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2월9일 [(녹) 연중 제5주간 금요일]
[수도회] 모든 것을 좋게 하시는 주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열왕 11,29-32. 12,19
† 복음 마르 7,31-37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지만, 사람들은 모두 놀라워하며
이를 알리지 않습니까?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목적은, 누구든지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 한다면
반드시 구원된다는 것을 일러 주시기 위함입니다. 일반적으로 잘 듣지
못하면 말도 제대로 못 한다고 합니다. 하느님 말씀도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그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왜곡하여 전할
위험마저 있게 되지요. 그 경우 다른 이에게 끼치는 피해는 얼마나
크겠습니까?
하느님의 목소리, 세상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가
열려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 이웃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정신적
귀먹음이 세상의 많은 비극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끊임없이 들어야 하며, 신앙적으로 귀먹은 상태에
있다면 주님께서 “에파타!”라고 말씀하시며 치유해 주시도록 간절히
청해야 하겠습니다.
제대로 듣고 말하게 된다는 것은 참된 해방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수많은 억압과 편견, 악습, 거짓 권위에 짓눌려
올바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왜곡하여
받아들이면, 올바른 가치관과 식별력마저 잃게 되지요. 그들에게 참된
해방이 주어진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교만
2018년 나해 2월9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이스라엘은 다윗 집안에 반역하였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1,29-32 12,19
복음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1-37
언젠가 제주도에 갔다가 어느 횟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집은
주인이 배를 가지고 있어서 직접 싱싱한 물고기를 잡아 오는
곳이었습니다. 가게 안에 들어가서 어떤 회를 먹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데, 주인이 마침 ‘다금바리’가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회
맛이 끝내준다는 이야기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선 가격을 물었습니다. 너무 비싸더군요. 그래도 그
맛이 너무나 궁금했기 때문에, 사장님께 “다금바리 회 맛은 어때요?”
라고 먼저 여쭤보았습니다. 이 질문에 사장님께서는 아주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제가 먹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네요.”
제주도에서 오랫동안 어부로 일하셨다는 분께서 어떻게 다금바리 회
맛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회 못 드세요?”라고
물었지요. 그러자 이러한 답변을 하십니다.
“다금바리는 가격이 비싸니 팔아야지 어떻게 제가 먹어요?”
자기가 잡은 것이지만 이제까지 맛 한 번 보지 못했다는 말씀에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사실 다른 이들의 흘린 노력의 결실을 너무
쉽게 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내 자신의 작은 노력을
가지고서 충분히 보상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교만으로 가득 찼던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점들에 대해 묵상을 하다 보니, 스스로에 대한
교만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적이 많았음을 깨닫습니다. 주님께
역시 마찬가지이지요. 주님의 사랑을 보지는 못하고, 내 자신이 행한
약간의 노력만으로 충분히 주님께 보상 받아야 한다는 착각 속에
있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지요. 그에게 손을 얹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치유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손을 얹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말씀 한 마디로도
충분히 치유의 은총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조금 복잡한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에파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제야 그는 치유의
은총을 얻습니다. 왜 이렇게 복잡한 방법을 쓰셨을까요? 단순히 말을
듣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따로 데리고 나가시고, 손가락으로 만지고 또
침도 발라주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에파타!”라는 말씀으로 주님을
향한 마음이 활짝 열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교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대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그 사랑의 힘으로 이 세상에서 힘껏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이 활짝 열려야 합니다.
사람은 본질적이면서 실존적 존재. 우리의 궁극적 실체이자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마리안 윌리엄스).
에파타.
주어와 목적어를 바꿨을 뿐인데....
이별의 아픔을 겪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상대방으로부터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받고서는 큰 충격을 받았지요. 그리고 자존감을 크게
상실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누군가가 자신에게 해준 말로 인해 이 아픔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이렇습니다.
“‘내가 너를 잃은 게 아니라, 네가 나를 잃은 것이다.’라고 생각해라.”
주어와 목적어만 바꿨을 뿐인데 그 의미에 큰 변화가 생겼다고 합니다.
나를 잃은 네가 더 손해라는 것, 이를 통해 자존감을 가지고 힘차게
살 수 있었답니다.
조금만 바꾸면 절망이 희망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지금 어렵고 힘든
상황에 있을 때, 조금만 내 마음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특히 주어와
목적어를 바꿀 수 있는 지혜와 용기만 있으면 어떤 것도 거뜬하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오늘도 미사 안에서 힘을 얻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모든 것을 좋게 하시는 주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2월9일 연중 제5주간 금, 마르 7,31-37
“‘열려라!’ 하고 말씀하시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렸다.”(마르 7,35)
모든 것을 좋게 하시는 주님
예수님께서는 티로 지역을 떠나 하느님의 놀라운 권능을 보여주셨던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힘으로 "열려라!" 하고 말씀하시어,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를 열어주시고 묶인 혀를 풀어 제대로 말하게
해주십니다(7,33-35).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권능과 신비 그 자체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만질 수 없는 권능께서 만질 수 있는 육신을 입고 내려오시어,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당신께 다가와 당신 인성을 만짐으로써 신성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굳게 닫혀 있던 입이 황폐함을
풍요로움으로 바꾸어주신 분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시리아인 에프렘)
예수님께서는 닫히고 묶인 모든 것을 풀어주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거룩한 소통의 문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기심과
탐욕의 어두운 감옥에 자신을 가둘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기억상실증에 걸려 세상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욕망에 사로잡히고 스마트폰에 중독되어 다른 이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아집과 교만은 영적인 감각세포를 마비시켜버립니다. 현세 권력에
대한 야망과 물욕에 사로잡혀, 진정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는 때도 있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품으면 닫힌
영혼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 '제대로'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손을 잡고 그분 안에 머무는 순간, 묶힌 것이 풀리고
닫힌 문이 열립니다.
예수님께서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주시자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합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7,37) 이를
직역하면 '그분이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는 뜻이지요. 예수님이 바로
모든 피조물과 인간의 삶을 창조 때의 '보기에 좋은 상태'로
되돌려주시는 재창조의 열쇠이십니다.
우리 모두 삶의 결정적 중심이요 목적이신 주님 곁에
머물러야겠습니다. 각자 자신 안에 굳어지고 닫히고 묶인 부분은 없는지
성찰해봐야겠습니다. 무의식의 작동과 익숙한 습관, 굳어진 사고의
틀과 신념고착의 덩어리를 알아내어 풀어내야겠습니다.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 주님의 영 안에 머물러야겠지요. 그리하여 귀를 열여 다른
이들의 한숨소리를 듣고, 사랑의 소통을 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의 말과 세상의 아픔과 피조물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고질적인 병에 감염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러려면 세상
재물과 권력과 명예가 아닌 주님을 소유해야겠지요. 소통의 샘이요
해방의 문이신 주님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좋게
하시는'(7,37)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바라고, 그분 뜻에 맞는 것을
행하며, 그분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그분 눈으로 만사만인을
바라봐야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인간과 접촉하시는 하느님
2018년 나해 2월9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
인간과 접촉하시는 하느님
인류 역사 안 등장했던 왕들은 대부분 안전할 뿐더러, 웅장하고
위풍당당한 왕궁 안에 주로 거처했습니다.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회의들도 왕궁 안에서 주로 이루어졌습니다. 왕과의 만남이 필요한
백성들은 또한 왕궁으로 찾아와야만 했습니다.
물론 가끔씩 특별한 왕들이 있었습니다. 신하들의 보고를 통하지 않고
자신의 두 눈으로 백성들의 민생을 살피기 위해, 변장한 채 몰래 왕궁
밖으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물고 예외적인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보통 왕들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행보를 한번 보십시오. 참으로 특별합니다.
고정적으로 머물 수 있는 왕궁이 아예 없었습니다.
어제는 티로에서, 오늘은 시돈으로, 내일은 갈릴래아 호숫가로...
공생활 기간 내내 일정한 거처없이, 언제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셨습니다. 때로 살기등등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로부터
성밖으로 쫒겨나기 일쑤였습니다. 때로 말이 철야기도지, 아마도 거처가
확보가 안되 밤을 꼬박 새워 기도하신 적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왕중의 왕이신 예수님의 떠돌이 생활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마도 당신의 삶 전체를 온전히 백성들과 공유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당신이 사랑하시는 양떼들과 24시간 함께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3년 남짓 밖에 안되는 짧은 순간을 오로지 당신 백성의 구원을 위해
100퍼센트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겸손하신 예수님이셨기에, 당신께서 견고하고 웅장한 왕궁에 머물고
계시면, 가난한 백성들이 찾아오기 힘들까봐, 꼼짝 못하고 누워있는
백성들의 불편한 이동거리를 감안해서, 왕이신 당신께서 친히 백성들
사이로 내려온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안락하고 쾌적한 높은 왕좌를 포기하시고, 냄새 풍기는 환자들과
죄인들과 직접 온 몸으로 접촉하시기 위해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참 많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선거 직전에만 딱 한번 내려와서, 시장 상인들을 만나 사진을 찍는 어떤
사람들은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시종일관
서민들과 고통받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낮은 행보를 계속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말입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치유하시는 과정에서도, 전지전능하신
예수님께서는 그저 말씀 한 마디로도 순식간에 치유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친히 그와 눈을 마주치시고,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세상의 창조주, 만민의 왕께서 한 비참한 인간과 나란히 마주 서시고,
접촉하시고, 스킨십 하시는 모습에서 그분의 인류를 향한 극진한
사랑과 자비를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만질 수 없는 권능께서 만질 수 있는 육신을 입고 내려오셨습니다.
모든 인간이 육체적 접촉을 뛰어넘는 당신 신성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교부 에프렘)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에파타!" 곧 "열려라!"(마르 7, 34)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 년 나해 2월9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
"에파타!" 곧 "열려라!"(마르 7, 34)
하느님 앞에서 조차 열리지 못하고 닫혀있는 우리의 폐쇄된 삶입니다.
열리는 열림 속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두려움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사람을 구하시는 진실된 열림입니다.
우리의 모든 시간은 하느님께 열리는 사랑의 시간입니다.
나와 너를 구하시는 에파타의 방식입니다.
열려야 용서할 수 있고 열려야 사람의 아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자신의 진정한 열림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삶이여 하느님 앞에서 활짝 열려라!
듣지 못했던 우리가 말하지 못했던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듣고 하느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로 열려야 진정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닫혀 있는 모든 것은 이와같이 "열려라!"(마르 7, 34)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5주간 금요일
2018년 나해 2월9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 마르 7,31-37
오늘 평창올림픽이 개막됩니다. 어떤 분들은 평양올림픽이라고
말하고, 어떤 분들은 평화올림픽이라고 말을 합니다. 저는
평창올림픽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올림픽은 개최하는 도시의 명칭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올림픽을 유치하고, 준비했던 강원도와 평창
사람들이 들으면 서운할 것입니다. 올림픽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올림픽의 이름까지 바꾸는 것은 곤란합니다.
평창올림픽을 통해서 평화와 화합의 잔치가 되면 좋겠습니다. 아무런
사고 없이 안전하게 마무리되면 좋겠습니다.
북한 선수들이 처음에는 무척 어색했다고 합니다. 남한 선수들도 역시
어색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함께 훈련하면서 자연스럽게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운동을 통해서 마음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올림픽을 통해서 남과 북의 닫힌 문이 조금씩 열렸습니다. 문화와
예술인들이 문을 열고, 북한의 학생들이 남한으로 수학여행을 오고,
남한의 학생들이 북한으로 수학여행을 가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의 귀와 입을 열어 주셨습니다.
남과 북은 철책으로 닫혀있습니다. 불신으로 닫혀있습니다. 이념으로
닫혀있습니다. 그러나 자주 만나다 보면, 대화하다 보면 꽁꽁 얼었던
얼음이 봄이 오면 녹듯이, 피는 물보다 진하듯이 언젠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통일신라(676-935),
고려(918-1392), 조선(1392-1910)을 거치면서 우리는 1300년 이상을
하나의 나라로 함께 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분단의 시대에 태어나서,
분단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우리의 후손들은 하나
된 나라에서 살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친한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하나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참 많은 말을 합니다. 어떤 말은 용기와 힘을 주기도
하고, 어떤 말은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 친구가 버스에다 카메라를 놓고 왔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친구를 위로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카메라는
다시 사면 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카메라를 버스에
놓고 왔던 친구에게 정말 위로와 용기를 주는 다른 말도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카메라를 잃어버렸으니 속상하겠다. 카메라를 다시 찾을
방법을 찾아보자.’ 하고 얘기할 수도 있었는데, 단순하게 돈 주고 다시
사면된다고 얘기한 것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 운전기사가
연락하였습니다. 버스를 청소하다가 카메라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오면 그편에 보내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찾아오는 많은 병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을
하십니다. ‘에파타’ 이 말씀은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어둠 속에 빛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절망 중에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고독한
이들에게 위로를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이야기, 희망을 주는 이야기, 위로를 주는
이야기, 용기를 주는 이야기를 해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야 한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2월9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 (마르7,31-37)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야
귀가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는 귀머거리 입니다.
입이 있어도 하느님에 관해 말할 수 없다면 그는 벙어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현존을
깨닫기도 전에 나를 사랑하시고 먼저 생각하고 찾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로마10.17).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에파타!” 곧 “열려라!” 하시며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능력으로 귀를
열어주시고 말할 수 있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사회적으로는 공부도
많이 하고 지위도 있으며 세상 것에는 해박하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는
둔한 사람들이 있다면 들을 귀가 없는 그는 귀머거리요, 입이 있어도
주님을 전하는 일에 사용하지 못한다면 반벙어리입니다. 그런 우리의
귀와 입을 열어주시길 청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엘리사벳 자매는 청각장애인입니다. 그분의 취미는
음악 감상입니다. 놀라시겠지만 ‘음악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육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지금도 서예를 가르치고
장애인을 위한 활동을 열심히 하시며 말씀도 얼마나 이쁘게 잘
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는 육체적인 귀는 닫혔지만 영적인 귀와 입이
열려 있으십니다. 내면의 귀가 열리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환자를 따로 데리고 나가서 손가락을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우리도 한적한 곳에서 주님과 따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끝날 수 있음에도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자신을 가두어 놓은 주위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을 발라 혀에 대는 행동으로
당신의 관심과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 하셨듯이 우리도 구체적인
행동을 통하여 이웃사랑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꼭 안아주는 포옹으로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그의 손길에 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발라 혀에 대는 것은 비위생적이고 단정치 못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늘 혼자
외롭게 지냈던 그들에게는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엄마가 자식에게
먹을 것을 꼭꼭 씹어서 주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셨다고 하였는데 하늘을 우러러 본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하였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물고기 2마리와 빵 5개로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루카9,16).을 베풀 때도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어떤 처지나
환경 안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은 하늘 아버지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을 찾으면 만나 뵐
것이다”(신명4,29).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귀를 열어 주시고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시는 주님을 뵙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말씀에 열리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위로와 구원을 얻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너 한껏 네 입을 벌려 보라, 나는 곧 그 입을 채워
주리라.”(시편80,11) 사람들이 우리의 변화된 삶을 보고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하고 놀라워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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