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2월20일 [(자)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수도회] 올바르고 참된 기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55,10-11
† 복음 마태6,7-15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가장 아름답고
완전하다고 불리는 주님의 기도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지요.
전반부에서는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며,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오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어 후반부에서는 영적, 물적으로 필요한
것을 청하지 않습니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잘못을 용서하시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할 때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이 첫 번째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이어 나에게 필요한 것을 청할 때도 자신의 이익보다도
인류의 공동선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의 내용은 합당하고
보편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자세는 하느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심과 끈질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9).
또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하느님께 용서받으려면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나도 누군가로부터 끊임없이
용서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면 내가 내 힘만으로가
아니라, 누구인지도 모르는 많은 사람의 힘으로 지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들의 도움마저도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 역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조그만 것에도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또한 사소한
것에도 욕심부리지 않을 때, 이 지상에 하느님 나라가 실현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기도가 어려우신 분은 주님의 기도를
2018년 나해 2월20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제1독서
<나의 말은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5,10-11
복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7-15
저는 책을 많이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책을 통해서 정말로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어떤 책을 읽을지를 인터넷 서점을
보다가 입문서의 책 중에서는 이런 제목의 글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할 수 있다....’, ‘누구나 쉽게 따라하는...’,
‘쉽게 배우는....’ 등등 뭐든 쉽고 만만하게 보입니다. 저자는 자신의
분야가 너무나 쉽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노력하면 다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책들을 보고서 많은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자기는 전문가니까 쉽지.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쉬울 수
있어?”
그렇다면 쉽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자기 분야의
소위 ‘고수’입니다. 어느 정도 올라가보니 별 것 아니었음을 깨달았고,
자기도 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요령을 받아들이면 쉽게 익힐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해왔던 것은 글 쓰는 것과 강의 등을 통해 말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아직도 너무 쉽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예전과는 다르게 크게 어려움을 갖지는 않습니다. 초보 수준을
벗어나서 약간 나아진 모습을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수준까지 오르다보니 오히려 글 쓰는 것과 말하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초보만 벗어나도 자신이 생깁니다. 그리고 고수가 되면
쉽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종종 기도가 어렵다는 말씀을 많이 듣습니다. 그래서 기도에 대한
말씀을 드리면, “그건 신부님이니까 가능하죠.”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선 기도가 왜 어렵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기도에
있어서 초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도가 쉬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초보상태에서 얼른 벗어나야 합니다. 초보만 벗어나면
쉬워지고 오히려 재미있어 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기도에 있어 초보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렵고 힘든 관계가 아닌 기쁘고 행복한
관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보의 상태에서는 하느님이 너무
어렵고 힘든 분으로만 생각해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기가 더욱
더 힘들어 지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이유로 주님께서는 기도에 대한
말씀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하십니다.
우선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특히 주님의 기도의 전반부에
있는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부분은 우리가 초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기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가 어려우신 분은 주님의 기도를 천천히 바쳐보십시오. 그
기도문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바치다보면 어느 순간에 초보에서
벗어나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을 기뻐하는 자신을 만날 것입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지금 하라. 그러면 다음 일을 하기가 수월할
것이다. 첫발을 내딛으면 그다음 걸음은 쉽게 뗄 수 있다
(사야도 우 조티카).
어제부터 글을 쓰기 위해 지리산 옆에 있는 산청에 와 있습니다.
걱정이 태산.
많은 분들이 산을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산은 어떤 산일까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다는 백두산? 제주도의
한라산, 설악산이나 지리산 역시 좋아하는 산에 뽑힐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산보다도 더 좋아하는 산이 있답니다. 바로 ‘부동산’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너무나 많이
오르는 산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걱정이 태산’이라고 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걱정이 태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요즘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 앞에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
역시 이 ‘걱정이 태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걱정만 한다고
해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이 가장 빠른 때이니까요.
이러한 길을 조용히 걷다보면 걱정이 사라집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올바르고 참된 기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2월20일 사순 제1주간 화. 마태 6,7-15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
올바르고 참된 기도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6,7) 하십니다. '빈말'은 자기중심적인 소리요, 하느님의 자비와
선을 추구하지 않는 소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식한 말이나
미사여구와 달변으로 하느님을 움직여,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기도는 결코 순수한 기도가 아니지요.
내 뜻과 생각, 내 이익을 앞세우는 기도는 올바른 기도라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과 세상을 살리는 사랑과 생명의 언어로 하는
기도가 올바른 기도입니다. 이웃사랑과 정의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언행일치의 기도가 참 기도입니다. 올바른 기도는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 뜻을 따르고, 모든 일에서 공동의 선과 정의를 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기도의 본보기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이 기도는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로써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요 형제임을 고백합니다. ‘아빠’이신
하느님은 “빛이시고 사랑이시며, 으뜸선이시고 영원한 선”이십니다
(주님의 기도 묵상 2). 우리는 '하늘에 계신' 위대하신 하느님을
'아빠'(마르 14,36)라 부름으로써, 차별없이 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어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6,9) 하고 기도합니다.
하느님은 거룩함 자체이기에 그분의 거룩함에 우리가 보탤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께는 우리의 찬미와 기도가 필요치 않지요.
따라서 빛이시고 지혜이신 그분의 거룩함이 내 안에서 드러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기도나 생각만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실행하는 거룩한 표양으로 드러내야겠지요.
다음으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6,10) 하고 기도하라 하십니다.
완전히 실현된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도 실현되기를 청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이 실현되도록
기도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이 청원을 드릴 때 하느님께 숙제를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되도록 투신하겠다는 의지를 담아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이 세상에 하느님의 자비와 선과 정의를 실현하도록
힘써야겠지요. 주님께서는 불의와 차별, 탐욕과 거짓이 넘치는 땅이
선이신 하느님을 만나, 살맛나는 세상으로 바뀌도록 기도하고
행동하라 재촉하십니다.
다음 청원은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소서.”(6,12)입니다.
우리는 자신과 세상의 힘에만 의존하지 말고 날마다 필요한 힘을
하느님께 청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용서를 받으려면 형제들을
용서하라 하십니다. 형제를 용서한다고 주님의 용서를 벌어들일 수
있을까요? 용서란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와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에 필수적인 마음자세일 뿐입니다.
마지막 청원은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6,13)입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유혹에 빠뜨리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유혹 자체를 받지 않게 해달라고 청할 것이 아니라,
이겨내기 힘든 시련을 피하게 해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유혹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힘에 사로잡혀 신앙을 잃을 위험이 있는 시련을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됨을 포기하려는 유혹을
물리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빈말을 떠벌이지 말고, 순수한 마음과 정신으로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오시기를 기도하고, 자비와 선과 정의가 세상에
실현되도록 투신하는 참 기도의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예수님 기도의 특징
2018년 나해 2월20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마태 6,7-15
예수님 기도의 특징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의 기도는 꽤나 왜곡되어 있었고,
제한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강제적이었고
공동체적이었습니다. 동시에 당시 고대 근동 지방 이교도들의 기도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자연히 그들의 기도는 길고 장황했으며,
요란스럽고 정신 사나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형식적이고
정형화되어 있었습니다.
개인기도나 자유기도, 묵상기도나 침묵기도, 다시 말해서 마음이 담긴
진정성있는 기도는 찾아볼 수 없었고, 대신 소란스런 기도, 틀에 박힌
기도, 위선적인 기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의 기도가 지니고 있던 두드러진 특징 중에 하나가
장황하고 요란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굿하는 광경과 유사했습니다.
괴성과 비명을 지르고, 길길이 뛰고 난리치면서 잡신이란 잡신들을
다 불러냈습니다. 신나게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오늘날 사이비
교도들과도 비슷한 점이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유다인들의 기도는 무척이나 경직되어있었고, 정형화되어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딱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유다인들은 식사 때 마다 적정량의 포도주를 한잔씩 마셨는데,
혹시라도 어떤 사람이 한잔 더 마시고 싶으면, 그 때 바치는 기도까지
있었습니다. “포도나무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시고,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 유다인들의 이런 기도를 보고 무척이나
못마땅해하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기도할 줄 모르는
백성들을 향한 그분의 선물이 바로 ‘주님의 기도’였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바치신 기도는 우리의 기도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아주 이른 새벽이나 밤늦은 시간, 자주 홀로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나, 일대 일의 기도를 자주
바치셨습니다. 침묵 속에 아버지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아버지와
오랜 시간 대화도 나누신 것입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마르코 1장 29-39절)
공동체와 함께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홀로 기도하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아무도 없는 시간,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오직
나와 주님 단 둘만의 시간을 갖는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바치신 기도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간절했고, 또
열렬했습니다. 빈말을 되풀이하는 이방인들의 소란한 기도를
싫어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분의 기도는 조용하고 겸손했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가장 아름다운 주님의 기도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2월20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복음: 마태 6,7-15: 기도할 때에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7절) 말을 많이 할수록 하느님께로부터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더 잘
들어주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기도를 길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런 기도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기복적인 기도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기도를
바치기를 바라신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더 잘 아시며,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우리가 무엇을 청할지 아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우리가 바라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내려주실 마음이 드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가르쳐 드려야 할 분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을
얻어야 할 분이시다. 그분께서 바라시는 것은 긴 기도가 아니라, 참된
마음이다. 참으로 우리가 그분께 항상 감사를 드리며 그분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항상
제때에 내려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9절)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아들을 믿는 이들의 특권이며, 믿음의 어머니인 교회에서 우리가 받고
그분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며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우리에게 든든한 확신을 주실 수 있도록 아버지라
불리기를 원하신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9절) 이는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로 더욱 거룩해지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우리 안에서 나날이 거룩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도록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흠 없이
열심히 살아 우리의 삶으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10절)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먼저 우리들 안에 서고 하느님께서 그
나라에서 다스리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이 나라의 시민들은 이미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그 안에 사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삶의 모습에 따라 나와 함께 있을 수도 있고 잃어버릴 수도 있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0절)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하며, 당신의 뜻이라는 힘과 그 뜻을 실행하는 능력을 주십사 청하는
것이다. 그분의 뜻은 그분께서 자녀로 삼으신 이들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11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청한다. 이것은 구원의
양식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가 죄로써 그리스도와 떨어지는
일이 없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양식으로 주님의 신성에
참여한다. 이 양식은 딱 하루에 충분한 만큼 주어진다. 이 양식은
‘내일을 위한’, ‘영원을 위한’ 양식을 뜻하며 물질로 바뀌지 않는
양식을 말한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12절) 우리는 매일 죄를 지으며 산다. 그러기에 죄의
용서를 청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죄를 용서받기 위한 조건은 다른
사람을 먼저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이
청원은 우리가 우리에게 용서를 청하는 이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용서를 청하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께 용서를 받기 바라기 때문이다.
말로는 용서한다고 하면서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이미 용서받았으므로, 용서에는 하느님과의 확고한
계약이 담겨있다. 그것은 소홀히 할 경우 앞에서 한 청원이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계약이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13절) 또한 우리는 이미 저지른 죄의 용서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새로운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주십사고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탄에게 이끌려 가도록 두지 마십사고 청하는
것이다.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13절) 이 기도는 앞의 모든 청원과 기도를
간결하게 요약하는 기도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신다면,
우리는 모든 어려움에서 확실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 이 기도를
하고나면 더 이상 청할 것이 없다. 악에 대해 하느님께 보호를 청하고
그것을 받게 되면 세상에서 하느님을 보호자로 둔 셈이니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주님의 기도를 잘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 중에서 용서에 관한 것을 특별히 강조하신다.
주님께서는 이 기도로 우리가 자비로워지기를 바라신다. 사실 이
용서는 주님과 계약을 맺는 듯한 말로 청하고 있다.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계약을 지키지 않는다면, 청원 전체가 헛일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14-15절) 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제 나에게 잘못한
이웃을 용서하면서 하느님과의 이 계약을 성실히 지키도록 하는
사순시기가 되도록 도우심을 청하자.
- 수원 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청주] 기도를 하면 할수록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2월20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마태6,7-15)
기도를 하면 할수록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기도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누군가가 기도해 준다고 하면 마음의 위로를 받습니다. 본인은 기도에
소홀히 하면서도 남에게는 기도해준다고 말하고 또 기도해 달라고
청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기왕 기도할 바에야 효과 있는 기도, 올바른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저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6,7-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청하기도 전에 알고 계신다니 청하는
바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하겠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의 본질적 요소는 많이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 기도란 사랑의 행위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더 많이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잘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사랑함으로써 사랑자체이신 하느님과 잘 통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묵주기도, 9일기도, 15기도, 33일 봉헌기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등등 성인 성녀들이 즐겨 봉헌하였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 따르는 삶의 쇄신과 실천
없이 목표한 바를 채우기에 급급해 하면서 꼭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해서 무엇을 그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 할수록 하느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께 나를 맡기게 됩니다.
루이 에블린은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열심을 다해 공덕을 쌓고, 많은 것을 청하지만
실제로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구원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기를 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먼저, 더 많이, 더 깊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한상봉).
그러므로 구하기도 전에 우리의 뱃속까지 환히 꿰뚫어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이사야서 말씀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49,15). 들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14,14).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6-7). 나보다 나를 더 환희 아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채워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 않고
더 좋은 것을 당신께서 주시고자 하는 때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심을 믿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갈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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