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월15일 월요일 [(녹)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수도회] 왜 단식하는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마르 2,18-22
† 복음 마르 2,18-22
◈ 오늘의 묵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로운 시작을 알릴 때마다 흔히
인용하는 성경 구절입니다. 우리는 늘 새롭게 변화하고 회심하고 싶어
하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나 자신이
너무 낡고 고집스러우며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의미에서 단식은 흔히 육신의 배부름과 욕망에서 생긴 영의
혼탁함에서 벗어나 맑은 정신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고행을 통하여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단식은 순수한 종교적 의미보다는, 이민족의
지배 속에서 유다인들이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는 율법의 조항이자,
사회적 계약으로 전락했고, 단식의 참된 종교적 의미도 사라져 갔습니다.
‘경건한 이들’이라고 자칭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을
하지 않는 것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단식의 참된 의미를 되살려 주십니다. 복음의
기쁨을 누리는 이들,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함께 있는 기쁨을
누리는 이들에게 단식 행위는, 마치 혼인 잔칫집에 와서 음식을 함께
나누는 기쁨보다 홀로 떨어져서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사람임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독선과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아말렉과 싸워 이긴 뒤에 좋은 전리품의 일부를 취한 것을 두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라는 질책을 받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주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는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하느님의 맛을 알아야만 가능합니다.
2018년 나해 1월15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제1독서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5,16-23
복음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8-22
어젯밤 책을 읽다가 커피가 마시고 싶었습니다. 누구는 밤에 커피를
마시면 잠을 잘 수 없다고 하지만 저에게는 그런 일이 전혀 없어서
밤에도 종종 커피를 마십니다. 드립커피를 만들기 위해 부엌으로 가서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드리퍼에 여과지를 끼운 뒤 그라인더에 원두를
넣고 갈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뒤 여과지에 갈은 커피를 넣고 뜨거운
물을 조금씩 넣습니다. 이것이 제가 커피 만드는 순서입니다.
간단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분명히 여러 단계를 거친 뒤에야 맛있는
커피를 마시게 됩니다. 물론 커피믹스를 뜯어 컵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서 마시는 아주 편한 방법이 있지만, 저의 경우 약간의 정성이
필요한 드립커피가 훨씬 맛있습니다.
누구는 “커피가 다 똑같지 뭐. 입에 들어가면 다를 것 없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커피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래서 커피를 마시기 위해 약간의 시간을 소비하는 것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더 맛있는 커피를 맛볼 수 있으니까요.
커피 맛을 아는 사람은 이렇게 커피 만드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남녀간의 데이트도 그렇지 않습니까? 분명히 사랑의 맛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데이트 하는 시간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만약
데이트하는 시간이 아깝다면서 만나자마자 “집에 가자.”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사랑하지 않는구나.’라고 하면서 그만
만나려고 하지 않을까요?
문득 ‘하느님 맛을 아는 사람은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느님을 위해 쓰는 시간을 아까워할까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성당
가는 시간이 또 기도하는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따지듯이 묻습니다.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단식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남들에게 자신은 열심히 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과시용일까요? 단식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크기
때문에, 몸으로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봉헌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 그 사랑이 부족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배반하기도 했고, 십자가의 죽음 이후에 다락방에 숨어 벌벌 떨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 단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냥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일 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이 없고서는 단식에 어떤 의미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음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끝까지 따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맛을 알아야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자신은 얼마나 그 맛을 느끼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혹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한다면,
하느님 사랑에 더욱 더 집중해야 합니다. 분명히 하느님의 맛을 알게
되고, 하느님 뜻에 맞춰서 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심에서 나오는 말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밝은 양심에서
나오는 말만이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다(윌리엄 펜).
커피를 내리다가 사진을 찍었습니다.
우리 찾지 못하면(‘좋은생각’ 중에서)
캐나다 금광 채굴 회사 ‘골드코프’가 경영난에 빠졌다. 생산 비용은 점점
늘어나는 반면 수십 년간 채굴한 광산이 고갈된 탓이었다. 새로운
금광을 찾아야 했으나 쉽지 않았다. 최고 경영자인 ‘롭 맥이웬’의 고민은
깊어졌다.
하루는 그가 한 강연회에 참석했다. 강연 내용은 소프트웨어 회사
‘리눅스’의 이야기였다. 리눅스는 새롭게 개발한 컴퓨터 운영 체제를
무료로 배포했다. 그 뒤 전 세계 사용자로부터 개선 사항을 전달받아
제품을 향상시켰다. 덕분에 적은 비용으로 빠르게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그는 무릎을 쳤다.
“우리가 못 찾으면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자신의 회사에도 비슷한 방식을 도입했다. 직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회사 기밀인 지질 자료를 인터넷에 모두 공개하고 ‘금 찾기
대회’를 열었다. 금맥을 찾는 사람에게는 60만 달러의 상금도 걸었다.
일반인부터 지질학자까지 전 세계에서 천여 명이 넘는 참가자가 모였다.
그들은 회사가 공개한 자료를 바탕으로 금광 후보지 110곳을 찾아냈다.
놀랍게도 그중 80퍼센트 넘는 곳에서 금광이 발견됐다. 덕분에
골드코프는 위기를 벗어났다.
방법은 분명히 있습니다. 나만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찾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혼자서 끙끙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금맥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에 공개한 골드코프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왜 단식하는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1월15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마르 2,18-22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단식할 것이다.”(마르 2,20)
왜 단식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르 2,18)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갖 것을 새롭게
하시고 구원의 기쁨을 주는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필요가
없다 하십니다. 그 기쁨이 사라지는 때, 곧 메시아인 당신이 죽음을
맞을 때가 바로 단식할 때라고 하십니다(2,19-20).
중요한 핵심은 단식하는 이유와 목적입니다. 유다인들에게 단식은
의무였습니다. 단식해야 하는 이유는 애도, 속죄, 간구였습니다.
그들에게 단식은 죄인임을 알아차리는 행위였지요. 또한 그들은
단식으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드러내면서 하느님의 은총을
간구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진노를 피하거나, 죄의 위험에
걸려넘어지지 않도록 도움을 청하려고 단식하기도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스승의 고행을 본받아 자주 단식했던 것
같습니다. 단식은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신심행위였으나 바리사이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끌려고 위선적으로 했습니다. 단식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지요. 문제는 어떤 동기로 하느냐입니다. 사람들은 건강,
종교적 신념, 사회정의 등 다양한 목적으로 단식합니다. 문제는
사리사욕을 채우거나 드러내보이려고 하는 단식입니다.
예언자들은 정의와 이웃사랑과 무관한 거짓 단식을 신랄하게
비판했지요(이사 58,3-9; 예레 14,12).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2,19-20)
예수님께서는 단식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단식은 종말론적인 구원의 기쁨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는 유다인들이 애도, 속죄, 간구를 목적으로 해오던 공적
단식을 부인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부재와 메시아의 죽음 때문에 단식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단식은 결코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기만족 때문에 할 일이 아닙니다.
참 단식은 온 존재로 신랑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려는 것입니다.
단식은 우리가 사랑하는 신랑이신 예수그리스도의 고통과 수난에
동참할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가난과 소외, 불의와 차별, 거짓과
악행으로 추방되어버린 하느님을 모셔오려는 단식이 되어야겠지요.
따라서 단식은 소극적으로 악습을 삼가거나 절제하는 개인적인 수련
그 이상의 것입니다.
영원한 기쁨을 가져다주는 그분과 함께하지 못하는 ‘사랑의 결핍과
부재’를 다시 하느님으로 채우는 것이 진짜 단식입니다. 여기서 단식의
사회적 차원이 드러납니다. 단식한다면 굶주린 사람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며 인간다운 삶의 회복을
꾀하고 불의에 저항하지 않는 단식은 위선입니다. 교회도 권력과 돈에서
자유로워져 하느님의 선과 자비와 정의를 드러내는 단식을 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 위선, 과거 전통과 제도에 매인 폐쇄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 돈의 우상, 탐욕과 이기주의, 무관심, 차별을 부르는
사회구조들, 비합리적 사고, 폐쇄적인 태도, 고정관념과 편견, 권력의
남용과 부패 등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런 단식을 통해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내가 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고 있다면?
전삼용 요셉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1월15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복음: 마르코 2,18-22
내가 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고 있다면?
바오로가 베드로를 나무란 적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초석이었고 바오로는 교회를 박해하다가 회개한
사람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도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감히 저의 논문지도 신부님께 그분의 태도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논문지도 신부님은 가난한 성자처럼 사십니다.
본당신부님이시지만 직접 시장을 보셔서 음식을 하시고 가난한
사람들과 사제관을 나누어 사용하시며 옷도 남이 버린 것들을 주워
입으시는 성인신부님이십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논문지도 신부님은 당신이
논문을 지도하시는 학생들과 함께 다른 신부님을 만나려 간 적이
있었습니다.
미사를 함께 드렸는데 성작과 성합이 매우 아름답고 값어치 있게
보였습니다. 저와 함께 간 그 신부님은 미사 도중에도 그 아름다운
성작의 문양을 손으로 만져보는 등 그 화려함에 경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 그 신부님은
저에게 “오늘 좋았지? 근데 내가 오늘 그 신부에게 사는 게 너무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냐고 충고를 해 주었어.”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가난하게 사시는 그 신부님을 존경하면서도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신부님, 각자 삶의 방식이 있으니 당신이 가난하게 사신다고 남에게
뭐라고 하시면 안 돼요. 성인들이 다 가난했던 것은 아니잖아요.”
그랬더니 그 신부님이 “그럼 부자가 성인이 되냐?”라고 되묻기에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교황님들을 생각해 보세요. 많은 성인 교황님들이 계십니다.
그 분들은 가난하게 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분들이셨잖아요.”
그 신부님은 더 이상 저에게 말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가난한 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부자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가난한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이 좋다고 하여 가난하지 않은
것이 죄인 양 모든 사람에게 가난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중학교 때 청소를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얼굴을
붉혀가면서까지 열심히 하지만 동시에 게으름 피우는 친구들을
나무랐습니다. 저는 그 때 자신이 하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만족을 위해 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 주위에 가난한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을
재정적으로 도와주었던 여인들도 나오고 베타니아에는 부자 친구들도
있으셨고, 그 중 어떤 여인은 수백만 원이 되는 향수를 예수님께
발라드리기 위해 옥합을 깨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 여인을 나무라는
제자들보다는 그 여인을 오히려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덕을
실천하시되 남에게 강요하시지 않으시고 그 실천하는 것에서
만족하셨고 그런 삶을 강요하기보다는 ‘초대’하셨습니다.
오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단식은 참 좋은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제어함으로써 영적인 능력을 극대화하게 만듭니다.
성경에 보더라도 ‘단식과 기도’를 자주 함께 사용함으로써 단식이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자신들만 단식하면 되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까지 그것을
강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심리 근저에는 자신들이 단식하기
때문에 더 올바르게 산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것은 아닐까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은 행동양식이 경직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어야 함에도 자신이
하니까 남들도 해야 한다는 식은 스스로 그렇게 행동하면서 자기만족을
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병원에 입원해 계신 어떤 분을
수술을 하려고 하는데 간수치가 너무 높아서 수술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도 수치는 떨어질 줄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약을 먹으면 몸에 좋을 것 같아서 병원에서 몰래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약이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닌 것처럼, 나에게 적용되는
것이 다른 이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도 전에 마치 성인이 된 것처럼 저의 신앙생활을 강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산을 오르는 길은 다양하고도 많습니다.
아무리 좋아도 강요하지 맙시다. 내가 강요한다는 것은 내가 하고 있는
그것으로 충분한 행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초대합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지난 성탄을 위해서 준비했던 구유와 장식물들을 치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준비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정리하는
것은 하루면 충분했습니다. 공들여 만들 것들도 우리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건강도 그렇습니다.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잘못된
습관이 계속되면, 불규칙한 생활이 이어지면, 근심과 걱정이 떠나가지
않으면 우리의 몸은 면역력이 균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유사종교와 신흥종교에 사람들이 빠져든다고 걱정을 합니다. 기존의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가기도 하고,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 가기도
합니다. 그들의 교리와 그들의 신앙에 문제가 있음에도 사람들이
유사종교와 신흥종교에 빠져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성의
종교들이 사람들의 외로움을 위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숫자로만 파악하기
때문입니다. 교리, 제도, 조직은 잘 갖추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조직과 제도도 필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직, 제도, 율법, 계명도 필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희생, 헌신, 열정, 사랑, 나눔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갑을 억지로
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좋은 것은 스스로 지갑을 열 수
있도록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제도와 조직에 안주하는 교회는 더 많은
사람들이 떠날지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깊은 위로와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낡은 제도와 조직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이 때로는 십자가의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조롱과 멸시를 받는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밀알이 썩어야
열매를 맺듯이, 씨앗은 쪼개져야 새싹이 나듯이 우리는 늘 낡은 허물을
벗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신앙인들은 3가지 유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깃발 아래 있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생활 태도는 하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즐거움이 가득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먼 훗날의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깃발 아래 왔다가, 금세 달콤한
유혹에 빠져서 세상의 것들에 빠져드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기준에 맞추어서
와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가난과 겸손이 주는 기쁨을 알고, 세상의
가치보다 훨씬 소중한 주님을 따르는 즐거움을 알기 때문에 언제나
주님의 깃발 아래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힘들었기에 오늘 우리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자가 되신 것은
고난을 겪으신 다음이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2018년 새해에는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겸손, 가난, 나눔,
봉사의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우리 삶이 새 부대가 되려면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1월15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마르 2,18-22)
우리 삶이 새 부대가 되려면
그동안 익숙해 있던 생활의 패턴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지켜온 전통과 소신이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나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정된 의식의 전환을 통해서 새로움이
주어집니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열린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디딤돌로 삼아 미래를 열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우리 자신을 쇄신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고(로마12,2). 거기에 나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어주셨고 이 구원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옛 사고방식대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구원의
기쁜소식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단식을 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의 결론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2).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의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단순히 율법의
규정에 따라 단식을 할 때가 아닙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죄를 벗는
속죄의 행위나 회개의 표시로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애덕을
실천하는 행위로 하는 것이지 단순히 식사를 절제하거나 육식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몸매 관리나 건강을
위해서 단식을 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금요일 고기를 먹지 않는
금육재를 잘 지킵니다. 그러나 단식을 해서 이웃에게 어떤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는가? 를 보면 그 단식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마태9,13). 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참된
단식은 생색내기가 아닙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올바른 단식에 대해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6,17-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보이기 위한 단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당하신 주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단식이어야 합니다. 단식은 단순히 음식의 절제만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사랑으로 내놓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기를 소망하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의 사랑에로, 그리고 이웃사랑에로 초대하십니다. “우리 삶이
‘새 부대’가 되려면 새 포도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 삶의 무언가 하나는 바꾸어 나가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새 부대가 되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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