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에게는 상식적인 생각이 보통사람에게는 철학적 사유가 될 수 있다
김태길/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 역임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역임
철학을 공부하는 김태길이 <소설에 나타난 한국인의 가치관>이라는 책을 썼다는 계기가
되어 철학과 문학이 만났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책 가운데 문학적 가치를 가진 내용이 담겨 있다면 그 저술을 통하여 철학과 문학이
만났다는 말을 떳떳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책 내용에는 문학적 요소는 별로 없으며 다만 가치관의 문제를 탐구함에 있어서
소설 작품을 소재로 삼았을 따름이다.
만약 철학자를 모델로 삼은 소설이 나타난 것을 가지고 문학과 철학이 만났다고 한다면
김태길의 저술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 있어서의 "만남"은 아주 가벼운 의미의 만남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사람이 철학적 저술도 내놓고 문학적 작품도 발표한 경우가 있다.
철학자로서의 명성이 높은 사르트르가 소설과 희곡의 작가로도 알려졌으며 이와 같이 같은
자연인이 문학과 철학 두 분야에서 각각 독립된 업적"을 냈을 경우에 "문학과 철학의 만남"
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동일한 자연인이 철학 논문도 쓰고 문학 작품도 내놓았을 경우에도 제한된 의미의 철학과
문학의 만남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것이다.
이 경우의 "만남"은 아마 철학자가 문학 작품에서 가치관 연구의 소재를 구하거나 소설가가
철학자를 작품의 모델로 삼을 경우에는 더 두터운 "만남"이 될 공산이 크다.
왜냐하면 철학자가 쓴 문학 작품에는 그의 철학 사상이 스며들 가능성이 높으며 문학을 본업
으로 삼는 작가가 철학적 저술을 썼을 경우에도 그 표현에 문학적 아름다움이 나타날 가능성
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본격적인 의미의 철학과 문학의 만남이 실현되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대체 철학이 무엇이며 문학이 무엇이냐는 물음과 만나게 된다. 철학과 문학
에 대한 어떤 定義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철학과 문학은 쉽게 만날 수도 있고 만나기가
매우 어려울 수 있을 것이다.
대개의 추상적인 언어들이 그렇듯이, "철학이라는 말과 문학이라는 말은 넓은 의미로도 쓰이고
좁은 의미로도 쓰인다
넓은 의미로 쓸수록 '철학적 요소 또는 문학적 요소"를 발견하기 쉬울 것이고 좁은 의미로
사용할 수록 그것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누구나 보통보다 좀 깊게 생각할 때, 넓은 의미의 철학하는 행위가 거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같은 정도의 깊이가 있는 생각도 그 생각의 주인이 누구이냐에 따라서 철학이 될수도
있고 안 될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문적 과학자에게는 상식에 불과한 것이 문외한에게는 과학적 지식이 될 수 있듯이 전문적
철학자에게는 상식적인 생각이 보통사람에게는 철학적 사유가 될 수도 있다.
어떤 대상을 자세하게 살펴봄으로써 언뜻 보았을 때는 모르고 지나쳤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경우가 있듯이 보통 정도의 생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던 사물의 숨겨진 진상眞像을
보통 이상의 사색을 통하여 파악할 경우가 있다.
인생에 대한 풍부한 체험과 심도深度있는 사색을 통하여 얻게 된 심오한 사상도 넓은 의미
로 "철학적"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철학도 문학도 인간 정신의 산물이다.하나인 인간의 마음에서 철학도 생기고 문학도 생긴다
철학의 가능성을 가진 사람과 문학의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람 안에 두 가지 가능성이 아울러 있는 것이다.
오늘의 철학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철학적 저술 가운데서 이른바"문학적 "표현을 시도하는
것을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유<思惟>의 정확한 전달을 목적으로 삼는 철학적 저술에 있어서 수사학적 용어를 남용
하면 독자를 현혹하거나 잘못된 의미의 전달을 초래할 염려가 있다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라면 나도 이 경향에 공감을 느낀다.
그러나 철학은 어디까지나 철학의 울타리를 지켜야 하고 문학은 끝까지 문학의 울타리를
지켜야 한다는 영토의 개념이라면 나는 그 경향에 회의를 느낀다.
본래 하나이던 인간 정신을 갈기갈기 쪼개 가며 전문성과 경계선을 강조함이 지나치면
편협으로 흐를 염려가 있다.
나는 한국의 문학 작품의 수준이 상당히 높은 작품도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수준 높은 창작으로서의 정평이 있는 문학 작품 속에는 넓은 의미의 :철학"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깊고 넓은 철학을 바탕에 깐 문학 작품들이 많이 쏟아져 한국 문단에 황금기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 절실하다.
김태길 산문집 1987년

http://cafe.daum.net/daum1000
공감/책속의 한줄
첫댓글 철학과 문학에 관심은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고 있는데
이분 이야기를 들으니 어렴풋 알것 같으네요.
저도 철학적 소양을 가지게 된 계기가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읽으신 사상집을 대충 읽게된 것이
영향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