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빙크 조직신학 4권 51장 455절,
이제 이러한 중생이 어릴 적 혹은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이나 들을 때 발생하든, 논리적으로 중생은 언제나 실재적인 믿음에 앞선다(Whether it takes place in childhood, youth, or later, before or during the hearing of the Word, logically it always precedes the act of really believing.). 왜냐하면 “만일 거듭나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구원에 유익되게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요6:44: cf. 또한 고전2:14, 12:3;롬8:7 등).
하지만 좁은 의미의 중생은, 즉 새 생명의 원리의 주입으로서 중생은 또 한 시간상 믿음에 선행할 수 있다(But regeneration in a restricted sense, as the infusion of the principle of the new life, may also temporally precede faith.).
첫댓글 넓은 의미의 중생의 순간인 참된 믿음을 갖게 되기 이전에 좁은 의미의 중생이 '논리적으로'(logically)만 아니라 '시간적으로'(temporally)도 앞선다는 것을 강조하는 바빙크의 글입니다. 이것은 좁은 의미의 중생이 일어나는 그 순간에 동시에 넓은 의미의 중생도 발생한다는 일각의 주장이 얼마나 개혁신학의 전통에서 이탈된 주장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455절은 정리해서 오늘 중으로 전체를 <바빙크 중생론 읽기>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죽은자가 반응 할수 있나요?..>
이 물음에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생각해본 신자라면,.
이 연중론은 쉽게 이해 되리라 봅니다...
한떨기 꽃을 피우기위해서도 ,.그렇게 오랫동안 역사(?) 하건만,.
우리들 인간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중생케 하는 생명의 씨앗이 신자들 마음에 떨어지는 것은 순간이요 찰나 이지만,.
그 씨앗이 싹을 튀우는 과정은 분명히 어떠한 여정이 있다고 주장 하는데,.
그것이 그렇게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저로서는 수긍하기가 힘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