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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30일 성주간 화요일
“주님, 그게 누굽니까? "Master, who is it?"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모태에서부터 기억하신다. 그를 교육시키시고, 당신의 뜻에 맞는 사람으로 이끌어 주신다. 이스라엘의 의인들은 모두 이런 사람들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보내시어 당신 구원을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하신다(제1독서). 스승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을 팔아넘길 것이라고 하신다. 가슴 아픈 지적이다. 제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질문한다. 그러나 스승님께서는 바로 답하지 않으신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이다. 오히려 유다에게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하고 명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배신’은 믿음과 의리를 저버리는 일입니다. 평생 ‘후회할’ 일인데 일부러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하찮아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역사 안에는 숱한 배신과 배은망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감을 얻은 것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은 개인적인 욕심이었습니다. 아무리 명분이 거창해도 시간이 지나니까 모든 것이 드러났습니다. ☆☆☆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유다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의 배반을 알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유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아무리 동기가 옳아도 배신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유다 역시 스승님을 따라나섰던 사람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무엇이 그에게 ‘차가운 마음’이 들게 했을까요? 그를 움직였던 분명한 ‘무엇’이 있을 것입니다.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을 예언하십니다. 또한 베드로의 배반까지 예고하십니다. 유다는 스승의 말씀에 밖으로 나갔지만 베드로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펄쩍 뛰었을 겁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말했던 베드로입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 구인회- 오늘 복음을 읽으면, 마치 확고한 신앙 안에 산다고 믿는 우리도 혹시 일상에서는 자주 예수님을 잊고,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며, 유다처럼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주님 그게 누굽니까?" -양승국신부- <또 다른 배신자>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복음서 안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두 제자의 배반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스승을 배반한 두 제자는 당시 제자 공동체 안에서 나름대로 "한 자리", "한 가닥씩"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베드로는 수제자였습니다. 그로 인한 자부심도 대단했습니다. 위세가 등등했습니다. 특히 틈만 나면 치고 올라오는 다른 제자들에게. 유다 역시 제자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제자 공동체의 살림을 담당한 총무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가장 신뢰가 가는 인물, 인간성도 괜찮고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할 수 있는 인물로 생각했기에 총무를 맡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동체 안에서 가장 중책을 맡은 공동체의 두 핵심 인물, 제자 중의 제자, A급 두 제자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두 제자의 배반 사건을 오늘날 교회 및 사회 지도자들은 눈여겨 바라보면서 깊이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가장 핵심 위치에서 교회를 인도하는 사람들입니다. 때로 그들은 교회 안에서 살며, 교회 가장 가까이에서 지내면서 교회를 위해서 가장 열심히 봉사하는 듯 보이지만, 많은 경우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먼 사람으로 전락할 위험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지속적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거듭 본질에로 회귀하지 않으면, 자신의 직책이 희생과 봉사, 섬김과 죽음의 자리임을 거듭 자각하지 않게 될 때 언제 배반자가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역할이 다른 무엇에 앞서서 십자가를 지는 자리이고, 끝까지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는 자리임을 망각하는 순간 그 지도자는 또 다른 배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베드로의 배반 사건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쓴잔을 거부했기에, 베드로는 그 뒤로 입으로만 수제자였지 몸은 배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은 많은 고난을 겪고 죽을 것이다"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펄쩍 뛰면서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표현입니다. 베드로는 입으로는 어떤 충성도 다 합니다. 그 어떤 맹세도 다짐도 다 합니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언제든지 예수님을 뿌리치고 도망갈 가능성, 예수님을 배신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남들이 봤을 때는 그럴듯한 신자, 잘나가는 수도자, 괜찮은 사제로 보이고 인정받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에 우리의 시선이 멀어지는 그 순간 언제고 주님으로부터 등을 돌릴 가능성, 주님을 배반할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포기 -전삼용신부-
가끔 장난으로 심리 테스트를 하곤 합니다. 여러분도 한 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산 속 오솔길 세 가지 길이 있는데 한 가지 길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첫 번째 길은 아침 햇살 가득한 꽃이 핀 길입니다. 두 번째 길은 그 꽃이 떨어져 땅에 깔려있는 길입니다. 세 번째 길은 그 꽃이 떨어져 비가 내려 운치 있는 길입니다. 선택하셨습니까? 이것은 헤어진 연인에 대한 집착을 나타낸답니다. 첫 번째를 선택한 사람은 헤어진 사람을 빨리 잊고 새 출발을 하는 스타일이고, 두 번째는 그러면서도 가끔가끔 첫 연인이 그리워지는 스타일이며, 세 번째를 선택한 분은 헤어진 연인을 끝까지 잊지 못하는 사람이랍니다. 뭐 맞는지 틀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죠?
초대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 오리게네스는 이런 주장을 합니다. 하느님은 지극히 자비하셔서 마지막 날에는 지옥이 없어지고 그 곳에 있는 모든 사람까지 주님께서 구원하셔서 하늘나라에서 모두 함께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가 무한하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인간이 고통 받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때는 마귀들까지도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잘 들어라.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거나 모독하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거슬러 모독한 죄만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또 사람의 아들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마태 12, 31-32) 즉,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는 뜻입니다.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면 그런 죄를 지은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 채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또 내세에서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면 내세에서 용서 받을 수 있는 죄도 있다는 뜻인데 이는 연옥에서의 죄의 보속을 의미할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천국은 물론이고 지옥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만 들리도록 당신께서 빵을 집어 전해주는 사람이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고는 빵을 적셔 가리옷 유다에게 주십니다. 요한복음은 그 때 바로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고 쓰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계속 예수님께서 보호해주셔서 가리옷 유다가 완전히 사탄의 것이 될 수 없었으나 이제 예수님까지도 그를 포기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완전히 사탄의 소유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무릎을 꿇느니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을 택합니다. 하느님께 할 수 있는 마지막 반항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이신 하느님으로서 유다를 매우 사랑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를 사탄의 손아귀에 놓아 보내야 하는 예수님의 심정은 매우 아프실 것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안 될 때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도 포기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유일하게 할 수 없는 것이 있어서 포기해야 하는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포기하면 그만입니다. 왜냐하면 완전히 사랑하였기에 포기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랑할 때 완전하게 하고 후회 없게 합시다. 그러면 뒤를 돌아보며 후회하거나 자꾸 과거에 집착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죄와 은총 -이정민 신부ㅡ 3년이나 스승이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그분의 사랑을 체험한 베드로에게
있을 때 잘해 - 진병섭 신부- 해외로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부모님을 대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제가 되어 처음으로 한동안 집에 머물면서 혼자 살던 습관 때문에 부모님과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불편했는지 모릅니다. 강론을 하나 쓰려고 해도 컴퓨터가 거실에 있어서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을 보아야 하고, 때로는 전화를 받고 어떤 때는 말을 걸고…. 혼자 살다 함께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러고는 후회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 뿐’일 텐데 말입니다.
-김찬선신부- "군대와 그 대장과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결박하여
새벽을 열며 - 조명연신부 흉노족을 토벌한 한나라의 명장 이광은 활을 대단히 잘 쏘는 명궁이었는데, 그의 화살이 날아간 곳에는 어김없이 새나 산짐승들이 화살을 맞고 쓰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세요.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양승국신부-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느님> 성주간 피정 프로그램으로 영화 ‘유다’를 보았습니다. 유다는 제자공동체 구성원 가운데 그나마 꽤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불의를 보면 피가 끓어오르는 젊은이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애국자였습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세상 바꾸기’였습니다. 제대로 된 혁명이었습니다. 오랜 식민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을 모으고, 무장해서, 힘으로 한번 전복시켜보는 것이 그가 꿈꾸고 있던 최종 목표였습니다. 그런 유다에게 예수님은 큰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나름대로의 개인적인 야망으로 가득 찬 채. 만 명, 이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어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명성과 능력에 유다는 내심 흡족해합니다. 자신의 계획이 차곡차곡 가시화됨에 기뻐합니다. 그리고 가끔씩 그런 자신의 계획을 예수님께 아룁니다. “선생님, 이 정도 인원이면 충분합니다. 이 사람들 손에 무기 하나씩만 손에 들려주면 로마 주둔군, 그 녀석들 충분히 대적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한번 로드맵을 구상해볼까요?” 이처럼 유다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관점이 남달랐습니다. 신앙이 대상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아들 메시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있어 성공의 지름길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성취의 도구였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쌓아나갈 수 있는 발판이었습니다. 이런 유다는 향해 예수님께서는 잘못 설정된 방향을 바로 잡도록 반복해서 타이르십니다. “여보게, 자네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네. 내 방법은 그게 아니라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제발 마음을 바꾸게.” 불행하게도 유다는 끝까지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멸망의 길로 걸어가는 유다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찢어질 듯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다른 제자들 역시 완벽하게 순수한 동기로 예수님을 추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사도 같은 경우 높은 자리 차지하기 위해 대놓고 다른 사도들과 다투었습니다. 어쩌면 상황은 유다와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다른 사도들과 구분되는 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에게는 나름대로 쇄신과 정화의 길이 이루어졌습니다. 자신들이 지니고 있었던 그릇된 메시아관에 대한 수정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초보적인 신앙이 조금씩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달랐습니다. 그의 신앙은 성장이 없었습니다. 쇄신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그릇된 메시아관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자기 성취의 도구로 바라봤습니다. 그 결과가 배신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를 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한번 보십시오. 놀라울 뿐입니다. 대단하십니다. 철저하게도 이중적인 유다를 몰아세우시지도 않으십니다. 끝까지 자신의 계략을 숨기는 유다에게 드러내놓고 욕하지 않으십니다. 유다의 잘못을 다른 제자들에게 떠벌이지도 않으십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유다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등을 돌리고 떠나가는 제자, 끝까지 속이는 유다에게도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빵을 포도주에 적셔 나눠주십니다. 배반 전에나 배반 후나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대하십니다.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묘사입니다. 3년이란 세월을 같이 동고동락했던 다른 제자들, 웬만하면 눈치 챘을 텐데, 예수님께서 끝까지 함구하신 관계로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전혀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유다를 향한 예수님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끝까지 유다의 인격을 존중하십니다.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태도도 마찬가지겠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막나가도, 우리가 아무리 죄 속에 빠져있어도, 우리가 아무리 방황을 거듭해도,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코너로 몰아붙이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십니다. 우리의 인격을 모욕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기다리십니다. 그저 참아주십니다. 끝까지 우리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려면
-김종기신부-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5분 지났어요
-서효경 수녀- 눈에 문제가 생겨 안과에 갔다. 간호사는 눈물검사를 한다며 작은 칩을 두 눈에 꽂더니 5분만 기다리라고 했다. 눈이 따갑고 매웠다. 조금 있으니 눈물이 주르르 흐르기 시작했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 눈이 따가워 뜰 수가 없는데 간호사는 오지 않았다. 수녀 체면에 사람들 많은 데서 간호사를 부를 용기가 없었다. 속으로 ‘예수님, 예수님, 간호사가 저를 잊어버렸나 봐요. 간호사를 불러주세요.’ 하며 예수님만 찾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아저씨가 간호사를 불러주었다. “여기 계신 수녀님, 5분이 훨씬 지났는데요.” 간호사가 다가왔다. “수녀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성화요일에... -오상선신부- 오늘의 무대의 중심인물은
독서강론 : 온 세상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자.
우리 내면에서 들려오는 이 유혹의 속삭임
-김상현 신부 -
한 순간에 바뀌는 배반과 회개의 삶 -이기양 신부- 오늘 복음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로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의 배반과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배신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유다가 배반하게 되고 베드로가 배반하게 될 것이라는 오늘 복음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에게는 하나의 의문이 생깁니다. 유다가 배반하게 되는 간접적인 동기는 돈을 꺼내 썼다는 표현으로 익히 알 수 있고, 그 직접적인 동기는 예수님께서 빵을 적셔서 유다에게 주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는 표현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다의 배반은 유다 스스로가 행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도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심순보 신부-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에 깊이 관련된 사람들 중에 예수님의 12제자 중에서 유다스를 빼 놓을 수는 없습니다. 유다스는 다른 제자들과 행동을 같이 하면서 공동체 안에서 재산을 관리하는 충실함과 경건함을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 스승을 팔아 넘기려는 마귀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함께 하는 모든 이를 속였던 것입니다. 유다스는 자기 스승을 팔아 넘길 기회만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유다스의 이러한 생각을 다 아시고 계셨지만, 주님은 그를 외면하거나 저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 깊은 관심과 친절을 통해서 그를 가까이 하셨습니다.
배신 -김훈일 신부-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아픔과 고통 중에 가장 큰 아픔은 사랑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할 때 그동안의 관계로부터 오는 상실감과 기만당했다는 인격적 모욕감 때문에아파하게 되는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문호영 신부- ◆우리가 ‘좋았다’라고 느끼는 것은 그 좋음이 실현되고 있는 현재가 아니라 그 좋음이 지나가거나 잃고 난 후인 것 같습니다. 곧 좋은 사람, 좋은 물건, 좋은 사건, 좋은 환경에 있을 때는 그것이 좋은 줄 몰랐다가 사라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때가 좋았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양승국신부- <여러분의 고통을 미워하지 마십시오> 심각한 심리적, 정신적 질병을 앓고 있는 이웃들을 바라보면서 ‘차라리 어디 부러지고 곪고, 상하는 등, 외적으로 드러나는 질병이 훨씬 더 낫겠구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외적인 병고야 우선 괴롭겠지만 시간과 더불어 아물어가지 않습니까? 적어도 세월과 함께 치유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지 않습니까?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지요. 잘만 견뎌낸다면 극복이 가능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외적, 육체적인 고통이야 대체로 한시적인 것입니다. 면역성도 생겨 그럭저럭 견뎌낼 수 있습니다. 시간과 더불어 상처가 아물어갑니다. 그러나 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은 그야말로 심연의 고통입니다. 정녕 끔찍한 고통입니다. 그 누구도 인간 영혼의 저변에 흐르는 내적 투쟁과 번뇌를 제대로 그려낼 수 없습니다. 버림받음, 배은망덕, 오해, 비방, 무관심...그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누가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끔찍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단의 두 핵심 제자였던 베드로와 유다의 배반과 관련된 기사입니다. 결정적인 수난의 시간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어찌 보면 십자가형보다 더 고통스러운 마음의 고통을 겪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서서히 목전으로 다가오는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너무나 괴로웠던 나머지 제자들을 향해 기도해달라고 청했지만, 그들은 쿨쿨 잠만 잤습니다. 따뜻한 격려와 위로의 말 한마디를 기다렸지만, 두 핵심 제자들은 오히려 배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죽음의 잔을 앞에 두고 피땀까지 흘려가며 괴로워하던 순간, 온 세상은 잠들어 침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형 이전에 이미 겪으셨던 죽음과도 같은 정신적 고통을 묵상하며, 오늘 우리의 고통을 바라봅니다. 너무도 처참한 예수님의 고통, 더 이상 비참할 수 없었던 예수님의 고통을 바라보니 우리의 고통은 정녕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마는군요. 결국 인류역사상 가장 큰 고통을 겪으셨던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의 고통이 작아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분의 고통으로 인해 우리의 고통이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가치를 지니기 시작합니다. 오늘 고통을 겪고 계시는 형제자매님들, 부디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절대로 무용지물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고통을 미워하지도 저주하지도 마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의 고통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고통당하고 있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윤택하게 하고 거룩하게 해주는 가장 고마운 은인들입니다. 지금 고통 받고 있는 형제자매 여러분, 힘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고통 중에 있는 자녀나 번민하는 자녀를 더 아끼시고 섬세하게 보살펴주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울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계시며,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위로를 건네주실 것입니다.
주님, 그게 누굽니까? -강영구신부-
이래저래 외로운 예수님
: † 가리옷 사람 유다의 길과 수제자 베드로의 길 †
(요한 13,21-33.36-38)
누구나 살면서 조금씩은 배반합니다. 은혜를 잊고, 도와준 것을 망각합니다. 조금 섭섭하다고 예전의 좋았던 관계마저 의심합니다. 푸념하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면서 소문에는 민감하고, 베푸는 일에는 냉정해집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유다의 모습입니다.
유다는 명석했습니다. 주님께서 ‘먹고 자고 관리하는 일’을 맡길 만큼 능력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매일 그는 기적을 체험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미루어 보건대,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엉뚱한 생각이 자리하기 마련입니다.
우리에게는 유다의 모습이 없는지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감사의 시각’으로 보지 않으면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남의 것을 기웃거리게 합니다. 자신의 소유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우직한 사람’도 마침내 자만하게 됩니다. 감사와 겸손이 언제라도 삶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인간만이 배신을 합니다. 동물의 세계에는 배반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을 합니다. 계산하고 따지기에 등을 돌립니다. 이해타산에 얽히기에 배신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모두 ‘판단의 잘못’입니다. 영악하게 생각하는 것이 원인입니다.
복음의 베드로 역시 스승님의 예언을 듣습니다. 하지만 그는 실수를 바로잡았기에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뉘우침이 빨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순간의 잘못을 계속 붙잡고 있었습니다. 결과는 파멸입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겁니다.
스승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돌아서야 했습니다. 우리 역시 살다 보면 우리를 붙잡는 말들을 만납니다. 사건들을 만납니다.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느낌이 앞섭니다. 그때 멈춰야 합니다. 그 순간 멈출 수 있는 힘을 지니라고 작은 시련들이 끊임없이 주어집니다. 진정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그런데 스승이 붙잡히자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납니다. 주위를 맴돌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합니다.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 했는데 막상 부딪히자 엉뚱한 말이 튀어나온 겁니다. 그것도 스승의 예고처럼 세 번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을 굳이 배반이라 몰아세울 수 있을는지요?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모른다고 말했을 겁니다. 어정쩡한 자세였기에 마음에 없는 말이 튀어나왔을 겁니다. 베드로는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직 부활에 대한 믿음의 은총이 내리지 않은 탓입니다.
누구라도 은총이 없으면 흔들립니다. 아무리 우직한 사람이라도 은총이 붙잡아 주지 않으면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겸손해야 합니다. 쉽게 장담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이 말씀은 용서를 전제로 한 말씀이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36절) 하고 묻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며, 지금은 당신이 가시는 곳에 제자들이 올 수 없지만 나중에는 따라올 수 있다고만 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려면 죽음을 거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나에게 오늘을 허락하신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그분을 향해 다가가는 하루하루를 기쁜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씨를 뿌리고 가꾸며 노고를 바쳐야 할 때는 자비를, 열매를 거둘 때는 찬미와 감사를, 혹여 오늘 이루지 못한 성과는 다음 기회가 허락될 것이라는 희망을 두고 기다림의 덕을 쌓아가며 그분이 가신 길을 잘 따라갈 수 있어야겠다.
‘나의 23살 남동생이 너무 게을러서 씻지 않아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사연에 대해서 그 해결책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그에게 일자리를 찾고 TV속 여자들을 그만 보라고 말하고 싶네요. 여자들은 지저분하고 더러운 남자들을 싫어해요. 계속 그런다면 여자 친구가 절대 생기지 않을 거라고 충고하고 싶어요.”
어때요? 적절한 대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고민 상담을 들어주고 해결해주는 카운슬러의 나이입니다. 글쎄 이 카운슬러는 엘라이나 스미스(Elaina Smith)라는 7살 먹은 소녀라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고민 상담을 하려면 인생을 어느 정도 산 사람, 즉 지긋한 나이를 가진 사람만이 고민 상담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7살짜리 꼬마 아이의 고민 상담을 통해서 나이 역시 우리들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연세 지긋하신 분들을 통해서 아니라, 이 어린 꼬마 아이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물론 큰 힘을 얻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이 어린 꼬마 아이가 카운슬러의 역할을 잘 해나가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순수한 마음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순수한 마음 때문에 걱정과 고민의 본질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이라는 것에 대한 문제 해결은 이 세상의 지식을 통해서 아님을, 그리고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통해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사심 없는 순수한 마음이 문제 해결의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선 예수님의 모습도 이렇지 않을까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 가득한 진실된 마음으로 인해서 우리가 고통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통해서만 나의 문제점을 극복해주시길 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이 결국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 곁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도 그랬으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말했던 베드로 역시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기준으로만 주님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그때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주님으로부터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 최후의 만찬 상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배반할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다들 그 사람이 누구일지 묻기를 두려워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옆에 있던 요한에게 슬쩍 그가 누구일지를 물어보라고 합니다.
배반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은 목숨까지도
내놓을 만큼 강하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배반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자신의 사랑을 못 믿어주시는
주님이 베드로는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인간은 나약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사랑 또한 그래서 늘 완전한 것을 지향할 뿐
실제로는 불완전합니다. 그분의 예고대로 후에 베드로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발뺌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약한 인간의
배반과 넘어짐이 아니라 그 후에 흘린 베드로의 눈물이고 또
부활하신 주님 앞에 다시금 세 번이나 “당신을 사랑합니다”고 고백한
베드로의 더 굳어진 사랑입니다. 베드로의 배반은 그래서
넘어짐 투성이인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우리가 베드로처럼 돌아서서 눈물 흘릴 줄 안다면, 더 굳건해진 사랑으로
주님께 다가갈 수 있다면 우리의 죄와 배반은 오히려 은총의 통로가 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고해성사의 기억이 오래된 분이 있다면 오늘 베드로의
배반과 눈물을 깊이 묵상해보시길 권합니다.
베드로는 이야기합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성주간을 살고 있는 지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당신의 목숨을 내어 주신 것이었는데, 과연 나는 그분께 무엇을 내놓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말이라도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해야 하는데, 그럴 배짱도 자신도 없습니다. 왜 이렇게 약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가 가진 것이 많아졌습니다.
제 것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집과 독선만 들어갑니다. 이제 그런 것을 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원래 없던 것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일 텐데, 그것을 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너희들이 하지 못하니 내가 보여주겠다. 너희도 그렇게 하여라.’ 저도 있을 때 잘하고 싶습니다.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로 잘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 용기를 청해 봅니다.
그해의 대사제 카야파의 장인인 한나스에게 데려갔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제자는 대사제와 아는 사이여서,
베드로를 데리고 대사제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에 문지기 하녀와
불을 쬐던 사람들과 말코스의 친척인 대사제의 종이 베드로에게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요?”하자
베드로가 “나는 아니오.”하고 말하였다."(요한8,15-27)
저는 대사제와 아는 사이여서
예수님, 당신이 붙잡혀간 한나스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사랑을 받았지만,
베드로는 당신이 믿었던 제자였지요.
얼마나 믿으셨으면 그에게 천국문의 열쇠를 맡기고
반석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시며 당신의 교회를 맡기셨겠습니까?
그래서인지
당신이 가시는 곳까지는 저희가 따라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실 때
그는 언제나처럼 호기 있게 나서서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하였지요.
그런 그를 어떻게 밖에 둘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아는 사이임을 이용하여
베드로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지 않은 것이 더 잘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사람들이 그를 알아봤습니다.
칼을 휘둘렀으니 알아보는 것이 당연하지요.
문지기 하녀가 물었을 때 그는 자기가 제자임을 부정했습니다.
처음에는 엉겁결에 부인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도 다시 아니라고 부정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알아봤을 때 도망쳐나갔을 수도 있었는데
베드로는 계속 당신 곁을 떠날 수 없었나 봅니다.
적극적으로 제자임을 밝히지도 못하고
완전히 배신하고 떠나지도 못했던 것이겠지요.
사실 자식이 부모를 부정한다고 부모가 부모가 아니고,
자식이 자식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제자가 스승을 부정한다고 스승이 스승이 아니고,
제자가 제자가 아니겠습니까?
다만 자기의 중요한 정체성을 상실할 뿐이고
사랑을 잃을 뿐입니다.
하느님은 누구도 처음부터 악마로 만들지 않으시고,
누구에게도 사랑을 끝까지 거두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자녀와 제자의 정체성을 거부하는 사람이 악마가 되는 것이고,
하느님과의 자녀관계, 제자관계를 거부하는 사람이
하느님 사랑을 받지 못할 뿐입니다.
당신은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수없이 다가가셨지요.
그때 악령들은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왜 간섭하십니까?”하며
당신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사랑을 간섭이라고 여겼습니다.
베드로도 전에 주님, 당신이 수난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럴 수 없다고 하다가 사탄이라는 질책을 이미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자기가 수난의 길을 당신과 함께 가기를 거부함으로써
관계마저 거부하는 악마가 되었습니다.
사실 더러운 영들은 자기들이 주님이 누구신지 잘 안다고,
당신이 하느님 아들 그리스도임을 안다고 아는 체를 하곤 하였지요.
하느님을 잘 알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악령들은 우리보다도 하느님을 더 잘 압니다.
그러니 아는 것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고,
사랑으로 함께 함이 중요하지요.
<성주간 화요일>
저의 필명인 당쇠는 마당쇠의 준말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맡은 배역이 흥부놀부전의 마당쇠였습니다.
저는 마당쇠 역에 불만이었지만
선생님이 시키시니 어쩔 수 없이 하였습니다.
이 역을 맡은 것이 어렸을 때는 불만스러웠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섭리였다고 생각합니다.
야훼의 종으로 살라는 섭리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이런 저의 신원을 상기시키기 위해
마당 쓰는 청소구역을 스스로 맡습니다.
그런데 이 연극에서 제가 하는 대사는 딱 한 마디였습니다.
“예”입니다.
주인인 놀부가 부르면 “예”하고 달려가고
주인인 놀부가 시키면 “예”하고 실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종은 언제나 주님 곁에 머무는 자이고,
그러다 주인이 시키면 무엇이든 실행하는 자입니다.
오늘 독서는 야훼의 종의 두 번째 노래입니다.
주님께서 모태에서부터 자기를 부르시고,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고 야훼의 종은 노래합니다.
그러니 야훼의 종으로서의 성소는 모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생겨라! 말씀하시자 “예”하고 그대로 생겨난 존재이고
그 때 이후로 늘 주님 곁에 있는 존재입니다.
주님 손 그늘에 늘 머무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야훼의 종의 첫 번째 성소입니다.
야훼의 종의 두 번째 성소는 명령의 수행입니다.
생기라는 명령에 순명하여 생겨난 존재이기에
명령을 수행하는 것은 그의 운명입니다.
명령이 떨어지면 “예”하고 즉시 수행하고
그리고 기꺼이 수행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왜”라는 말은 없고 “예”라는 말만 있습니다.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하라고 소명을 주시면
“예”라고 합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는 이 소명을 위해 죽어라 하시면,
그때도 “예”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게 되어도 마음은 평화롭습니다.
“왜”가 없고 “예”만 있으니 평화롭습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평화롭고
민족들과 나 사이에 평화롭고
무엇보다도 나와 나 사이에 평화롭습니다.
민족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구원의 소명을 다 한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내가 대견스럽기 때문입니다.
이 이광이 하루는 사냥 길에 올랐다가 숲 속에서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문득 앞을 보니 큰 호랑이가 자신을 노려보는 것이 아니겠어요? 깜짝 놀란 이광은 진정하고 급히 화살을 집어 들었지요. 만약 그가 쏜 화살이 빗나간다면 그는 호랑이 밥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요. 그는 온 정신을 집중해서 활시위를 힘껏 당겼습니다.
다행히 화살은 호랑이를 명중시켰지만, 이상하게도 호랑이가 전혀 움직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호랑이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있을까요? 글쎄 그것은 호랑이 형상처럼 생긴 바위였던 것입니다. 그가 쏜 화살은 바위 한가운데 깊이 박혀 있었지요.
화살로 바위를 뚫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생각에, 그는 다시 바위를 향해서 쏴 보았습니다. 그러나 화살이 박히기는커녕 화살촉이 튕겨 나가고 화살대는 부러져 버렸습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 일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합니다. “같은 화살로 같은 바위를 쏘았지만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 것은 과녁을 향한 마음가짐이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도 이렇다고 생각합니다. 주어진 환경과 목표가 같을지라도 자신이 어떤 마음가짐을 먹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천지차이로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마음가짐은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팔아넘길 사람을 미리 예고하심으로 인해서 유다에게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신을 배반할 유다이지만 그에 대한 극진한 사랑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의 이러한 사랑을 받고도, 유다는 세속적인 욕망에 오래 전부터 찌들어 있었기 때문에 자기 갈 길을 바꾸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택을 바꾸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워낙 뻔뻔한 인물이라서? 그래도 예수님께서 모르겠지 라는 생각으로?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리 역시 이 유다의 모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죄의 유혹에 얼마나 많이 넘어가고 마는지요? 분명히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죄이며, 이 죄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합니다. 주님께서도 내 삶 안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죄의 유혹에서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지금 편한 일을, 지금의 세속적인 이익을 바라보면서 회개하지 않고 그 유혹의 길을 선택하고 맙니다. 즉, 우리 역시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유다의 마음을 간직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앞서 이광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면서 어떤 마음가짐에 따라서 그 결과가 천지차이로 달라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내 마음가짐 역시 바꿔야 할 것입니다. 죄에 대해 안일한 마음가짐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죄를 멀리하겠다는 마음가짐만이 제2의 유다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길인 동시에 아들로서
자신이 영광스럽게 되는 길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들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셨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이런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기가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거나 불리한 입장이 되면 참지 못하고
화를 내거나, 실망스런 태도를 보이며 돌아서버리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모습이기 때문이지요. 때론 참고 견딜 수 있는 작은 어려움도
쉽게 피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이 인간의 약한 본성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자세는 언제나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사랑과 겸손의 마음으로 무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인간적인
굴욕 속에서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도록 다짐하며 기도할 때 가능합니다.
‘예수’ 그 이름밖에 찾을 수 없는 처지에서 예수님을 부를 때 그 순간 예수님과 나는 하나가 된다. 그때 누군가가 나를 구해 준다면 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를 구해 준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 이름밖에 부를 수 없는 처지에서 나의 도움이 필요한 그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때 나는 그 사람뿐 아니라 예수님을 외면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찾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예수님의 공동체라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들이 찾는 바로 그 ‘예수’의 이름으로 구해 주어야 한다. 오늘날 신앙 공동체 안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구하는 이가 절실히 필요하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도움을 받는 체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을 살려드려야 한다.
교회 지도자들과 봉사자들은 자신의 직무와 능력으로 하느님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던져야 한다. 만일 사사로운 이익과 자기의 욕망을 앞세워 약자들이 찾는 예수님의 이름을 외면한다면 그야말로 직무 남용이요, 유다의 배신을 재현하는 일이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13,21) 교회 안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의 이름을 외면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예수님의 이름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던지는 사람이 절실히 필요하다.
유다와 베드로이다.
예수 수난극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두 인물이다.
유다는 성월요일의 주인공이기도 하였는데,
오늘은 더욱더 그 역할이 분명해 지기 시작한다.
<스승인 예수를 팔아먹을 자>라는 것이다.
유다 또한 일말의 양심은 있었을 것이고
나름대로 예수를 존경은 하고 있었다.
또 나름대로의 기준 하에 예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랑과 존경은 자신의 목적에 따라 이용될 뿐이었다.
예수를 팔아먹는 자는 처음부터 준비된 악인은 아니었다.
일상 속에서 편의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유다적 사랑과 존경을 예수께 드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예수를 팔아먹을 가능성을 항상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유다를 나쁜 놈으로 치부하기 이전에
우리 자신은 예수를 어떻게 사랑과 존경하고 있는지,
상황에 따라서 예수를 사랑하기도 하고 내치기도 하는
그런 나는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으뜸 사도인 베드로의 연약한 모습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늘 큰소리치지만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할 자>라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으로부터 으뜸사도 역할을 맡으라고
인정받은 사람이었고
나름대로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위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사도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정도로
연약한 면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손치더라도
정말 순탄치 않은 위기가 닥치면
주님을 배반하고 부인할 가능성을 언제나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자, 이렇게 본다면 오늘의 주인공인
유다와 베드로,
어떻게 보면 상반된 인물인 것 같지만
실상은 같은 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나는 유다이기도 하고 베드로이기도 하다.
<예수를 팔아넘길 자>가 될 수도 있고
<예수를 세 번 부인하며 배반할 자>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유다와 베드로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각자 직시하고
그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라고 촉구하신다.
따라서
그 누구를 유다같은 놈이라고 힐책하고 비판하지 말자!
그 누구를 베드로같은 배신자라고 욕하지도 말자!
내가 바로 유다이고
내가 바로 베드로가 아닌가?
내가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게되는
유다이고 베드로란 말이다.
그리고 겸허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자.
그리고 고백하자.
주님, 제가 바로 당신을 팔아넘길 유다입니다.
제가 바로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할 베드로입니다...
아, 주님!!
-: 경규봉 신부-
예언자는 모든 민족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주님의 종을 예언한다. 하느님께서는 모태에서부터 이미 당신의 종을 선택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민족을 위해서 그를 뽑으시어 당신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준비하셨다. 그를 통하여 당신의 말씀이 능력과 힘을 가지고 전파됨으로써 당신의 영광이 빛나게 될 것이다.
비록 그는 자신의 수고가 헛된 것처럼 생각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의 수고와 고통을 인정하시고 그에 대한 보상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수고와 고통은 결국 목적할 만큼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며, 나아가 온 세상의 빛으로 세워 온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이 예언은 메시아(그리스도)의 강림을 예언한 것이다.
이 예언에 따라 강생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마태 4,17) 하고 복음을 전하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온갖 질병과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치유해주시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사람들을 얽매는 여러 가지 것들로부터 해방시키시어 자유롭게 해주셨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질병과 악령, 죄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었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루가 17,11-17).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내고 있는 것이다.”(마태 12,24)라고 비난했고, 어떤 이들은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비난했으며(마르 2,7), 급기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백성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해 죽였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에게 보낸 이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마태 23,36)는 주님의 말씀처럼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그리스도께서 실패한 것처럼 보이고 당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수효 또한 많지 않았다(1고린 15,6). 그러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는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한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이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의 거부로 이하여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은 온 세상으로 보다 쉽게 전파되어 나갔던 것이다(사도 13,46). 결국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는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승리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1고린 1,23-25)라고 말한다.
세상의 가치기준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실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에 또 하나의 작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듯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도 승리할 것이다.
“세상도 가고 세상의 정욕도 다 지나간다.”(1요한 2,17)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주님은 영원히 계신다.”(히브 1,11)
그러므로 다 지나가버릴 세상 것에 연연해하지 말자. 영원하신 하느님을 바라보며 하느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가치를 추구하자. 하느님을 바라보며, 하느님께 충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자. 나 자신이 오늘을 살아가는 또 하나의 작은 그리스도임을 생각하고, 그리스도처럼 온 세상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자................
-이장환 신부 -
여러분 반갑습니다.
성주간 잘 보내고 계십니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던 중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동안 모든 시간을 함께 했던 제자들을 앞에 두고 그 중 한명이 나를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하셔야했던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심란하셨을지 가히 짐작이 갑니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를 시켜 그 제자가 누구인가 묻게 하고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가 유다임을 빵을 적셔주는 암묵적인 행동을 통해 드러내십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 사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제 하느님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실 것과 제자들이 따라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베드로가 자신의 목숨을 내 놓더라도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예수님은 그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에 대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반석이라고 불린 수제자입니다. 그리고 유다 역시 예수님께서 돈주머니를 맡기실 정도로 신임을 받았던 제자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신임을 받던 두 제자의 배반을 보면서 참 의리도 없구나 하는 비난의 마음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인가 봅니다. 그러나 두 제자를 비난하기에 앞서 어쩌면 그들의 행동이 우리 인간의 한계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무엇이 두 제자로 하여금 그들을 신임해 주던 스승을 배반하게 했을까요? 베드로는 목숨이 아깝고 죽음이 두려워서이고 유다는 돈의 유혹으로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목숨이 아깝지 않고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돈이라면 부모도 친구도 버릴 수 있게 된 오늘날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유다를 더 쉽게 이해할 것 같습니다. 이 두 제자는 우리 인간 내면에 누구나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재물에 대한 욕심을, 그리고 그 두려움과 욕심이 하느님을 따르는데 얼마나 걸림돌로 작용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이 두려움과 욕심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강력한 것이기에 예수님의 신임 받던 제자인 유다와 베드로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 오히려 위로가 될 지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달리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에게 하셨던 말씀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 21) 고 말씀하십니다.
재물이란 것은 유다의 경우와 같이 파멸로 이끌 뿐이기에 예수님을 따르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또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 35)는 말씀을 통하여 참된 생명의 주인은 바로 하느님이심을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따름에는 영웅적 용기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내면에서 들려오는 이 유혹의 속삭임은 너무나 강력한 것이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 세상의 강한 손짓에 늘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하느님을 통해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발가벗겨지시고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내 놓으시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성주간은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르기 위해 큰 용기를 내는 시기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나의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참 삶의 길과 참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큰 용기를 내면서 ‘저의 권리는 주님께 있고 저의 보상은 하느님께 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신앙인들이 되도록 다짐해 봅시다. 아멘..............
동거동락이란 말이 있습니다. 함께 살고 함께 즐긴다는 뜻입니다. 오늘 함께 식사를 나누는 '예수님과 열 두 제자'의 관계를 표현할 수 있는 말입니다. 3년 전... 열 두 제자로 뽑힌 베드로와 유다 그들은 눈에 띄게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온갖 기적과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참 하느님이심을 느낀 이들이었습니다. 특히 배운 것이 없는 베드로는 수제자로 인정받을 정도로 예수님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유다는 모든 재산을 책임질 정도로 신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그들은 예수님을 배신할 인물로 예언되어 집니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가집니다. 기쁨과 슬픔을 나누기도 하고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 상처 중에는 특히 씻기 힘든 것이 배신을 당하는 것입니다. 철저히 믿었던 사람의 배신은 증오와 원망으로 가득하게 합니다. 어떤 말에도 위안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서도 당신을 배신하는 그들을 증오도 원망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는 과거... 세례를 받으면서 마귀와 미신행위와 허례허식으로부터 "끊어 버립니다"라고 다짐하였고, 또한 사도신경을 바탕으로 "믿습니다"라고 주님 앞에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 다짐으로 우리는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주님 앞에 나아가는 길에서 이런 저런 핑계로 머뭇거리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다른 이들 앞에서 당당히 주님을 믿고 증거하십니까? 세상의 유혹과 두려움은 너무나 나약한 우리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때론 베드로와 유다처럼 주님을 배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이런 모습을 오히려 측은하게 여기십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부활절을 앞두고 있는 우리들은 주님을 배신하고 있는 행위가 없는지 반성하고 고쳐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죽음의 고통을 당하시는 주님과 함께 이 성주간을 지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이 의문과 함께 오늘 복음은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배신 행위가 단지 이천 여 년 전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 지금도 지속되는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반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초대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따져 물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배반자를 몰랐을 수가 있는가?”
“어떻게 배반자를 제자로 뽑아 동고동락할 수 있었는가?”
정말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을 모르고 계셨을까요? 오늘 복음은 이미 누가 배반을 하실 지 예수님께서는 미리 알고 계셨다는 것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배반 역시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빵을 적셔 유다에게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13,27)
같이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늘상 하시던 당부를 하시는 것으로만 알았지요. 예수님의 전능을 시험하며 사람들이 문제삼는 유다의 배반을 예수님께서는 미리 알고 계셨으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허락하셨음을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유다의 배반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배반했던 제자들, 특히 수제자로 대표되는 베드로의 배반에 대한 예수님의 예고가 나옵니다.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13,33)
예수님의 이 말씀에 베드로가 묻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13,36)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요한13,36)
예수님의 설명에도 아랑곳없이 베드로는 장담을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요한13,37)
베드로의 장담에 예수님께서는 고요히 예고하실 뿐입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13,38)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반 역시 알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유다도 배반하고 베드로도 배반을 하였습니다. 유다는 돈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베드로는 목숨이 아깝고 죽음이 두려워서 배반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많은 제자들도 신변에 위협이 다가왔을 때 추풍낙엽처럼 모두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우리 시대에 너무나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돈 때문에 또 자신의 육신의 건강이나 외모 때문에 하느님을 외면하고 마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라고 표현된 이는 요한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요한 만이 십자가 곁에서 스승의 죽음을 지켜보았을 뿐입니다. 못 박혀 돌아가시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부탁한 제자이지요.
유다와 베드로, 그리고 다른 많은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배반하였으나 유독 유다만이 배반자로 역사에 새겨져 있음을 우리는 봅니다. 모두가 똑같이 배반의 길을 갔으나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회개의 삶으로 배반을 갚는 삶을 살았고, 그에 반해 유다만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말았던 까닭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삶을 결성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여 목숨을 끊어버린 유다는 끝내 배반자의 멍에를 벗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고대로 베드로 또한 배신의 길을 갔지만 통회의 눈물로 자신의 죄를 씻고 새로운 길을 갔지요.
우리 시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유다의 배반이 성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돈 때문에 부모자식 간이 갈라지고 형제 간이 단절되며 이웃 간에 원수처럼 지내는 경우가 너무나 많지요. 베드로처럼 자기의 목숨 때문에 또 이 세상에 대한 집착 때문에 주님을 배반하는 경우도 또 많습니다. 우리가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를 미워하며 배반자라고 손가락질하고 있지만 실은 그 손가락이 우리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 또한 베드로의 배반이나 유다의 배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배반은 어느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서히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유다의 배반은 어느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평상사의 작은 배신이 어느 순간에 드러난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요한12,6)
이런 작은 사욕이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 행위로 귀결된 것입니다. 작은 것이 결국 큰 일을 저지르게 만든 것이지요.
도깨비 뉴스(www.dkbnews.com)에 따르면 1839년 마커스 몰튼은 단 한 표 차이로 미국 매사츄세스 주지사에 당선이 됐습니다. 그와 경쟁했던 후보자는 당시 현직 주지사였던 에드워드 에버렛이었지요. 에버렛은 당일 투표 참여를 독려하느라고 그만 자신이 투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깜빡했던 것입니다. 또 1645년, 대영제국은 단 한 표 차이로 올리버 크롬웰에게 전 영국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부여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1649년, 영국왕 찰스 1세는 단 한 표 때문에 처형됐지요. 1839년, 마커스 몰튼은 단 한 표 덕으로 미국 매사츄세스 주의 주지사로 뽑혔으며 1868년, 안드류 죤슨 미국 대통령은 단 한 표 때문에 탄핵 소추를 모면했고 1875년, 프랑스는 단 한 표 차로 왕정에서 공화국으로 바뀌는 새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23년, 아돌프 히틀러는 단 한 표 때문에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은 나찌당을 장악하게 됐지요.
재물을 택한 극단적인 인물 유다를 우리는 비난하지만 하느님보다 재물을 택하는 신자들이 의외로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남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어느 한 순간 세상 쪽으로 흐름이 바뀌면 나도 모르게 서서히 배반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삶에서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사람이 모든 것보다 앞서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시대에 휩쓸리고 욕심에 흔들리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다행인 것은 주님께서는 회개하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깊이 뉘우치고 회개하는 베드로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주시고 교회의 반석이 되기까지 함께 해 주신 주님께서는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자에게는 탄탄한 미래를 열어 보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돈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결국은 멸망의 길로 가는 길임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혹시라도 나에게 그런 욕심의 씨앗이 생기려고 한다면 과감히 잘라버리고, 회개한 베드로의 새로운 삶처럼 하느님을 우선으로 섬기는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최후만찬 때 식탁에서 빵 조각을 친히 유다스에게 주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유다스를 특별한 관심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풍습으로 볼 때, 주인이 손님에게 접시에서 빵 조각을 때어 준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특별한 우정을 표시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스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지만 사랑과 친절로서 그를 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도 사랑하는 제자를 향한 마음을 보냈지만 유다스는 그의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 없이 유다스에게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였고, 단지 돈을 관리하기 때문에 명절? ?준비하기 위해 심부름을 보내는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유다스가 주님께로부터 빵을 받았을 때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빵을 때어 줄만큼 강한 사랑의 호소가 오히려 그가 스승을 팔고자하는 결정적인 안심의 기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스는 스승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은 유다스 뿐만은 아닙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스승님을 따라 가겠다던 베드로사도도 -물론, 상황은 서로 다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와 유다스를 놓고 볼 때, 어떻든 둘 다 배신의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주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유다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돌아와 용서를 청하는 대신 주님 곁을 영원히 떠나 버렸습니다. 베드로 역시 후회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주님께 용서를 청합니다. 다시는 주님 곁을 ? 개ち?않고 배반하지 않겠다 결심하며,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켜 주님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칩니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모습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후회하는 공통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가는 길은 서로가 아주 상반된 길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후회하면서 죽음의 길을 갔고, 또 한사람은 생명의 길을 찾아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청하는 자세입니다. 우리의 포기는 하느님 보시기에는 인간의 교만일 것입니다.
믿는 이들의 아름다움이란 한번도 죄를 범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주님께 용서 청하며 회개하여 더 나은 삶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이렇게 생각하고 쉽게 포기해 버린다면, 이것은 하느님 앞에서 교만한 모습일 것입니다. 나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면서 용서 청할 때, 이 때 믿는 이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갖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것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배신으로 아파하십니다.
특히 사랑하는 제자들의 배신은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 따랐지만 그는 오로지 한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의 절름발이
믿음은 결국 예수님을 배신하게 됩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이유는 자신이 성취하고자 했던 세상의 욕망과 주님께서 보여 주신 구원의 삶이 어느 순간
어긋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즉 그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도 실상은 자신의 야망을 좇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두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삶의 결정적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하는 길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혹시 지금 예수님을 따르면서 유다와 같이 자신의 욕망을 함께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는 유다와 같이 믿음의 삶에서 힘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나는 지금 온전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은총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은총을 받고 있는 그 순간에는 그것이 은총인지 잘 모르다가 그 은총이 지나간 후, 혹은 그 은총을 잃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것이 은총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은총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한 자신을 후회합니다.
오늘은 성주간 화요일입니다. 이번 주간에 우리는 예수님 수난 속에 있는 영적인 보화를 캐기 위해 수난 전례 속으로 깊이 들어갑니다. 교회가 신자들에게 성주간 전례에 깊이 젖어들기를 독려하는 이유는 단순히 어떤 기념과 예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 상황 속으로 들어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총과 사랑을 생생히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사, 전례는 언제나 기념과 재현이라고 하는 두 가지를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기념은 과거의 사건을 기억·회상함으로써 그 사건의 의미를 찾아 현실 생활에서 구현시키려 하는 것이고, 재현은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앞당겨서 사건 자체를 현재화·현실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전례와 성사는 과거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인 것입니다. 은총은 언제나 현실이지 과거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받게 되는 성주간의 은총은 ‘지금, 여기’에서 이뤄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일 년 중에 가장 거룩한 주간, 은총이 가장 풍부한 주간인 이 주간을 우리는 ‘성주간’, ‘거룩한 주간’이라고 부릅니다. 이 성주간의 은총이 헛되지 않도록 그리고 주시는 은총을 놓치지 않도록 깨어 지내야 하겠습니다.
부활(復活) 대축일을 파스카(Pascha 過越) 축제일이라고 합니다.
파스카(過越.Pascha)란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어둠에서 광명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감을 말합니다.
건너가는 길목에는 고통과 시련, 유혹의 골짜기가 가로놓여있습니다.
이 골짜기를 건너는 사람만 파스카(過越.復活)의 기쁨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당신은 누군가로부터 배반이나 배신을 당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 속담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있습니다.
멀리 있는 도끼가 발등을 찍을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손에 든 도끼가 발등을 찍습니다.
배신과 배반은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당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자식이 부모를, 제자가 스승을, 형제가 형제를, 친구가 친구를 배반하고 배신합니다.
평소에 믿고 사랑하던 사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주는 상처가 더 아프고 치명적입니다.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유다는 스승 예수를 유대 지도자들에게 팔아넘깁니다.
제자의 배반은 한없이 아프지만,
예수께서는 그것마저도 파스카(Pascha 過越)를 향한 고통이며 시련으로 받아들입니다.
당신이 가는 길에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닥치더라도 걸려 넘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하늘의 뜻(天命)을 헤아리며 그것을 넘어서는 지혜를 발휘하십시오.
부활(過越 Pascha)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一明)
-정호신부-
하루 하루 예수님의 수난일이 다가오면서 예수님은 비장한 마음으로 그 순간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예수님을 향해 많은 사람들은 오해와 시기, 멸시의 눈으로 그분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며 없애려 노립니다. 그리고 많은 무지한 사람들은 그들의 선동에 휘둘릴만큼 그리고 지금껏 당신과 함께 했던 제자들마저 당신을 버릴 것임을 아시는 상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예수님의 사랑스런 제자들이 그분을 버릴 것이라는 슬픈 음성입니다.
우리는 스승을 팔아넘긴 악한 제자 가리옷 사람 유다만을 배반자로 낙인찍지만 사실 복음에 등장하는 이 제자들 모두는 죽음을 앞둔 예수님을 떠나 도망가고 마는 다른 의미의 분명한 배반자들입니다.
요한복음은 유다만을 직접적인 죄인으로 여기고 있는 듯하지만 예수님의 지적을 통해 죄인임이 드러난 유다뿐아니라 자신이 한 맹세에 빠져 스스로 배반의 길을 걷게 되는 베드로에 이르기까지 예수님 편에 서서 그분과 생명을 나눌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담담하게 이 사실을 인정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생각들 모두를 인정해주십니다. 스승에게 실망을 느낀 유다의 감정도 그대로 인정하시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놔두시며 베드로의 생각 역시도 고치려 들지 않으시고 그가 자신의 말이 얼마나 힘이 없었는지 느끼도록 그대로 두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유다와 베드로에 대한 말씀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지금 제자들의 상태를 그대로 인정하시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배반하며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가실 길이 지금은 혼자 걷는 길임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지금은 내가 가는 곳으로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팔기 위해 떠나버린 유다는 결국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다가 예수님을 떠나버렸음이 그가 차리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 애통해 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직 그분 곁에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분 곁에 남아 그들의 약함을 바라보게 될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그래도 흔들리지 않는 예수님의 사랑과 희망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렇게 주님은 혼자 사랑을 모두 지고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 곁에 있는 모두는 그분의 슬픔은 알아채지 못한 채 그저 예수님 곁에 머무름을 유일한 자신들의 할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같이 있지만 혼자 계신 예수님, 그분을 바라보며 우리가 그분 곁에 머물고 있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 이 제자들과 같지는 않는지, 혹시 지금도 예수님께서 너무 슬프시진 않는지 걱정이 됩니다.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제2부(13장-21장)에 해당되는 첫 부분이다. 요한복음 제1부(1장-12장)가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업적을 전개(展開)하는 과정이라면, 제2부는 이 업적의 완성(完成)을 지향하고 있다. 우리는 제2부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 앞에서 행하신 마지막 말씀(13장-17장)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사건(18장-21장)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 복음은 그 전반부에 속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그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난 뒤, 새계명의 선포 부분(13,34-35)을 제외한 가리옷 사람 유다의 배반과 함께 베드로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그의 배반을 예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어제 복음에서 3백 데나리온 어치의 향유 한 근을 예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았던 마리아의 예수를 위한 사랑의 행위를 심한 낭비의 행동으로 생각하고 투덜거렸던 가리옷 사람 유다는 이미 예수를 배반할 자로 암시되었다.(12,4-6) 물론 이 부분은 복음서가 기록되던 시점에서 소급하여 언급된 부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복음서의 기록과는 관계없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만 빼고는 다른 어떤 제자들도 유다가 배반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할 수 없었다.
유다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도 함께 자리를 하였고, 예수께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그의 발도 씻어주셨다. 그때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때가 되자 예수께서는 몹시 착잡한 심정으로 예언적 비밀을 폭로하신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 가운데 나를 팔아 넘길 사람이 하나 있다."(13,21) 이 비밀이 폭로되자 만찬석상은 순식간에 서로에 대한 의심과 자신에 대한 변명의 자리로 변한다.
제자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다가(13,22) 사뭇 걱정스런 어투로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르 14,19; 마태 26,22) 하고 자신 없는 반문을 하기도 하고, "자기들 중에 그런 짓을 할 자가 도대체 누구일까"(루가 22,23) 하고 서로 묻기도 했다. 이미 그 전날 대사제들을 찾아가 예수를 넘겨줄 것을 약속하고 그 값으로 은전 서른 닢을 챙겨먹은 유다도(마태 26,14-15) 나서서 예수께 "선생님, 저는 아니지요?"(마태 26,25) 하고 물었다. 수제자(首弟子: 베드로)와 애제자(愛弟子: 통상 요한을 지칭함) 사이에 눈짓이 오가면서 마침내 배반자(背反者)를 색출한다.
애제자가 예수께 속삭인다: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25절) 예수께서 스스로 배반자를 암시적으로 지목하신다: "내가 빵을 적셔서 줄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26절) 이로써 배반자는 수제자, 애제자, 예수님, 그리고 배반자 스스로의 선에서 밝혀졌다.(이 장면을 묘사한 15세기경의 그림이 있다. 프랑스 알사스 지방의 콜마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마르틴 숀가우의 작품이다.) 이제 배반자는 더 이상 그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예수님 스스로 유다를 밖으로 내보내신다.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27절) 유다는 곧 밖으로 나갔고 때는 밤이었다. 유다에게는 배반의 밤이지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실 영광의 밤을 내다보시고 남은 제자들에게 말씀을 계속하신다.
수제자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오갔을까? 유다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운명(運命)으로 태어난 것인가? 아니면 재수가 없는 것일까? 베드로의 머릿속이 복잡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참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새계명"(34-35절) 부분이 오늘 복음에는 빠져있다고 했다. 이 부분을 원래 자리에 넣어 읽어보면, 베드로가 딴 생각을 하고 있었거나 그의 생각이 한 곳에 머물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31-34절)는 부분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복음서의 문맥상 베드로는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새계명("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을 흘려들은 것이 분명하다. 그 때문에 갑작스레 "주님, 어디로 가시겠습니까?"(36절) 하고 물으면서,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37절) 하고 장담한다. 결국 수제자도 걸려들었다. 예수께서는 스승을 배반할 자가 유다만이 아님을 이미 내다보고 계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새벽닭이 울기 전에 실제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고, 닭이 울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마태 26,75; 루가 22,62)
사태가 이쯤 되면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스승을 배반할 가능성에서 배제될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사실 바로 그날 밤에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모두 달아났다.(마태 26,36) 스승에 대한 제자의 신의(信義)와 충성(忠誠)은 장담(壯談)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行動) 속에 있음을 본다. 배반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정작 배반했을 그 순간에 해야 할 가장 필요한 일은 즉시 회개하는 것이다. 유다인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1878-1965)는 '인간의 가장 큰 잘못은 회개할 수 있는 모든 순간에 회개하지 않는 데 있다'고 하였다. 성주간 화요일은 이렇게 가리옷 사람 유다와 수제자 베드로가 걷게 될 길, 같은 길인 듯 하면서도 서로 다른 길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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