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3월16일 [(자)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수도회] 우리는 어디에 터 잡고 사는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지혜 2,1ㄱ.12-22
† 복음 요한 7,1-2.10.25-30
◈ [인천] 평화와 용기를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2018년 나해 3월16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제1독서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2,1ㄱ.12-22
복음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2.10.25-30
우리 삶 안에서 통제할 수 없는 것과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그 둘을 분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스토아학파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말했습니다. 사실 통제할 수 업슨 것에 대해 영향을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 번은 비행기 환승을 위해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원래 출발하는
시간보다 무려 3시간 연착되었다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화가 너무
났습니다. 비행기 대합실에서 할 일도 따로 없었고, 늦은 시간이라
쇼핑을 할 수 있는 곳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공항이 워낙 작은
곳이라서 그런지 인터넷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힘들다면서
공항 측에 항의를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즉, 통제할 수 없는 경우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상황에 영향을 받아서 화를 내고 있는 제 모습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모릅니다.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처럼 보이지만, 이 상황에서도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내 자신의 마음입니다. 화가 나는 마음은
내 것이기에 분명히 통제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책을
보다보니 3시간이 후딱 지나가더군요.
많은 이들이 변화시킬 수 없는 것에 시간을 쏟으면서 정작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에는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손해는 누구에게 돌아갈까요? 두말 할 필요 없이 내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화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둘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이러한 기도를 끊임없이 바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러한
기도보다는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를 끊임없이 바칠
때가 많지 않나요? 그래서 주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모습에서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바꾸려는 억지를 보게 됩니다. 주님은 통제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을 받아들이고 함께 하면서 그분의 뜻을
따르는 우리 자신뿐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주님께서는 분명
우리를 뛰어넘는 통제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분께 아무도 손을 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실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주님의 일과 세상의 일, 이 둘 사이를 올바로 정의하고 분리할 수 있는
지혜를 주님께 청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더 이상
주님께 불평불만의 모습으로 다가서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
찬미의 모습으로 다가서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무엇으로 채워가는 것이다(존 러스킨).
어제 강의를 했던 서울 우장산 성당.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
1991년 일본의 사과 산지로 유명한 아오모리 현에 큰 태풍이 휘젓고
지나갔습니다. 그 결과 과수원에서 익어가던 사과들이 떨어져서 팔 수
없게 되었지요. 한 해 농사를 망쳤으니 농부들의 실망이 컸을까요?
그런데 떨어진 사과를 줍던 농부가 아직 나무에 매달려 있는 몇 개의
사과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과들을 ‘떨어지지 않는 사과’
라고 이름을 붙여서 팔았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사과들은 모두 높은 가격에 팔렸습니다.
‘떨어지지 않는’이라는 말이 ‘합격’을 의미한다면서 수험생들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이 되었던 것이지요.
태풍으로 사과 농사를 망친 것은 통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는 것은 통제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과연 통제할 수 없는 것과 통제할 수 있는 것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혹시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원망과 절망으로
다가서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장산성당 제대. 성전을 지으면서 봉헌한 신자들의 묵주기도
꾸러미가 담겨있어요.
◈ [수도회] 우리는 어디에 터 잡고 사는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3월16일 사순 제4주간 금,
지혜 2,1ㄱ.12-22; 요한 7,1-2.10.25-30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요한 7,27ㄴ)
우리는 어디에 터 잡고 사는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죽이려는 유다인들의 음모를 알아차리시고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치 않으셨기에(7,1) 갈릴래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초막절 축제 때에 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을 죽이려는 유다인들 앞에서, 자신의
신성(神性)과 메시아로서의 신분을 선언하심으로써(7,10. 28)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의 일부 시민들은 예수님의 기원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드러냅니다(요한 7,27) 그들은 예수님이 갈릴래아
출신이라고 굳게 믿어 그분의 메시아성을 부인합니다. 그들은 그분의
기원을 모르고 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메시아가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에서 와 획기적인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내리라 기대했지요. 그들은
메시아라면 마지막 순간까지 숨겨져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 시민들은 자신들의 죄를 정화시켜줄 새로운 메시아를
고대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
없었습니다. '때가 되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이런 기대를 명백히
실현하실 것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고 들은 것과 자기들만의 기대치에 묶여버린
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파견을 받아 오신 메시아이심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감각과 지식과 물리적 장소에 갇혀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 뒤에 계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나자렛과
물리적 시간(크로노스)의 어둠 속에 머물렀기에 진정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분의 삶과 사명의 기원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신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스스로 오지 않고 '진실하신 분'으로부터
파견되었다 하시며, 자기의 신적 기원을 밝히십니다. 니코데모나(3,2)
태생 소경도(9,31 이하) 예수님이 하느님으로부터 오셨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일부 시민들은 그 신적 기원과
사명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결국 그들은 거부하고 고집을 부리며
예수님을 잡으려 합니다(7,30).
그들은 오늘 제 1독서에 나오는, 알렉산드리아의 악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들은 물질주의와 쾌락에 빠져, 악을
버리기는커녕 의인을 보는 것만으로도 짐이 된다(지혜 2,14)고
투덜거렸지요. 그들은 하느님께서 의인을 돌보아주시는지
시험하려고, 의인에게 모욕과 고통을 주었습니다(2,18-19).
우리는 어떻습니까? 머리로만 예수님의 기원과 사명을 알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과 완전하고 깊은 친교
가운데 계신 그분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과 감각의 틀을 깨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
믿음과 사랑으로 살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알아보는 눈을 멀게 해버리는 감각과 경험과 지식의
틀에서 벗어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거부하는 몸짓과 완고한 마음은
악의 덫임을 상기해야겠지요. 이기적이며 세속적인 헛된 기대를
내려놓고,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예수님께 삶의 출발점과 목표를 두고
살아감으로써, 참 하느님을 드러내는 오늘이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기타] 금식 선포/오늘의 능력말씀
2018년 나해 3월16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금식 선포
오늘은 “금식 선포”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역대하 20장 3절 말씀에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했습니다.
여호사밧왕은 연합군의 공격 앞에 금식을 선포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자세를 보입니다.
여러분 사실 금식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금식하라는 말만 듣고도 금식을 하기 전부터 벌써 걱정이 태산입니다.
금식하면 둘 중 하나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하나는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먹을 생각 밖에 나지 않습니다.
금식할 때에 하나님만 생각하며 부르짖어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기뻐하시고 능력과 권세의 손으로 기적을 베풀어주십니다.
그것이 금식기도의 힘 아닙니까? 하나님께 의뢰하고 금식하며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응답을 반드시 하시겠다.’ 약속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하는 우리를 통해서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할렐루야!
-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서울] 사순 제4주간 금요일
2018년 나해 3월16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요한 7,1-2.10.25-30
성소국 사제 모임을 다녀왔습니다. 친교를 나누고,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신부님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참신한 아이디어로 학생들에게 사제성소의 꿈을 심어주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방학이면 한 달 동안 학생들과
합숙하며 지낸다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제 막 성소국의
업무를 시작하는 신부님들에게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재정적인 뒷받침도 되고, 함께 일할 분들이 많기 때문에 영상물을
만들었고, 교재를 만들었습니다. 영상물도 나누어 드렸고, 교재도
필요한 분들에게는 나누어 드리기로 했습니다. 저 역시도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함께 한 달 동안 기도하고, 미사하고, 복음을 나눈다는
신부님의 이야기가 감동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생님이
메시아이십니까?”라고 묻던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오.”라고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알았습니다. 학생들은 신부님과 함께 지내면서 사제가
되는 꿈을 키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달 동안의 합숙을 참지 못하고 돌아가는 학생도 있었다고 합니다.
공동체 생활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제가 된다는 것은 공동체에 속하는
것이고, 공동체가 바라는 방향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제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공동체 생활을 견디지 못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하려고 한다면 삶의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만남과 우리들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제 아주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어떤 이발사가 자신의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제자를
한 명 맞이했습니다. 3개월 동안 열심히 스승님께 기술을 익힌 제자는
드디어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지요. 그는 그 동안 배운 기술을 최대한
발휘하여 첫 번째 손님의 머리카락을 열심히 깎았습니다. 그러나
거울로 자신의 머리 모양을 확인한 손님은 투덜거리듯 “머리가 너무
길지 않나요?”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초보 이발사가 손님의 말에
아무 답변도 못하고 있을 때, 스승님이 웃으며 말합니다. “머리가 너무
짧으면 경박해 보인답니다. 손님에게는 긴 머리가 아주 잘 어울리는
걸요.” 이 말을 들은 손님은 금방 기분이 좋아져서 돌아갔습니다.
잠시 뒤에 두 번째 손님이 들어왔습니다. 이발이 끝나고 거울을 본
손님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너무 짧게 자른 것 아닌가요?” 라고
말합니다. 이번에도 초보 이발사는 아무 말도 못하는데, 스승님께서
말합니다. “짧은 머리는 긴 머리보다 훨씬 경쾌하고 정직해
보인답니다.” 이번에도 손님은 매우 흡족한 기분으로 돌아갔습니다.
신부님들과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한 신부님께서 신발을 벗었는데
냄새가 심했습니다. 다른 신부님들은 코를 막기도 하고,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고, 이게 무슨 냄새냐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의 말이 분위기를 따뜻하게 바꾸었습니다. “오늘 일을 많이
하셨나 봅니다.” 하루 종일 신자들과 만나면서 열심히 일을 했기에
발에서 냄새가 난다고 이해하시는 신부님이 정말 멋져 보였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이웃과 하느님께 어떤 다리를 놓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정과 비난의 다리는 분노와 미움을
키우게 됩니다. 칭찬과 긍정의 다리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이웃들에게
비난과 부정의 다리가 있다면 그것을 치워버리고 칭찬과 격려, 긍정과
사랑의 다리를 놓았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하느님과 함께한다면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3월16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요한 7,1-2.10.25-30)
하느님과 함께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728-29). 이 소리를 듣고 유다인들은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랜 역사 안에서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겨왔고 메시아를 기다려 왔는데 나자렛 촌놈인
예수라는 사람에게서 자신들이 하느님을 모르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습니다. 분노와 시기 질투가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출신배경을 알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유다인들에 의하면 메시아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나타나야 하며 아무도 그의 출처를 몰라야 합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의 현존 안에 숨겨져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은 촌뜨기로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안다는 것이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습니다. 가난한 나자렛
목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 메시아가 될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야말로 확실하게 알면 힘이요, 능력이지만 어설프게 알면 아는 게
병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비록 의문이 간다 할지라도 우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일단은 받아들여야 비로소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또 확고히
믿게 됩니다. 존 포엘신부는 “믿어라. 그러면 너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말라. 먼저 믿어라. 그러면
나는 네가 애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너에게 더 위대한 일을 행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모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
의심이 해소된 후 믿겠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과학적이 확인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단 한 번의
기도가 모든 것은 해결하는 것은 아니어도 우리는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절망을 극복하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비록
저의 믿음이 부족하오나 당신을 주님으로 믿사오니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촌뜨기가 말하여도 그 말이 힘이 있고 살아있으니 그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개천에서 용난다’ 는 옛말이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집안에서 훌륭한
인물이 났을 때 쓰는 말입니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나와서는 안 됩니까? 어디에서 태어났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어떤 삶을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지혜로 사느냐? 아니면
세상의 지식으로 사느냐가 믿음의 사람을 결정합니다. 글도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교 교수보다도 훨씬 더 큰 믿음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 그의 믿음을 판단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만든 예수님상’을 올바로 세우기를 희망합니다. 아무리 형편없는
나자렛 출신이라 해도 하느님과 함께하면 세상을 구원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유다인들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3월16일 사순 제4주 금요일: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유다인들
복음: 요한 7,1-2.10.25-30: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이제 당신 신변의 위협을 아시고 아직 당신의 때가
아니었으므로 갈릴래아 지방을 다니신다. 그리고 초막절이 되어
제자들과 따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 초막절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던 생활을 기억하며
그때와 같은 천막을 세우며, 9월말에서 10월 초순에 걸쳐 지냈다. 이
축제는 8일간 계속되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영광스럽게 변모시켜 보여주신 때가 바로
초막절이었다. 이 초막절 때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겁내고 계시리라 생각했는데, 축제
때 드러내 놓고 말씀하시자 군중은 놀라워했다. 사람들이 기를 쓰고
그분을 잡으려 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26절) 하고 말했던 것이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7절) 이 말은 근거 없는 생각이다. 성경에는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마태2,23) 또 헤로데가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냐고
묻자 메시아는 유대아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자들의
증언을 증거로 제시하였다.(마태 2,6 참조) 메시아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누가 그의 가계를 말할 수 있으랴”
(이사 53,8 칠십인역 참조)에 근거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으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은 모르고 있다. 그래서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28절)고 하신다. 그러시면서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28절)라고 하셨던 것이다. 즉 그분의 가족들을 알고
고향을 아는 것뿐이며, 그분에 관해서 모르는 것은 당신이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에게서 오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들이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하느님과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29절) 당신 말고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은 그분께서 아버지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본성으로
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유일한 분이시므로
그분만이 하느님을 아신다. 다른 모든 만물이 알지 못하는 아버지를
그분 홀로 아시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이 누구에게서 왔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그리스도를 참으로 알고 있는가?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30절)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에 자신들의 지식을 믿고 있던
유다인들은 격노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한다.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이 원하시지 않으면 붙잡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의 때’란 그분께서 죽음에 처해지기로 결정하신 때를
말한다.
- 수원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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