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3월28일 [(자) 성주간 수요일]
[수도회] 돈의 노예로 살아가는 비극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50,4-9ㄴ
† 복음 마태26,14-25
◈ [인천]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펼칠 수 있어야
2018년 나해 3월28일 성주간 수요일
제1독서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0,4-9ㄴ
복음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6,14-25
신학생 시절에 후배들이 참 잘 따르는 선배님이 계셨습니다. 이
선배님께서는 후배들에게 자주 밥을 사주셨지요. 신학생이라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늘 본인이 식사 값을 지불했습니다. 제가
여쭤보았습니다. 왜 늘 식사 값을 본인만 지불하느냐고 말이지요.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세요. “너희도 후배들에게 많이 베풀라고 이렇게
하는 거야.”
이렇게 많이 베푸니 늘 후배들이 이 선배님을 잘 따랐습니다. 지금도
사제로 살아가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베풀면서 사시는 선배 신부님의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베풀기만 한다고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 행복한
사제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자신이 행복해지고 싶다면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면 됩니다.
자신이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기쁨을 원한다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하고, 용서를 원한다면 먼저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평화를 바란다면 우리 주변의 세상 안에서 평화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주지 못하는 사람,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절망과 슬픔을 주는 사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사람,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다투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결국 어떤 사람일까요? 행복하지도, 사랑을 간직하지도,
기쁘지도, 용서받지도, 평화롭지도 못한 불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자신의 상처는 영원히 치유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사랑을 말씀하셨고, 당신이 먼저 그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당신을 팔아넘길 제자가 누구인지 아는 상황에서도
그 사랑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감사하기는커녕 근심하면서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기만 할
뿐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그 사랑을 실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걱정 그리고 그후 자신들이 겪을
일에 대한 걱정만 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주님을
팔아넘기고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주님의 죽음 뒤에는 다락방에
숨어서 벌벌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사랑을 주지 못한다면, 그래서 부정적인 생각으로 끊임없이 판단하고
단죄하는데 집중하고 있다면 2,000년 전의 제자들 모습처럼 주님의
뜻과는 반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받고자 한다면 사랑을 해야 하고, 행복해지고 싶다면 행복을
줘야 하며,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펼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는 충실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젊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아메리카 원주민 속담).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만약' 과 '다음'('즐거움은 지혜보다 똑똑합니다' 중에서)
지나간 일에 대해 후회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시간
낭비입니다. 뉴욕의 저명한 한 신경정신과 의사는 퇴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동안 환자들을 만나면서 나의 생활방식을 바꾸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스승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많은 환자들이 입에 담는
'만약'이란 두 글자입니다. 나와 만난 환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지난
일을 회고하고, 그때 반드시 해야 했는데 하지 못했던 일을 후회하면서
보냅니다.
"만약 내가 그 면접시험 전에 준비를 잘했더라면"
"만약 그때 그 사람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하지만, 그렇게 후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엄청난 정신적인 소모를
가져올 뿐입니다. 차라리 이렇게 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당신이
습관처럼 쓰는 '만약'이란 말을 '다음에'라는 말로 바꾸어 쓰는
것입니다. 만약 꼭 들어야 할 강의 듣지 못했다면 이렇게 말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오면 반드시 그 강의를 들을 거야!"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그 말은 이미 자신의 습관이 되어 버린 사실을
발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절대로 이미 지난 일을 가슴에 담아두지
마세요. 문득 지난 일을 후회하는 마음이 들면 이렇게 말하세요!
"다음번엔 그런 바보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한다면 과거의 후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동시에 당신의
소중한 시간과 정열을 현실과 미래에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성모님을 떠올립니다.
◈ [수도회] 돈의 노예로 살아가는 비극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3월28일 성주간 수요일 마태 26,14-25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
돈의 노예로 살아가는 비극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유다 이스카리옷이 수석사제들을 찾아가 종
한 명 값인 은전 서른 닢에 그분을 팔아넘기겠다 합니다(26,14-15).
돈이 노예가 된 사람을 조종하기 시작합니다. 파스카 축제 전날 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드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6,21)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며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26,22) 하고 묻기
시작합니다. 한심하게도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태도를 보인
것이지요. 그런데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 좋았을"
(26,24) 유다는 한술 더 뜹니다. 그는 뻔뻔스럽게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예수님께 여쭙니다(26,25).
심한 돈 집착증에 걸린 유다는 예수님을 상거래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돈 때문에, 우정과 평화의 상징인 식탁을
'배반의 병상'으로 바꿔버립니다. 그는 자신의 물욕을 충족하려고
예수님이 아닌 돈을 선택하고 맙니다. 감히 하느님을 팔아 자신의
탐욕의 곳간을 채우려 한 것이지요. 그는 어리석게도 생명의 곳간 대신
죽음의 곳간을 채운 것입니다.
양심은 돈에 눈이 멀어버린 유다에게서 외출해버립니다. 그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려는 음흉한 마음을 숨긴 채, 뻔뻔스럽게 자신만은 배반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돈에 집착하면 우리 영혼은 그렇게 갈갈이 찢기고
맙니다. 자아분열이 심해져 나도 알 수 없는 가짜 내가 나를
뒤흔듭니다. 돈집착증 환자가 되면 뻔뻔해져 거짓을 진실인양 자신있게
말합니다.
요즈음 어떤 분의 말이 명언으로 회자되고 있지요. 그는 온갖 비리를
밥먹듯이 뻔뻔스럽게 저지르고서도,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하고 외쳐댔습니다. 우매한 일부 군중은 그의 말에 환호했고, 그는
최고 권좌에 올랐지요. 그러나 그는 돈에 대한 집착이 극심하여
뻔뻔스레 악행을 일삼고, 탐욕의 밥그릇과 거짓의 국그릇만 챙겼던
것 같습니다. 그의 절친은 유다뿐이었습니다.
돈집착증 환자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것은 거짓과 탐욕과
뻔뻔스러움입니다. 그 결과 심각한 자아분열이 생겨 자신은 물론
하느님과의 관계마저 단절된 채 살아갑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유다의
모습이 숨어있을 수 있겠지요. 뭔가를 잘못하거나 현세의 우상들을
섬기면서도,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 말한다면 그건 유다의
목소리입니다.
돈에 집착하여 모든 사람을 돈을 버는 수단으로 삼고도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요? 고귀한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상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성도 인격도, 생명도 돈보다 소중할 순 없지요. 그러나
이번에 수감된 전직 대통령은 유다처럼 국민의 존엄한 기본권을
짓밟아버렸습니다. 그는 그렇게 자아분열과 관계단절을 부르는
거짓과 탐욕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답게, 가난하고 고통 받고 병든 이들의 해방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져야겠습니다. 돈의 우상에 사로잡혀 인간은
물론 하느님과 예수님마저 상거래 대상으로 삼는 추악함에 빠지는
일이 없어야겠지요. 하찮은 물질과 욕구 충족을 위해 예수님께
소홀하거나 그분을 배반하여 십자가에 못 박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아니겠지요?”(26,25)라고 말하는 뻔뻔스러움 대신, 겸손하게
그분의 정의와 자비를 찾아가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마태 26, 25)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3월28일 성주간 수요일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마태 26, 25)
정말 서슴없이 거짓을 고백합니다.
우리 영혼을 더럽히는 것은 언제나 우리자신이였습니다.
잘려나가는 가지처럼 아픔이 있습니다.
이스카리옷 유다는 탈출이 아니라
스스로를 가두는 배신을 선택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성주간은 십자가를 지겠다는 십자가의 각오가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착각과 거짓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리자신을 똑바로 보는 것입니다.
혼자 살고싶어 도망치는 우리들 삶입니다.
고통을 견딜만한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만남에 상처를 주는 것은
언제나 우리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라 생각했는데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자신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자신을 아는 회개의 성주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십자가에 우리자신을 맡기는 것이 참된 희망입니다.
희망을 죽이지 마십시오.
그 어떤 인간적인 것에도 놀라지 마십시오.
주님의 십자가에 머무르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근본적인 희망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성주간 수요일
2018년 나해 3월28일 성주간 수요일 마태 26,14-25
사람과 동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동물은 본능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사람은 본능과 이성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사람도
동물처럼 살기 위해서 먹고,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자녀를 낳고, 그
자녀를 키웁니다. 동물은 살기 위해서 사냥을 합니다. 죽는 동물이나,
죽이는 동물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억울해 하지도 않고,
미안해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자연은 먹히는 동물은 숫자가 많게 하고,
먹는 동물은 숫자를 적게 하여 균형을 이룰 뿐입니다.
사람은 본능에 따라서 살기에는 너무나 약한 존재입니다. 사자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독수리처럼 하늘 높이 날지도
못합니다. 말처럼 힘차게 달리지 못합니다. 개처럼 후각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원숭이처럼 민첩하게 나무를 오르지 못합니다. 또한
인간의 자녀들은 다른 동물의 새끼처럼 금세 걷고, 달리고, 날지
못합니다. 최소한 15년은 돌보아 주어야 비로소 앞가림을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오래 부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동물은 지구상에
없습니다.
이렇게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은 또 다른 생존 방법을 찾아냈고 그
방법은 성공했습니다. 물, 불, 바람, 공기와 더불어 지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힘으로 인간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성의
발달입니다. 그 이성은 ‘왜’라는 질문을 하고, 그 이성은 ‘어떻게’
라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이것은 본능에 의지하던 동물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 천지 만물이 존재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라는 초월자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초월자는 인간의 모든 질문에 응답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왜 고통과 악 그리고 폭력이 있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농부는 분명히 밀을 심었는데 어느새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처럼 우리는 평화, 행복, 기쁨을 추구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다 얻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그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을 닮게
만들었지만 당신의 꼭두각시로 만들지는 않으셨다. 부모가 자녀를
낳았지만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듯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인간을 당신의 소유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자유는 인간
안에 내재되어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유의지는 인간의 교만과 탐욕을 키워주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한없이 추락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해마다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수난 성지주일,
성유축성미사, 주님 만찬 미사, 현양제대 묵상, 십자가 경배,
부활성야미사를 성주간에 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파스카의 성삼일을 하루 앞두고 있습니다. 교회 전례의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님 수난 성삼일을
준비하면서 우리들의 몸가짐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는지 묵상하면서 오늘 하루를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입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대사제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 앞에 자신의 양심을,
친구를, 하느님과 함께한 신앙을 팔아넘기는 것을 봅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입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고 변명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분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갈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분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릴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분의
고난을 가슴아파하고, 마음에 새길 것입니다. 2018년 성삼일이
시작됩니다. 나는 어느 편에 있을까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말씀의 활용/오늘의 능력말씀
2018년 나해 3월28일 성주간 수요일
말씀의 활용
오늘은 “말씀의 활용”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만 하는 성도가 있지요.
그 말씀을 보고 듣기만 하는 성도 또한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활용하는 성도는 적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용하고 활용하지 않으면, 그 말씀은 그저 좋은 글에 불과합니다.
말씀을 읽고 보고 들을 때, ‘이 말씀은 내 말씀이다. 내게 주신
말씀이다’ 이렇게 믿음으로 받고 믿음으로 시인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통해서 나아가기를 사모할 때 그것이 실제 적용이 될
것입니다.
교수이자 저술가인 나관호 목사님은 학창시절 “폐렴”으로 피를 토하는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주신 치유의 말씀으로
받고 온전히 매달려 기도를 했는데 정말 거짓말 같이 깨끗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내거야!” 하고 그대로
믿고 받아들여 활용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교구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저는 아니겠지요?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3월28일 성주간 수요일 (마태26,14-25)
저는 아니겠지요?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할 때의 일입니다. 행려자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젊은이였는데 분명 아침미사참례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밤10시가 다
되었는데 배가 고프다고 하니 돌려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늦은
저녁을 먹으려고 준비하던 때라 사제관으로 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어설프게 준비한 파스타를 먹으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본인을 이탈리아사람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종이를 달라고 하여
그림을 그리며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어설프게 알아듣는 저를 보고 얼마나 답답하였을까? 음식을 챙겨
주었지만 제 마음 한 구석에는 이제 사제관에서 재워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였습니다. 결국 담요 한 장을 챙겨 내보내고는 미처 여관비도
주지 못한 후회스러움 속에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부끄러운 밤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미사 봉헌을 위해 제단에
올랐는데 그가 담요를 둘둘 말아 가지고 성당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디서 밤을 지새웠을까? 행려자로 오신 주님을 외면하고 봉헌하는
미사에 가슴이 저며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에 앞서서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26,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26,22) 하고 말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넘길 양으로 은돈 서른 닢을 챙긴 유다도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뻔뻔스레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하셨습니다. 일상을
살아오면서 오늘도 여전히 주님의 뜻을 외면하면서도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말합니다. 밥 한 끼 주고서는 할 일을 다 한양
“저는 사랑을 베풀었지요?” 하고 말합니다. 아직도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는 소리는 살아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성사를 받을 때 약속한 것들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지? 혼인계약으로 새 가정을 시작하면서 다짐한 약속들, 부모와
자녀, 이웃과의 신의를 지키지 못하면서도 유다를 쉽게 비난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천상을 갈망하면서도 세상의 애착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입니다.
“주님, 저는 아니지요?” 하고 물을 때 “아니 너 맞아”라는 답변을
들을까 두렵다고 고백한 한상봉씨의 말씀이 크게 들려옵니다.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오늘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2,15-17). 죽은 믿음을 살리는 부활을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입니다.
"혀로 예수님을 팔지 마십시오." 유다는 은돈 서른 닢으로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짓을 합니다. 서로 험담할 때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험담할 때 그 사람은 하나의 물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유다가 한 짓입니다. 험담할 때, 다른 사람의
껍질을 벗길 때에 바로 유다가 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고합니다. '다른 사람을 나쁘게 말하지 맙시다."
예수님을 배반했을 때 유다는 마음이 닫혀있었습니다. 이해심이 없었고,
사랑이 없었고, 우정이 없었어요. 우리도 역시 남들에 대해 슬데 없는
말을 할 때 우리에게 사랑이 없고, 우정이 없으며 모든 것이 시장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친구와 친지를 팔아먹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를
청합시다. 친구에게 용서를 청하면 예수님께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 친구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무에게도 껍질을 벗기지
말고, 아무도 험담하지 않는 은총을 청합시다. 어떤 사람에게 결점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 입으로 정의를 이루려고 하지 말고, 그를
위해 주님께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그를 도와주십시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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