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3월6일 [(자)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수도회] 매정함을 버리고 끝없이 나누는 자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다니 3,25. 34-43
† 복음 마태 18,21-35
◈ 오늘의 묵상
베드로 사도는 이웃의 잘못을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하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복수와 증오의 마음을 용서의 마음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복수의 악순환’에 대해 창세기 4장 2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
하느님의 자비로 죄를 용서받은 우리는 이웃의 잘못을 조건 없이
용서해 줌으로써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어야 합니다. 우리가 부서지고
낮추어진 마음으로 남의 잘못과 죄악을 바라볼 때, 하느님의 자비로
이루어지는 ‘용서의 선순환’ 효과가 드러납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는 데 인색하면 무자비한 종이 되어 하느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이 됩니다. 그럴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보실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용서받은 만큼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남의 죄를 용서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가 됩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이웃의 작은 잘못을 너그러이 대하지 않음으로써
무자비한 종의 모습을 닮아 갑니다. 우리의 선행과 보속과 기도는
하느님께 용서받은 죄의 은혜를 되갚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의
측은지심은 용서의 원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는 훈련을 해야 하겠습니다.(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용서
2018년 나해 3월6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받아 주소서.>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25. 34-43.
복음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35
인간관계가 어렵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 사람들의
관계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자주 느낍니다. 특별히 자신의 의도를 다르게
해석하고 또한 따지듯이 말씀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되면 참으로
당황스럽지요. 그리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화가 나면서 감정이
폭발하게 됩니다.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는 상대방이 되고, 앞으로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생각합니다.
이렇게 감정의 대립을 겪게 되면 다시 보기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감정을 잘 다스리는 것입니다. 특히 상대방의
말에 강하게 반박하고 상대방의 잘못한 행동에 대한 증거가 많을수록
말투는 더욱 더 부드러워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서로가 자신의
감정만을 내세우면서 의견의 일치를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상대방을 더욱 더 사랑해야겠다.’라는 마음을 먹게 됩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감정만을 내세우게 되면 그 안에서는 어떤 긍정적인
모습은 나올 수가 없으며 그래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게 됩니다.
인터넷 댓글에서 왜 함부로 말할까요? 상대방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상대방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함부로 댓글을 달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극도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가게에 어머니와 함께 갔는데 제가
정말로 먹고 싶은 사탕이 있었습니다. 사달라고 졸랐지만 어머니께서는
꿈쩍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생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엄청나게 혼나기만 했습니다. 그 후 어느 날, 필요한
물건이 있었고 이것이 왜 필요한지를 어머니께 설명을 자세히 드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고 제 뜻대로 해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자신에게 죄를 지은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냐는 질문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그냥 ‘그래 내가
용서하는 거야.’라고 말을 하고 다짐을 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상대방을 감정적으로 대해서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보지 않을 생각으로 대한다면 절대로 용서의 단계에
다다를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 대한 용서를 하지 못할 이유를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큰 사랑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만 탈렌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못하는 속 좁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진정한 힘은 싸움으로 얻는 게 아니라 지혜를 통해 얻음을, 진정한
강인함은 감정에 저항하는 게 아니라 감정의 무게를 견디는 것을,
진정한 용기는 사랑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사랑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을(덩훼이원).
감정의 대립보다는 침묵 안에서 서로 안아만 주어도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만큼은(‘저녁이 있는 삶을 꿈꾸는 당신에게 주는 말’ 중에서)
오늘 만큼은 행복하자. 사람은 스스로 행복해지려고 결심한 정도만큼
행복해진다. 주변 상황에 맞추어 행동하자. 무엇이나 자신의 욕망
되로만 하려하지 말자.
오늘만큼은 몸을 조심하자. 운동을 하고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자. 몸을
혹사시키거나 절대 무리하지 말자.
오늘만큼은 정신을 굳게 차리자. 무엇인가 유익한 일을 배우고
나태해지지 않도록 하자. 노력과 사고와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책을
읽자.
오늘 만큼은 남이 눈치 못 채도록 친절을 다하자. 남모르게 무언가
좋은 일을 해보자. 정신 수양을 위해 두 가지 정도는 자기가 하고 싶지
않는 일을 하자.
오늘 만큼은 기분 좋게 살자. 남에게 상냥한 미소를 짓고 어울리는
복장으로 조용히 이야기하며 예절 바르게 행동하고 아낌없이 남을
칭찬하자.
오늘 만큼은 이 하루가 보람되도록 하자. 인생의 문제는 한꺼번에
해결되지 않는다. 하루가 인생의 시작인 듯한 기분으로 오늘을 보내자.
당신이 있어 참 좋은 오늘입니다.
◈ [수도회] 매정함을 버리고 끝없이 나누는 자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3월6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마태 18,21-35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매정함을 버리고 끝없이 나누는 자비
오늘 복음에서 만 탈렌트나 되는 큰 빚을 진 종이 주인 앞에
끌려옵니다. 그는 주인에게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참아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안식일을 빼고 20여
년 넘게 일해야 벌 수 있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큰 빚을 탕감해줍니다
(마태 18,27). 이렇듯 하느님의 자비는 끝이 없으며, 먼저 다가가
헤아려주고 품어줍니다.
그런데 그 종은 고작 백 데나리온 밖에 빚지지 않은 동료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다 갚으라고 다그칩니다. 동료가 엎드려 갚을 때까지
참아달라고 간청했지만, 그는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그 동료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18,30) 채무자를 가두는 것은 유대법에도 없는
가혹한 처사였지요. 그는 주인에게 받은 엄청난 자비를 까맣게 잊고,
동료에게 매정하고 옹졸하게 대한 것입니다.
우리도 매정한 종과 같은 생각과 행동으로 기울어질 때가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중심적인 때문일까요? 사랑하기보다는 사랑받으려 하고,
자신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다른 이들에게는 엄격하게
대하기도 하지요. 자기 잘못은 큰 것마저도 덮어주길 바라고 조건없이
용서받으려 합니다. 그러면서도 남의 사소한 잘못을 문제삼는 옹졸함을
보이기도 합니다.
또 남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입힌 일은 금새 잊어버리곤 하지요.
그런데 남의 작은 실수나 거슬리는 말 한 마디는 기억의 창고에
영구보관합니다. 그리곤 감정의 파도가 밀려오거나 자신이 불리해지면
곧장 꺼내어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런 처신은
주님의 자비를 망각한 영적 치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매정함과 옹졸함은 자신을 자비의 주인으로 여기는 착각에서 나옵니다.
나에게 자비가 많아서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나의 자비를
필요로 해서 용서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비이신 하느님 때문에
(propter Dei) 용서하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해주신 그
자비를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매정함과 옹졸함의 늪에 빠지지 말고, '끝없이'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나 끝없는 용서는 죄와 불의를 묵인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결코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큰 죄로 남에게 피해를 입히고 공동의
선을 침해했다면, 반드시 회개하고 정의와 공동의 선을 회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선을 파괴하는 죄를 눈감아주는 것이 자비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끝없는 용서란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소극적으로는
당장 재판관이 되어 남의 실수나 죄를 판단하지 않고, 그 사람이 회개할
때까지 사랑으로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용서는 '사랑의
이해'이지 죄를 덮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한편 적극적인 면에서 용서란
그 사람이 회개하고 정의를 회복하도록, 다가가 더 큰 자비를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큰 죄를 짓고 차마 용서를 구하지도 못하는 형제에게
다가가 하느님의 자비를 느끼게 해주라고 권고합니다. 동시에 성인은
간음죄를 범한 형제는 수도복을 벗기고 수도회를 떠나 회개생활을
하도록 했습니다. 또 순종생활을 떠나 제멋대로 떠돌아다니는 형제를,
형제라 여기지도 않겠다 했지요. 자비와 정의가 함께 감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매정함과 옹졸함을 버리고, 끝없는 용서를 실행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18,35) 아울러 자비와 정의가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다른 이의 회개를 사랑으로 기다려주고, 회개하고 정의와 선을
회복하도록 더 큰 자비를 보여주는 오늘이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마태 18.33)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3월6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계절의 봄또한 생명자체로 날마다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생명은 자유를 향해 나아갑니다.
자유를 향하여 나가는 모든 생명은 힘겹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데는 함께 살아가는
동료의식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적이 아니라 용서가 필요한 우리의 동료입니다.
참된용서는 용서라는 우상숭배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진정성있는 용서는 용서의 아픈 여정을 필요로합니다.
완벽한 단 한 번의 용서가 아니라 용서의 삶을
사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용서의 삶이란 하느님의 자비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자신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를 꼭 기억하는
사순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용서는 과거에 묶여있는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서로를 파괴시키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삶의 본질은 자유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이제 우리가 미움과 원망에서 벗어나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먼저 만나십시오.
우리에게 용서 할 힙과 용서를 구할 진실된 마음을 주시는
분또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이심을 믿고 고백합니다.
용서는 사로잡혀 있는 용서의 강박이 아니라 충만한 하느님
자비를 기쁘게 체험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느님 자비에 참여하게 하소서.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사순 제3주간 화요일
2018년 나해 3월6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마태 18,21-35
영어로 용서는 “Forgiveness”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자연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받았습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어도 이 세상에 태어났고, 무상으로 햇빛과 공기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지구는 이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푸른 별 지구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정말 우리가 받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감사드리며, 받은
것을 나누며 살기에도 부족한 시간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어쩌면 심각한 병에 걸린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런 증상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주교님께서 저를 부르신 적이 있습니다. 외국에 가서 공부도
하고, 교포 사목을 하면 좋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를 인정해
주시는 주교님께 감사했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학원에 다니면서
준비를 했으면 좋았지만, 저는 송별회를 한다는 이유로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하곤 했습니다. 주교님께서 다시 저를 부르셨습니다. 제가
술자리에 늦게까지 있었던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제게
금주를 명하셨고, 외국에 가는 것도 취소하셨습니다. 저는 저의 잘못을
돌아보기보다는 저에 대해서 주교님께 이야기를 한 사람이 미웠습니다.
성당으로 돌아와서 성경책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욥기 1장의
말씀이었습니다. 욥 성인은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했다면 나쁜 것을 주셔도 감사한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올 때 빈 몸으로 왔으니 빈 몸으로 가는 것도 감사한다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저는 욥기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안에 있던
분노가 사라졌습니다. 술에 대해서도 절제하게 되었고, 일찍 귀가하는
좋은 습관이 생겼습니다. 저의 잘못을 지적해 주신 주교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잘못을 주교님께 알려주신 친절한 분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용서’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형제가 잘못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처벌과 제재는 법과 규칙의 문제입니다. 사회는 이와 같은 법과 규칙이
있어야지 질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양심과 내적인
자유의 문제입니다. 처벌과 제재로 질서를 유지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마음의 평화를 주거나, 상처를 치유해 주지는 못합니다. 용서는 마음의
평화를 주기 때문에, 내적인 상처를 치유해 주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용서는 내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워야 한다고 하십니다.
宗敎란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한자입니다. Religion은 엉킨 실타래를
푸는 의미가 있는 영어라고 합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으로 세상사의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이 종교라면 그리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그리하여 참된 구원의 문에 도달하려면 꼭 是非를 가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법과 규정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도 용서와
사랑으로 해결되는 것을 봅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갈등과 아픔이
있다면 그것까지도 놓아버리고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따라서 용서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3월6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마태18,21-35)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능한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어느 한 순간 걸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도 아무의 도움도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넘어지는 이유를 보면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야고보사도는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야고4,1-2).하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도 탐욕과
어리석음과 성냄이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독이라고 가르칩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화를 내고 다투는 일이 없을 텐데 욕심 때문에 남과는
물론 심지어 형제와도 등지게 되기도 합니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서로를 힘들게 하고 자유를 억압하며 담을 높이 쌓게 됩니다.
얼마 전 한 어르신이 자녀들에게 유언으로 유산을 분배하고 세상을
뜨셨는데 자녀들에게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자녀들은 모두 내로라할
만큼 큰 재산을 가진, 그야말로 살만한 사람들이었는데 서로 서운함을
가지고 등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재산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재산은 분명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데
재산이 사람을 죽입니다. 그 담을 허물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담을 허문다는 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용서라는 것이 말같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듯이
하느님으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성찰해 볼 때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삶을 살아온 날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음을 다잡으려 하지만 인간의 연약함에 넘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왔고 앞으로도 분명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 용서 덕분에 죄악으로부
터의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유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당신을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며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사도7,60). 하고 애원하였던 스테파노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선물로 주어졌지만 만약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담고
있게 되면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고립되게 되고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건강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용서는 결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선행도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만큼 우리도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설령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이라도! 어느 날, 내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가슴깊이 느낄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3,9). 더 큰 사랑으로
주님 안에서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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