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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가 벌인 투쟁의 산물, <피아노 협주곡 24번> 한편, 모차르트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를 '타고난' 천재로 보는 선입견을 바꾸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모차르트라는 한 음악가가 관습에 맞서면서 자유로운 예술가로 태어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모차르트가 파리에서 실패하고 잘츠부르크를 떠나서 빈으로 가는 여정은 자유로운 예술가로 태어나는 과정이었으며, 후기의 명작들은 '근대적 의미의 저자'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피아노 협주곡 24번 역시 이런 부류로 묶을 수 있는 작품인 것입니다. 피아노 협주곡 24번은 그의 수많은 작품들 중 얼마 안 되는 단조곡으로 다른 단조곡들, 가령 교향곡 40번, 피아노 협주곡 20번 등과 마찬가지로 의심할 나위 없는 걸작입니다. 이 곡은 모차르트의 교향곡, 협주곡 중에서 가장 큰 편성을 갖추고 있으며, 이 편성을 넘어서게 되는 것은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에로이카>에 이르러서입니다. 유명한 음악학자 알프레트 아인슈타인은 모차르트가 단조곡인 피아노 협주곡 20번을 작곡한 후 "자신이 너무 앞서 나갔고, 빈 사람들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했으며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것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느꼈다"고 추측합니다. 그래서 22번이나 23번과 같은 "확실한 성공을 보장하는" 작품들을 작곡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24번은 20번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창조력을 자유롭게 발휘하여 작곡됩니다. 엘리아스는 이 길항관계가 모차르트 음악의 키워드라고 주장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이 24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주장하였으며(조성 역시 2악장만 E 장조와 E플랫 장조로 조금 다를 뿐 1, 3악장은 c 단조로 두 곡 모두 같음), 이 곡은 지극히 '베토벤적'이며 '교향악적'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통상 '경박한 천재 모차르트'와 '심오한 불굴의 인간 베토벤'이라는 식의 대립항을 설정하기 쉽지만, 이 곡은 모차르트의 심오한 음악성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협주곡은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을 창작하던 1786년 예약 음악회(당시의 음악가들이 지원금을 받기 위해 귀족들을 모아 놓고 신곡을 발표하던 음악회)를 위해 작곡된 곡인데 그가 내 용이 전혀 다른 이 두 곡을 거의 동시에 만들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그리고 이 곡과 거의 때를 같이 해서 ≪제 23번 피아노 협주곡≫도 작곡되었다는 점을 보면 모차르트가 얼마나 비범한 천재인지를 알 수 있다. '샘처럼 한없이 솟아난다'라는 비유로밖에 설명이 안 되 는 그의 악상의 풍부함에는 놀랄 수밖에 없다. 한 해 전에 만든 ≪피아노 협주곡 제 20번≫과 함께 단 두 곡뿐인 단조 협주곡 중 하나인 이 곡 은 20번과 마찬가지로 무겁고 깊숙하면서도 로맨틱한 내용인데다가, 악기의 뛰어난 사용법과 관 현악의 충실함에 있어서는 20번 이상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모차르트의 협주 곡을 들을 때는 우선 ≪제 20번≫과 ≪제 24번≫부터 먼저 듣기를 권한다. ≪피아노 협주곡 24번≫을 듣노라면 어둡고도 극적인 분위기가 넘치는 알레그로의 4/4박자인 제 1악장과 라르게토의 속도로 서정이 넘치는 피아노와 현악기가 대화를 하는 듯한 로만스풍의 2/2 박자인 제2악장에서는 마음을 찌르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 전편에 걸쳐 관악기를 크게 부각시키고, 협주곡으로서는 색다르게 알레그레토, 2/4박자의 제3악장에 변주곡을 두는 등 의 새로운 시도도 큰 매력으로 작용한다. 치밀한 계산이 눈에 띄는 모차르트의 다른 작품들과 달 리 기교적인 연주들을 즉흥적으로 이끌어 내도록 만든 점 또한 이 곡을 모차르트의 음악 생활 중 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라 평가하게 만든다. '내용적으로 더 이상 능가할 수 없는 모차르트의 창작 활동의 높은 경지'라고 일컬어지는 이 작 품에 대한 아인쉬타인의 평가는 이렇다. "이 협주곡은 얼마나 훌륭한 작품인지 베토벤도 감탄하여 자신의 ≪C단조 협주곡≫중에서 두세 개의 작품을 모차르트에게 공물로 바칠 정도였다. " 다니엘 바렌보임(아르헨티나,1942~) 피아노와 지휘를 겸하며 현대 음악계의 영감주의자로 일컬어지는 이가 다니엘 바렌보임이다. 그는 1942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피아노 교사였던 양친에게 5세때부터 피아노를 배워 7세 때는 벌써 데뷔하는 대단한 재능을 보였는데, 유럽과 이스라엘에서 연주하여 신동이라고 일컬어졌다. 1952년 바렌보임가족은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이스라엘의 국적이 주어졌다. 다니엘의 양친이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텔아비브에 정주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10세가 되는 생일을 앞둔 그에게는 아메리카=이스라엘 문화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이 나오고 잘쯔부르크의 모짜르테움 음악원에 입학, 피아노는 에드빈 피셔에게, 지휘는 마르케비치에게 배웠고, 작곡은 파리에서 블랑제에게 사사받았다. 푸르르 벵글러도 잘쯔부르크의 이 천재소년을 보고 베를린 필의 독주자로 계약했고 협연은 대성곡이었다. 그 이래로 바렌보임은 푸르트벵글러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그후 1955년 13세로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 입학하여 이듬해 7월에 석사의 칭호를 받고 졸업했다. 1955년과 이듬해 피아노로 비오티와 카셀라 콩쿠르를 잇달아 석권했으며, 60년대 초에는 지휘계에 데뷔, 본격적으로 지휘에 주력하였다. 1975년 파리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에 발탁, 1991년에는 솔티의 후임으로 시카고 교향악단에 상임지휘자에 내정되어 지휘계에서도 큰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그는 피아니스트로서도 넓은 영역을 구축하였는데, 피셔의 영향을 받아 독일, 오스트리아의 계열에 전통적인 피아니슴 양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지휘에서 끌어내는 오케스트라의 음량에 못지않은 웅장한 울림과 거친 기복이 존재하는 피아노연주를 들려주지만, 푸르트벵글러의 낭만성도 공존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두 음악계 최고 천재들의 결합이라는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영국의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와 결혼하지만, 재클린의 정신 분열증으로 이혼하고 만다. 하지만, 재클린의 임종 때 참석하여 한 천재의 불행한 종말에 옛날의 연인으로서 자리를 지켜주었다 <자료출처: 참마음 참이웃 / 음원출처: http://usoc.snu.ac.kr> |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이 있는 곳-김도사
첫댓글 이 협주곡은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을 창작하던 1786년 예약 음악회(당시의 음악가들이 지원금을 받기 위해 귀족들을 모아 놓고 신곡을 발표하던 음악회)를 위해 작곡된 곡인데 그가 내 용이 전혀 다른 이 두 곡을 거의 동시에 만들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그리고 이 곡과 거의 때를 같이 해서 ≪제 23번 피아노 협주곡≫도 작곡되었다는 점을 보면 모차르트가 얼마나 비범한 천재인지를 알 수 있다. '샘처럼 한없이 솟아난다'라는 비유로밖에 설명이 안 되 는 그의 악상의 풍부함에는 놀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