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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26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he calls his own sheep by name and leads them out.
(요한 10,1-10)
When he has driven out all his own,
he walks ahead of them, and the sheep follow him,
말씀의 초대
초대 교회 신자들 가운데에는 유다교에서 개종한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여전히 율법을 지키고 있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그들은 못마땅해한다.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른 것이라고 답한다.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발언이다(제1독서). 양들은 목자를 따라간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라가지 않는다. 아무리 친절한 목소리로 불러도 따라가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목자로서 오셨다. 그런데도 유다인들은 낯선 사람으로 여기며 따라가지 않고 있다(복음).
☆☆☆
오늘의 묵상
‘유방제’ 신부님은 조선에서 활동한 두 번째 사제입니다. 최초로 활동했던 ‘주문모’ 신부님이 ‘신유박해’ 때 순교하자, 33년 뒤인 1834년 조선에 입국했습니다. 본이름은 ‘여항덕’(余恒德)입니다. 박해 시대라 신분을 감추려고 이름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분에 대해서는 많은 오해가 남아 있습니다. 이름까지 바꾸며 철저하게 헌신하셨지만, 역사에는 감추어진 부분이 더 많이 있습니다. ☆☆☆
현대 철학은 ‘실용주의 노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유익한 것만이 ‘최고의 가치’라 생각합니다. 국가든 개인이든 무엇이 유익한지 먼저 계산하고 챙기려 듭니다. 이익은 어느 틈에 삶의 목적으로 등장했습니다. 까닭 모를 불안과 두려움은 그래서 존재합니다.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그러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실의 목자들입니다. 그러니 착한 목자의 근본은 사랑입니다. 아무리 해박한 지식과 명쾌한 이론을 지녔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착한 목자가 아닙니다. 똑똑한 목자는 될지언정 착한 목자는 아닌 것입니다.
1836년 조선에 들어왔던 첫 서양 선교사 ‘모방’ 신부님은 ‘여항덕’ 신부님에게 ‘성무 집행 정지’를 명합니다. 미사를 집전하지 말고 빨리 조선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방’ 신부님은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대리로 그러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성직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때입니다. 이국땅으로 숨어 들어왔던 ‘여 신부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었습니다. 하지만 받아들입니다. 8개월간의 선교 활동을 끝내고,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신학생을 데리고 쓸쓸히 중국으로 돌아갑니다.
훗날, ‘여항덕’ 신부님에 대한 나쁜 평가가 파리 외방 전교회와 중국 교회 사이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이 밝혀졌을 때에는 신부님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목자는 언제나 양들보다 앞장서서 갑니다. 주님께서도 그렇게 먼저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여항덕’ 신부님도 앞장선 목자이셨습니다. 그분이 계셨기에 ‘김대건’ 신부님이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생기면 어느새 세상의 가치관을 먼저 떠올립니다. 잘못된 생각이며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제자들은 스승님의 이런 모습을 닮으려 애썼습니다. 훗날 그들을 지배했던 것은 그분의 말씀과 행동이었지 다른 사상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모방을 우리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일입니다.
‘내가 진실로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주님께서는 분명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곁에는 ‘위험한 가치관’이 너무 많습니다. 물질과 소유를 최고라 외치며 젊음과 아름다움만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정보를 통해 쾌락주의에 세뇌되고 있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알려 주는 사람입니다.
삯꾼은 보수를 받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양 떼를 돌보는 일이 돈벌이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이리가 오면 도망친다고 했습니다. 몸으로 막을 각오도, 이유도 없는 것이지요. 오히려 자신의 몸을 다칠까 두려워합니다. 착한 목자와는 반대입니다.
그러니 온몸으로 다가가며 사랑해야 합니다. 온몸을 부딪치며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길입니다. 희생 없이 이것이 가능할는지요? 똑똑한 목자는 많지만 착한 목자가 드문 이유입니다.
이리는 시련입니다. 관계를 힘들게 하는 고통입니다. 그러한 상황이 닥칠 때 목자인지 삯꾼인지 판명 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스승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에게 맡겨진 사람들과 착한 관계를 지속시켜야겠습니다. 그러려면 매일매일 예수님의 힘을 청해야 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 반명순 수녀- 하느님을 아는 것, 그것은 우리 마음으로 향한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성경은 이런 부르심을 사변적 지식이 아닌 인격적 관계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안다’ 는 것은 구체적인 관계 안에서 점진적으로 체득된 전인적 신뢰입니다. 때문에 하느님께 대한 앎은 하느님한테서 옵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수련기 시절, 실습 소임지는 성남분원의 무의탁 집이었습니다. 그곳은 정신지체와 자폐증 그리고 당뇨를 앓는 아이들과 어른들로 구성된 소공동체였습니다. 저의 일과는 오전에 점심식사 준비와 청소로 바쁘게 지냈지만 오후는 좀더 여유롭게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 날 오후에도 가족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었는데, 이야기 도중에 물었습니다. “인어공주가 밤에 바닷가로 나왔는데 밤하늘에는 달이 환하게 떴고, 별들은 하늘 가득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어, 자! 하늘에 무엇이 떠 있었지요 ?” 저를 빤히 바라보던 한 아이가 “해가 떴어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나머지 가족도 하나같이 “네-에, 해가 떴어요.” 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손끝에 맥이 풀리며, ‘이 소중한 시간에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 하는 의구심과 함께 갈등이 파도처럼 일었습니다. 그날 저녁, 경당의 성체등을 바라보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 갑자기 그분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도 자폐증에다 정신지체라는 것을 알고 있니 ? 내가 너를 부를 때마다 엉뚱한 소리를 하거나 나를 피해 달아나기도 했잖아 ? 그렇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포기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기다렸어.”
아, 그랬습니다! 저 역시 주님을 알아뵙지 못하는 정신지체이고, 소리쳐 불러도 달아나던 자폐증 환자였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분께서 나의 이름을 불러 인도하셨기에 제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안전할뿐더러 마음대로 드나들며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다.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양승국신부- <다섯 번씩이나 보육원 문 앞에서> 한 아이가 꽤 오래 전부터 자기 아빠를 저한테 소개시켜주겠다고 그래서 오늘 만나게 되었습니다. 건장해 보이는 아이 아버지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털어놓은 그간의 사연을 듣고 있노라니 제 눈시울까지 덩달아 뜨거워졌습니다. 아버지는 아이가 네 살 되던 무렵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아이 엄마와 헤어지게 되었답니다, 그 뒤로 직장 다니랴 아이 돌보랴 너무나 힘들어서 아이 손을 잡고 다섯 번씩이나 보육원을 찾아갔었지만 용기부족으로 차마 아이의 손을 놓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조금만 돌보아주시면 고맙겠다"고 하셨습니다. "빨리 기반을 마련해서 아이와 함께 열심히 살겠다"고 제게 다짐하셨습니다. 참으로 흐뭇했던 주일 아침의 일이었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가족이란 끝까지 함께 가는 것이 가족이지요. 진정한 가족이란 건강할 때, 일이 잘 풀릴 때, 정상적일 때만 가족이 아니라 힘겨울 때, 포기하고 싶을 때도 끝까지 함께 걸어가는 가족입니다. 지난 5월 8일 어버이날 한 일간신문은 참으로 특별한 한 어머니를 소개했습니다. 68세 된 전신마비의 딸을 50년 동안이나 돌보아온 101살 된 특별한 엄마를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4살 때 추락사고로 인해 뇌 손상을 입고 전신마비가 된 딸을 10년 20년도 아니고 50년 동안이나 돌보아오신 할머니의 삶은 진정한 가족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01살 된 엄마의 소원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이미 자신의 나이가 101살이지만 불쌍한 딸을 위해서 딸보다 더 오래 살고 싶은 것입니다. 101살 된 엄마의 걱정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혼자 남은 저것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걱정뿐입니다. 어버이날을 맞아 장애인 딸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분은 나의 어머니"라며 "오늘까지 산 하루 하루가 모두 어머니의 덕"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답니다. 요즘 계속되는 복음은 착한 목자에 대한 복음입니다. 착한 목자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양들이 비록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고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선물로 생각하고 그 양들을 끝까지 주님의 풀밭으로 인도하는 사람이 착한 목자입니다. 착한 목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이 무례하고 불손하고,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하느님께서 개입하실 순간을 기다리며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를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성장을 위해서 투신하는 사람이 곧 착한 목자입니다. 착한 목자는 무엇보다도 끝까지 양들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착한 목자는 무엇보다도 양들의 약점과 배은망덕함을 참아내는 사람입니다. 착한 목자는 무엇보다도 양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동행해주는 사람입니다. 결국 착한 목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찾아 나서는 사람,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입니다.
유다인들의 불신 - 서동원 신부-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께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24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려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정말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25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정 짓지 말지니! -김찬선신부- “하느님께서 거룩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양승국신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작년에 폐간된 ‘사목’지에서 한번은 ‘신자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수녀님 상’에 대해서 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이는 3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 학력은 대졸 이상, 인상은 지적이면서도 후덕해 보임, 외국 경험도 있음, 교수 능력이 탁월함(교리, 단체 지도, 훈화 등), 사제와 신자들 사이를 사려 깊게 중재함, 늘 밝고 친절하게 신자들을 대하며 겸손함, 언어구사와 행동에 품위가 있음, 늘 기도하고 상담할 때 내적인 문제를 잘 듣고 해결해 줌, 사제의 권위에 잘 순명함, 신자들을 뒤에서 잘 보살피고 나서지 않음, 시대의 징표를 읽고 시대감각이 있음, 청빈하고 소박함. 이런 수녀님 혹시 보셨습니까? 결혼생활을 꽤 오래 하신 자매님들, 그래서 이제 거의 ‘상황 끝’인 자매님들께서도 가끔씩 ‘우리 신랑 이랬으면’ 하고 꿈꾸신답니다. 키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자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남자 유머가 많은 남자 매너가 좋은 남자 분위기 맞춰줄 줄 아는 남자 돈 잘 벌어오는 남자 속박하지 않는 남자 나한테 목숨 걸지 않는 남자 해외 출장 자주 가는 남자 그러면서도 절대로 한 눈 팔지 않는 남자. 이 세상에 이런 형제님이 있을까요? 이상적인 사제상에 대한 신자들의 답변은 더욱 솔직합니다. 강론 시간에 제발 잠 좀 안 오게 하는 사제, 그리고 이왕이면 ‘쿨’하고 짧게 강론하시는 사제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사제 기도생활에 충실한 사제 겸손하고 예의바른 사제 많은 일보다는 꼭 해야 될 일을 하는 사제 귀가 큰 사제 쉽게 분노하지 않는 사제 친절하고 매너 있는 사제 여러분들, 이런 신부님 구경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재미있는 현상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잘 생기고, 능력 많고, 인간성 좋은 형제들, 하나 둘 떠나가더군요. 결국 끝까지 남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그렇지 않은 형제들에게는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모질거나, 아니면 천사거나, 아니면 바보 같거나... 참으로 신비스럽습니다. 요즘 와서 깨닫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부족한 사람들이 이끌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은 하느님께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각각 너무나도 부족한 우리들이 분명한데, 턱없이 부족한 우리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다들 한 가지씩 장점들이 있습니다.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각자가 지니고 있는 한 가지씩의 장점들을 한 곳에 다 모으니 제대로 된 ‘착한 목자’ 한명이 딱 나오더군요. 어제에 이어 착한 목자에 대한 복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목자든, 신자든 착한 목자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나친 기대는 큰 실망과 상처만 가져다줍니다. 사제도, 수도자도, 사실 까놓고 보면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너나할 것 없이 부족하고, 죄도 많고, 나약하고, 방황을 거듭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그 생활을 엮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정병덕 신부- 횡단보도에서 어떤 사람이 빨간 신호인데도 길을 건너고 있습니다.
속속들이 아시는··· - 김연희 수녀- 성서적인 ‘앎’이라는 주제를 놓고 강의를 하면서 성서모임 수강생에게 하느님께서 자신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시고(마태 10,30),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신다면(시편 139) 어떤 느낌이 드는지를 물었다. 즉각적인 반응이 “아이고, 두려워요!”였고, 심지어는 “무서워요!”라고도 했다. 좀 더 숙고해 본 사람은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 계셔서 큰 힘과 위로가 돼요.”라는 응답을 했다. 나에게도 두 가지 생각이 오락가락했던 체험이 있어 고개가 끄덕여졌다.
항상 감사하며 삽시다
-김유철 신부- 목자의 말을 잘 듣는 양이 있다는 것은 양을 잘 관리하는 좋은 목자가 있다는
예수님 안에서 -이세영 수녀- 지난해 가을 성모 발현지를 따라 성지순례를 하던 중 파티마에서 체험한 환희와 평화의 밤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묵주기도와 성체거동이 있는 날 각국에서 3만여 명의 인파가 모였습니다. 성지순례를 온 나라의 대표가 제단 앞에 나와 자기 나라 말로 선창을 하기로 했는데, 영광스럽게도 제가 한국 대표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차례가 되어 우리말로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이라고 선창을 하자 모두들 우리말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받는 것이었습니다. 각자 자기 나라 말로 선창을 했으나 모두들 일체감을 느끼며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마치 오순절 성령 강림을 재현하는 것 같았습니다.
다른 민족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말을 듣고서 유다 지방의 형제들이 보인 첫 반응은 베드로가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 간다는 비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그들이 이렇듯 조심스럽게 제한을 둔 것은, 하느님의 선민이라는 자신들만의 ‘특별함’을 자부심을 가지고 수호하려는 생각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느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뜻을 수행하고자 하는 진지한 열망에서였습니다. 그렇기에 베드로가 코르넬리우스의 집안에 성령께서 내리신 경위를 설명하자,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지요.(사도 11,18) -말씀지기에서
-허성호신부-
-예정출신부- 목자는 양들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양들에 대하여 잘 알고있습니다. 맡겨진 양들을 책임집니다. 목자는 양을 푸른 풀밭이나 목초지로 이끕니다. 그러면 양들은 목자의 지팡이 아래서 편안히 풀을 뜯습니다. 양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목자가 이끄는대로 따라갑니다. 목자를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목가적인 모습이 바로 성서가 말해주는 착한 목자와 양들의 모습입니다.
"영적 깨달음을 통한 치유와 자유" -이수철신부- 선입견이나 편견의 내적 상처를 치유하여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오늘 베드로가 기도 중 무아경의 환시 중에 주님과 나눴던 대화가 우리에게도 역시 신선한 깨달음입니다.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제 입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거룩하고 깨끗하고 좋습니다. 하느님 감탄하신 세상이 아닙니까? 알게 모르게 선입견, 편견, 오해, 불신, 환상 등에 오염된 마음이 자의대로 성속(聖俗)을, 선악(善惡)을, 우열(優劣)을 판단하는 경우 허다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바로 거기에서 하느님을 뵈올 것입니다. 하여 수도생활이 궁극 목표로 하는 바도 ‘마음의 순결’입니다. 영적 깨달음은 순전히 성령의 은총입니다. 다음 성령 충만한 베드로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모두를 구원하시고자 자유롭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성령을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이르는,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있는 구원의 문, 생명의 문입니다. 문이라고 다 생명의 문이 아닙니다. 우 리를 현혹하여 절망과 파멸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넓고 화려한 문들은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요!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우리 요셉 수도원의 정문이 ‘문이신 주님’께 대한 참 좋은 상징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문을 통해 하느님의 집인 수도원을 드나들며 위로와 평화의 구원을 얻어 가는지요!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 문을 통해 생명의 미사잔치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영적 깨달음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선물하십니다. (시편42,3ㄱ).아멘.
남을 판단하지 말자.
-경규봉 신부 -
양들의 착한 목자
동반자 - 노성호 신부- 목자를 따라가는 양의 모습. 그 안에는 목자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과 철저한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김동원 신부- ◆내가 살던 신학교의 창밖에는 집채만한 큰 단풍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그때 시험을 준비하느라 밖에 자연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가을날 아침, 커튼을 제치는 순간 단풍나무가 온통 빨갛게 물들어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는 장관을 보게 되었습니다. 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닫혔던 문을 여는 순간,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에 들어가는 듯한 체험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문은 막혀 있던 곳에서 탁 트인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을 체험하게 합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양승국신부- <너무 슬퍼하지 마시길> 어버이날을 목전에 둔 연휴에 주말사목을 나갔다가 길이 막혀 돌아오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제대로 한번 찾아뵙지도 못하는 송구스런 마음에 ‘왜 이런 날은 만들어가지고’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저마다 부모님께 전해드릴 감사의 정을 한 아름씩 안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꽃처럼 어여뻐보였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어버이날, 상황이 여의치 않아 마음뿐인 분들, 도무지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 분들, 그래서 가슴 아픈 분들도 많겠지요. 또 이미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셔서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도 너무 슬퍼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부모님들, 여러분들의 못내 아쉬운 그 마음을 잘 헤아리고 계실 것입니다. 그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을 담은 묵주기도 한번 정성껏 봉헌해드리는 것도 좋은 선물이 될 것입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을 맞아 오랜만에 나들이 나온 한 가족을 유심히 보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표정이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다는 표정들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까르르르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 눈길은 유독 아버지에게로 쏠렸습니다.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그 순간을 셔터에 담기 위해 아버지는 엄청 바빴습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언젠가 아이들이 성장해서 어른이 되었을 때, ‘너희들에게도 이런 예쁜 순간이 있었단다’ ‘이렇게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지’ 하며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겠지요. 그런데 아버지는 아이들 사진 찍어주느라 자신의 모습은 거의 남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자녀들의 배경으로 만족하십니다. 자녀들이 행복하기만 하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좋습니다. 자녀들을 위한 무조건적인 헌신, 이것이 세상 모든 부모님들의 보편적인 모습이겠지요. 어제 성소주일 복음에 이어 계속되는 오늘 복음의 주제는 ‘착한 목자’입니다. 착한목자의 최종적인 소원 한 가지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양들이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 그래서 주님의 푸른 목장에서 마음껏 풀을 뜯는 것, 그것이 착한 목자의 유일한 소망이자 기쁨입니다. 마치도 우리 부모님들이 그러셨듯이 말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우리에게 대하는 모습에서 아주 조금이나마 착한 목자 예수님의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집에 들를 때 마다 와 닿는 느낌이 없으십니까?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으셔서 안달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더 먹이려고 기를 쓰십니다. 뭐 하나라도 들려서 보내고 싶습니다. 우리가 기뻐하면 그분들 자신들의 일보다 더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걱정하면 자신들의 걱정인양 걱정하십니다. 그분들의 유일한 바람은 우리가 잘 되는 것입니다. 무사한 것입니다. 건강한 것입니다. 만사형통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이 이러한데,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헌신, 인내, 자비는 우리의 상상을 완전히 초월할 것입니다. 그분에게 있어 가장 큰 고통은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가장 큰 슬픔은 우리가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가장 큰 불행은 우리가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분에게 있어 가장 큰 행복은 우리가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가장 큰 기쁨은 우리의 인생길이 활짝 꽃피어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분의 가장 큰 바람은 우리가 멸망하지 않고 구원되는 것입니다.
양을 아는 목자 -강영구신부-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성소주일 복음(10,11-18)의 앞부분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우리가 어제 복음의 주제를 <착한 목자로서의 예수님 자기계시>로 요약한다면, <목자-양-문>의 비유를 들려주는 오늘 복음(10,1-10)은 그 주제를 향한 도입의 역할을 맡고 있다. 오늘 복음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9장의 내용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만난 태생소경을 고쳐주신다.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탓이 아니라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전제하신(9,3) 예수께서는 그 날이 안식일인데도 불구하고 "땅에 침을 뱉어 흙을 개는" 수고를 통하여 소경에게 광명을 되찾아 주신다.(9,6-7)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과 예수께서 동시에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사실을 놓고 논쟁의 도가니로 빠져든다.(9,13-16) 그들은 소경의 부모까지 불러다가 심문을 하게 되고, 급기야 치유를 받은 소경과 논쟁을 벌인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의 논쟁에서 치유 받은 소경은 기적을 베푼 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가 마치 예수의 제자가 된 것처럼 예수를 "하느님께서 보낸 분"으로 주장한다. 결국 그는 소경의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회당에서 쫓겨난다.(9,18-34) 그후 그는 자기를 치유해 주신 예수를 뵈옵고 "사람의 아들"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함께 있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기 위해 왔으며, 못 보는 자는 죄가 없고 오히려 보는 자에게 죄가 있다"(9,39-41)고 말씀하신다. 이어서 예수님은 <목자-양-문>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비유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10,6) 우리는 9장에서 치유된 소경이 예수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메시아)으로 고백한 이유로 회당에서 쫓겨났음을 보았다. 회당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선택받은 하느님 백성의 시민권을 박탈당하는 것이며, 구원에서 배제됨을 의미한다. 즉, 하느님 백성의 목장(牧場)에서 쫓겨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쫓겨난 자는 버려진 양이요, 목자 없는 양이며, 양우리 없는 양이 되는 셈이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렇게 버려지고 그래서 목자 없는 외로운 양, 그러나 예수님께 메시아의 신앙을 고백한 양을 위한 복음이 된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양은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목장에서 풀을 뜯어먹고 사는 양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시며(7절, 9절), 그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는 착한 목자(11절)가 됨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예수님 외에는 어떤 구원의 진리도 없으며,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구원의 목장에 들어갈 수 없다. 구원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양우리로 들어가는 사람이나 예수님보다 먼저 양우리에 들어와 있는 자는 모두다 도둑이며 강도가 된다.(10,2.8) 하느님의 진리는 오직 예수님의 음성에서 시작되며, 참 생명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얼마나 엄청난 계시(啓示)인가?◆
남편은 얼른 뛰어나 농부에게 만 원을 줄 테니 차를 좀 빼달라고 했지요. 농부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다가와서 트랙터로 차를 아주 쉽게 빼주었습니다. 남편은 너무나도 감사했지요. 그리고 농담조로 만 원을 건네면서 말했습니다.
“아저씨! 여기서 차 빼주는 일만 해도 수입이 나쁘지 않겠는데요?”
그러자 농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말 마세유. 매일 여기다 채우는 물 값도 만만찮아유!”
아마 처음에는 농부가 너무나도 고마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고마워할 일이 아니었지요. 오히려 화내야 할 상황인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물건을 살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가게 주인은 나한테만 특별하게 가격을 싸게 해주는 것처럼 말을 합니다. 나이기 때문에 특별히 밑지는 장사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때 어떠합니까? 고맙지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가격이 결코 싸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때 하는 말…….
“세상에 밑지는 장사가 어디 있어?”
세상 사람들은 겉으로는 남을 위한 척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남보다는 나를 더 생각하고, 그래서 봉사와 희생의 삶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이렇게 자기만을 위한 삶,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삶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문을 통과해야 함을 말씀하시지요.
“나는 양들의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주님의 문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주님의 문을 통과하기보다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세상의 문을 통과하려고만 합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나’만을 위한 삶을 통해서 주님의 문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들의 궁극적인 목적인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는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양들의 문으로써, 이 문을 통과하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어야하겠습니다. 그래야 그 문이 행복의 문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누구인지 이미 여러 가지 표징을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으며(요한 2,1-12), 벳자타 못 가의 앉은뱅이를 고쳐 주시고(5,1-18),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6,1-15). 갈릴래아 호수 위를 걸으며 풍랑을 꾸짖어 잠재우시고(6,16-21), 태어나면서 눈먼 사람을 보게 하셨습니다(9,1-12). 또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당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셨고(4,25-26), 태생 소경에게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해 주셨습니다(6,35-39 참조).
그러나 유다인들은 영원한 생명, 곧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인 복음을 선포하는 예수님과 그분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베푸는 표징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과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파견한 구세주로서 예수님의 역할과 그들이 바라고 기대하던 구세주의 모습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자기 나라, 자기 민족의 회복과 현세적 부귀영화를 가져다줄 구세주를 기다렸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떠합니까? 입으로는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불편해지고 어려움을 겪게 되면, 오늘 복음의 유다인들처럼 “주님, 당신께서는 언제까지 저희 속을 태울 것입니까?”라며 거북스러워하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은 세례성사를 통해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영광에 감사드리며, 우리가 겪는 삶의 고통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충실히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은총을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합시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일전에 가족 중의 하나가 자살한 집의 모든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쓴 적이 있습니다.
"ㅇㅇ 자매는 이제 하느님 자비에 맡기십시오.
지옥에 갔을 거라고 단정 짓지 마십시오.
마지막 순간까지 ㅇㅇ 자매가
어떻게 회개하고 갔는지 누구도 모를 뿐 아니라
자비하신 하느님이 정신 질환으로 목숨을 끊은 ㅇㅇ 자매님을
자비 없으신 분처럼 단죄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비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ㅇㅇ 자매가 지옥에 갔을 거라고 믿는다면
하느님 자비에 대한 모독이요 불신앙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보다 ㅇㅇ 자매를 덜 사랑한다고 생각한다면
하느님 자비가 내 자비보다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믿으십시오."
우리는 종종 斷定을 잘 합니다.
그리고 그 단정은 대부분 부정적입니다.
왜 그럴까요?
단정은 교만한 사람이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부족한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이나
자기보다 더 죄인인 사람이 없다고 여기는 겸손한 사람은
감히 남에 대해서 그리고 무엇을 단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나쁘게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영역에 대해서는 더더욱 단정 짓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하느님인 양 판단을 내립니다.
그런데 그 판단을 긍정적으로 내리면 다행인데
안타깝게도 그의 모든 판단은 부정적입니다.
남을 깎아내려야 자기가 우뚝 서고
남이 죄인이어야 자기는 거룩하며
남이 나빠야 자기가 좋은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단정 짓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과 같은 단정은 곤란합니다.
이 말이 틀리지는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꼭 제도 그리스도교 안에 들어와서
그리스도교 형식으로 세례를 받아야지만 믿는 것이라는 뜻이라면
이것은 지나친 단정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사도는
요한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요한의 세례는 일정한 곳에서 행해지는 일정한 형식의 세례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는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바람과 같이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될지 모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역이지 우리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민수기 11장을 보면
70 장로가 아닌데도 그리고 만남의 장막 밖인데도
엘닷과 메닷은 주님의 영을 받았습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와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자
모세는 자기를 위해 질투하는 것이냐고 반문한 다음
차라리 모든 사람이 주님의 영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만 구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만 좋게 만드신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모두의 아버지이십니다.
어제 저는 너무나 피곤한 하루였습니다. 사실 전날 청년 피정이 있었거든요. 그 피정이 밤늦게 끝나서 제가 잠을 잔 시간은 2시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새벽미사, 9시, 11시 미사, 점심식사 후에는 아는 분의 아버님께서 돌아가셔서 서울의 *** 병원으로 문상을 다녀왔지요. 이제 좀 쉴까 했더니만, 텔레비전에서 흥미진진한 프로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다가 결국은 조금도 쉬지 못했지요. 6시에 면담 그리고 7시 미사. 마지막으로 8시에 집 축복을 한 뒤에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너무나도 피곤한 하루였습니다. 두 시간도 못 잤는데, 왜 이렇게 바쁜 하루를 보내야 하는지……. 그런데 여기서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만약 낮잠을 두 시간 가까이 잔다면 어떨까요? 아마 사람들이 잠보라고 놀리지 않을까요? 하지만 밤의 잠을 두 시간 정도 잤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렇게 자서 어떻게 생활하느냐?’고 깜짝 놀라지요. 똑같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언제 자느냐가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이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서 지금의 상황도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즉, 부정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긍정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의 차이는 천지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상황이 최악의 상황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내 안에 부정적인 마음이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러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만 가지고 있다면, 최악의 상황이 아닌 최고의 상황이라면서 신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상황을 이렇게 최고의 상황으로 만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이러한 약속을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해주셨지요.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자기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상황은 최악의 상황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절망에 빠지는 사람은 신앙인의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매 순간 주님을 느끼고 그분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갖기에, 언제나 희망을 간직하면서 기쁘게 살아갑니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어느 여인이 살충제를 먹고 자살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녀가 마신 액체는 살충제가 아닌 독이 전혀 없어서 인체에 무해한 액체라는 것이지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스스로 살충제를 먹었고 이제 곧 죽는다는 생각에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오묘한 육체는 마음과 정신의 지배 아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이 마음에 반드시 주님을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주님께서 주신 멋진 세상이라고 하면서 기쁘게 그리고 재미있게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 꼭 있습니다. 또 반대로 신호가 바뀔 때까지
굳세게 버티고 서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레프코위츠라는 학자가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아주 한산한 거리에서 과감히 무단행단을 하는 가짜 행인을
한 명 고용을 하여 이 행인이 허름한 복장을 하고 무단행단 했을 때와
반대로 깨끗하고 말끔한 복장을 하고 무단행단 했을 때를 비교해보았답니다.
그런데 그 결과, 깨끗하고 말끔한 복장을 하고 무단행단을 했을 때가
압도적으로 많은 위반자가 생겼다고 합니다. 이 실험의 결과는 사회적 지위가 높게 보이는 사람이 잘못을 하면 그것을 쉽게 모방하거나 동조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바로 착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 스스로 모범을 보이시고,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희생까지도 감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행동의 원칙으로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사랑이라는 계명 아래에서 예수님은 생각하고 판단하셨으며 그 판단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셨습니다.
선의 실천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열쇠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닮아
우리의 삶도 사랑이 넘치는 삶이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매년 8일 피정을 하는데, 그때마다 마음에 새겨주시는 주님 체험이 다르다. 지난해 피정에서는 특별히 시편 139편을 온 마음으로 고백하도록 이끄셨다. 처음에는 두려웠으나 피정을 마무리하면서 한 구절 한 구절 마음과 혼을 다해 읊을 수 있는 열매를 주셨고, 여기에서 크나큰 위로와 사랑을 확인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부인했던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5) 베드로는 일찍이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착한 목자의 비유가 어떤 의미인지를 그제야 깨달았을 것이다. 양들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의 수난과 죽음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놀라우신 신비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드러내 주시며 부활로 목숨을 다시 얻는 것을 보여주셨다(17절).
착한 목자는 양들을 잘 안다. 이 앎은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일치처럼 깊은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주님께서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시며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 하시고,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신다.
것입니다. 좋은 목자는 양들이 다른 목소리에 이끌려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항상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며 자주 목자의 소리를 들려주어 주위를 환기시킵니다.
착한 양들은 알아듣고 목자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한순간에 유럽에서 제일의 거부가 된 스웨덴 사람 알프레드 노벨은 어느 날
프랑스 신문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거기에 자신이 죽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의 형이 죽은 것을 신문사가 잘못 알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벨에게 충격을 준 것은 그 기사에 나오는 자신에 대한
평가였습니다. 그 기사에는 “다이너마이트라는 폭발물을 발명한 죽음의 장사꾼
알프레드 노벨이 사망하다”라고 씌여 있었습니다. 특히나 ‘죽음의 장사꾼’이라는 문구가 가슴을 찔렀습니다. 내가 이대로 죽었다면 세상 사람들은 나를
이렇게 보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중에 전 재산을 희사하면서 인류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기여한 사람들에게
큰 상을 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바로 ‘노벨상’의 시작인 것이지요. 만일 그가 잘못된 신문기사를 보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노벨상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목자로서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보살피십니다.
착한 자녀로서 우리 또한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묵주기도를 하는 중에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성체거동을 앞두고는 제법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신자 중에 비를 피하기 위해 자리를 이동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성체거동을 하는 동안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가지고 온 우산과 양산을 조용히 펴 옆 사람을 씌워주었습니다. 그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가 얼마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묵주기도와 성체거동을 하는 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사랑,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이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체험했습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날 예수님 안에서 한자리에 모인 세계 각국의 많은 사람들은 참으로 좋은 풀, 귀한 양식을 얻고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 안에서 누구라도 하나가 될 수 있고, 그렇게 예수님 안에서 풍요로운 생명의 양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 안에서 참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 안에서…. ●
초대교회 시절에 이교도들과 유다인들이 하늘 나라를 앞당기기 위해 서로 화목하고 협력하는 법을 배워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오늘날 분열된 그리스도교의 모습 앞에서 같은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정교회가 구세주요 주님이신 예수님께 똑같은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교의와 신학, 교회예식 등 여러 분야에서 의견을 달리합니다. 심지어는 가톨릭교회 내에서조차 성부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심각한 분열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우리를 하느님 백성들 간 일치의 도구로 써 주십사고 감히 청할 수는 없을까요? 교파 간 차이점들을 두고 논쟁하기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로서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점들에 초점을 맞출 수는 없을까요? 사랑과 상호존중을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할 수는 없을까요? 최근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말씀하셨듯이, “인간 개개인에게 빠짐없이 주시는 하느님 사랑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인들 간의 형제적 친교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통해 확실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되게 해 주실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날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동료 신앙인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을 강건하게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선포하는 일에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지 그 누가 알겠습니까? 성령께서 코르넬리우스의 집안에 권능으로 돌연히 임하신 일을 상기해 보면, 그와 똑같은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
성자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당하시기 전날 밤,
모든 이들이 하나가 되게 하시어
세상이 믿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셨습니다.
(요한 17,21) 이제 이 기도를 저희의 기도로
바치오니, 아버지, 저희가 하나 되게
해 주십시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 되게 하시어,
저희 증언을 통해 많은 이들이
당신과 당신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세계적인 이론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가 며칠 전(26일) 휠체어에서 벗어나 무중력 공간 체험을 하였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습니다. 호킹 박사는 그 감격을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지구에서의 삶은 갑작스런 온난화나 핵전쟁, 유전적으로 변형된 바이러스 등의 위험으로 사라질 수도 있어 인류는 우주로 나가야 한다.” 호킹 박사는 루게릭병으로 인해 팔?다리를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컴퓨터를 통하지 않고는 말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우주 공간의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고 난 뒤에 지구상의 인류를 걱정하는 모습은 너무나 진지하였습니다.
호킹 박사의 지구 미래에 대한 그 진지한 메시지를 우리는 과연 얼마나 귀담아 듣고 있습니까? 불과 며칠 전에 봄이 오는가 싶더니 벌써 늦봄이 된듯합니다. 예전에 양봉 꿀을 따는 사람들은 남쪽에서 시작하여 위로 차츰 올라가며 아카시아 꿀을 딸 수 있었는데, 이젠 한반도 전역에 아카시아 꽃이 거의 동시에 피기 때문에 이동하며 꿀을 딸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아프리카 등지에서 발생하는 신종 폐결핵은 걸리면 항생제가 듣지 않아 80% 이상이 사망한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양들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선 우선 나를 떠나서 세상을 보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예를 들면 편안하게 살고픈 나의 본능에 따라 살면 사제로 옳게 살지 못할 것 같아, 차를 없애고, 가능한 걸어 다니려 애를 씁니다. 처음에는 불편하였지만 요즘은 걷는 것이 참 좋습니다. 지구 온난화를 생각하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 하나쯤 생각하기 쉽지만 나 하나부터라는 의식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이렇게 사소한 나의 일상 주변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파괴하지 않고 가꾸려 노력하는 것부터가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어제가 성소주일이었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양들인 우리에게 지금 무엇을 말씀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처한 곳에서 빛과 소금의 생활을 할 것을 명하십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시면 복음서를 펼쳐보십시오. 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 또 우린 분주하게 생활하게 됩니다. 하루를 살면서 하루를 알차게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를 몽땅 허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 목소리를 듣고 감사드리는 하루가 되게 살고, 그리고 저녁에 감사드릴 수 있는 그런 하루를 삽시다.
오늘 복음이 이야기하는 착한 목자는 바로 그리스도를 가르킵니다. 양들은 부활의 신앙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가르킵니다. 부활한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며 살아갑니다. 성령의 힘이 우리를 지켜주는 그 믿음 안에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흔들림 없는 신앙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착한 목자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셨습니다.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사랑안에서 당신이 메시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을 살았으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세상 한 가운데서 세상사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다 세상의 것만을 추구하고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함께 나누고 함께 베풀고, 함께 도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삶의 아름다움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서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삶의 매순간을 두가지 갈림길을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길이요, 하나는 죽음의 길입니다. 우리는 이 두갈래 인생길 가운데 항상 생명의 길을 선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를 알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참된 평화를 주시는 그리스도를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제시해주는 바른 삶을 선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릇된 믿음과 그릇된 길은 인간을 파멸로 이끕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사람을 구원에로 초대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시대의 잘못을 따라가지 말고 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생명을 주는 길이고, 무엇이 우리를 멸망과 죽음으로 이끌며, 파멸로 내치는 길인가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파멸의 목소리는 아주 달콤합니다. 유혹적입니다. 그러나 그 유혹은 쉽게 우리를 멸망으로 내칩니다. 쉽게 우리를 구렁텅이에 빠트립니다. 평화를 빼앗아 갑니다. 주님의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로 이끄시는 분이 아닙니다. 구렁텅이에 빠지도록 내치시는 분도 아닙니다. 오류와 잘못으로 이끄시는 분도 아닙니다. 단지 우리들이 잘못살아 그런 길을 걷고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인생의 가르침을 주는 많은 스승들을 만납니다. 우리는 그들을 본받아 현인이 되고, 성인군자가 되고, 학인이 되기를 바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때론 그렇지 못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잘못된 인생 길을 걸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알고서 잘못된 길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때론 본인도 모르게 어느날 잘못된 길에 들어선 자신을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완전하지 못합니다. 결점투성이입니다. 부족하기만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바른 인생길을 제시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목장으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양들은 목장 안에 있을 때 보호를 받습니다. 안전합니다.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가르침 안에 머무를 때, 참된 사랑 안에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참 목자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며 바른 인생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가치있는 삶으로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과 진리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깨달음을 통하여 계시되는 진리가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주님, 절대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하느님 만드신 ‘있는 그대로’의 피조물들,
피조물을 만드신 후마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하며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깨끗한 마음에는 모두가 깨끗할 것이며,
깨달음을 통해 계시되는 진리에 자유요 깨끗한 마음입니다.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렇습니다.
“나는 문이다.
바로 언제나 모두에게 활짝 열려있는
“제 영혼의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당시 초대 교회 내에서 이방인 선교에 관하여 매우 심각하게 논쟁하고 있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유대교의 전통에 따라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거부했다.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점에 대하여 비난했던 것이다.
이에 베드로는 자신이 요빠 시에서 체험한 신비로운 영상에 대한 설명과 함께 고르넬리오의 집에서 성령께서 이방인들에게 내리신 일에 대해 들려준다.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셨던 것처럼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보내셨음을 강조하며, 이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임을 선언한다. 이에 할례를 주장하는 이들도 이방인들이 구원되고 성령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방인 선교를 받아들인다. 이로써 초대 교회 안에 있어왔던 이견이 통합되어 이방인에 대한 선교가 더욱 힘을 받게 된다.
유대교 전통을 고집하는 할례파는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만을 선택하셨고, 그들만의 하느님이 되셨기 때문에 전통에 따라 할례를 받아야만 그리스도인이 되고 구원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방인이 구원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영상과 고르넬리오의 집에 있는 이들에게 내리신 성령께서는 그와 같은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었다. 할례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향한 마음이며, 주님께 대한 믿음이다. 고르넬리오의 집에 있던 사람들은 그 마음이 주님을 향하였고,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믿었기 때문에 사도들처럼 성령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향한 마음과 믿음을 보지 않고 모든 것을 교리에만 얽매여 해석한다면 자칫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으로 바라보지 않고 모든 것을 우리의 기준으로만 바라보고 해석한다면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교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요한 8,15)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마태 7,1-2)라고 가르치셨다. 우리의 기준을 가지고 그것이 마치 하느님의 기준인 것처럼 착각하여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교회는 물로 받는 수세(水洗)뿐만 아니라 물로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순교로서 받는 혈세(血洗)와 세례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주님께 대한 간절한 사랑과 믿음으로 받는 화세(火洗)도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는 곧 세례만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마음, 즉 주님께 대한 사랑과 열정, 희망과 믿음으로 구원될 수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간직하고 살아가자. 주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신앙인이 되자. 그리스도인만이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임을 생각하며, 하느님의 마음으로 살아가자..............◆
-심원택 신부-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여러분! 한 주간을 새로이 시작하는 이 시간, 어떤 마음으로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까? 무엇이나 시작의 첫 마음은 중요합니다. 그 마음 여하에 따라서 모든 것의 양상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혹 걱정거리가 있으신 분, 주님께 모두 맡겨 드리고 한 주간을 시작하도록 합시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착한 목자’에 관한 비유 말씀을 들려주시는데, 이 비유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기 위해서는 당시의 ‘양과 목자의 관계’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는 지형이 대부분 고원지대인데다가, 토지는 거칠고 돌이 많았기 때문에 양치는 것을 일반적인 생업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이 먹을 수 있는 풀밭이 대단히 적었기에 양치는 생활 또한 매우 고되고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풀이 없기 때문에 방목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었고, 별 수 없이 멀리까지 풀밭을 찾아 나서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양떼를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이 늘 상존해 있었고, 늑대나 도적 또는 강도들로부터 양을 빼앗길 수 있는 위험이 항상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목자는 양떼를 뒤로하고 그들에 앞서 가며 길의 안전함과 위험을 살피면서 양들을 보살폈습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양우리의 입구를 가로질러 누워 자면서 양떼를 지켰던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을 일컬어 ‘양들의 목자’라고 말씀하시며, 그분의 양떼인 우리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목자를 따라갈뿐더러 낯선 사람은 결코 따라가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과연 우리는 목자의 음성과 낯선 사람의 음성을 분별하고 따라갈 수 있을 만큼 식별력을 갖추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서 들려오는 온갖 음성을 들으면서 그 음성들 가운데 목자의 음성만을 가려내고 따라갈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청력의 문제나, 기술적인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목자의 음성만을 따로 구분해 낼 줄 아는 것은 사랑의 문제인 것이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깊게 자리잡고 있지 않으면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읽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자람에 따라 그분의 음성을 정확하게 구별해 내지 않으면 우리는 본의 아니게 예수님을 떠나 낯선 이를 따라가게 되고 말 것입니다. 물론 낯선 이도 목자처럼 때로는 좋은 풀을 먹이기도 하며, 위안이나 기쁨을 제공해 주기도 하지만 낯선 이가 제공하는 것은 결국 미끼임에 분명합니다.
먹이를 찾던 물고기 두 마리가 먹음직해 보이는 지렁이를 발견하였다. 한 물고기가 다른 물고기에게 말했다. "저 지렁이가 보이지? 저건 낚싯바늘에 꿰어 있는 거야. 낚싯바늘은 낚싯줄 끝에 달려 있지. 그리고 낚싯줄은 낚싯대에 연결되어 있고, 그 낚싯대는 사람이 쥐고 있어. 우리가 저 지렁이를 삼키면, 우리 입이 바늘에 걸려 결국 후라이팬에 얹혀지는 신세가 되고 말 거야." 그러자 다른 물고기가 말했다. "하하하! 어릴 때 할머니가 자주 해주시던 바로 그 이야기구나. 나는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는 믿지 않아. 후라이팬에 얹혀졌다가 다시 물 속으로 돌아와 그 사실을 밝혀준 이가 어디 있어? 자네가 저 지렁이를 먹지 않겠다면 내가 먹어치우겠네." 그러더니 그 물고기는 지렁이를 삼키고 후라이팬에 얹혀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겉보기에 같아 보이는 먹잇감이나 위안이라 할지라도 목자와 낯선 이는 그 목적하는 바가 전혀 다릅니다. 즉, 한쪽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하려고 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훔쳐다가 죽여 없애려고 하는 것이기에 앞선 이야기의 미끼를 먹은 물고기처럼 결국 자기 파멸의 길로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해 주시려고 푸른 풀밭으로 앞장서 가시며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양떼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목자를 따르듯, 우리 또한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분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자라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다분히 목자가 아닌 낯선 이들의 기만과 술책에 넘어갈 위험성을 안고 있습니다. 대비책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더욱 크고 깊게 키우는 것 뿐입니다. 우리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 나의 모든 상처, 결함, 걱정, 죄스러움까지도 열어 보이며 주님의 인도와 보살핌에 한없이 자신을 맡겨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목자이신 주님의 보살핌으로 든든한 하루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둘 중에 하나라도 없다면 양들은 목자를 따라가지
않을 뿐더러 이제는 더 이상 그를 자신들의 목자라고 여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목자와 양들 사이에 사랑과 믿음이 깨져 버린다면, 그때부터 목자였던 사람은
도둑이나 강도로 돌변해서 양들을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할 테고,
양들은 그를 낯선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더 이상 그 주변에 모여들지 않고
뿔뿔이 흩어지며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겠지요.
신학생 때 뉴질랜드를 여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몇십 마리의 양들이
목자 한 사람과 양몰이 개 한 마리에 이끌려 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수많은 양의 무리가 대열이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자기들을 인도하고 있는 한 사람의 목자 뒤를 따르는 모습이 왠지
신비스럽게까지 보였습니다. 이런 일은 절대로 없겠지만, 아마 그 양들은
목자가 자신들을 도살장으로 끌고 간다 하더라도 그곳이 좋은 곳인지 알고
끝까지 쫓아갔을 것입니다. 목자를 믿기 때문이겠지요. 참 목자는 양들과 함께
인생의 여정이 험난할지라도 끝까지 걸어갈 것입니다. 양들을 사랑하기
때문이겠지요. 그 참 목자의 모범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의 목자이며, 또한 드나드는 문이라고 비유하셨습니다. 문은 열리고 닫히면서 내면의 세계와 외부의 세계를 연결시켜 주고, 사람들을 서로 만나서 친교를 나누게 하며, 새로운 차원으로 눈을 열어줍니다. 예수께서는 말씀의 문을 열어 세상과 하늘나라를 연결시켜 주시고 사람들이 드나들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이라는 문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드나들게 됩니다.
인간의 모든 심각한 문제의 원인은 사랑의 결핍에 있습니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은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거부하고 단죄하면서 폐쇄적인 태도로 공허하고 병든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의 문이 열릴 때에 그 마음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내롭게 사랑으로 그를 지탱해 주며 생명의 문으로 인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우리가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갈 때 풀밭에 이르는 문을 찾고 좋은 풀을 배불리 먹도록 도와주십니다. 무엇인가 막히고 닫혀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과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활짝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한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허락하신 이 한 주간이 보람차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어떻게 살면 이 한 주간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함께 라면 행복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는 분입니다. 하느님 또한 예수님을 압니다.
예수님은 양떼인 우리들을 압니다.
‘안다’는 것은 서로에 대한 객관적(客觀的)인 지식(知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안다’는 것은 지식(知識)을 뛰어넘어 생명과 사랑을 나누는 관계를 말합니다.
양떼를 ‘아는’ 목자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알게 되고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갑니다.
목자 예수님은 양떼를 이리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실 뿐 아니라 맛있고 싱싱한 풀과 맑고 시원한 물을 마시게 합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당신 삶이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만일 욕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목자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욕망의 소리를 따르면 당신의 삶은 신나고 재미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 없는 당신의 삶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 내어놓기를 주저하지 않는 목자 예수님과 함께 행복한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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