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2월4일 주일 [(녹) 연중 제5주일]
[수도회] 손을 잡아 일으켜주시는 주님을 선포함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욥기 7,1-4.6-7
○ 제2독서 1코린 9,16-19.22-23
† 복음 마르 1,29-39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는, 새벽이
되자 외딴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십니다. 이처럼 활동하기 전과 후에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활동의 원천이고, 활동은 기도의 목적을
올바로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기도 않고 활동만 한다면 영적인
힘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웃을 돌보지 않고 기도만 한다면,
영적인 자만에 빠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도를
활동으로, 활동을 기도로 대치하려는 유혹을 받지 않습니까?
우리는 기도를 통해 볼 수 없었던 목마른 이들을 보아야 하며, 활동을
통해 그들에게 물을 주어야 합니다. 내가 힘든 상황에 있더라도, 나보다
더한 처지에 놓인 이에게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기에 그 마을에 계속 머무신다면
갈채와 함께 편안한 생활이 보장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길을
택하시지요.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우리가 한 가지 일을 끝내면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늘 새로운 일을 찾고 끝없이 도전해야만 하지요. 바오로
사도 역시 제2독서에서 말씀하시지요.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다른 이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한
자세에 대해 묵상했으면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꾸준한 기도를 통해
2018년 나해 2월4일 연중 제5주일
제1독서
<나는 고통스러워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 욥기의 말씀입니다. 7,1-4.6-7
제2독서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9,16-19.22-23
복음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9-39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보면, 어느 순간 ‘몇 년 뒤’라는 자막이 보이면서
새로운 화면이 나오곤 합니다. 그 몇 년 동안을 잘 지냈는지 성공한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어렵고 힘든 일들이 많았는지 남들에게
위로를 받는 불쌍한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 몇 년이 사람의
모습을 과거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무도 이러한 구성에 대해 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럴 수 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지금의 내 모습을 한 번 천천히 바라보십시오. 지금 모습은
몇 년 뒤에 어떻게 될까요? 남들의 부러움을 받을 만큼 잘 될까요?
아니면 엉망진창이 되어서 사람들의 안타까워하는 시선을 받게
될까요? 그 몇 년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분명하게 결정될 것입니다.
문제는 내게 그 몇 년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삶은 틀려먹었어. 지금의 상황은 바뀌지 않아.’
남의 몇 년이 변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나의 몇 년 역시 변화
가능합니다. 우리에게는 멋지게 변화시킬 몇 년이 있음을 그리고 그
몇 년은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랑이신 주님께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그 몇 년을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따라서 무엇이
무서울까요? 또 무엇이 걸림돌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습니다. 이 시몬의
장모 모습처럼 많은 이들도 세상의 각종 문제들로 힘들어합니다.
제1독서의 욥이 말하는 것처럼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을 지도 모릅니다(욥 7,1 참조). 그래서 나의
나날이 희망 없이 사라져가고,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 같기도
합니다(욥 7,6.7 참조). 하지만 예수님께서 시몬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시게 됩니다. 즉, 병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힘만으로는 지금 이 순간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바로 주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 주님께서도
기도하셨습니다. 밤새 병자를 고쳐주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도 새벽에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마르 1,35 참조).
기도는 특별할 때에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평범한 일상 안에서도
계속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우리에게 선물로 줍니다. 종종 18년째 새벽 묵상 글을 써오고
있는 저를 향해 사람들은 “대단하다”는 말씀들을 하십니다. 그러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해서 밥을 먹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져봅니다. 모두가 “당연하지요. 안 먹으면 살 수 없으니까요.”라고
대답하십니다. 이에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하고 묵상 글을 쓰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밥
먹는 것이 특별하지 않는 것처럼, 묵상 글 쓰는 것도 특별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평범한 일상입니다. 그러나 이 평범함도 꾸준히 하니까
특별함이 나오나 봐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평범한 일상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특별함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통해
주님의 손을 잡으신 분은 결코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시몬의 장모가
주님 곁에 시중을 들었던 것처럼 주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기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꾸준한 기도를 통해 주님의 손을 잡을 수가 있었고, 그는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
지금 내 자신은 주님의 손을 잡고 있는지를 떠올려 보셨으면 합니다.
그 방법은 오로지 평범한 일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꾸준한 기도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명언: 위대한 인물에게는 목표가 있고, 평범한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을 뿐이다(워싱턴 어빙).
재미있는 강아지 케익입니다.
내가 만드는 미래.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께서는 1970년 ‘여성동아’의 장편소설 공모전을
통해서 데뷔하셨습니다. 이 데뷔작이 유명한 ‘나목’이라는 작품이지요.
이 소설은 한국전쟁 중 미군 부대 PX 초상화 가게에서 일하던 화가에
대한 내용으로, 선생님의 체험이 담겨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나목’을 뽑은 심사위원들은 선생님을 칭찬하면서도 작가의 특수한
자기 경험을 형상화한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일회적인 작가가 될
것이라고 한 소리로 예언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선생님께서
데뷔하실 때의 나이는 이미 마흔으로 결코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어떠했을까요? 2011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선생님께서는
계속해서 글을 쓰셨고 또 많은 책을 출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심사위원들의 예언은 어떠한가요? 모두 틀린 말이 되고 말았지요.
종종 미래를 예상하는 ‘저 사람은 ~ 할거야.’,
‘너는 ~ 사람이 될 거야.’ 등등의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느님이 아닌 다음에야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겠지요. 그런데 이런 말에 쉽게 흔들리고 또 단정
지으면서 포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이러한 말에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저렇게도 생각하는구나.’
라고 받아들이면서, 그 생각이 틀렸음을 보이기 위해 더욱 더 힘차게
살아보면 어떨까요? 남의 말에 의해 내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내는 미래가 되지 않을까요?
박완서 선생님.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손을 잡아 일으켜주시는 주님을 선포함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2월4일 연중 5주일
욥기 7,1-4.6-7; 1코린 9,16-19.22-23; 마르 1,29-39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셨다.”
(마르 1,34)
손을 잡아 일으켜주시는 주님을 선포함
욥은 재산과 자녀들을 다 잃고 나병에 걸려 잿더미 위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냅니다. 그는 자신을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7,1-2)에 비유하며, 다음과 같이 탄식합니다.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 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7,4) 그럼에도 그는 고통스런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합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십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일으키시고 악인들을
땅바닥까지 낮추십니다."(시편 147,3.6) 욥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도
자비의 주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며 주님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나오시어 '곧바로' 시몬의
집으로 가십니다. 그분께서는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일으키시어 병을 고쳐주십니다(마르 1,30-31).
예수님께서는 온 고을에서 온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십니다.”(1,34).
예수님께서는 병들고 마귀들린 모든 이에게 먼저 다가가십니다.
그리고는 치유를 바라며 '누워 있는' 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1,31). 그분께서는 질병을 앓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어
고쳐주십니다.'(루카 4,40)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시며, 치유와 해방의 업적을 하느님 안에서 수렴하십니다.
그리고는 갈릴래아 온 고을을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셨지요.
어쩌면 믿는 우리는 고통을 직시하며 탄식하는 욥이나,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와 비슷한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회
또한 예수님을 찾아나서는 병자들과 마귀들린 사람들의 처지와 같다고
할 수 있겠지요. 누워 있는 병자인 우리 각자와 사회는 침상에서
'일어나' 해방자이신 주님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분이 계신데도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히에로니무스)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체험하고 선사받은 하느님의 자비와
기쁜소식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도록 불렸음을 상기해야겠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듯이, 우리는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겠습니다.'(1코린 9,19.22)
복음은 차별 없이 모두를 품어 사랑 안에 하나가 되는 가운데
선포됩니다. 곧바로 다가가 손을 내밀어 일으켜세우는 바로 그 순간
치유와 해방이 일어납니다. 복음은 그렇게 고통 가운데서 선포됩니다.
복음은 불의와 불평등으로 가득한 부조리한 현실 한복판에서
선포됩니다.
우리도 아픔과 고통 중에서도 치유자이신 예수님처럼 열린 마음과
영혼으로 모두를 사랑했으면 합니다. 고통의 극복이 아니라 고통을
직시하며, 서로를 향해 종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가 행복하도록
자신을 사랑의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님의 그 사랑으로 서로를 더 많이
사랑해야겠지요. 오늘도 예수님을 통해 인간됨을 회복하는 복음선포의
날이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마르 1, 39)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2월4일 연중 제5주일.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 1, 39)
다시 추워졌습니다.
이 추위에 아프게 떨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복음이 시작되었습니다.
칼이 되고 불이 되어 우리를 정화시켜 나갑니다.
복음이 우리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복음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아름다움을 회복시켜줍니다.
마귀를 쫓아냄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영원함을 보여주십니다.
복음이 깊어지면 사람을 새롭게 보게됩니다.
하느님 사랑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복음으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됩니다.
복음으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기쁜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은총가득한 주일 되십시오.
복음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드립니다.
복음이 우리 가운데 오셨음을 믿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5주일
신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규칙적인 생활을 통해서 기도하는
법, 시간을 지키는 법, 함께 사는 법을 배웁니다. 강의실에서는 신학과
철학을 배웁니다. 그러나 숨은 보물처럼 신학교에는 눈으로 보고 배울
수 있는 조형물들이 있습니다. 제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준 것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최민순 신부님의 ‘두메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하는 사제가 되라는 뜻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사제직은 영광의 자리가 아님을 늘 마음에 새기라는
가르침 같았습니다.
일은 사람이 하지만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잠언의 글도 있습니다.
사제는 늘 순명하는 마음으로 지내야 한다는 가르침인 것 같습니다.
교만하지 말라는 뜻인 것 같았습니다.
신학교의 교가가 있습니다. 교가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젊은이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평신도가 바라는 사제상이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많은 묵상을
하였습니다. 신자들이 원하는 사제는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사제와
같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교황님의 말처럼 사제는 양 냄새가 나야
합니다. 신자들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동상이 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동상은 사제가 가야할 길은 희생과 순교의 길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순교로 모범을 보이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자랑스러웠고
고마웠습니다.
“Omnibus Omnia(모든 이의 모든 것)”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글도
있습니다. 사제는 이념, 사상, 신분, 계급, 성별, 세대, 피부라는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가난한 이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면,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명동 성당 들머리에 구걸하는 걸인이 있습니다. 매일
지나다니면서 그분들을 봅니다. 그리고 그분들에게 도움을 주시는
분들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나자로’를 말씀하셨습니다.
걸인은 어쩌면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천사일 수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명동에는 폐지를 줍는 자매님이 있습니다. 늘
긴 치마를 입고 다니십니다. 어디에서 주무시는지, 무엇을 먹는지
모르지만 폐지를 가득 주워서 묶어 놓는 자매님은 거리를 깨끗하게
치워주는 고마운 분입니다. 가끔씩 가톨릭 회관 후문 쪽에서 껌과
사탕을 파는 형제님이 있습니다. 몸이 좀 불편하신 분입니다. 불편한
몸임에도 추운 겨울바람을 맞으면서 열심히 일을 하는 모습은
아름다웠습니다.
어떤 강사가 있었습니다. 그 날도 그 강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세미나에서 열띤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 강사는 수표 한
장을 높이 쳐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돈을 갖고 싶은 사람
있습니까. 이 돈을 갖고 싶은 사람 손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그러자
세미나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 대부분이 손을 들었습니다. 강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 중에 한사람에게 이 돈을 드릴
생각입니다. 하지만 먼저 나의 손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쳐들었던 수표를 손으로 이리저리 마구 구겼습니다. 그리고는
“여러분 아직도 이 수표를 가지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다시 묻습니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강사의 행동에 놀랐지만 역시 모든 사람이 손을
다시 듭니다. 그러더니 강사는 이번에는 그 10만 원짜리 수표를
땅바닥에 던지더니 구둣발로 밟으며 더럽혔습니다. 그리고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구겨지고 더러워진 그 10만 원짜리 수표를 집어 들고
아직도 그 돈을 갖고 싶은지를 또 다시 물었습니다. 또 다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이 때 강사는 힘찬 어조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이 수표를 마구 구기고 발로 짓밟고
더럽게 하여도 그 가치는 전혀 줄어들지 않습니다. 10만 원짜리 수표는
항상 10만 원짜리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삶 안에서 여러 번 바닥에 떨어지고 밟히며, 더러워지는 일이
있습니다. 실패라는 이름으로 또는 패배라는 이름으로 겪게 되는 그
아픔들 그런 아픔을 겪게 되면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실패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의 가치는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구겨지고 짓밟혀도
여전히 자신의 가치를 지닌 이 수표처럼 말입니다. 지금 힘들어하는
분들이 있다면 희망과 용기를 내십시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기적을 행하시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셨던 예수님이십니다. 언제나 기도 중에
하느님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그런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언제나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려했던 바오로 사도 역시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겪었습니다.
지난 주 평화 신문에 나왔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느 분을
추모하면서 쓴 시일까요?
“큰 바위 얼굴”
그는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경제를 발전시키고 나라를 부흥시켰다고
기념관을 만들고 동상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큰 바위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많은 돈을 벌었고
큰 기업도 거느린 재벌이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기업가로 인정을 받았고
이름을 날리며 명성도 높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큰 바위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보내준 지도자라고
사람들이 모여서 칭송을 하였습니다.
기적을 일으킨다고 선전하면서
집회를 열고 찬양하며 경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큰 바위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힘없고 약한 사람들의 편이 되어
그들을 위로하며 힘이 되었습니다.
언제는 철거민들과 함께 아파하고
언제는 쫓기는 자들을 감싸며 안아주었습니다.
그는 권력을 내세우지도 않았고
이름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나는 바보야! 하고 자신을 낮추면서
빙그레 웃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았습니다.
진실로 우리나라의 큰 바위 얼굴은
바로 그 사람이 이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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