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거철을 맞아
용맹정진(勇猛精進.잠을 자지 않고 눕지 않고 수행에 전념하는 것) 에
들어가면 산중은 아연 긴장하게 된다.
용맹정진을 하다가 탈락하면 누구나 예외 없이 해인사를 떠나야 한다.
용맹정진에 참가하는 선방(禪房) 스님들은 스님대로,
또 그 뒷바라지를 하는 소임(所任.행정적 직책) 을 맡은 스님들은
그들대로 마지막 수행의 정점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정진 중 휴식시간은 세끼 공양(식사) 시간,
식사 전후 해 방 정리하고 세수.칫솔질하는 시간이 약 한시간씩 허용된다.
그 시간을 이용해 어린 스님들은 눈 좀 붙여보려고 안달이다.
간혹 창고나 탁자 아래에서 잠에 떨어진 스님이
입선(入禪.참선을 시작하는 것) 을 알리는 죽비 소리를 듣지 못해
다른 스님들이 찾아나서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한다.
선방에서 졸거나 잠든 스님을 깨우는 물건은 장군죽비다.
장군죽비는 길이 1m20㎝, 두께는 어깨에 닿는 부분 4~5㎜, 넓이는 3~4㎝ 정도.
반드시 물푸레나무로 만드는데,
그래야 낭창낭창하여 유연성이 좋으며,
때려서 잠을 깨워도 크게 아프지 않기 때문이다.
때릴 때도 목과 어깨에 튀어오른 쇄골뼈 사이
살이 있는 부분을 정확하게 쳐야 아프지 않게 잠을 깨운다.
여간 숙달되지 않고는 경책을 잘 할 수 없다.
잘못 하다가는 귓바퀴나 엉뚱한 데를 때려 시비가 붙기도 한다.
성철 스님에겐 그런 관행들이 의미가 없다.
경책의 경우 보통 등짝을 후려패고, 혹시 더 큰 잘못을 하면
여기저기 가리지 않고 맞아야 한다.
한번은 성철 스님이 선방인 선열당의 다락을 올라가다
젊은 수좌 하나가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을 봤다.
산으로 포행(산책) 다니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무 말 않지만
낮잠을 자다가 들키면 용서없는 것이 성철 스님의 성격이다.
"이놈!"
성철 스님이 들고 다니던 죽비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깜빡 낮잠을 즐기다 아닌 밤중의 홍두깨격으로 느닷없이
기습을 당한 스님에게 다른 방어수단이 있을 수 없다.
성철 스님의 기세로 봐 죽비를
그대로 맞고 있다간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젊은 스님이 성철 스님의
장군죽비를 부러뜨리고는 창문으로 뛰어내려 도망쳤다.
오후 입선시간이 되어 모두들 앉아 참선정진을 하는데,
도망갔던 그 수좌도 다시 돌아와 좌복 위에 앉아 정진을 했다.
그 스님만 아니라 모두들
"어떤 불호령이 떨어지나"하는 걱정에 좌불안석이었다.
저녁 예불을 마치고 다시 참선에 들어가는데
방장인 성철 스님의 '만참(晩參) 법문'이 있다는 전갈이 왔다.
성철 스님은 안거철 수시로 선방 스님들을 불러 법문을 하곤 했는데,
이를 소참법문(小參法門) 이라 한다.
그 중에서도 저녁 무렵 하는 법문이 '만참법문'이다.
스님들이 모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모였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정작 "참선 잘 하라"는 당부만 하고는 끝냈다.
지난 일,
이미 가르침을 준 일을 다시 언급하거나 문책하지 않는 성정 탓이다.
성철 스님의 호통과 꾸짖음에야 누가 반기를 들랴만,
선방 스님들끼리 경책을 하다 보면 종종 언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경책을 하는 사람은 분명히 졸고 있는
스님 앞에 가서 "경책하겠다"고 통지를 하는데,
졸던 스님은 잠이 깨 "절대 졸지 않았다"고 불복하는 경우가 문제다.
"졸았으니 맞아라" "졸지 않았으니 안맞는다"는
시비가 한바탕 소동으로 확산되기도 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철 스님이 꾀를 냈다.
"경책하는 스님이 돌다가 조는 사람이 있거든
손수건을 장군죽비에 걸어 그 스님 어깨나 무릎 위에 먼저 놓는다.
그러고서 조는 스님을 깨워 그 손수건 놓인 것을 먼저 확인시키고 경책해라."
이후 경책과 관련된 시비는 거의 없어졌다.
성철 스님의 아이디어 중 특이한 것 하나는
일주일간 용맹정진을 마친 스님에게 산행을 시키는 것이다.
피곤하다고 누워버리면 그 피로를 풀 수 없고
빨리 이길 수 있다는 지론에 따른 것이다.
실제로 정진후 산행을 하면 몸이 가벼워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