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liam Holman Hunt/Self-Portrait, 1845
19세기 중엽(1848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는 젊은 예술가들에 의해 결성된 영국의 사실주의 운동으로 라파엘 이전처럼 자연에서
겸허하게 배우는 예술을 표방한 유파이다.
1838년 6월 28일, 19세의 빅토리아 여왕은 대영제국의 군주가 되었고, 그녀가 다스리는
동안 제국은 5대륙으로 확장되었다. 빅토리아 시대는 영국 역사에서 길고도 중요한
시기로, 경제 발전이 활발하게 이루여졌을 뿐만 아니라 도덕성에 대한 관심도 증대되었다.
또한 과학과 기술 진보의 중요성을 굳게 믿었던 시기이자, 사회적, 경제적으로 격변의
시기였다. 1848년에 설립된 라파엘전파(前派)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예술을 상징한다.
나자렛파의 영향을 받은 라파엘전파의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1827~
1910),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1828~1882), 존 에버릿
밀레이 경(Sir John Everett Millais: 1829~1896) 등을 중심으로 J. 콜린슨,
T. 울너, F.J. 스티브슨 등 7명으로 결성되었다.
라파엘로의 '근대적 방식' 이전의 이탈리아 대가들과 중세 예술이 지닌 순수한 회화
양식으로 회귀할 것을 주장했다. 라파엘전파는 신앙심과 관능을 혼합하고 했기 때문에,
비평가들과 대중으로부터 모순된 반응을 이끌어내었다. 기법적으로는 당시 자연신학적
인 과학사조를 반영하고 자연에의 침잠, 과학적인 정확함과 현미경적인 세밀함을 추구
하였다. 또한 태양빛 아래에서의 밝고 맑은 색채를 재현하기 위해 혼합한 백색을
밑바탕으로 칠하고 그 위에 조금씩 그림을 그려가는 수법을 개발하였다.
깊은 내적 의미를 가진 주제를 선명하게 묘사하고, 작가는 서명과 함께 PRB라는 이니셜
을 넣어 작품을 발표했다. 한편 기관지 <맹아>를 간행하여 미술뿐만 아니라 시(詩)
분야까지 그들의 주장을 펼쳤다.
프랑스의 사실주의 운동을 부채질했던 사회적, 예술적 혁명이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에서
는 종교적인 열정의 형태로 나타났다. 당시의 젊은 화가들이 당시 영국 미술의 퇴폐성에
반기를 들고 라파엘로의 후기와 전성기 르네상스의 이전 플로렌스와 플랑드르 지방에서
성행했던 직접적이며 소박한 자연주의를 본보기로 삼는 혁신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이것은 그보다 30년 전에 일어났던 독일의 나자렛파들과 다소 유사한 데가 있지만, 위의
7명들이 힘을 합쳐 라파엘전파 교우회라는 개혁을 목표로 한 비밀 예술단체를 결성했다.
수도승 같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신앙심이 깊었던 라파엘전파 교우회는 전래의 모든
매너리즘적이며 바로크적인 기교를 삼가고 소박함과 정확한 질감, 색채, 빛 그리고 무엇
보다 자연의 윤곽선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충실성을 지니고서 가치있는 것, 나아가
기독교적인 주제에서 진실을 찾고자 했다. 전통적인 자연주의의 부드러운 명암 대조법
식의 생략, 율동적인 붓질, 몸동작의 우아함은 사라지고, 마치 예술가 자신이 추구하는
환영주의 역시 거짓된 것임을 선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세부에 한결같은 주의를 기울여
도처의 환영주의를 붕괴시키는데 기여하는 다소 볕에 그을리고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신선한 관점의 자연주의에 대해 대체되었다.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미술평론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은 이 유파를 옹호했으나,
불명확한 주장과 주제의 통속적인 해석 및 번거로운 묘사법 때문에 당초의 목표와는
동떨어진 방향으로 나아갔다. 1854년부터 작품을 함께 전시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활동
하게 되어 사실상 해체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화풍은 1850년대와 1860년대 초반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모방하였다.
이 예술운동의 후기 단계는 번 존스의 그림에 요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작품
들에는 약간 진부하지만 서정적인 중세풍의 감각적인 느낌이 종종 가미되어 있다.
William Holman Hunt/Self-Portrait, 1907
★ William Holman Hunt(1827~1910) ★
윌리엄 헌트는 영국 런던 출생이며 런던 아카데미에서 공부하였다.
'라파엘전파(前派)'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처음에는 시나 전설에서 취재한 낭만적인
작풍을 보였으나 후에는 종교적인 소재를 즐겨 다루었다.
곧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파의 자극을 받고 정교한 사실적 수법으로 바꾸었다.
경건한 성품을 지녔던 그는 그림의 발전과 더불어 신심이 더욱 깊어갔다.
그리고 일찍부터 예술상의 도덕적 감정을 뚜렷이 나타내어 그 점에서 비평가 J. 러스킨
의 동조를 얻었다.
그림에서는 가끔 조잡한 색채가 엿보이고 필치가 지나치게 정교한 일면도 보이나 자연을
그 세부까지 극명하게 그려내려는 노력은 때로는 전체적인 미에 손상을 주기도 한다.
종교적으로 확실한 자료를 얻기 위하여 1854~55년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방문했으며,
거기에서 1855년 7월에 사해의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는 버림받은 외로운 동물을 묘사한
그림인 <속죄양 The Scapegoat>을 완성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12살이 되던 해 학교에 맡겨 성서공부를 시켰으나 그의 두드러진
재능은 그를 화가의 길로 돌아서게 한다. 그는 성서를 많이 읽고 공부한 영향으로 초기
에는 이탈리아 화풍을 많이 답습하고 르네상스 화가들의 그림을 모작하는 연습을 많이
하지만 친구였던 Millais와 Rossetti를 만나면서 화풍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화풍은 Millais와는 다르다. 그의 붓질이나 색채감은 라파엘전파의 양식을
다루지만, 상류사회의 우아한 삶이나 신화를 주로 그린 라파엘전파의 일반적 양식과는
달리, 그의 대상은 유쾌한 익살로 가득하다. 심지어 성화나, 자연속에 방목된 양의
표정이나 동작 조차도 익살에 겨워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부르조아에 대한 즐거운 조롱
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 부르조아 입장에서는 분명히 나를 조롱하는 것은 분명한데,
그속에 악의가 없으니 화를 낼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오히려 당시 부르조아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한다.
The Appearance of Christ to the People(Detail), 1837-1857
A Converted British Family Sheltering a Christian Missionary from
the Persecution of the Druids, 1850
프로티어스로부터 실비아를 풀어주는 발렌타인
이 작품은 세익스피어가 쓴 <베로나의 두 신사>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헌트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그 시대의 복장과 무기들에 관한 정확한 자료들을 수집
하였다. 이처럼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 세부 표현은 헌트 작품의 특징이다.
Claudio and Isabella, 1850-53
The Hireling Shepherd, 1851-52
The Light of the World, 1851-53
신비한 새벽 빛이 숲속에 가득하다. 휘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은은한 달빛의 흔적이
아련히 배어 있다. 신선한 새벽 빛을 온 몸으로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등불을 들고
조용히 문을 두드린다. 예수의 눈동자에는 투명한 새벽빛과 달빛, 그리고 등불이 고스란
히 담겨 있다. 예수는 바로 빛처럼 빛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문을 두드리는 손바닥에는 고난의 증표인 십자가에 못 박힌 흔적이 애처롭게 남아 있다.
그러나 예수의 머리를 비추는 눈부신 후광과 화려한 옷은 그리스도가 천국의 왕임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가만! 예수가 두드리는 문을 자세히 살펴보자. 문 빗장과 못은 녹이 슬었고, 풀들은
키를 넘을 듯 훌쩍 자랐다. 담쟁이 넝쿨마저 문을 칭칭 휘감고 있다.
문은 그 동안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문은 대체 어떤 의미를 지녔까?
그래. 예수 앞에 꽉 닫힌 이 문은 신의 은총을 저버린 인간들의 죄를 뜻한다.
신앙심을 잃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잠긴 영혼의 문을 상징한다.
그러나 예수는 구원의 빛이 담긴 등불을 들고 다시 한 번 인간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문을 두드린다.
On English Coasts, 1852
The Awakening Conscience(눈뜨는 양심), 1853
헌트의 이 그림은 1853과 1854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런던의 테이트 미술관에 소장
되어 있다. 이 작품은 빅토리아왕조 사회의 문학적이고 '박애주의적인' 교훈을 상징
한다. <눈뜨는 양심>이라는 제목은 어느 젊은 창녀가 자신이 영원한 파멸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갑작스럽게 자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연인과 함께 피아노 앞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빛이 비쳐 들어노는 순간, 불현듯
성적 접촉의 의미와 부도덕성을 깨닫고 소녀는 남자의 무름에서 벌떡 일어난다.
원래 이 여인의 표정은 어둡게 묘사되었으나, 이 작품을 소장한 사람이청승맞은 얼굴
을 보기 싫다고 하여 표정을 좀 더 밝게 수정해주었다고 한다.
그 결과 여인의 얼굴에는 느닷없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길로 다시 들어서게 된 기쁨이
나타난다. 화면 중앙에 상징적으로 배치된 유혹자의 손과 여성의 마주잡은 두손,
여자의 왼손에는 가운데 손가락만 빼고 모두 반지가 끼워져 있다.
이는 독신이라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 위험한 상태를 암시한다.
나아가 두 사람의 손에 평행을 이루는 것으로부터 둘 사이에 성관계가 오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벽난로 위에 한 장의 판화가 걸려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 주제가
<밀회의 현장을 들킨 여인과 그리스도>라고 한다. 물론 피아노를 연주하는 유혹자는
그리스도와 같은 성인이 아니다. 오히려 조그만 새를 실내에 가둬놓고 완상(玩賞)
하는 비정한 냉혈한에 가깝다. 테이블 아래를 보라. 고양이 한 마리가 작은 새를
갖고 놀고 있다. 유혹자와 여인의 관계를 암시하는 알레고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저 방은 유혹자의 방일까? 아니면 소녀의 방일까? 갑자기 도덕적 양심에 눈을
뜬 저 여인은 이제 돈 많은 남자의 애인이라는 지위를 잃어버리게 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사실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마당에서 흘러 들어오는
빛, 말하자면 갑자기 그녀를 비쳐준 신의 은총의 빛이다.
등 뒤의 거울에 반사된 죄와 거짓의 세계, 그 작고 폐쇄된 세계에 있다가 빛을 통해
갑작스런 개심의 체험을 한 그녀의 몬에서는 벌써 밝은 빛이 나는 듯하다.
작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이 시대에 들으면 정말 숨 막힐 듯이 답답하게만
여겨지는 고리타분한 도덕 설교다. 이것이 그 유명한 비토리아조의 도덕인 모양이다.
타락한 여인 헌트의 여인은 타락하기 일보 직전에 도덕적 양심에 눈을 뜬다.
The Scapegoat, 1855
The Lantern-Maker's Courtship, 1854-56
Il Dolce Far Niente, 1860
Isabella and the Pot of Basil, 1876
The Triumph of the Innocents, 1883-84
The Lady of Shalott, 1889-92
그림속에 있는 거울과 창문이 열쇠다. J. 러스킨의 말처럼 그림이 자연을 보여주는 창문
이라면 19세기 영국을 풍미했던 주류 화풍들은 거울이다.
한마디로 가상을 비쳐준다는 뜻이다. 유명한 플라톤의 동굴을 떠올려보면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거울의 예술은 플라톤적인 것으로, 예술을 기교로 간주하고 자연의 모방
으로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관과 대치된다.
헌트의 그림은 아리스토텔레스로 플라톤을 비꼬는 그림이기도 하다.
숱한 가상의 예술들이 난무하지만, 궁극적으로 양심의 소리는 자연과 동일화된 예술로
부터 울려나오는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헌트의 그림은 내포하고 있다.
러스킨은 진정한 예술은 사람들로 하여금 동굴속에 비치는 그림자를 보도록 하는 게
아니라, 눈을 돌려서 바깥을 보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헌트의 그림은 이런 러스킨의 미학이론에 따라 처녀의 눈이 거울이 아니라 창문으로
향하게 했다.
헌트의 그림에 등장하는 저 방이야말로 빅토리아풍으로 변주된 플라톤의 동굴인 셈이다.
헌트의 입장에서 본다면, 타락한 욕망으로 점철된 그림 속의 방이야말로 빅토리아시대
의 축소판이기도 했다.
이 어둠침침한 동굴에서 처녀는 지금 뭔가 계시를 받고 조금 전까지 탐욕에 희롱 당하
도록 내버려두었던 자신의 손을 내던지고 창 밖을 보며 돌연 일어섰다.
뭔가 각성이 일어난 것이다. 이 처녀는 중년의 사내가 하나씩 선물해주었을 방안의
숱한 귀중품들을 순간 까맣게 잊어버린 듯하다.
러스킨은 이런 관점에서 이 장면 후에 처녀가 '거리로 뛰쳐나갈 것'이라고 해석한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거리'는 저 거울에 비친 창문 밖의 세계다.
러스킨은 또한 '저 처녀의 하얀 드레스가 곧 흙과 먼지로 더럽혀질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러스킨이 보기에 더럽혀지는 것은 처녀의 외양일 뿐 영혼이 아니다.
May Morning on Magdalen Tower, 1890
★ Dante Gabriel Rossetti(1828~1882) ★
Self Portrait at Age Eighteen, 1847
Dante Gabriel Rossetti는 영국 런던 출생으로 W.H. 헌트를 알게 되어 그와 더불어
'라파엘전파(前派)'를 결성하고 그 중심 인물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부친 R. 가브리엘레(1783∼1854)는 영국으로 망명한 이탈리아 카르보나라 당원
출신으로, 시인이자 문학가였으며 특히 단테 전문가로서 킹스 칼리지의 교수였다.
단테 연구가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로세티는 어려서부터 시를 가까이 했으며, 단테의
작품을 소재로 한 그림을 다수 남기기도 했다. 또한 단테를 통해 자연과 가까워지는
법을 배웠다고 술회한 적도 있다. 그는 문학 서적의 삽화를 그려주는 일로 작가 생활
을 시작했으며, 1846년에는 괴테의 <파우스트>에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기도 했다.
1850년대에는 신화·성서·문학작품 등을 통하여 얻은 주제로 수채화나 소묘(素描)로
서정적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환상적 표현에 대한 흥미와 묘사기술의 부족으로
라파엘전파 작가들에게 공통된 자연주의적 묘사를 피하였으므로 그 후 그 파에서 떠나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하였다. 단테와 셰익스피어, 아서왕 전설 등을 주제로 한 중세
적 분위기가 넘치는 낭만적인 작품을 그렸고, 정열, 색채감, 중세적인 주제와 분위기
등을 특색으로 하며 신비적이면서도 육감적인 시경(詩境)을 표출하였다.
그는 또 책의 장정(裝幀), 삽화, 스테인드 글라스, 가구 디자인 등도 폭넓게 취급했다.
만년은 주로 W. 모리스 부인 등을 모델로 한 탐미적 작품을 그렸다.
후반기의 작품은 수채가 주(主)였으며 감각적 표현으로 기울어졌다.
1860년 연인 엘리자베스 시달과 결혼하였으나 2년 후에 그녀가 자살하자 사실상 은퇴
한 것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다가, 만년에는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The Girlhood of Mary Virgin, 1848-49
The models for this painting- Christina, his sister and a well-known poet,
sat for Mary and his mother Frances for Saint Anne.
로세티가 1848-49년에 그린 <마리아의 소녀시절>은 프레라파엘리티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성서에는 마리아의 생애가 나와 있지 않지만 로세티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상황을 그려냈다. '자연에 충실하고, 주제를 장엄하고 엄숙하게
그린다.'는 러스킨의 말을 실천이라도 하듯, 등장인물들의 행위에는 고요함과 엄숙
함이 감돌고 있다. 햇살이 잘 드는 실내에서 소년 마리아는 어머니 성 안나로부터
수놓기를 배우고 있다. 앞에 있는 천사는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 꽃병을
책 위에 놓고 있으며, 창 밖에서는 관리인이 나무를 손질하고 있다.
나뭇가지에 앉은 비둘기는 성령을 뜻한다. 천사만 없었다면 이 그림은 영락없이
당시 중류층 집안의 한가로운 한때를 담은 작품으로 보일 것이다.
실제로 이 그림에 등장한는 인물들은 화가의 모친과 여동생 그리고 관리인을 모델로
하고 있다. 명료한 윤곽선과 정적인 인물처리, 충실한 사실묘사, 원근법에 의한 구도
등이 이탈리아 콰트로첸토 미술를 연상시킨다.
창 밖의 덩굴잎이나 천사가 들고 있는 백합은 화가가 식물의 사실적 묘사에 관심이
있음을 보여준다.
Ecce Ancilla Domini!(The Annunciation), 1849-50
로세티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성모영보>이다.
1850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성처녀 마리아 앞에 예수의 잉태를 알리는 천사가 백합을
들고 나타난 순간을 그리고 있는데, 마리아는 순수한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실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림에 배경이나 인물의 옷이 모두 흰색의 조화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다만 침대머리의 파란 커튼과 창 밖의 하늘, 전경의 빨간 걸개 장식이 흰색의
단조로움을 완화시킨다.
집안의 여명이 비치면서
하얀 침대에서 일어나, 두려움은 없었지만
해가 질 때까지 울며 전율에 떨었네
시간이 다 차왔으므로.
로세티의 이 자작시를 읽고 나면 이 단순한 그림에 내포된 의미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한 구도와 고요하고 정적인 인물들의 모습은 이 화가가 의도적으로
르네상스 이전의 순수함으로 돌아가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The First Anniversary of the Death of Beatrice, 1853-54/Watercolor
단테를 소재로 한 그림으로 <베아트리체 사망 일주년>이다.
여기서 화가는 단테와 베아트리체, 그리고 화가 자신과 그의 애인 엘리자베스를 나란히
등장시켜 두 쌍의 연인이 시공을 초월하여 실내에서 신비롭게 만나고 있는 장면으로
그렸다. 네덜란드 회화의 자연주의가 이탈리아 15세기 회화의 엄숙한 분위기와 결합된
듯한 느낌이다.
Portrait of Elizabeth Siddal, 1854
A Christmas Carol, 1857-58
Portrait of Jane Burdon(later Jane Morris), 1858
St. George and the Princess Sabra, 1862
Venus Verticordia, 1864-68
Il Ramoscello, 1865
The Beloved(The Bride), 1865-66
Regina Cordium, 1866
Monna Vanna, 1866
Lady Lilith, 1868
Aurea Catena (Portrait of Mrs. Morris), 1868
La Pia de' Tolomei, 1868-80
Pandora, 1869
Dante's Dream at the Time of the Death of Beatrice, 1871
Veronica Veronese, 1872
Beata Beatrix, 1872
The Bower Meadow, 1872
La Ghirlandata, 1873
<기를란다타> 역시 꽃에 둘러싸여 있는 세 여인을 그린 작품이다.
여인들의 길고도 붉은 머리카락과 창백하리만큼 흰 얼굴, 붉은 입술은 순수함을 추구한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보여주지만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오히려 인위적으로 보인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꽃과 식물의 잎, 줄기 그리고 하프의 줄이 주는 곡선미를 프레
라파엘리티의 장식적 취향을 잘 보여준다.
Sancta Lilias, 1874
La Bella Mano, 1875
The Blessed Damozel, 1875-78
A Sea Spell, 1877
Astarte Syriaca, 1877
Proserpine, 1877
A Vision of Fiammetta, 1878
La Donna Della Finestra, 1879
The Day Dream, 1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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