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월11일 목요일 [(녹)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수도회] 생명의 불꽃이 피는 자리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사무 4,1ㄴ-11
† 복음 마르 1,40-45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과 독서에서는 예수님께 치유를 청하는 나병 환자와,
필리스티아인과 싸워 이기려고 하느님 현존의 상징인 주님의 계약 궤를
전면에 내세우는 이스라엘 원로들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겸손하게 청하는 나병 환자의 모습은 치유의
주도권이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주님의 계약 궤를 이용하는 이스라엘 원로들의
태도에는 주님이 아니라 자신들이 전쟁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교만이 엿보입니다.
두 대조적인 태도의 결과는 명확합니다. 겸손한 나병 환자의 청원에는
가엾은 마음으로 ‘손을 내밀어’ 신체적인 고통과 사회로부터 격리된
소외감에서 해방시키는 예수님의 치유가 이루어집니다. 반면, 명분 없는
전쟁에서 승리하려던 이스라엘은 대살육을 당하고, 하느님의 궤까지
빼앗기는 징벌을 받고 맙니다.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겸손과 교만의
두 얼굴을 본 듯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인 듯하지만, 각자가 믿고 기대하는
하느님의 얼굴은 전혀 다릅니다.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고, 당신 얼굴을 보여 주실 것을 기대하지만,
정작 내가 원하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이나 명령 앞에서는 그분을
외면하는 것이 솔직한 우리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나’지만, 정작 그 믿음을 이끌어 주시고 지탱해 주시는 분은 주님의
성령이심을 깨닫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의 관점인 ‘사랑’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보십시오.
2018년 나해 1월11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제1독서
<이스라엘은 크게 패배하고, 하느님의 궤도 빼앗겼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4,1ㄴ-11
복음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0-45
아이들의 장래희망 중에서 꽤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연예인’이라고 합니다. 연예인들의 화려한 모습을 동경하면서 갖게
되는 장래희망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함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며칠 전에 미국과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재미교포
코미디언의 현재 근황을 매스컴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뇌출혈로
쓰러진 뒤에 현재 미국의 요양병원에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홀로
쓸쓸하게 생활한다는 것이었지요.
엄청난 인기를 가졌었던 연예인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짜릿했던 인기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잃어버린 것만이 늘어갑니다. 그렇다면 지난
성공에 대한 만족으로 지금을 잘 살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화려했던
전성기를 잊지 못해서 향정신성 의약품을 사용하기도 하고, 또 보톡스나
성형수술에 중독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자신의 삶을 끝마치는 경우도 종종 보입니다. 그런데 한 아름다운
인물이 떠올려집니다.
그녀는 ‘로마의 휴일’, ‘타파니에서 아침을’ 등의 영화로 세계인의
요정으로 사랑을 받았지요. 맞습니다.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
(1929-1993)입니다. 많은 배우들이 전성기를 잊지 못해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그녀는 특별한 삶을 선택합니다. UN 홍보대사로 봉사하면서
생의 마지막까지 아프리카에서 굶주리고 가난한 어린이들과 함께
보냅니다.
그녀가 이러한 선택을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프리카의 뜨거운
태양과 제대로 씻기도 힘든 환경은 여배우에게는 정말로 피하고 싶은
자리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그러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모두
맡길 때 비로소 사랑의 삶이 가능합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찾아와 도움을 청합니다. 그때의 모습을 잘
보십시오. 그는 무릎을 꿇습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완전한 의탁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굳은 믿음을 드러냅니다. 바로 이때
주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하시면서 그의
나병을 치유해주셨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첫째는 겸손한 마음을 갖고 완전히 의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주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굳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떠했을까요? 겸손도 없고 또한 믿음도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관점이 아니라 늘 세상의 관점으로만 보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관점인 ‘사랑’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보십시오.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겸손과 믿음을 통해 진정한 기쁨의 삶,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천 번을 넘어질 수 있지만 중요한 건 용기를 내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리스타트! 세상엔 딱 한 종류의 실패자들이 있는데, 이는 싸우기와
꿈꾸기와 사랑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이다(호세 무히카).
오드리 헵번.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인내는 쓰나 열매는 달다(‘따뜻한 하루’ 중에서)
옛날 어느 마을에 겸손하고, 착실하고, 인내심 많고 심지어
현명하기까지 한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이
청년을 칭찬하고 좋아했지만 시기와 질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날 마을의 불량한 청년들이 유치한 내기를 시작했습니다. 이성을
잃고 화나게 할 수 있다 없다를 가지고 내기를 벌인 것입니다. 청년을
화나게 할 수 있다고 한 불량배가 나섰습니다. 불량배는 청년이 목욕을
시작할 때를 노려 청년 집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젖은 몸을
급하게 닦고 나온 청년에게 실없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 목욕 중이었어? 미안. 그런데 내가 갑자기 궁금한 것이 생겨서.
저기 말이야, 사람의 머리가 둥글잖아? 그거 왜 그런 거냐?"
청년은 불량배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청년이 다시
목욕을 시작할 때 불량배가 문을 또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나이를 먹으면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는 거지?"
누가 봐도 일부러 곯리려는 것이 분명한 질문에 청년은 웃으면서
친절하게 설명했습니다. 오히려 오기가 난 불량배는 청년이 목욕탕에
들어갈 때마다 몇 번이고 문을 두드리며 이상한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청년은 화는커녕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불량배의
질문에 여전히 친절하게 답해주었습니다. 결국, 내기에 진 불량배는
그 청년을 찾아가 내기에서 손해를 봤다면서 말했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여전히 친절한 얼굴로 불량배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하지만 내가 인내심을 잃는 것보다 당신이 손해
보는 것이 낫습니다."
별 것도 아닌 것에 인내심을 잃고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그 모습이 분명히 좋지 못한데,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별로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인내심의 실종을 막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
참아보면 어떨까요? 이러한 인내가 내 삶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동창신부 어머님 장례미사로 충남 보령대천성당에 다녀왔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생명의 불꽃이 피는 자리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1월11일 연중 제1주간 목, 1사무 4,1ㄴ-11; 마르 1,40-45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생명의 불꽃이 피는 자리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인들에 맞서 싸웠으나 사천
명 가량이나 살상 당하고 패배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실로에서
주님의 계약의 궤를 모셔와 다시 필스스티아와 싸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보병이 삼만이나 쓰러지고 하느님의 궤마저 빼앗기고
맙니다.
결국 필리스티아인들은 하느님의 궤 때문에 벌을 받고 보상제물과 함께
다시 이스라엘로 반환됩니다(5-6장). 이 사건은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거룩함을 요구하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요청에 올바로 응답하지 않으면 제아무리 성소에 피한다 해도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의 나환자는 하느님 앞에서 올바른 태도를 취함으로써 생명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게 한 사람입니다. 나환자는 살았으나 죽은 시체로
간주되었습니다(민수 12,12). 그 결과 그는 일상생활과 종교행위,
대인관계 등 모든 부분에서 소외되고 멸시를 당했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나환자는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깨끗이 치유 받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무엇보다도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알아보았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 믿었지요.
알아보고 믿었기에 그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1,40). 하며 도움을
청합니다.
생명의 불꽃은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피워주십니다. 따라서 그분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주도권을 알아보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면, 생명의 불꽃은 꺼지고 죽음의 그늘이 덮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뿌리깊은 교만입니다. 나병환자는 자신
안에 생명의 모닥불을 지피려고 생명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무릎을 꿇은 나환자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신앙과 겸손의 태도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아픔과 처지를 올바로 알아차리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드러냈기에 무릎을 꿇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올바른
자기이해와 자기수용은 자기 사랑의 기본입니다. 이는 생명의 주님을
만나고 사랑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지요.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는 상처를 그대로 안고 상처 입은 치유자께
나아가야겠습니다.
또한 나환자는 생명과 자유를 갈망하고 열망했습니다. 그에게는 낫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몸이 성한 사람 가까이에 가지
말아야 하는 정결법을 어기면서까지 예수님께 다가가 치유를 청한
것입니다. 그의 간절함을 알아보신 예수께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1,41) 하시자 곧바로 그의 병이 치유됩니다.
나 자신도, 우리 사회와 교회도 상처 입고 병든 나환자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굵직한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언론에
보도되며 치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언자적 증거는 커녕 악표양의
암세포를 퍼뜨리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생명의 불꽃이 다시
타오를 수 있도록 생명과 자비의 주님께 나아가야겠습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아픈 상처와 치부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회복과 재생의 불씨를 간절히 청해야 할 때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한센인의 치유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1월11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복음: 마르 1,40-45: 깨끗하게 되어라.
한센인의 치유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40절)
하고 말씀드렸을 때,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을 가지시고 그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41절) 하셨다. 그러자
나병의 증세가 깨끗하게 사라지고 나았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금하는
데도 나병환자를 만지셨다. 왜 그랬을까?
그분은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티토 1,15)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그에게 손을 대신 것이다. 즉 한 사람 안에 있는 불결이
다른 사람에게 옮지 않으며, 외적인 불결이 내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만져서는 안 되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신다. 그들의 외적인
모습이나 허물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께서 만지시려고 손을 내미실 때, 이미 나병은 사라져 버린다.
주님의 손은 나병환자를 만지신 것이 아니라, 깨끗해진 몸을 만지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영혼이 나쁜 병으로 감염이 되었거나, 죄로 오염이
되어있다면 지금 즉시 하느님께로 돌아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하느님께서는 즉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분의 거룩한
손은 나병으로 더러워지지 않았고, 환자는 그 거룩한 손으로
깨끗해졌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적을 행하시면서 침묵을 요구하셨지만 오래
감추어지지는 못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지곤 한다. 우리 가족들도 그런 경우가 많을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과 모범을 따르면서, 또 기도하면서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뜻과는
반대로 그 활동이 알려지기도 한다. 세상에는 이름 없는 천사들도 많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44절)
주님께서는 나병환자를 사제에게 보내시어 사제직을 존중하셨고,
치유의 예물을 바치라고 명하셨다.(마태 8,4; 마르 1,44; 루카 5,14)
주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인정하셨다. 이 율법이 예수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분은 당신의 말씀으로 나병환자를 치유하시고
사제에게 보내 예물을 바치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자비보다는 나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죄보다도 하느님의
자비가 더 크시다는 것을 믿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분께 갈 수 있는 용기와 은혜를 청하면서
항구히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연중 제1주간 목요일
2018년 나해 1월11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0-45
‘순간 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보면서 가슴이 찡하였고, 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를 모시는 여성의 이야기였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시간이 나면 폐지를 주우면서 두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계셔야 했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손과 발이 되어 주었습니다. 용변을 볼 수 있도록
해 드리고, 물과 먹을 것을 드렸습니다. 잠 잘 때도 시어머니 곁에
있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부르면 일어나서 시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해
드렸습니다. 앉아서 겨우 움직이시는 친정어머니를 위해서도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주어진 일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기쁜 마음으로 두
어머니를 모시는 자매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였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온 몸으로 드러내는 참된 신앙인이었습니다.
요양원을 만들어서 지원을 하고, 육아를 잘 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고, 더 좋은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왜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알았다면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궤를 가지고 전쟁에 나섰지만
패했던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궤가
아니었습니다. 전쟁에 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수도자들이 입고 있는 수도복은 수도자들에게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수도자들은 수도복을 입고 세상에서 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수도복이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수도복을 입은 수도자가
수도복을 입고 있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수도복을 입는 이유는 이
세상에 살면서 천상의 삶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히 따른다면 수도복은 세상의 그 어떤 옷보다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반면에 수도자로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망각한다면 수도복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하는 굴레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성직자들도 그렇습니다. 교구와 본당이 사제들의 외적인 모습을 지켜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성직자가 되고자 했던
첫 마음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바닥에 엎드려서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면서 모든 성인들의 도움을 청하였던 그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저 멀리 오지에서 선교를 하여도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하지만 타성에 젖어서 지낸다면, 권위를
앞세운 다면 교구와 본당이라는 조직도, 사제복도 진정한 자유를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셨습니다.
‘제자들의 배반, 율법학자들의 모함,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고독’ 이런
것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지고 가셨던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의 결말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무겁기 마련입니다. 십자가는
인내를 요구합니다. 십자가는 나를 구속하기도합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열쇠입니다.
두 어머니를 모시던 자매님은 수도복을 입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또한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때에, 주님께 의지하며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1월11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마르1,40-45)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라.
편찮으신 분이 많습니다. 질병으로 다가온 고통을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 믿음을 고백해도 아픔은 여전하기 때문에 진정
그분이 함께하시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합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이루실수 있으시니 고통을
거두어 주시고 당신이 몸소 함께 하고 계심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고통이 계속된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오히려 그 아픔을
통해 당신의 수난 고통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유다인들에게 나병은 하늘에서 내린 형벌로 저주 받은 모습이요
(레위13,34). 죽음으로 향하는 상태(욥기18,13)였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사람’ 이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레위13,45-46). 법은 접근을 막을 뿐 나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문제는 알지만 해결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르1,40). 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상의 것이라도 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의 자세입니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렸으니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저 저는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저로써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애원하는 자세요,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은 저의
주인이고 저를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저의 희망이십니다.’
하는 순종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결국 무릎을 꿇은 것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다가와야 하고 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은 살리는 일입니다. 인간됨의 회복에
있습니다. 차별과 소외로 공동체에서 갈려나간 이들이 다시 공동체
안에 함께할 수 있는 길을 치유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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