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로서는 질문1에 대해서 답변하는 이들이 없어서 주저되는 바가 없지 않지만,
순중론자들의 연중론비판자들의 논리가 무엇인지, 과연 개혁신학적인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봅니다.
소위 연중론을 비판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개혁신학적이라면서 좁은 개념의 중생에 집중해서
연중론을 비판합니다. 그런데 그 좁은 개념의 중생은, 연중론에서는 중생의 시초, 혹은 수태, 혹은 초기중생
이라고 표현하는 바입니다. 이것이 수동적으로 하나님의 전적 주권에 의해서 주어지게 되면
그 주어짐에 의해서 능동적으로 반응하게 된다는 것이 연중론입니다. 수동성과 능동성을 동시에 강조합니다.
곧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그 절대적 주권에 의하여 시작된 은혜에 의해서 가지게 된 능동성에 의해서
중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르게 된 중생이 넓은 의미의 중생이며, 또한 회심이기도 합니다.
좁은 의미의 중생에 촛점을 맞춰서 연중론을 비판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과연 연중론자들이나 순중론자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개혁신조들은 과연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고백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16~17세기의 개혁신조들의 중생개념에서 현대의 개혁신학자들의 중생개념은
그 범위를 좁혀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좁은 의미의 중생에 촛점을 맞춰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자신들의 믿고 고백한다고 하는 그 신조에서부터 스스로 이탈하였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국내의 소위 어떤 개혁주의자들의 글을 보면 그들이 인용하고 있는 외국의 개혁신학자들은
좁고 넓은 의미의 중생개념을 분명히 언급하고 구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 개념을 잘 조화시키고 있는데
국내의 어떤 분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10장 "유효한 부르심"의 장을 보면, 이 부르심이 한편으로 수동적이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능동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됩니다. 그 2절은 이렇습니다:
II. This effectual call is of God's free and special grace alone, not from anything at all foreseen in man, who is altogether passive therein, until, being quickened and renewed by the Holy Spirit, he is thereby enabled to answer this call, and to embrace the grace offered and conveyed in it.(이 효과적인 부르심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일 뿐인데, 전적으로 수동적일 뿐인 사람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을 미리 아시게 되는 그 어떤 것으로 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수동적인 것이 성령에 의해서 살아나게 되고 새로워지게 되어서 그는 그것으로 이러한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게(enabled to) 된다. 그 부르심에 담겨져서 제안되어진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홀리죠이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분명히 원래는 수동적이던 죄인이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해서 능동적이 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신조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학이 정통적이며 개혁신학적인가 아닌가를 따져 보려면,
이 신조의 표현들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과연 그러한가? 질문을 던져보고 싶은 것입니다. 바로 좁은 의미의 중생개념에만 촛점을 맞춰서 연중론을 비판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말입니다. 연중론이 과연 이 신조에서 어긋나는 것이 있는가 하고 비판하려면 해야 할 것입니다. 연중론이야말로
전적으로 수동적인 죄인이 이 신조의 고백처럼 능동적이 되어서 그 부르심에 응답하게 되는 죄인의 반응까지를 포함한 것을
중생으로 고려하면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연중론이야말로 개혁신학의 전통을 굳게 지켜오는 것입니다.
비판하려면 이 신조를 기준으로 하여 비판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비판해 볼 수 있는지요?
....
첫댓글 부르심과 중생의 관계가 개혁신학계에서도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는 바이기 때문에, 그 점에 관련해서는 추후에 논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웨신에서는 부르심으로 중생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관점인 줄 알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역사적 맥락을 연구한 로버트 니담교수가 이 점에 대해서는 그의 웨신연구서에 분명히 강조하고 있음을 여러번 제가 언급하였는데, 아무도 이 점에 대해서 답변하는 분들이 없어서 이 점만 따로 떼어내어서 질문글을 만들어 놓습니다.
좋은 글입니다 ^^
감사합니다. 매우 선명한 글입니다. ^^
관심들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아니라 벨직,도르트,하이델베르그 등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지를 찾아보는 것도 흥미롭지 않겠습니까? 관심있으신 분들은 하나씩 만이라도 찾아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내일 오전중에는 지계표님의 글에 대해서 답변글을 써야 합니다. 제가 제기한 질문 세가지에 이상하게도 답변을 안하셔서 좀 불충분한 답변이 될 것 같아서 아쉬운 마음이 드는데, 혹 모르지요. 오늘 저녁이라도 세 가지 질문에 답변해 오실런지...
중생론 토론에 도움이 될 좋은 질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