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구/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학교 철학박사
20세기 중후반의 철학계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대유행이었다 그야말로 이름이라도
아는척 않으면 왕따가 되는 분위기였다. 필자는 그의 흔적을 찿아 케임브리치 대학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당시의 소감을 적은 것이다
2012년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무덤에 가보았다.비석도 하나없이 그냥 땅 표면의
석판에 이름과 생몰 연대만 새겨져 있다.
일체의 세속적 가치에 무관심했던 생전 그의 삶의 자세를 다시 보는 듯 하였다.다만 군데
군데 헌화한 꽃이 놓여있고 세계각국의 동전이 놓여있는 것에서 아직도 그를 추모하는 사람
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독일의 지도교수 때문이다. 1990년
가을 독일에 도착하여 처음 들었던 빔머교수의 강의가 바로 "후기 비트겐슈타인과 대승
불교"였고 그때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게 아직까지 꼬리를 끌고 있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비트겐슈타인은 20세기 철학의 지평을 바꾼 사람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비트겐슈타인은 원래 공학도였다. 영국 멘체스터 공대에 유학하여 공부하던 중 수학에
관심을 갖게 되고 수리철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철학을 공부하러 케임브리치 대학에
오게 되었다
러셀 <1872~1970>의 회고담에 나오는 그와 비트겐슈타인의 만남 장면은 인상적이다
강의가 끝난 후 한 학생이 러셀에게 다가와 자기가 바보인지 아닌지 알고 싶다고 하였다
만일 바보라면 철학을 포기하고 멘체스터로 돌아갈 것이며 바보가 아니라면 계속 철학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러셀은 그에게 무어라도 좋으니 글을 하나 써와보라고 하였는데 단 한줄을 읽은 후
러셀은 "자네는 바보가 아니야! 라고 말하였다 그 후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치 대학의
교수가 되고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 중 한명이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철학 못지않게 엄청난 부를 상속받았지만 친지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그야말로 "무소유"삶을 실천했다.
논리적 사고와 섬세한 예술적 감수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으며 천재적인 통찰력으로 당시
까지 서양의 철학자들이 인식하지 못했던 언어의 함정을 간파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정신병 이력을 가진 가족들 형제자매가 많이 자살
하는 바람에 자신도 자살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쫓겼으며 치열한 학구열과 예민한 감수성
때문에 동료들과도 자주 충돌하였다.
묘지에서 발길을 돌리는데 바로 앞에 비트겐슈타인의 무덤과 똑같은 그의 제자인 앤스컴"
의 묘다. 죽어서도 스승을 본받고 싶은 제자의 마음이 읽혀졌다.
묘지의 방문은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한 세기를 풍미했던 철학자와 그를 흠모
하여 평생 그의 사상을 연구하고 고양시켰던 제자의 무덤. 그리고 멀리 한국에서 음습하고
후락한 이곳까지 찿아온 나'
우리는 모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눈을 뜬 채 꼿꼿한 자세로 진리를 추구했던 비트겐슈타인도 법정 스님도 떠난 세상에서
나는 과연 이 분들의 흔적 한 부분이라도 건져갈 수 있을까?
박찬구.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저서: 우리들의 응용 윤리학
윤리학:옳고 그름의 발견
개념과 주제로 본 우리들의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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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책속의 한줄
첫댓글 감사~
시골버스님
다녀가셨군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