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목사는 순중론자인가? 연중론자인가?
물론 그가 ‘순중론’ 혹은 ‘연중론’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의 중생에 대한 신학과 설명이 순중론적인가? 아니면 연중론적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마침 어떤 분의 질문으로 그의 중생교리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성경교리강해시리즈’의 2권 성령 하나님(기독교문서선교회:2000) 속에 나오는 7장부터 10장까지를 보면, 효과적인 부르심(7장), 중생의 본질(8장), 새출생(9장), 중생의 증거(10장)를 다루고 있는데, 이러한 설명들 속에서 그는 ‘중생’으로 인하여 일반적인 부르심이 효과적인 부르심이 효과적인 것이 되게 한다면서 중생을 ‘새로운 기질이 심겨지는 것 그 자체’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그리고 이러한 ‘중생’과 그 새로운 기질이 표출되는 새출생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중생’은 일반적으로 개혁신학계에서 말하는 ‘좁은 의미의 중생’ 곧 새생명의 원리가 심겨지는 것을 말하고, ‘새출생’은 넓은 의미의 중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봅시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볼 수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것과 그 씨를 뿌린 결과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중생은 삶의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그 결과로 오는 것들과 분명하게 다릅니다. 중생과 탄생 사이에도 역시 차이가 있습니다. 중생은 한 행동입니다. 그것은 결론으로 인도하는데, 어떤 과정이 계속된 후에 탄생의 실제적인 과정에 도달합니다. 따라서 이 둘을 우리의 생각에서 구분하여 둔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중생을 말할 때, 우리는 실제적인 탄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generation)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교리강좌2, 111쪽).
이런 그의 주장이 우연이지 않은 것은 ‘실제적인 탄생’을 설명하는 제 9장 129쪽에서 다음과 같이 이 점을 다시금 환기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여러분들은 지난 강의에서 제가 중생의 결과로 어떤 행동이 나타나는 것과 중생 그 자체 사이에는 긴 기간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곧 이런 글들을 보면 로이드 존스목사는 분명히 ‘발생’과 ‘실제적인 탄생’을 구분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지금까지의 토론을 통해서 이 ‘발생’은 루이스 벌콥이나 후크마가 말하고 있는 “좁은 의미의 중생”이고, ‘실제적인 탄생’이란 “넓은 의미의 중생”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로이드 존스목사는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좁은 의미의 중생인 ‘발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인 ‘실제적인 탄생’이 순간적이요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과정이 계속된 후에 탄생의 실제적인 과정에 도달”한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로이드 존스목사를 개혁적인 설교가로 인정해 오고 존경해왔다고 한다면, 그의 중생에 대한 이 설명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로이드 존스목사를 우리는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이 동시적으로 일어난다고 하는 순중론적 주장을 하는 자라고 보아야 할지, 아니면,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은 시간적인 과정을 거치는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는 연중론적 주장을 하는 자라고 해야 할지 판단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직접 그의 책을 읽어보시고,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존스목사가 중생은 순간적이라고 자주 말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주장을 그의 중생론 교리를 설명하는 전체 맥락을 고려하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순간의 의미를 해석해야 할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맥락을 무시한 채로, 좁은 의미의 중생의 순간성을 마치 넓은 의미의 중생에 이르는 과정까지도 순간적인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목사는 순중론자인가? 연중론자인가? 한 번 판단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중생도 확인해 보시면서 말입니다.
첫댓글 존스목사의 글을 하나 더 첨가하여 수정하였습니다. ^^
로이드존스는 내적부르심인 유효적 부르심(연중론이 말하는 초기중생)과 새출생을 동시사건으로 말하므로 연중론과는 다르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로이드존스가 발생과 출생의 시간적 간격을 말하지만 로이드존스에게 있어서 발생은 말씀을 매개로 하지 않는 것이고 출생은 말씀을 매개로 하는 것이니 이런 정의에 의하면 당연히 시간적 간격이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로이드존스가 말하는 시간적 간격은 연중론에서 말하는 시간적 간격과 의미에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새출생의 시점까지 피상적회개와 믿음에 대한 언급이 없는걸보면 이러한 이해는 더욱 분명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발생'에 있어서 말씀을 매개로 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말씀을 매개로 하든지 안하든지 하나님의 창조적인 행위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벌콥도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까? 외적 부르심 중에 창조적 말씀이 작용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시간적 간격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이드존스가 유효적 부르심과 새출생을 동시사건으로 본다는 구절이 어디에 나오는가요? 오히려 유효적 부르심과 발생을 동시에 보지 않나요? 연중론이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만...
@holyjoy 제가 처음에 질문 올리면서 인용문을 적어 드렸습니다. 바로 아래 내용입니다.
[효력 있는 부르심은 실제 출생시에 발생하며] 이것은 사람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됩니다. 부르심은 유효하고 그들은 믿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발생의 과정, 즉 씨뿌림이 이미 일어났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교리강좌에서 중생파트 중)
로이드존스는 효력있는 부르심이 실제출생시에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로이드존스가 유효적 부르심을 발생(좁은의미중생)과 동시에 본다는 구절은 읽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알려주시면 살펴보겠습니다.
존스목사가 유효적인 부르심이 유효적이 되는 것은 그 이전에 중생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유효적 부르심이 중생으로 인해서 된다는 의미보다는, 일반적인 부르심이 유효적으로 변화되는 것으로 그 이전에 이미 좁은 의미의 중생이 있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만....저의 말씀은 로이드 존스목사도 유효적인 부르심과 좁은 의미의 중생을 동시적으로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soon5908 흐음...그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holyjoy 부흥과개혁사 번역이 문제인지 CLC 번역이 문제인지는 아직 알 수 없는것 아닐까요? 그리고 제가 보기에 의미상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부개사: 효력있는 부르심은 실제 출생시에 발생하며
CLC: 그 효과적인 소명은 실제적인 출생으로 오며
보시다시피 내적부르심을 '출생'과 열결시키고 있지 '발생'과 연결시키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로이드존스가 유효적 부르심과 발생(좁은의미중생)을 동시에 본다는 구절을 알려주시면 살펴보겠습니다. 발생은 말씀의 매개가 없이 이뤄지는 것이고 유효적 부르심은 말씀을 매개로 하는 것인데 어떻게 동시에 이뤄질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soon5908 1)'발생하며'와 '오며'라는 말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효력있는 부르심으로 인하여 실제출생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원문을 확인해야 로이드존스의 글이 제대로 해석될 수 있는 셈이지요. 2)로이드존스의 책 7장(유효한 부르심)을 보면, 유효한 부르심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한 원리를 심으신 것을 의미합니다"(CLC:105쪽), 유효한 부르심으로서의 성령님의 역사와 좁은 의미의 중생을 일치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soon5908 유효한 부르심 장을 읽어보시면, 새생명의 발생이 '말씀의 매개없이' 이뤄진다는 존스목사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의 답변에서 이런 부분에 대한 것을 이미 언급하였습니다.벌콥의 이게 관련되는 세 가지 질문을 다시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holyjoy 인용하신 문구의 앞뒤 내용을 더 적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인용하신 문구는 원리는 심으시는 성령님의 역사만 언급하지 그것이 유효한 부르심이라는 설명이 안보입니다.
@soon5908 그러실 줄 알고 다른 구절을 찾아두었습니다. 저의 책 101쪽에 보면, "그러면 우리가 말하고 있는 효과적이며 내적인 부르심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것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 그리고 이것은 성경구절들의 빛으로 볼때 참으로 필수적으로 틀림없습니다 - 영혼 안에서의 성령의 능력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서의 성령님의 직접적인 작용입니다. 그것은 직접적이며, 영적이며, 초자연적이며, 그리고 기적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영적 행위가 가능한 새로운 양태를 만드는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좁은 의미의 중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holyjoy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일단 처음 인용하신 구절에 대한 앞뒤 내용도 좀 알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나중 인용문은 새출생으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처음 인용문이 유효한 부르심에 대한 것이 확실하다면 좁은 의미중생과 유효한 부르심이 일치된다는 말씀에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거 같습니다.
@soon5908 감사합니다. 아내에게는 미안하지만, 부탁하신 것까지는 해놓고 나가야 겠군요: 처음 인용한 부분의 앞뒤도 함께 적어봅니다: "저는 에베소서 1:18;데살로니가전서1:5; 그리고 빌립보서2:13을 다시 한 번 더 언급하고 싶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성령님의 내적인 역사하심이 사람들의 영혼과 마음에 있어서 그들로 소명이 효과를 내도록 하는 상태가 되도록 한다는 이런 진술의 적극적인 증거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이런 일을 하실 때 그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합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불가항력적 은혜 -저는 이 용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란 용어를 사용해 왔습니다. 제가 이 용어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그
@soon5908 용어가 사람의 의지에 망치질을 하여 그 사람을 넘어뜨리고 곤봉으로 치는 것 같은 일이 발생했다는 그런 인상을 제게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성령님의 역사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성령님게서 한 원리를 심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내 생애 처음으로 이런 영광스럽고 놀라운 진리를 분별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요?
@holyjoy 제가 귀한 시간을 뺏은거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인용하신 내용은 홀리조이님의 주장을 뒷받침하기엔 의미가 흐려보입니다. 아래는 인용문정리.
1. 성령의 내적인 역사하심이 있다.(좁은의미중생으로 이해됨)
2. 그것은 소명이 효과를 내도록 하는 상태가 되게 하는 것이다.(소명은 부르심이고 소명의 효과는 내적부르심 및 새출생으로 이해됩니다. 좁은중생과 유효적 부르심이 일치된다는식의 의미로는 읽히지가 않습니다.)
3. 성령의 내적인 역사하심(좁은중생)은 불가항력은혜를 가능케한다.
4.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란 원리를 심으신 것이다.(1번과 마찬가지로 좁은의미중생으로 이해됨)
@soon5908 유효한 부르심을 설명하는 장의 1101페이지에서는 유효한 부르심과 좁은 의미의 중생을 일치시킨다고 보면서 똑같은 장의 결론부분인 105페이지에서는 일치되는 것으로 존스목사가 설명하지 않는다고 보는지....존스목사가 아이큐가 모지라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holyjoy 이 부분은(로이드존스가 유효적부르심을 새출생과 일치시키는지 아니면 발생과 일치시키는지) 제가 당초에 드린 질문에 담겨 있는 번역이 의심되는 내용에 대한 원문을 먼저 살펴보는게 좋겠습니다. 마침 제가 아는 분께 원문을 부탁드렸으니 조만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soon5908 ad fon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