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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기사)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1578
단군조선이 아닌 기자조선에 온 국호 조선
대부분 사람들은 일제가 식민통치기간 중 우리역사를 전부 말살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잘못 와전된 것으로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일제가 어떻게 겨우 35년의 세월 동안 그 방대한 작업을 모두 다 할 수 있었겠는가! 광활한 아시아대륙을 말 달리며 호령했던 우리의 위대하고 찬란했던 대륙지배의 역사가 축소·말살된 실상은 다음과 같다. 중국대륙에서는 우리와 동족인 원나라가 남경을 근거지로 해서 일어난 주원장에게 밀려 북쪽 몽골초원으로 쫓겨 가고, 1368년 남경에서는 한족 중심의 명나라가 건국된다. 원나라가 망함으로써 중원을 차지하게 된 명나라로 인해 그전 송나라 때까지만 해도 황하 남쪽에 조그맣게 있던 한족의 영토가 갑자기 큰 풍선처럼 커져버린 것이다.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쥔 이성계는 1392년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연다. 그러나 당시 부도덕하게 정권을 잡았기에 대의명분이 없어 많은 대신들과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던 이성계는 강력한 외부의 힘인 명나라를 끌어들이고는 스스로 속국임을 자처한다. 국호인 조선까지 명나라에게 하사받게 되고, 소중화가 되어 유교를 국시로 하는 억불숭유정책을 편다. 명나라는 3대 영락제 때인 1416년 도읍을 북경으로 옮긴다. 그런데 그 지역은 예로부터 단 한 번도 한족의 영토가 되어본 적이 없는 우리 민족의 땅이었다. 막상 그런 곳에 도읍을 하려하니 주변국, 특히 속국인 조선에 위엄도 서지 않았다. 그래서 통치의 목적으로 명나라는 예로부터 북경이 한족 땅이었다는 역사왜곡을 단행한다. 그 때 지명이동된 것이 고대역사강역을 밝힘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갈석산과 고죽국 백이·숙제의 무덤으로 유명한 노룡현 수양산의 이동이었다. ▲ 대청광여도(위 이미지). 북경 동쪽 난하 부근에 그려진 갈석산과 고죽국(노룡현)은 황하 굴곡지점에서 옮겨졌다. <이미지=필자 제공> 조선왕조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으며, 오히려 소중화가 되어 스스로 우리 고대사를 축소·왜곡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명나라와 조선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다. 태종 때 명나라 사신이 와서 황제의 칙서를 받으라하니 임금이 절하고 나서 서쪽 층계로 올라가 사신 앞에 꿇어 앉아 머리를 바닥에 두드리며 말했다.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해 명령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조선왕조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던 왕이었던 태종도 명나라 사신 앞에서는 마치 고양이 앞에 생쥐 격이었다. 가장 사대모화가 지극했던 세종 때인 1424년 명나라 영락제가 죽자 세종은 자신과 영락제는 군신관계라 하며 27일간이나 소복을 입고 곡을 하며 죽음을 애도하였고, 정사를 돌보지 않고 위패를 떠나지 않았으며 식음을 전폐하여 건강을 많이 해쳤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세종 때 <신찬팔도지리지>와 <세종실록 지리지>를 만들면서 중국대륙에 있었던 우리의 역사지명들을 모두 한반도로 옮겨와 심어버린다. 세조 3년(1469)에는 역사·천문·지리·음양을 기록한 모든 고대사서의 수거령이 내려지고, 이어 예종과 성종도 즉위하자마자 같은 수거령을 내리고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한다는 어명까지 내린다. 수거된 서책 중 상당수는 불태워지고 나머지는 궁궐서고에 감금시켰다. 나중에 일제가 단기간에 우리 역사를 쉽게 말살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조선왕조가 이미 우리 고대사서를 수거해 분서(焚書)·감금(監禁)시킨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 일제가 사서를 일거에 대량 불태울 수 있었던 것은 고대사서가 조선왕조에 의해 감금됐었기 때문이다. <사진=필자 제공> 중화사대모화주의의 상징, 유명조선(有明朝鮮)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시대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는 송강 정철의 묘비명은 이렇게 시작한다. '有明朝鮮 左議政 寅城府院君 諡文靑公 松江 鄭澈之墓’ 그 뜻은 “(유명조선) 좌의정을 역임했고, 인성부원군의 군호를 받았으며, 사후 문청공이라는 시호를 받고 호가 송강인 정철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이렇듯 16세기 이후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묘비에는 당사자의 관직과 성명 앞에 으레 ‘유명조선(有明朝鮮)’이란 말이 관용구처럼 따라붙는다. 그런데 비석의 맨 앞에 붙어있는 ‘유명조선’이라는 글자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여러 의견이 있으나 이는 ‘명나라가 있는 조선’, 즉 ‘명나라 속국 조선’이라는 뜻이다. 이는 종주국 명나라에 대한 조선왕조 사대부들의 사대모화사상의 발로로 해석되어 진다. 혹자는 병자호란 때 조선에게 치욕을 안겨준 오랑캐 청나라에 대한 반발로 해석하기도 하나, 송강 정철의 묘는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에 조성된 것이므로 그러한 해석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조선조정은 임진왜란 때 위기에 처한 조선을 돕겠다던 동족 누루하치의 제안을 오랑캐라는 이유로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명나라에게 원병을 요청한다. 명나라는 참전 이후 국력이 급격히 쇠약해져 이자성의 농민반란으로 1644년 망하게 된다. 이에 앞서 중원을 도모할 욕망을 불태우던 청나라 태종은 1636년 후방의 불안을 먼저 없애고자 조선을 침공해 인조임금에게 삼전도에서 항복을 받고 앞으로 청나라를 형님으로 모실 것을 약속받는다. 물론 소중화였던 조선왕조는 이를 엄청난 치욕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인조를 형상화한 작품. <사진=필자 제공> 그런데 만일 청 태종이 조선과 청나라가 동족이라는 역사의식이 없었다면 아마 인조임금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고, 물론 조선이라는 나라도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청 태종은 항복만 받고 인질을 데리고 감으로써 후방의 위협을 없앤 다음 중원을 도모할 기회를 노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고, 다음해 아들인 순치제에 이르러 청나라는 산해관을 지키던 명나라 장수 오삼계의 투항으로 북경으로 진군하여 이자성을 몰아내고 결국 중원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청나라는 조선에게 군신관계, 즉 속국임을 요구했고 조선조정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겉으로는 청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섬겼지만, 마음속으로는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기며 복종하지 않았다. 청나라 지배하에 있으면서도 대내적인 기록을 쓸 때는 “崇禎紀元後 00 甲子 0年" 하며 청나라 연호가 아닌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의 연호를 썼다. 얼마나 명나라에 대한 중화사대모화가 지극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숭명반청주의자인 인조임금은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9년 만에 돌아온 장자 소현세자를 독살시키고 며느리 세자빈과 손자들을 모두 죽여 버린다. 소현세자가 오랑캐 청나라에게 우호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또한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통해 청나라의 눈부신 발전상을 소개하며 “모든 분야에 그 장점들을 도입하자”고 제안하니 조정대신들은 “어찌 저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의 습속을 따르겠는가?”고 말했으니 명나라에 대한 사대모화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알 수 있다 하겠다. 죽어서는 묘비에 이미 없어져버린 명나라를 그리워하며 ‘유명조선(有明朝鮮)’이라는 문구를 써서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오랑캐 청나라에 대항했던 것이다. 일예로 서울역사박물관에는 정조임금이 직접 쓴 ‘은신군 신도비’가 있는데, 거기에도 ‘유명조선국’이라는 문구가 뚜렷하다. 은신군은 정조의 이복동생으로 흥선대원군의 조부가 되는 인물이다. 당시는 청나라 연호를 쓰던 시절임에도 국왕이 직접 쓴 묘비가 이랬던 것으로 보아 그야말로 조선왕조는 죽어서도 뼈 속까지 명나라를 지극정성으로 사모했던 소중화였던 것으로 보인다. ▲ 은신군(흥성대원군의 조부) 신도비의 유명조선 <사진=필자제공> 조선 초 삼봉 정도전이 지은 아래 <조선경국전>에 조선이라는 국호가 정해진 이야기가 있다. <<해동은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조선이라고 일컬은 이가 셋 있었으니, 단군과 기자와 위만이 바로 그들이다. (중략) 이들(우리 삼국·후삼국)은 모두 한 지역을 몰래 차지하여 중국의 명령을 받지 않고 스스로 국호를 세우고 서로를 침탈하였다. (중략) 그러나 기자만은 주 무왕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朝鮮候)에 봉해졌다. 지금 천자(명 태조)께서 “오직 조선이란 칭호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유래가 구원하다.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하늘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리면, 후손이 길이 창성하리라”고 명하였는데, 아마 주 무왕이 기자에게 명했던 것처럼 천자께서 전하에게 명한 것이리니, (중략) ▲ 국호 조선은 기자조선의 조선이라는 <조선경국전>의 내용. <이미지=필자 제공> 기자는 무왕에게 홍범을 설명하고 그 뜻을 부연하여 8조의 가르침을 지어서 나라 안에 실시하니, 정치와 교화가 성하게 행해지고 풍속이 지극히 아름다웠다. 그러므로 조선이란 이름이 천하 후세에 이처럼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제 조선이라는 아름다운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으니, 기자의 선정 또한 당연히 강구해야 할 것이다. 아! 명나라 천자의 덕도 주 무왕에게 부끄러울 게 없거니와, 전하의 덕 또한 어찌 기자에게 부끄러울 게 있겠는가? 장차 홍범의 배움과 8조의 가르침이 금일에 다시 시행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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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신 글 잘읽어 배웁니다...
예, 개 성계 조선왕조는 우리 민족에게는 귀태 가렴주구 왕조입니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반민족적 반역사적 반동입니다..^^ 우선 국호 조선은 지나족의 우리 민족의 고대 대륙경영을 짓밟는 지나족의 저질스러운 상고사에 대한 복수 드라마이며 정신병자 귀화 3 세 개 성계와 당시 신진사대부층과의 담합으로 새끼 지나주의로 사상을 무장하고 우리 사촌들을 오랑캐라 호칭하는 무례와 법을 흐렸도다..^^
원 명 고려 천하삼분론에서 숭명사대로 꼬릴 내린 개 성계와 사상적 기반을 제시한 주자학으로 무장한 신진사대부층.... 최근에 접한 구호 하나... 대륙에서 8600 녀 년 반도에서 600 여 년.... 이것이 우리 민족의 숨은 진실이 아닐까
성선생님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요즘 짬짬이 징비록을 읽고있는데, 그 당시 대세의 흐름을 살피지 못하고 명에 목을 매고 있는 조선조정을 보니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역사가 뒤틀린건 반쪽 통일인 신라로부터 기원 합니다 .
그리고 조선건국의 당위성과 이면을 살펴보라 권합니다 .
고려의 멸망은 필연이며 , 그 시작은 정체성을 상실하고 삼별초 항쟁이후에서 기원하며 고려 왕조의 왕들이 충성을 의미하는 왕명이 시작됨으로 무신정권이 들어섬으로 명분보다는 힘의 논리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된거죠
무신정권의 시작은 하급관료들이 주축이 되어서 일어난 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
그럼에도 문신이었던이가 권력을 위하여 무신들을 독살하는 과정이 일어 나죠 !
역사를 단편적으로 보는건 위험합니다 . 왜라고 자문해 보고 사유하여 보아야죠 !
신라가 반쪽 통일을 하고 [ 외세를 끌어들여 ] 인구가 급감한 사실을 주목하면 명분이 없었다는걸 증명하며 ,
발해가 건국되자 다시 외세를 끌어들여 침략하죠 그리고 신라는 부흥운동도 없이 들어다 바치고 망합니다 .
고려와 조선 건국시기 이 신라계는 기득권층으로 살아 남습니다 .
신라가 창씨개명을 한 사실을 아십니까 ?
또 조선이 망조를 들게한 성리학 즉 서원이 어떤 태생적 한계를 가지는지 아십니까 ?
이미 우리는 1300여년전 신라가 얼결에 주역이 됨으로써 강역뿐만 아니라 기회주의자들을 양산하게 된겁니다 .
경남에서 시작된 서원은 유교의 수장이었던 김일손을 배척하고 명분도 의리도 없는 권력욕의 발로 였으며 ,
외척의 발호로 문란해진 국정속 기득권층만 바뀌어 더 탐악한 이들이 집권 함으로 정체성마저 단절된 것입니다 .
유교와 편협된 성리학은 다름을 아시고 우리 민족의 배덕자들이 권력욕을 지속하며 1300여년을 이어와
오늘의 현실속에 기득권층으로 잔존함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
저의 자평으로 신라속 김유신이나 김춘추가 태생적 한계를 벋어나기 위한 열망이 삐뚤어저
명분없는 권력을 탐함과 이들이 건국시 마다 정화되지 못하고 기득권층으로 존속되어 권력을 쥘때 마다
우리민족의 고통으로 다가와 오늘의 현실를 낳았으며 , 이는 모두의 방임이 부른 원죄라 봅니다 .
지금부터라도 자신의 주변에
매국자 , 국익에 반한자 , 사익을 위해 타인을 해하는자가 보인다면
단호하게 배척하십시요 .
이러한 과정이 없이는 변화는 다가오지 않으며 , 소수나 어느 시점의 주역만이 변화를 부르지 못함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
먼 역사를 보지 못하시는 분은 근대사인 흥선과 고종의 친정 시기를 주목하라 권합니다 .
아관파천이 무엇이며 , 그 이후 봉기가 어던 형태인지 주목해 보십시요 .
조선사에서 위대한 인물을 뽑으라면 저는 고종을 빼놓지 않습니다 .
고종이 실패한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며 우리 모두의 탓입니다 .
반대편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본았을 때 고종의 의지가 성공했다면 일제 치하는 없었을 정도로 개화의 물결은
일본과 비교하여 늦지않았었음을 명심하시고 , 고종의 실패 원인이 근위세력 이었던 박영효의 배신을 기화로
수구 세력에게 명분을 줌으로써 좌절되었다는 점을 명심 하십시요 .
박영효의 계보는
이승만 - 박정희 - 전두환 - 노태우 - 이명박 - 박근혜로 이어짐도 아셔야 합니다 .
이게 우리의 현실 입니다 .
민주주의 투표 체제하에서 우리의 선택은 변하지 않았으며 , 모두의 책임인 것입니다 .
길지만 또렷하신 의견 잘 읽었읍니다..^^ 고맙습니다..^^
글 리조선오백년방으로 옮겨갑니다. 감사합니다.^^
예나제나 주체성 없이 큰나라에 기대려는 사대근성이 문제군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일제시대 왜놈 쪽발이가 조선사 편수화에서 우리에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조선사가 왜곡된것이 조선에서가 아니고 왜놈 입니다 해방후 왜놈이 만들어준 허구 반도설 버리는 것이 정석이죠 그러나 버렷습니까 아니죠 이병도의 매국행위로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말도 안되는 행동이죠 그러나 그에 제자 강단학자들은 허구 반도설 검증하고 수정함에 수정 햇습니까 아니조 검증도 안하고 공짜로 정사자격 줬습니다 허구 반도설이 왜놈이 조작한것이지 이씨조선이 조작은 아닙이다 신라사도 왜놈이 조작 했지 신라가 조작 안 했습니다 절대로 허구 반도설로 기준점두고 역사를 보면 안 됩니다 역사를 보는 기준점은 대륙 입니다 대조선의 진실을 안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