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12월2일 오전9시 전두환은 연희동 자택 앞에서 소위 “골목성명”을 발표했다. 그 광경이 TV를 통해 생방송으로 중계됐다.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이 나라가 지금 과연 어디로 가고 있고 또 어디로 가고자 하는 데 대한 믿음을 상실한 채 심히 비통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 우리 모두가 잘 기억하고 있는 대로 현재의 김영삼 정권은 제5공화국의 집권당이던 민정당, 신민주공화당, 통일민주당 3당이 과거사를 모두 포용하는 취지에서 연합해 ‘구국의 일념’이라고까지 표현하며 이뤄진 것입니다. . 그런데 취임 후 3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 와서 김대통령은 갑자기 저를 내란의 수괴라 지목해 과거역사를 전면 부정하고 있습니다. 만일 제가 국가의 헌정질서를 문란케 한 범죄자라면 이러한 내란세력과 야합해온 김대통령 자신도 응분의 책임을 져야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길로 고향 경남 합천으로 내려갔고, 검찰은 그날 밤 11시20분에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아 12월3일 새벽 5시57분 그의 5촌 조카 집에서 잠들어 있던 전두환을 연행해 안양교도소에 구속수감해버렸다. 선영에 성묘를 하러간 전직대통령을 쫓아가 새벽에 구속한 것이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는가? 김영삼의 특기인“깜짝쇼”였다고 하지만 그 상대는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었다. 같은 법을 집행한다 해도 인격적으로 이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김영삼은 상류사회의 덕목을 갖추지 못하고 참모총장을 하루아침에 해임하면서 이대생들 앞에서 “놀랬재이” 하며 자랑한 몰상식한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직을 수행함에 있어 우아함이나 품위 같은 게 없었다.
수사관들이 고향사람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이 TV로 생중계됐다. 전두환은 세수를 하느라 몇 분간의 시간을 지체했다. 이 얼마 안 되는 시간을 경찰총장이 견디지 못해 검찰수뇌부로 전화를 했다.“왜 빨리 안 나오는 겁니까. 어른(김영삼)이 보면 저한테 날벼락이 떨어집니다.”김영삼을 극도로 의식한 것이었다. 남총련(전라남도대학총학생회연합회) 소속 대학생들(체포결사대)이 합천으로 가고 있었다. 박청장의 전화가 끊긴 5분 후 전두환이 방에서 나왔다. 이때 검찰수뇌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다.
전두환이 밖으로 나오자 마당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고향 주민들이 “각하, 안됩니다”라며 울었다. 이런 주민들 앞에서 수사관들은 굳이 팔짱을 끼었다. 김영삼이 보리라는 것을 의식했을 것이다. 참으로 비참한 모습이었다. 팔짱을 끼지 않아도 그는 조용히 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극적인 모습을 연출해야 김영삼의 눈에 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동이 트기 전인 새벽 6시37분 전두환은 검찰승용차를 타고 고향인 합천을 뒤로 했다. 호송승용차는 고속도로 버스전용차로로 줄곧 시속 100㎞가 넘는 속도로 달렸다.
전두환은 소변을 호소했다. 수사관들이 깡통을 내밀었다.“내가 어떻게 여기에 오줌을!” 전직 대통령은 차마 깡통을 사용할 수 없었다. 오전 10시37분 안양교도소에 도착했다. 승용차에서 내리자마자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이 화장실이었다.
언론에 의하면 당시 최환 서울지검장은 전두환에 대한 신병처리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대검찰청에 올라갔다. 그가 가졌던 안은 전두환이 선영에 성묘를 마치고 동해안을 거쳐 며칠 후 돌아오기로 돼 있으니 그때 정식으로 소환장을 보내 검찰청사로 불러들인 뒤 구속하는 것이었다. 안우만 법무장관도 같은 의견이었다고 한다. 김기수 검찰총장도 같은 생각이었다 한다. 그런데 한 순간에 바뀐 것이다. 최환 지검장이 김기수 총장에게 가자마자 검찰총장이 일방적으로“즉시 구속하라”고 명했다 한다. 필자는 이를 김영삼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여기에 역사바로세우기재판의 격과 품질이 예단돼 있었다. 상류사회와 하류사회, 분명한 물리적 선은 그어져 있지 않지만 이 세상 그 어느 사회에나 상류사회, 하류사회는 분명히 존재한다. 물질적 귀족도 있겠지만, 정신적인 귀족도 있다. 필자는 투사로 일생을 살아왔다는 김영삼 그리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법을 팔아 아부한 검찰과 판사들을 정신적 귀족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필자는 당시의 군부사회에서 성장한 사람이다. 당시의 군부사회는 정직하고 예의 바르고 형식을 중요시했다. 당시의 사회부류들 중에서 그래도 가장 깨끗하고 앞서가는 사회가 군인사회였다는 것은 자타가 다 인정할 것이다. 선진 외국문물은 군 장교들을 통해 들어왔고, 군행정이 사회행정을 선도해 왔다. 검찰이나 재판부가 판결한 것처럼 그렇게 막돼버린 사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더구나 육사출신들은 생도 1학년부터 “국제신사”를 지향한다는 모토를 가지고 훈육됐다. 이러한 관계로 육사출신들의 매너는 다른 사회에 비해 평균적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12월12일 당시 최규하와 함께 밤을 지샜던 신현확 총리는 장군들이 대통령 앞에서 예의를 깍듯이 갖추었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판결문에는 장군들이 대통령을 예의 없게 대했다고 되어 있다. 신현확은 본인이나 대통령이 공관을 지키는 무장 경비 병력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했는데도 판결문에는 대통령이 무장경비병들로부터 공포감을 가졌다고 되어있다. 노재현과 신현확 그리고 이희성은 대통령이 스스로 판단하여 재가를 했다고 증언했지만 판결문에는 공포감을 주고 협박하여 재가를 받아냈다고 되어 있다. 국방장관 노재현은 그가 국방부 청사 1층 계단에서 병사들에게 발견되었을 때 병사들이 경례를 했고, 그 스스로 국방장관실로 갔다고 진술했는데도 판결문에는 병사들이 체포하여 장관실로 연행했다고 되어 있다. 윤성민 참모차장이 전두환에게 “총장을 원위치 시키라”는 명령을 한 바 없는데 판결문에는 전두환이 윤성민 차장의 명령을 거역했다고 되어 있다.
윤성민 차장이 비상을 발령했을 때 경복궁에 있던 장군들은 너나없이 부대에 전화를 걸어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부대장악을 잘하고 있으라 당부했다. 이는 지휘관들의 당연한 생리다. 또한 진돗개 하나는 대간첩작전에서 최고 수위의 비상수준이며 그 자체가 출동준비명령이었다. 이를 놓고 재판부는 경복군 장군들이 쿠데타를 위해 출동준비명령을 내렸다고 덮어 씌웠다.
1공수여단이 밤 10시경에 출동했던 사실이 전혀 없는데도 재판부는 출동했다고 했다. 정승화가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서 해임하자고 노재현 장관에게 넌지시 던져봤던 날짜는 12월9일이고, 전두환이 이학봉에게 총장을 연행하라고 지시한 날짜는 그보다 3일 전인 12월6일이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전두환이 12월9일에 처음으로 장관과 총장 사이에서만 발설됐던 경질소문을 듣고 선수를 쳐서 정승화를 연행했다고 판결했다. 12.12와 하나회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9명의 장군 중 하나회는 3명뿐이었다. 그런데 재판부는 하나회가 12.12를 주도했다고 판결했다. 이학봉 중령과 전두환 소장은 직속 명령관계에 있는 사이다. 건의를 올리고 지시하는 것을 가지고 공모했다고 판결했다. 검찰실에서나 법정에서 검찰이 한 결 같이 묻는 질문은 “그 때 권총을 찼었느냐”였다.
위에서 필자가 적시한 판결들을 보면 재판부나 검찰이 군 장성들의 매너수준을 저작거리 폭력배 수준으로 낮추어 보았다는 것이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 군 장성들의 사회는 판검사들이 상상했음직한 그런 하류사회가 아니다.
리더는 남이 하기 싫어하거나 남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리더가 존재한다. 하나는 공식적인 리더(formal leader)이고 다른 하나는 비공식적인 리더(informal leader)이다. 계급이나 직급이 낮아도 윗사람이 풀지 못하는 문제를 풀거나 남들이 피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면 사람들은 자연히 그를 따르고 그에 의존하게 된다. 비공식적인 리더인 것이다.
전두환은 당시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냈고, 정의감을 가지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해야 할 일을 해냄으로써 자연스럽게 윗사람들이나 아랫사람들로부터 신임을 받고 동조를 얻었다. 하나회가 아무리 강해도 강제적으로는 2성장군에 불과한 그가 당시 군의 여론을 좌우했던 그 많은 장군들로부터 신임과 동조를 이끌어 낼 수 없었다. 12.12때 전두환은 그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비공식적인 리더가 되어 있었고, 최규하가 무능하다는 비판을 받는 사이에 그 자신도 모르게 공식적인 리더가 된 것이다. 이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었다. 12.12는 하극상도 아니며 쿠데타는 더더욱 아닌 것이다.
전두환 시절, 사상 처음 무역수지에서 흑자를 기록했고, 국민소득이 3천달러로 치솟았으며 물가가 쌌고, 경제가 호황을 이뤘다. 그 시대만큼 경제가 좋았던 적은 없었다.
한국은 5000년 역사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거지의 나라였다.“조센진은 할 수 없어” 필자가 고3이었을 때 신당동 거리에서 늘 듣던 자조와 자학의 말들이었다. 이런 무기력하고 게으르고 도박과 마약에 빠진 국민을 일깨워 그는 이 나라를 세계에서 11번째로 잘사는 나라로, 가장 부지런한 나라로 바꾸어 놓았다.
김일성은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2,300만 북한 주민을 기아로 죽이고 학대하여 죽이고 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을 이용해 소련의 야욕으로부터 이 나라를 건국했다. 당대의 국제 지도자 중 이승만의 학력이 가장 화려했다. 조지타운 학사, 하버드 석사, 프린스톤 박사였다. 그의 존재가 곧 한국의 위상이었다. 그가 미국을 요리하는 솜씨는 참으로 대단했다. 비록 장기집권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말년이 불행하기는 했지만 이들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이 부유와 국제적 신분은 누릴 수 없었다.
짧은 기간에 이룩한 이 자랑스러운 현대사는 세계의 부러움을 샀다.“한강의 기적”그런데 이 자랑스러운 역사를 수치의 역사라고 폄훼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양성됐다. 좌파 대통령 노무현은 한국 현대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오욕의 역사라고 표현했다. 노무현만이 아니다. 유일한 현대사 역사책이라고 믿어온“해방전후사의인식”을 읽은 사람들이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했다. 초중고교에서, 대학 강단에서, 방송 프로그램에서 한국 근현대사는 반민중의 역사요 반민족의 역사라고 매도당했다.
좌익들이 득세하면서“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될 더러운 정권”이었다며 이승만을 역적으로 표현했다.“5.16군사정변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며 박정희를 친일파 앞잡이로 매도했다. 좌파세력에 의해 전두환 역시 이렇게 매도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김영삼과 역사바로세우기 판검사들이 심부름을 해준 것이다.
12.12는 다시 평가돼야 한다. 그리고 원상대로 되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12.12는 부국강병의 국부 박정희를 살해한 패륜아 김재규, 그리고 그의 뜻에 동조한 정승화가 이끄는 막강한 군벌에 의해 발생할 수 있었던 쿠데타를 사전에 차단한 애국적인 상황조치였고, 목숨을 건 결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다음 주제는 5.18에 대한 진실이다.
2008.5.10.
첫댓글 혼자 보기 너무 아까운 글입니다
쳐죽일놈들 피가 꺼꾸로 흐를려고하네 ..김영삼은 역사를 꺼꾸로돌리고 일사부조리 원칙을 무시해버린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