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3월21일 [(자)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수도회] 사랑을 실천하여 자유를 사는 참 제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다니 3,14-20.91-92.95
† 복음 요한 8,31-42
◈ [인천] 감사할 수 있는 마음
2018년 나해 3월21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20.91-92.95
복음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31-42
멕시코 어느 마을에는 온천과 냉천이 솟아나는 아주 신기한 곳이
있습니다. 이 온천과 냉천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요? 오래전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빨래를 들고 와서는 온천에서 빨래를 삶고
냉천에서 헹군 뒤에 깨끗해진 옷을 집으로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외국 관광객이 자신을 안내하는 멕시코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정말로 좋겠습니다. 찬물과 더운물을 마음대로 거저
쓸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큰 선물에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멕시코 안내원은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합니다.
“감사한다고요? 천만에요. 감사하기는커녕 비누가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이 훨씬 더 많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기보다는 가지지 못한 것에 주목하고 아파하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려지지 않습니까?
1940년대 미국인들은 10점 만점에 평균 7.5점의 행복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1940년대에는 부족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상하수도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여건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등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오늘날의 행복도는 어떨까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니 행복도가 훨씬 더 높아졌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계속 머무르기가 그분께로
오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의 말씀 안에
머물러야 진리를 깨닫게 되는데, 죄로 인해서 진리이신 주님께
나아가는 데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주님 안에 머물러야 진정한 자유를 얻어서 참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은 당신 곁에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구원 역사를 직접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감사하지 못합니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대신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삼기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바로 주님을 죽일
생각만 하게 만든 것입니다.
가지고 있지 못한 것에 집중하게 되면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없으며, 그 결과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도 또 감사할 수도 없습니다.
무엇을 바라봐야 할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또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 안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공포는 그것을 직시하지 않으면 더욱 악화된다(러셀).
세계에서 가장 큰 폭포 이구아수 폭포.
가능한 일을 바라봅시다.
고등학생 때, 영화 ‘미션’을 보고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제를
꿈꾸고 있었던 저에게 영화에서 보여주는 선교사의 모습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영화의 배경인 남미, 특히
어마어마한 이구아수 폭포의 모습에서 꼭 한 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너무나 먼 남미에 갈 수 있을까 싶었지요. 비행기를 타 본
적이 없었던 저로써는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몇 년 전 주교님과 함께 이곳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영화 속에서만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곳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이 어디 있을까요? 그보다는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고 있는
부정적인 내 마음 때문에 실제로 못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불가능한 것이 많은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많다고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불가능한 일보다 가능한 일이 많을 때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불가능한 일들만을 바라보면서 가능한 일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못한 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요?
영상으로만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직접 보고 이렇게 사진도
찍었습니다.
◈ [수도회] 사랑을 실천하여 자유를 사는 참 제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3월21일 사순 제5주간 수, 요한 8,31-42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8,31-32)
사랑을 실천하여 자유를 사는 참 제자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8,31-32) 그리스도의
참 제자는 일시적 이끌림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 안에 항구히 머물고,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제자는 진리를 깨닫게
되고 온갖 속박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진리는 지식이나 괸념이 아니라, 말씀이며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이 진리는 말이나 지식으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말씀이 주시는 구원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을
뜻하기에, 구체적 실천을 요구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선이 늘
실현되는 인간다운 세상이 되도록 하는 것이, 진리를 깨달은 제자의
소명입니다.
참 자유에 이르려면 먼저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과의 인격적이며 친밀한 관계를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 안에 머문다는 것은 관념이나 지식으로
간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과 사랑이신 ‘말씀’이 모든 이들
안에 머무르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말씀을
실천할 때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아무에게도 종살이 한 적이 없는
자유인인데 무슨 말씀이냐며, 예수께 반문합니다. 그들이 생각한
자유는 정치적, 사회적 자유였습니다. 그와 달리 예수님께서는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 참 자유임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의
노예상태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진리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노예의 길로 역주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진리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에
그분을 죽이려고 합니다(8,40.42). 그들은 스스로 진리이신 예수님과
단절되어 죄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참 자유를 얻으려면
말씀이신 주님께 뿌리를 두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영혼의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은 현세 재물이나 권력과 명예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결정적으로 드러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정의로운
사랑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주님의 자유를 사는 참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탐욕으로
얼룩진 경제적 자유가 참 자유일 수는 없습니다. 타인을 억압하고
이기적 목적을 추구하려는 사회적 자유나 정치적 자유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하느님과 무관한 자유는 스스로를 구속하는 굴레일
뿐이지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자유는 죄의 굴레와 삶의 고통과 어둠,
편견과 속박과 같은 인간적인 실존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자유입니다.
오늘 이 땅에서 드러나고 있는 온갖 부패와 비리들은, 우리 사회와
교회가 얼마나 진리에서 멀어져 노예상태에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제는 권력과 무지가 결합되어 사회정의를 가로막고,
탐욕과 집단이기주의가 경제정의를 해치는 현실에 눈감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모두 부활을 향한 길목에서, 말씀을 받아들여
정의로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진리를 깨달아 자유의 길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 3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3월21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 32)
진리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죄는 우리를 죄로 가두지만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십니다.
진리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하느님의 인격입니다.
인격은 말씀 안에 머무르는 기쁨으로 더욱 충만해집니다.
이와같이 진리는 본 것을 이야기하고 들은 것을 실천합니다.
진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임을 뜨겁게 일깨워줍니다.
그래서 진리의 중심엔 언제나 사랑이 있습니다.
진리는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고 십자가에 못박혀도 끝내 부활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드러납니다.
진리는 우리를 위해 피 흘리고 길 잃은 우리를 위해 길을 나섭니다.
우리의 영혼에서 지울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 사랑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돌아가는 사랑의 사순시기 되십시오.
모든 진리는 사랑으로 귀결될 것임을 믿습니다.
진리 안에 머무르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기타] 원망과 기도
오늘의 능력말씀 2018년 나해 3월21일
원망과 기도
오늘은 “원망과 기도”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5절 말씀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광야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뜨겁게 불타는 태양아래 갖고 있던 물은 곧 동이
나고 3일 길을 가는 동안 물을 전혀 구하지 못했습니다.
목마름에 더 이상 움직이기도 힘든 바로 그 때, ‘마라’라는 곳에서 물을
발견합니다. 백성들은 어찌나 반갑던지 벌컥 벌컥 물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이내 다 토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에서는 그 물은 도저히
마실 수 없을 정도로 쓰디 쓴 물이었다 말합니다.
“마라”라는 말은 ‘쓰다’, ‘괴롭다’, ‘고통스럽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지요. 백성들은 모세에게 원망을 쏟아냅니다.
그러나 모세는 원망대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러자 쓴 물이 단 물로 변화될 수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원망하는 것,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누구나 세상 사람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원망할 만한 일이
와도, 원망을 들어도 원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성도, 하나님은 참 귀하게 여깁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서울] 사순 제5주간 수요일
2018년 나해 3월21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요한 8,31-42
‘매일미사’ 3월의 호의 표지를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모습입니다. 단순한 그림이지만 신앙인이 가야할 길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반대가 되는 말을 통해서 쉽게 이해하기도 합니다. 발을 씻겨 주시는
행위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갑질’입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힘과
능력이 있었지만 그것을 모두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외로운 이들을
위해서 사용하셨습니다. 매일미사 3월호의 표지는 그것을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리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거짓일
것입니다. 위선일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자유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억압일 것입니다. 스스로
쌓아 놓은 성에 갇히는 것일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왜 우리가 신앙을 가져야 하는지, 왜 우리가 성당에
오는지, 왜 우리가 성서를 읽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알고, 깨닫고, 진리를 살기 위해서입니다. 진리는 무엇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큽니다. 진리는 우리들의 의식과 상식이라는 그릇에
담기에는 너무 크다고 하겠습니다. 진리는 분석하고 알아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리의 일면만을 알고, 볼 수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가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는
말씀에서 나왔습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그 어떤 것들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은 하느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하느님과 우리들을 이어주는 약속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려주는 약속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 주셨다는 약속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공동체로
이끌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함께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함께 사는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믿어 줄 수 있습니다.
말씀은 역사적인 사실과 사건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진리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말씀은 공동체를 친교와 일치로 맺어주는
삶의 지침입니다. 따라서 진리는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숨
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삶으로 증언하지 않는 사람은 말씀을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들은 많이 배웠고, 많이 알았지만 그 말씀을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보면서도 진리를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 외로운 이들, 죄를 지은
사람들 중에서는 말씀을 삶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이 알지 못했고, 배우지 못했어도 진리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지 않는 말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사탄이 좋아하는
말들입니다. 어떤 말들일까요? “지겨워, 피곤해, 싫어, 죽겠어”와 같은
말입니다. 어떤 사람을 1주일 동안 조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겨워’라는 말을 500번 하더랍니다. 그렇게 말을 하면 삶이
지겨워지고, 삶이 고단하고, 주위 모든 것들이 싫어지고, 결국 죽고
싶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말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고마워,
사랑해, 감사해, 아름다워, 믿어요.’와 같은 말입니다. 이런 말을
1주일에 500번 정도 한다면 우리는 정말 고마워 할 일, 사랑하고
사랑받을 일, 아름다운 일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진리는, 영원한 생명은 내가 죽은 후에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두꺼운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
속에 있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지금은 말씀대로 실천할 때입니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3월21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요한8,31-42)
지금은 말씀대로 실천할 때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워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면 그를 닮게
되고 상대방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와 하나가 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맞춰주기
보다는 나에게 맞추려 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면 아직 깊은
사랑을 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주님의 삶의 모습에 이끌려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야말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사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마음에 새기고
사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새겨 두지 못하였고 실행하지 못한다면 그는
겉모양만 제자처럼 보일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요한8,38).고 하셨습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참된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나 깨나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고, 당신의 삶으로
하여금 오직 그 말씀이 실현되게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 하루에 하느님의 말씀을 몇 번이나 기억하고 실행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제자는 한시도 스승의 가르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말씀을 실천할 때이고 사랑할 때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의
흐름, 세속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써 우리에게 죄악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말씀을 깊이 새겨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일상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언제나 실천을 요구
합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노예가 될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강요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발적인 협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함으로써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야고1,25).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고 무엇이 흉하게 묻었으면 지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에 마음을 비추어 무엇이 잘못되었으면 고쳐야
합니다.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에 비추어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함으로써 주님과 하나가 되는
기쁨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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