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요동(遼東) 태수 (11) 현토(玄兎) 태수 (12) 낙랑(樂浪) 태수이고, 1명은 판독 불능
1976년 평안남도 덕흥리에서 발견된 고분의 주인공은 고구리 광개토태왕의 신하인 유주자사 진이었다. 천장에 있는 묵서명을 통해 광개토태왕 당시 유주는 고구리의 영토가 확실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유주자사에게 하례를 드리고 있는 13태수의 지명은 과연 어디일까? 일본과 북한사학계에서는 광개토태왕이 북경까지 진출했다는 결정적인 자료로 보았는데, 과연 그럴까?
13개 군 중 8개 군들은 중국의 고지도인 <동한군국지도>에 북경 부근 하북성에 그려져 있다. 그리고 중국은 요동을 요녕성을 흐르는 요하의 동쪽이라 하고 요서는 요하의 서쪽이라 한다. 또한 낙랑군의 위치는 대동강 평양이고 현토군은 압록강 중류 집안현이라 한다. 중국의 제멋대로 지명비정대로라면 유주는 한반도 북부에서 북경 부근까지 엄청난 크기의 행정구역으로, 유주는 고구려의 영토보다 훨씬 더 크게 그려진다. 따라서 중국의 지명비정은 뭔가 대단히 잘못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 유주자사에게 하례를 드리는 13태수의 지명을 중국의 주장대로 그린 지도. <사진=필자제공>
13태수가 다스리던 지명들의 정확한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사서로는 <한서지리지>가 있다. 후한 때 반고가 편찬한 <한서지리지>의 내용은 먼저 우공의 9주 이후 분열되어 혼란 상태에 있던 천하가 통일되어 한나라의 지방제도가 성립되는 연혁을 설명하고, 제2단에서는 AD2년을 기준으로 하여 103개 군국(郡國)과 그 관할 아래 있는 현과 읍 등을 설명하며, 그 연혁·호구·산천·고적·물산 등을 기록하고 있는 지리지다.
1. <한서지리지> 유주(幽州)에 속한 10개 군(원문은 생략하고 중요지명만 언급한다)
(渔阳郡 어양군) 진나라 때 설치했고 유주에 속한다. 가구 수는 68,702호, 인구는 264,116명, 어양(渔阳), 천주(泉州)현 등 12개현이 있다.
(上谷郡 상곡군 ) 진나라 때 설치했고 유주에 속한다. 가구 수는 36,008호, 인구는 117,762명, 거용(居庸), 창평(昌平), 광녕(广宁), 탁록(涿鹿)현 등 15개현이 있다.
(代郡 대군) 진나라 때 설치했다. 왕망 때 염적이라 불렀고 유주에 속한다. 가구 수는 56,771호, 인구는 278,754명, 상건(桑乾)현 등 18개현이 있다. 우연수(于延水)는 차여(且如)현에서 나와 동으로 령(寧)까지 흘러 고수(沽水)로 들어간다. 구하(滱河)는 동으로 문안현까지 흘러 대하로 들어가고, 5개 군을 거쳐 940리를 지난다.
(右北平郡 우북평군) 진나라 때 설치했고 유주에 속한다. 가구 수는 66,689호이고 인구는 320,0780명, 16개현이 있다. 대게석산(=대갈석산)이 려성현 서남에 있다.
(辽西郡 요서군) 진나라 때 설치했고 유주에 속한다. 작은 하천이 48개가 있는데 총 길이 3,046리이다. 가구 수는 72,654호이고 인구는 352,325명, 신안평(新安平), 유성(柳城), 고죽성(孤竹城)이 있는 영지(令支), 비여(肥如), 임유(临渝)현 등 14개현이 있다. 마수산(马首山)은 유성현 서남에 있고, 당취수(압록수)는 도하까지 흘러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辽东郡 요동군) 진나라 때 설치했고 유주에 속한다. 가구 수는 55,972호, 인구는 272,538명, 양평(襄平), 요양(辽阳), 험독(险渎), 안시(安市), 서안평(西安平)현 등 18개현이 있다. 대요수(大辽水)는 망평현 밖에서 나와 남쪽으로 안시까지 1,250리를 흘러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涿郡 탁군) 한 고조 때 설치했고 유주에 속한다. 가구 수는 195,607호 인구는 782,764명, 탁(涿), 역(易), 범양(范阳)현 등 29개현이 있다. 역수(易水)는 염향(阎乡)현에서 나와 동으로 범양까지 흘러 유(濡)로 들어간다.
(勃海郡 발해군) 한 고조 때 설치했고 유주에 속한다. 가구 수는 256,377호 인구는 905,119명, 부양(浮阳), 부성(阜城), 남피(南皮), 장무(章武)현 등 26개현이 있다.
(玄菟郡 현토군) 한 무제 4년에 설치했다. 고구려현을 왕망이 하구려현으로 불렀다. 유주에 속한다. 가구 수는 45,006호 인구는 221,845명, 고구려(高句骊)현, 상은대(上殷台)현, 서개마(西盖马)현의 3개현이 있다. 마자수(압록수)는 서북으로 염난수에 들어가고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에서 바다(황하)로 들어가는데, 2개 군을 지나고 2,100리이다.
(乐浪郡 낙랑군) 한 무제 3년에 설치했고 유주에 속한다. 가구 수는 62,812호 인구는 406,748명. 운장(云鄣)이 있으며 조선(朝鲜), 패수(浿水), 수성(遂成), 대방(带方), 열구(列口), 둔유(屯有)현 등 25개현이 있다.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增地)현까지 흘러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함자(含资)현에서 대수(帶水)가 서쪽으로 대방현까지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분려산(分黎山)에서 열수(列水)가 나와 서쪽으로 점선(黏蝉)까지 820리를 흘러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그런데 위 유주에 속한 10개 군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보면 이상스럽게도 아래와 같이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로 나타난다. 독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지며 “그곳은 대대로 중국의 땅이었으므로, 중국의 주장대로 중국에서 유주자사를 지낸 한 관리가 고구려로 망명해 살다가 광개토태왕 때 죽어 한반도에 묻혔나?”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과연 그런 중국의 주장이 옳을까?
▲ 유주는 황하가 꺾이는 산서성 남부와 북부 하남성 일대로 중원 한복판이다. <이미지=필자제공>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주의 위치는 황하 이북 하남성과 산서성 남부가 맞는데 그곳은 대대로 중국의 땅이 아니라, 배달국과 조선 이래로 줄곧 우리 민족의 땅이었으며 잠시 중국이나 백제에게 내준 적은 있으나 곧 수복하였고, 광개토태왕 이후에는 줄곧 고구리의 핵심강역이었던 곳이다. 참고로 지난 (1부)에서 유주자사 진의 출신지인 신도현(信都縣)이 산서성 남부 임분이라고 밝혔는데, 그는 중국출신이 아니라 고구려 땅에서 태어난 고구려 사람이었던 것이다.
유주의 위치를 정확히 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유주에 속한 180여개의 현 중에서 그 위치를 정확하게 밝힐 수 있는 지명이 몇 개 있기 때문이다. 그 핵심 Key가 바로 요동·요서하는 요서군에 속한 영지현(고죽성)과 한사군의 핵심 낙랑군에 속한 패수현이다. 이들 위치가 정확하게 밝혀짐으로써 유주가 어디인지 밝혀졌고, 고구리의 남쪽 경계가 어디까지였는지 밝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곳에다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지명들을 대입해보면 지금까지 이상했던 역사해석이 신기하게도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톱니바퀴처럼 정확히 맞물려 돌아간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 치우와 헌원이 마지막으로 겨룬 탁록(상곡군)이 산서남부에 있는 운성시라고 밝힌 운성시정부의 공식홈피(아래)와 그곳에 있는 치우촌. 즉 중국지방정부가 말하는 유주는 황하북부 하남성과 산서성 남부라는 사실이다. <사진=필자제공>
즉 동쪽으로는 유주자사 진이 묻혀있는 한반도에서부터 북경을 지나 남쪽으로 황하까지가 고구리의 강역이었고, 서쪽으로는 그야말로 해가 지지 않는 엄청난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연방대제국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증명해주는 유적이 덕흥리 고분과 광개토태왕 비문인 것이다. 또한
치우와 헌원이 마지막으로 겨룬 탁록(상곡군)이 산서남부에 있는 운성시라고 밝힌 운성시정부의 공식홈피와 그곳에 있는 치우촌. 즉 중국지방정부가 말하는 유주는 황하북부 하남성과 산서성 남부라는 사실이다.
<우리 역사의 지명을 밝히는 핵심 Key인 영지현과 패수현의 위치는 다음 (3부~4부)에 이어집니다>
첫댓글 참말로 얼렁 통일이 되어야할텐데....
북한이 중국과 우호적관계라 저런 역사적 진실도 입밖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듯합니다
통일만되면 우리 대한민국에 정신적 지주가 될 자료라고 보여집니다...
유주=황하이북 지역(번한)...고구려의 국시 다물(고조선 고토회복) 실현한 광개토태왕//백제(웅진)과 신라(경주)와 가야(김해)는 마한땅(남한)에서 마한 진왕의 허락을 받아 개국된 나라들이고 왜는 마한 남쪽 전라도 영산강을 중심으로 해양세력을 의미한다...고구려는 압록강 지역 환인에서 일어난 나라다. 고구려는 태조왕 시기에 이르러 요하를 건너 서토회복에 나섰고,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에 서해를 건너 요서와 중국 동해안.열도로 진출하였다. 신라는 초원세력 흉노신라 때가 아니라 왜세력인 석탈해가 왕으로 있을 때 남지나해를 건너 월주지역에 월주신라를 개척한 것이다.
이 분은 끝까지 왜놈들을 동족이라고 표현해... 왜구 후손들은 사람이 아니고 개종자들이라니까?
허구 반도설을 기준으로 역사를 보지 마십시오 조선사 편수횡에서 만들어준 역사위서 입니다 ,,,,
왜구는 동족이 아니고 백성입니다 ,,,,
그니까 고구려가 압록강 지역 환인에서 일어났다는 지표조사보고서 보여 달라니까!!
니가 안보여주니까 니 말이 신뢰가 안가잔아.
왜는 마한 남쪽 전라도 영산강을 중심으로 해양세력을 의미해? 그럼 복현이 당신의 고향도 왜의 해양세력을 의미한다 하니 당신은 그럼 여태 김자님이 한 말씀 처럼 왜구가 맞구만..ㅋㅋ
논리가 영... ㅋㅋㅋ 자충수 두셨어 복현아. ㅋ
신라는 초원세력 흉노신라 때가 아니라 왜세력인 석탈해가 왕으로 있을 때 남지나해를 건너 월주지역에 월주신라를 개척한 것이다. <- 임나일본부설의 2차인가? ㅋㅋ
경상도와 전라도를 일본에 주고 싶어 안달이지? 복현아? ㅋ
대륙에 고구리가 있음을 증명하는대 왜 강단학자는 조용한가 한국인에 자긍심이 뭔지는 알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강단학자는 한국인이 아니다 앞잡이 역적일뿐이다 ,,,,,,,
우리역사를 모두 찾는다면 민족개개인의 자긍심은 하늘을 찌를것입니다....
우리역사서 언제쯤이나 사실대로 될까?
대륙은 바로 과거 수천년 우리의 영토가 틀림없는데
좋은글 가우리큰제국방으로 모셔갑니다.
고구려가 마한땅 압록강지역(환인.집안/적석총 지역=세계 최다 피라미드 지역=신시)에서 개국함으로써 한국사임을 증명할 수 있으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광개토태왕 시기 황성인 국내성은 광개토태왕비가 서 있고 태왕릉이 있고 많은 고구려 태왕들의 무덤들이 즐비한 집안이였다. 그런데, 어떤 자들은 세계 최대규모의 엄청난 무게의 광개토태왕비를 청나라 때 집안지역으로 끌고 왔다는 코메디같은 주장을 하면서 고구려를 중국에 상납하고 싶어안달하는 자들이 있다. 한마디로 웃기지마라다. 요하건너 후연을 정벌하기 전에 광개토태왕의 고구려는 요하 동쪽지역의 만주다.광개토태왕 당시 국내성은 압록강지역 집안이라는 소리다.
그리고 왜와 왜구.왜노(왜의 오랑캐.노예)를 구분하지 못하면서 민족사를 운운하면 안 된다.4국 시대 이전의 고대 남한을 기록한 <후한서-한전>에 보면 남3한 중 마한과 번한 남쪽으로는 왜와 경계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란 한반도 토착 해양세력을 중국인들이 그렇게 기록한 것이다. 위만집단에게 망하여 서해를 건너 망명해 온 번한의 기준집단이 만든 체제가 남3한이기 때문에 한반도 토착해양세력과 구분지어 기록한 것이다. 왜는 고대부터 바닷길을 개척하며 영산강을 중심으로 해양무역을 하던 해양세력이다. 왜구.왜노란 왜인들의 노예.오랑캐라는 의미이니 왜세력이 해양무역을 하는데 노예로 부린 인간들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왜구들은 노략질을 하던 왜의 오랑캐들을 의미하는데, 그 근거지가 대마도였다. 그런데, 왜구들의 머리스타일을 보면 전형적인 북방 초원세력의 머리스타일임을 알 수 있다. 4세기 동해안을 따라 경상도 지역으로 이주해 온 선비흉노족 중에 신라.가야 권력집단으로 부터 외면당하거나 이탈한 선비흉노족이 대마도를 중심으로 주변 열도지역에 거주하면서 노략질하는 해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략질은 호전적인 북방 초원세력의 생존습성이기도 하다. 해양세력이 되어 노략질을 하고 유부녀들을 강간하게 되니 왜구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해양무역에 종사했던 영산강 중심의 전라도 해양세력을 왜구로 비하매도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왜구들의 근거지가 대마도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내 얘기는 그들도 배를 타고 움직였으니... 남해안 섬은 그들의 또다른 근거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묻는 것이야.... 약산도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냐고?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줄까?.... 현감이 마당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 가려고 하자 상관의 명을 거역하고 오동나무를 지켰다는 일화가 전해진 곳이... 완도에서도 건너다보이는... 고흥군 도화면 내발리에 있던... 발포만호지다... 이순신의 두번째 근무지가 고흥의 발포였다는 것은... 발포가 최전선이고 그 너머는 적지로 해석함도 틀린 해석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한번 묻는데... 약산도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누구였느냐?
쐐기를 박는 김에 하나를 덧붙이자면... 지금도 완도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고흥군 녹동항... 그곳에도 군시설이 있었으니 ... 난중일기에 나오는... 이순신 장군이 가장 총애했다는... 정운 장군께서 녹도만호로 근무하던... 녹도만호지가 바로 지금의 녹동이다..... 자! 완도는 녹도와 발포에의해 철저히 차단이 되었던 섬이다. 그 섬에서 태어난 네가 지역감정을 유발시키는 글을 계속 올리는 한 나의 추궁은 계속될 것이다... 약산도에는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냐?
유주자사진의 무덤이 왜 북한지역에 있겠는가? 당시 국내성이 존재했던 만주를 중심으로 북한지역이 고구려지역이고, 요하를 건너 고구려의 원수나라였던 모용선비족 후연의 요서지역을 정벌하면서 황하이북지역까지 차지하여 다스렸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아니겠는가! 현재도 불리우고 있는 북경지역의 고려영은 당시 광개토태왕 군대가 머물던 병영에서 비롯된 지명이고.
모본왕 때 상곡, 어양, 우북평 등에 진출했다는 기록이 있지요. 저 지역은 모본왕 이후 계속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었을까요?
대한민국 코리아는 코리아대칸이 아닌지요? 이렇게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도 우기는 것으로 봐서.... 머리가 나빠서 이해를 못하는 건지, 이해되면서도 그냥 자기 주장대로 우기는 건지?
코리아 대칸. 대한민국.대한민국 코리아는 동일인입니다.
성훈씨 광개토태왕비를 하북성에서 만주까지 끌고 와요? 어디서 그런 코메디같은 주장을 하는 거요? 고고학적으로 유적,유물들이 무더기로 발굴되는 고구려가 개국한 지역이 환인의 골본=홀본이고, 장춘으로 수도를 옯겼다가 다시 유리왕 때 국내성 집안으로 천도해서 광개토태왕 시기에도 황도를 삼았는데 하북성이 고구려 개국지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요. 광개토태왕 시기에 후연이 어느 지역에 있었소? 바로 당신이 고구려 중심지라고 주장하는 하북성 지역이요.ㅎ..번조선에 속하는 요서지역이 바로 후연땅이란 말이요.
광개토태왕 때 거란.말갈족과 연합하여 요하를 건너 요서지역의 후연을 정벌하고 모용황의 사당이 있는 북경지역까지 정벌한 것이요. 그 때 유주지역까지 차지하여 진에게 통치권을 맡긴 것이고. 민족사를 논할 때는 이 코리아 대칸처럼 대중이 공감할 수 있도록 상식적으로 주장을 해야지 주관적 해석과 감성적 이해로 혹세무민을 하면 안 되는 것이요. 대중의 지적수준을 웃습게 알면 안 되는 것이요. 이 카페의 소수가 잘한다 치켜 세워준다고 으시대지 말라는 것이요. 문제는 다수의 대중이 당신논리를 인정해 주냐 이거요
./고구려사 개요-환인의 홀본성에서 개국.장춘으로 천도.집안으로 다시 천도하여(환단고기 기록) 400여년간 수도로 삼고, 대무신왕이 고구려에 굴종을 강요한 연해주 지역의 동부여 정벌하고 대소왕을 죽이고 만주의 패권을 장악한 후 한반도 북부지역까지 차지. 태조왕 시기에는 부여와 한나라가 연합하여 한군현 회복을 저지했으나, 모본왕의 한나라를 공격의 기상으로 요하를 건너 현토군을 제외하고 요서의 한군현 지역을 회복하고 10개성을 쌓아 한나라 침략에 대비했다.(삼국사기.환단고기) 한군현 회복은 번조선 유민들의 합세에 힘입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서해를 건넌 백제의 요서지역진출의 기반도 번조선 유민들의 합세떄문이다,
미천왕 시기에 요서지역의 현토군을 비롯한 한반도 북부의 낙랑군과 대방군 등 한군현을 완전히 회복하였다..유리왕 때 고구려에 정벌 복속되어 태조왕 시기에 고구려 용병으로 참여했던 선비족이 단석괴를 중심으로 흥기하여 중국 북부지역으로 진출한 이래로 요서지역은 모용선비족이 세운 연나라가 들어서서 고국원왕 시기에는 방어전술이 빚나가는 바람에 고구려 국내성이 유린되고 미천왕 시신이 도굴되고, 태후와 왕후가 고구려 유민 5만과 함께 인질로 끌려 갔다. 왜와 연합한 백제를 정벌하고 굴복시킨 광개토태왕은 거란.말갈이 합세한 5만의 기마군을 동원하여 철천지 원수 모용선비족 정벌에 나서 궤멸시키고 고운을 제후로 삼았다.
추모왕 고추모의 국시는 경천애인과 고토회복이라는 다물이였다.그러한 국시를 실현한 왕이 국내성이 있던 만주를 중심으로 남으로는 마조선에 해당하는 한반도와 열도를, 북과 동으로는 진조선에 해당하는 흑룡강지역과 연해주지역을, 요하건너 서쪽과 남쪽으로는 감숙성지역과 번조선에 속하는 황하이북까지 완전히 평정한 광개토태왕이였다.그래서 세계 최대 규모의 자연석에 업적과 기상을 세워서 황도였던 집안에 세운 것이다.그런데, 고구려 개국지가 하북성이라면서 중국에 고구려를 상납하겠다는 정신나간 자들이 고구려사를 운운할 자격이 있나?고고학적 근거자료는 부재한 체 문헌기록만 자위적으로 해석하여 주장하는건 자위사관이다.
37톤짜리 호태왕비는 19세기 말에 산서성 황하변에서 현 위치까지 배에 싣고 왔음이 분명하다. 그 어마어마한 비석이 조선왕조의 기록에 전혀 안 보인다는 것은 말이 안되며 조선왕조 때 집안에 그 비석이 없다는 증거이다. <강계현지>를 보면 압록의 북쪽에 금황제비석이라는 작은 비석이 있었다는 기록까지 있는데 그 큰 비석이 없는 이유는?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