습을
판단하는데 열중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부족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저는 당신을 해치지 않습니다.’는 표시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집니다. 여기에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표현을 상대방에게 한다면 어떨까요? 더욱 더 나를 향해 마음을
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내가 상처를 받지 않는 방법은 나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환히
드러내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따뜻하게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 역시 부족한 부분을 숨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숨겨봐야
별 이득이 없음을 삶 안에서 자주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족한
부분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가까이 와서 도와줍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아닌데 어떻게 모든 것을 다 잘 할 수 있습니까?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이에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면서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을 내리지요. 예수님 출신이 나자렛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분명히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부정적인 판단으로 깎아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정반대였습니다. 그가 무화과나무에 있는 것을 미리 볼 정도로
모든 것을 알고 계심에도 오히려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라면서 칭찬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께 고백하지요.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주님 앞에 숨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으며, 주님을
통해 큰 은총과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처럼 그
안에서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자기의 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영웅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진실하게 수행하며 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영웅입니다(헤르만 헤세).
바르톨로메오라고 알고 있는 나타나엘.
그 손은 아름다운 손입니다(‘좋은 글’)
넘어진 친구를 위해 내미는 손 그 손은 아름다운 손입니다.
외로움에 허덕이는 사람을 위해 편지를 쓰는 손 그 손은 아름다운
손입니다.
하루 종일 수고한 아버지의 어깨를 주무르는 손 그 손은 아름다운
손입니다.
낙망하고 좌절한 이에게 내미는 격려의 손 그 손은 아름다운 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는 손 그 손은 아름다운 손입니다.
나 아닌 남을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손 그 손은 아름다운 손입니다.
아름다운 손 그 손은 지금 당신에게 있습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손 그 손을 더 아름답게.....
여러분의 손은 어떤 손이신가요? 지금 내 손을 한 번 바라보세요.
아름다운 손으로 쓰이고 있는지를.....
예전에 송도유원지로 유명했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자동차만 모여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영의 눈을 떠가는 여정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1월5일 주님 공현 전 금, 요한 1,43-51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요한 1,49)
영의 눈을 떠가는 여정
오늘 복음은 우리의 영적 여정을 알려줍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가
부르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습니다(요한 1,48). 예수님 시대에
율법교사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성경공부에 몰두하곤 하였습니다.
영적 여정에서 하느님 앞에 자신을 두고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야말로
그 어떤 만남이나 경험과 지식에 앞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필립보가 성경공부를 하고 있던 나타나엘을 만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 곧 메시아를 만난 사실을 말해줍니다
(1,45).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그분을 따라나선 필립보가 자신이 체험한
구세주에 관한 지혜를 그에게 나누어준 것입니다. 이렇듯 구원의 진리와
영적 보물은 다른 이들을 통해서도 전해집니다.
그런데 나타나엘은 성경말씀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음에도,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1,46) 하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입니다.
조건 없이 곧바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필립보와 달리 그는 아직
영의 눈을 뜨지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필립보는 여전히 보잘것없는 작은 마을 나자렛에 머물러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라”(1,46)고 권유합니다. 그의
권유는 단지 감각을 통해서 확인하라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필립보는 나타나엘을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로 인도한 것입니다. 그는
나타나엘이 지식과 경험의 한계를 깨고 영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이끈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을 보고,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1,47)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시자
그는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1,49) 하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이 ‘있었던 본래의 자리' 곧 본모습을
상기시켜주시자 이 놀라운 고백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나타나엘은
말씀을 통해 하느님과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의식하고, 또 자신이
걸어야 할 삶의 방향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이렇듯 주님께서는 내
삶의 시작과 살아가는 여정,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나를
지켜보시며 알고 계십니다.
나타나엘이 처음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한 채 나자렛에
머물렀던 것은 바로 이 점을 기억하지 못해서였을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 자신 안에서 꿈틀거리는 사고의 틀과 타성, 그리고
욕망들에 잠시 눈이 멀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 모든 걸림돌이 사라지자 그는 구세주를 알아보고
고백합니다.
우리 모두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 곁에 머물고,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또한 필립보처럼 내가 체험하고 만난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다른 이들과 나눠야 할 것입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할 때”(1요한 3,18) 생명으로
건너갈 수 있겠지요. 나아가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시고 함께
하시는 주님을 기억할 때 “앞으로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요한 1,50)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와서 보시오/전삼용 요셉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1월5일 주님 공현 전 금요일 요한 1,43-51
“와서 보시오.”
안 믿는 사람에게 성당에 한 번 나와 보라고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예, 저는 마음속으로는 다 믿어요. 어려울 땐 기도도 하고 그래요.
혹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꼭 천주교에 나갈 거예요.”
이 분의 말은 긍정적으로는 들리지만, 사실 현재로서는 신앙을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부정의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절대 혼자서는 가질
수 없고 증가시킬 수도 없습니다.
제가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어머니께서 억지로라도 성당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헌금하라고 준 돈으로 오락실에 갔다가 시간을
때우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그것이 어머니께 발각되자 다음에는 일찍
가서 주보만 가지고 오락실 가서 시간을 때웠습니다.
그것마저 들켜버리자 하는 수 없이 미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아는 친구들도 없었고, 그래서 형과
같이 갔는데 둘이 미사시간에 떠들다가 모든 신자들이 보는 앞에서
신부님께 자랑스럽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우리 둘은 집으로 돌아오며
결심했습니다.
‘다음부턴 절대 성당 나오지 말자.’
그러나 어머니가 주시는 밥을 먹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성당에
다녀가야 했고, 그렇게 세례를 받고, 첫 영성체를 하고, 중고등학교
때도 주일미사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무슨 대단한 강론을 들은 것도
아니었지만 나 자신도 모르게 신앙이 자라났습니다.
대학 시험을 마치고 철야기도회에 어머니 손에 끌려갔을 때 보았던
것들은 정말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들이 손짓 하나에 주저앉고
하느님 나라의 음악소리를 듣고 저절로 감탄의 소리를 질렀으며
성모님이 선물하시는 꽃향기를 맡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핏덩이를
토하며 병이 치유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성령님에 이끌려 일어나서 성경을 히브리어로 말하고 다른
사람은 그 구절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했습니다. 성령님이 직접 하시는
말씀을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기도회는 그 이후로 어디에서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대학 들어가서는 주일학교 교사를 하였습니다. 성당에 있는 것이 좋아서
다른 많은 단체에 가입했고, 거의 매일 성당에 와서 살았습니다.
성당에 더 자주 오니 신앙에 관한 더 많은 것들을 접하게 되었고
그러니 신앙도 나 자신도 모르게 커져갔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며 한 아이가 떠들기에 미사 중에 불러내서 그냥
집에 가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냥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가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사실 많은 기도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진실 되게 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기도를 마치자마자 머리를 들어보았는데 그 아이가
제 옆에 서서 용서해 달라고 사과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빨리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처음이었고, 그 이후로 기도의
힘을 의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무실에서 우연찮게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라는
열권짜리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5년 만에 다 읽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제가 되고나니 하느님의 섭리였던 것을 알았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억지로라도 성당에 나오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와야 볼 수 있습니다. 봐야 믿을 수 있습니다.
나타나엘도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어야 하고 그래서 베틀레헴에서 태어나야 하고,
예루살렘, 혹은 적어도 유다지방에서 나와야합니다.
그런데 필립보가 증언하는 메시아는 갈릴레아 지방의 나자렛
사람입니다. 필립보는 그를 자신의 믿음으로 설득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요한과 안드레아에게 하신 말씀처럼, 그저 “와서
보시오.”라고 초대할 뿐입니다. 필립보는 데리고 오기만 하면 믿음은
예수님께서 책임지실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행히 나타나엘은 그 분을 직접 눈으로 보기위해 필립보를
따라나섭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나타나엘을 보시며 이렇게
외치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은 자신을 어떻게 아시느냐고 묻습니다. 안다는 말은 이미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관심이 없다면 더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역시 예수님께서도 그를 알기 위해 그를 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랑한다’는 것과 ‘머무른다’는 것, 또 ‘안다’는 것과
‘와서 본다’는 것이 요한복음에서는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타나엘은 이미 자신을 보아서 아시고, 그래서 그 마음 안에 기억하고
사랑하시는 분이 메시아가 아닐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말을 듣고도 예수님을 직접 보기 위해 길을 나서지
않았다면 이런 신앙을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신앙을 주시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어, 나타나엘에게 더 많은 것들을 보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믿음은 끊임없이 보아가며 커지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와서 보지 않으면 신앙은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당에 오기
위한 노력만 있다면 자신도 모르게 보게 될 것이고 믿게 될 것이며 또
믿는 이들에겐 그 신앙이 커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와서 보아라.”하시며 초대하고 있습니다.
남은 것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 분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오기만 하면 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주님 공현 전 금요일
2018년 나해 1월5일 주님 공현 전 금요일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 요한 1,43-51
인터넷을 통해서 처음으로 글을 쓴 것은 20년 전입니다. 당시에는
천리안, 하이텔 등이 있었습니다. 저는 천리안의 가톨릭 동호회에
가입을 해서 글을 나누었습니다. 저의 이름은 ‘우산장수’였습니다.
우산은 비가 올 때 비를 피할 수 있게 해 주는 고마운 도구입니다. 저는
사랑의 우산, 기쁨의 우산, 위로의 우산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우산장수로 정했습니다. 벌써 오래전의 기억입니다. 20년
전입니다. 교구는 양업프로그램을 개발하여서 본당과 교구가 전산을
통해서 소통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생긴 것이
‘가톨릭 굿뉴스’입니다. 저는 가톨릭 굿뉴스 자유게시판을 통해서 제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적성 본당에 있을
때였습니다. 시골에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많은 분들이 제게 용기를
주고, 힘을 주었습니다. 교구 성소국에 와서는 매일 강론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때로는 힘이 들기도 하고, 시간을 내서 글을 쓰는 것이
버겁기도 하지만, 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에, 하루의 시작을
말씀으로 시작할 수 있기에 계속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익명성이 있기 때문에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이,
가짜 뉴스들이, 남의 소중한 인격을 침해하는 글들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국가기관을 동원해서 정부에 비판적인 사람이나 조직에 대해서 악성
댓글을 달기도 했습니다. 글은 본인에게는 엄격하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늘 관대한 마음으로 작성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비판할 때는
정확한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글과 말은 때로 칼보다 더 날카롭게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예전에
남성 구역 봉사자들을 위해서 강의를 할 때였습니다. 쉬는 시간에 잠시
화장실에 갔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이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신부님
강의 말이야, 예전에도 들었던 내용이더군.” 그분은 별 뜻 없이 하셨던
말이었을 것입니다. 강의를 하다보면 같은 내용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화장실에서 “아! 내가 준비 없이 강의를 하였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휴식이 끝나고 강의를 하는데 힘이 나지 않았고,
겨우 강의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웃으면서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대상이 다르면 같은 내용을 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가능하면 남의 일에 대해서는 좋은 이야기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저의 무심한 말 때문에 함께 일하는 분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있습니다. 직원들은 때가 되면 상여금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저는 별
뜻 없이 “상여금을 받아서 좋겠습니다.”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의 말이 직원에게는 서운하게 들렸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상여금인데 특혜를 받는 것처럼 말을 했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서운했던 감정을 풀었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작년에 읽었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고쳐 심고
각목으로 버팀목을 세웠습니다.
산 나무가 죽은 나무에 기대어 섰습니다.
그렇듯 얼마간 죽음에 빚진 채 삶은
싹이 트고 다시 잔뿌리를 내립니다.
꽃을 피우고 꽃잎 몇 개
뿌려 주기도 하지만
버팀목은 이윽고 삭아 없어지고
큰바람 불어와도 나무는 눕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허위허위 길 가다가
만져 보면 죽은 아버지가 버팀목으로 만져지고
사라진 이웃들도 만져집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기 위하여
나는 싹 틔우고 꽃 피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이 시를 음미하면서 신앙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삶의 자세를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야할 삶의 이유도 알 것 같았습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선명하게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을
닮은 우리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깃들여 있음을 이야기 합니다.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말, 서로에게 위로를 주는 말, 서로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말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아름답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1월5일 주님 공현 전 금요일( 요한1,43-51)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아름답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 중에는 본받고
싶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좋은 기억으로
남아서 다른 사람에게 소개 시켜 주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오래 오래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보고 싶은 사람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은 벳사이다인데 필립보도 벳사이다
출신입니다.벳사이다는 갈릴래아 호수 북족 요르단강 하구에 위치하며,
그 지명의 뜻은 ‘어부의 집’, 혹은 ‘고기의 집’입니다. 지명을 미루어
생각하면 그들이 어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을 만났고
안드레아가 형제 시몬에게 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나타나엘에게 전하였습니다. 나타나엘은 히브리 이름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사실 성경에 의하면 메시아의 고향은 베들레헴입니다(미가5,1). 많은
유다인들은 그리스도는 갈릴래아에서 나올 수 없고 베들레헴에서 나야
하며 다윗 후손이어야 한다(요한7,41-42).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있겠는가? 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이 결국 걸림돌입니다. 그러나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백문이 불여일견” 입니다.
마침내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권고에 의해 발길을 옮길 때 먼저 예수님이
그를 알아보고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 1,48). 이 말씀은
그대가 공부하는 랍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율사들은 올리브나무나 무화과 나무 아래 앉아서 율법서를
공부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나타나엘이 율법서를
공부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려왔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셈입니다.
나타나엘은 자신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 놀라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요한 1,49). 하고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믿음에 바탕을 두고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1,51). 하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복음은 창세기 28장12절 이하의 ‘야곱의 꿈 이야기’와 아주
비슷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베텔에서 있었던 것과 비슷한
하나의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된다는 것을 약속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베텔, 곧 하느님의 집, 성전임을 보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베텔은 하느님의 계시가 충만하게 나타난 곳이며 하느님께서는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시쿤둥한 반응을 보인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끝까지 인도하는 모습을, 또 ‘와서 보시오’ 하고 확신을 가지고
얘기할 수 있는 믿음을! 귀한 분을 만났으니 이웃에게 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베텔의 꿈을 상기해 보면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다가 한곳에 이르러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꿈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참말 야훼께서 여기에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외쳤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 문이로구나”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베고
자던 돌을 그곳에 세워 석상으로 삼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붓고는
그곳을 베텔이라고 불렀습니다. 베텔은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집은 어디에 있는가? 하느님의 눈으로 보는 곳에,
하느님의 뜻을 사는 곳에 있습니다.
묵시록 21장 2절 이하를 보면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도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아름답고 그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보고 싶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을 밖에서 찾지
말고 지금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집으로 알고 사시기 바랍니다.
고달프고 힘든 이 집이 하느님의 집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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