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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수기(현대불교 신문에서 펌)
친가에서 자랄 때는 가난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나는 어느 아주머니의 중매로 결혼, 9남매의 둘째 며느리가 되었다.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서 시부모님 모시고 살다가 1970년 여름에 1만7천원 하는 월세 가게 방 한칸을 얻어 다섯 식구가 분가하게 되었다. 이사가서 보니 낡은 집이라 비만 오면 지붕에서 빗물이 줄줄 흘러서 세숫대야로 받쳐 두어야 하고 벽은 전체가 흙벽이어서 문만 크게 닫으면 벽에서는 미끄럼을 타듯이 흙이 흘러내리는 소리에 밤에는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분가할 때 시어머니께서 주신 얼마되지 않은 쌀을 아껴 먹는다고 해도 어찌나 빨리 줄어드는지 다섯 식구가 살아갈 일이 막막하였다. 가장인 남편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이고 고민만 하고 있어 시집올 때 화장대 값으로 가져왔던 얼마되지 않은 금액을 내놓았다. 이 돈으로 살아보자는 말에 남편은 밑천이 적게 드는 세탁업을 시작하자고 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하여 세탁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리미 하나, 다림질판 하나, 옷걸이 몇 개, 재봉틀은 시집올 때 가져온 것 등이 전부였다. 남편은 다림질을 배우고 나는 수선, 염색, 짜깁기, 세탁 등을 배우면서 2평 남짓한 가게에 ‘형제세탁소’라는 간판을 걸었다.
그러나 비만 오면 수몰지역에 으슥하고 한적한 곳이라 거의 손님이 오지 않았다. 당장 끼니가 걱정이라 하는 수 없이 나는 아이들을 등에 업고 남의 집 품팔이, 관공서 이불빨래 등을 했다. 배가 고프면 아이에게 먹일 젖이 나오지 않으니 보채는 아이를 달래며 허기진 배에 고무줄을 더 땡기며 가게 앞을 지나갈 때마다, 그리고 먹고 싶은 것을 볼 때마다 눈을 반 정도 감으며 침을 한 번 삼키면서 배고픔을 참았다. 일을 해주고 받은 삯으로 종이 봉투에 혼합곡 반되를 사서 밥을 지을 때 이 끼니 한 줌, 저 끼니 한 줌, 나누다 보면 반되의 혼합곡 쌀은 보기만 해도 줄어진듯 싶었다. 시집올 때 해가지고 온 옷들은 다 낡아서 입을 옷이 없어 부잣집 쓰레기통에서 깜깜한 밤에 주어다 입어도 부끄러운줄 몰랐고 모든 것을 참고 견딜 수 있었지만 배가 고파 젖이 안나올 때는 진정 가슴이 저몄다.
생활이 너무나 어렵자 남편은 교회에 나가면 신도들이 도와준다고 하여 나를 몇 번이고 설득시켰지만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아 싫다고 하여 여러번 말다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던 1987년 이웃집 보살님 소개로 향림사에서 방생이 있다 하여 남편을 졸라 방생을 따라 갔다. 방생의식에서 큰스님 법문중 “효는 만선의 기점, 효를 떠나서는 부처님 법을 찾지 말라”는 말씀과 가정이 우선이 되어야 하며 종교는 두번째라는 말씀이 특히 인상깊었다. 그리고 방생이란 이타주의로 미물의 생명도 중요하지만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는 불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길래 비록 가난한 환경에 쪄든 나였지만 새로운 삶에 눈을 뜬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의 인생관이 달라졌다. 환경을 탓하고 남편을 원망하던 내가 내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 염색, 짜깁기를 전문적으로 연구해서 노력한 결과 나날이 세탁소 손님이 늘기 시작하더니 가게 수입도 꽤 많아졌다. 남편과 나는 수입의 90%를 저축하기로 마음먹고 열심히 생활했다.
한 달에 두번씩 초하루법회나 보름법회에 참석하며 부처님 공부에 환희심이 났을때 남편은 “교회에 나가라고 할 때는 가지 않더니, 왜 그렇게 자주 절에 가느냐”며 화를 내곤 했다. 그리고는 만약에 또 절에 나가면 이혼을 하든가, 절에 그만 다니든가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윽박질렀다.
어떠한 대답도 할수 없었던 나는 감히 큰스님을 친견하여 “절에 다니고 싶은데 남편이 나가지 말라고 하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여쭈었다. 스님은 <봐서 행하는 길> 책을 주시면서 행동으로 남편에게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에 집에 와서 두 다리를 뻗고 엉엉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그날 밤 잠을 자다가 문득 잠이 깨어 옆을 보니 스님이 주신 책을 남편이 읽고 있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남편은 집안일만 손색없이 해놓고 다니라고 허락했다. 나는 너무 기뻐 남편에게 합장하며 “감사합니다”라고 하자 남편은 고개를 돌려 빙그레 웃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단칸방 문옆에 108염주 걸어 놓고 아침예불을 올리며 부처님께 남편이 제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했다. 남편은 예불을 모시는 것은 좋으나 가게집이니 소리없이 마음 속으로 하라고 했다. 소리없는 예불과 발원을 눈물과 한숨으로 기도한지 3년만에 남편이 나에게 하는 말이 그렇게 불교가 좋으냐며 묻자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울고 말았다.
그뒤 1991년 8월 향림사에 광주불교대학이 설립되어 신입생을 모집한다고 하길래 남편에게 사정하여 입학하게 되었다.
입학하던 날 관세음보살님께 ‘제가 여기까지 오기에는 너무나 어려웠으니 제발 2년간 결석하지 않고 공부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발원을 했다. 불교대학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교수님의 강의내용이 생소하고 이해하기가 힘들었지만 공부를 하다보니 합장의 의미, 삼배 뜻, 오체투지, 삼학, 육바라밀, 인과사상 등을 배우면서 부처님 진리를 터득하기 시작했다. 세탁업도 항상 ‘고객이 나’라고 생각하며 생활하다 보니 뜻하지 않게 수입이 늘어나서 조그마한 상가를 사서 이층집을 지어 예불방도 하나 만들고, 아이들 방도 하나씩 마련해 주었다. 아이들 삼남매를 키우면서 유치원은 물론이고, 학원 한 번도 보내지 못하고 대학 입학할 때까지 5인가족이 단칸방에서 밥상을 책상삼고 발을 포개고 잠을 자도 불평 한 번 하지 않았던 아이들. 텔레비전도 대학가서 아르바이트로 장만하였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말없이 자라준 아이들한테 정말 미안하기 그지 없었다.
이층집을 지은 우리 온가족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행복한 나날이 되어 이제는 살만하겠구나 하며 한숨을 돌릴만 하니 기쁨도 잠깐 남편에게 당뇨병이 오고 말았다. 당뇨병은 밥을 많이 먹어서는 안되는 병이었다. 지난날에는 밥이 없어서 먹지 못했고 이제는 살만한데도 먹어서는 안되니 정말 가슴이 아파 한숨밖에 안나왔다. 남편의 체중이 68㎏에서 55㎏으로 감소되면서 기운이 없어서 세탁업을 하기가 힘들어졌다. 전국에서 좋다는 한약과 처방약을 다 써보았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다. 혈당이 무서울 정도로 올라가기에 이웃에 있는 내과병원에서 알약을 3일분씩 지어 먹기 시작했다.
그날이 지장재일이어서 지장전에 가서 지장보살님께 엎드려 울면서 1시간 정도 참회기도를 올리고 무거운 걸음으로 집에 돌아와 잠을 자는데 꿈에 왼쪽 귀에서 “걱정마라, 걱정마라” 두 번 소리가 들려왔다. 그날 아침에 우연히 신문을 펼쳐 읽는데 ‘댁의 비방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에 어느 아주머니의 건강고단백 식품이 기재되어 있어서 그 처방대로 만들어서 먹이기 시작했다. 나는 남편에게 건강이 나쁜 것도 전생의 업보이니 참회기도를 아침에 같이 하자고 졸랐더니 그때부터 남편도 새벽에 일어나 몸을 청결히 하며 3배를 시작으로 예불을 모시고, 아침에 가게문을 열고, 일반신문 대신 <현대불교신문>을 읽으며 틈틈히 경전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불교대학의 강좌는 일주일에 두번이지만 세탁업을 하면서 내 시간을 내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과 남편의 보살핌으로 2년을 하루도 결석하지 않고 졸업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 3월 불교대학원 모집요강은 가져다 놓았으나 도저히 다닐 엄두를 못내고 있을 때 남편이 나 몰래 입학금을 내주며 열심히 다니라는 말이 너무나 감격스러워 고맙기만 했다. 하루는 불교방송에서 4박5일 해남 대흥사 수련대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녀오라고 배려도 해주고 삼천배 참회기도도 허락해 주었다. 나의 신행생활을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는 남편에게 나도 뭔가 정성을 들여야 된다고 생각하며 항상 부처님처럼 모시기로 마음 먹었다. 대학원 졸업여행 성지순례가 일요일이어서 남해 보리암에 가서 참배하고 기념사진을 찍은 뒤 관세음보살상을 무심코 찍었다. 필림을 현상하려고 사진관에 갔더니, 잘 찍었다며 어느 유명한 작가의 사진이냐고 물었다. 그때부터 이 사진을 확대하고 코팅해서 액자에 넣어 불자 가정마다 나누어 주었더니 더욱더 많은 불자들의 신심이 두터워졌다.
그뒤 큰스님 법어나 교수님들의 강의 내용 테이프 등을 복사해 나누어 주며 신행생활을 했다. 우리가 세탁업을 시작한지 어언 30년, 다른 업소보다 고객이 많은 탓인지 10여년 전부터 남편의 오른쪽 팔꿈치 인대가 늘어나며 어깨 통증이 심하고, 손등에는 밤알만한 혹이 생겼다. 정형외과, 신경외과, 한약, 양약, 단방약을 다 썼어도 아무 효과도 보지 못했다. 의사선생님이 어깨를 쉬어주며 적당한 운동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어깨를 쓰지 못할 수도 있다고 주의를 주었지만 30여년 세탁업을 하다보니 고객이 엄청 많아 도저히 쉴 수가 없어 세탁업을 그만두기로 했다. 막상 결정을 내리지 못해 고민하다가 1996년 음 4월24일 일요일 관음재일날 남편에게 절에 기도를 가자고 했다.
그날따라 비가 와 남편은 거사들이 거의 오지 않을것 같으니 싫다고 집 밖을 나섰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가며 간절한 소원이라며 손을 잡고 애원을 했다. 하루종일 이슬비는 오고 남편의 눈치를 살피면서 관음정근을 종일 하다가 저녁 어두워져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는데 꿈에 향림사 큰스님께서 남편에게 무슨 보따리를 주시는 모습을 보았다. 점심을 먹으면서 꿈 이야기를 하자, 남편도 수저를 들다 말고 “참 이상하다. 나도 어제밤 꿈에 큰스님이 오셨는데…” 하는 것이다.
남편 꿈속에서 “스님, 저는 이 팔을 도저히 못쓰고 왼손으로 밥을 먹습니다” 하자 스님께서 “오른손 옷소매를 걷어 올려라” 하시고는 하얀 칼로 오른손 팔꿈치 안쪽으로 20㎝ 정도 수술을 하시더니 핀셋으로 15㎝ 정도 되는 하얀 힘줄같은 것을 꺼내시며 “다시는 안 아플거야” 하시면서 손으로 만져주시고는 사라지셨다는 것이다. 남편은 이것이 정말인지 아닌지 몇번이고 만져보아도 정말 아프지 않았고 이것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실제 그렇게 통증이 심해서 고통스러워 못견디던 남편의 어깨가 안 아프다니…. 그 손등의 혹은 어디갔나? 정말로 관세음보살님이 계신가 보다….
점심을 먹다말고 가게로 나와 우리집 손님들에게 자랑을 하며 시아버님 돌아가셨을 때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남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나는 두손 모아 “관세음보살님 감사합니다”를 몇번이고 불렀다. 절에 다닌다고 이혼까지 강요했던 남편이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 체험까지 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편의 당뇨병도 좋아져 병원약 신세를 지지 않고도 정상 혈당, 정상 혈압으로 건강지키며 살아가고 있으니 어찌 조상님의 은덕이 아니며 관세음보살님 가피력이 아니겠는가!
내 아들은 내과의사지만 아버지가 약을 복용 않고도 정상 혈당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이상하다며 몇번이고 의심하다가 지금은 항상 관세음보살님을 마음 속에 모시면서 환자를 진찰한다고 한다. 이런 체험을 하기 전에는 종교는 자유라며 불교는 미신을 믿는다고 시댁의 9남매 온가족이 싫어했는데, 이제는 모두가 불자가 되었다. 93세 되신 친정아버님도 관세음보살님 사진 앞에 앉으셔서 염불로 하루를 마치시며 갖가지 지병을 치료하시는 모습을 볼 때 정말 마음이 흐뭇하다. 아이들 둘은 불자가정과 인연을 맺어 다복하게 살고 있으며, 교사인 막내딸은 아침은 못먹어도 예불을 꼭 올리고 출근하는 모습 등을 보니 나날이 감사하는 마음이다.
오늘이 있기까지 양가 부모님의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씀이 큰 교훈이 되었다. 요즈음 IMF로 힘들다해도 열심히 바르게 살다보면 분명히 밝은 내일이 있을거라고 믿어지며, 항상 아이들 교육은 부모의 뒷모습에서 보고 자란 것이며 말로 하는 것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불자가 되어야 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전국 불자가정 거사님들이 법회에 많이 참석하고, 부처님 정법을 배워 거사님들이 앞장서 포교하고, 불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요사이 남편은 늘 나의 손을 잡고 지난날 전생의 업보 때문에 당신을 괴롭게 했다며 미안해 한다. 온가족이 오계를 받은 뒤 육식은 일체 사다먹지 않는등 계율에 어긋나지 않게 살려고 애쓰고 있다. 내가 후손에게 꼭 물려주고 싶은 재산은 부처님 정법이다. 재산은 잘못하면 자식간에 의리도 상하고 우애도 끊길 수 있지만 부처님 정법은 지혜의 등불이니 어찌 전법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소원이 있다면 부족한 전법사이지만 병원 환자들에게 우리의 체험담을 들려주며 위로하고 싶고, 교도소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인과도리 등을 전해 가르치고 싶다.
< 광주시 광산구 송정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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