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2.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 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 1954,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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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를 들으면 첫 구절에서부터 정신이 아득해진다. 봄바람에 휘날리는 열아홉 처녀의 연분홍 치마 때문일까.
그 처녀는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며 연신 옷고름을 씹는다.
열아홉 나이만큼이나 풋풋했던 그 사랑은 과연 이루어졌을까. 2절을 보면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신작로 길의 뜬구름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속절없이 떠나갔으리라. 그저 새의 노랫소리만 얄궂다.
이미지가 매우 빼어난 가사여서 손로원이라는 작사자에 대한 궁금증이 솟아오르지만,
그에 대해서는 의외로 알려진 것이 매우 적다. 원로 대중음악인들에게 물어봐도 본명·나이·출신 지역·학력 등 어느 것에 대해서도 시원스러운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저 ‘데카당한’ 사람이었다는 말씀들만 하신다.
그의 작품은 크게 두 부류다. ‘봄날은 간다’뿐 아니라, 손인호의 ‘비 내리는 호남선’(‘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불러야 옳으냐’), 박재홍의 ‘물방아 도는 내력’(‘벼슬도 싫다지만 명예도 싫어’), 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처럼 느낌 풍부한 서정적인 노래들이 있다. 이런 노래에서 그의 가사는 구절구절 절창이다. 그런 한편, ‘페르샤 왕자’ ‘인도의 향불’ ‘샌프란시스코’ ‘홍콩 아가씨’ ‘아메리카 차이나타운’처럼, 샌프란시스코에 비너스 동상을 얽어놓고 페르샤 왕자에 마법사 공주를 결합시켜 지금의 감각으로는 너무도 황당하여 웃음이 나오는 이국적인 노래들도 대부분 그의 작품이다.
어쨌든 그는 1950년대에 매우 활발하게 활동한 다작의 작사가였다.
이 노래는 시간이 흘러도 인기가 식지 않는다. 아마 과거와 추억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노래이기 때문이리라. 그래서인지 이 노래를 이후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했다. 이미자나 조미미·문주란 같은 웬만한 트로트 가수는 물론이거니와, 이은하·최헌·투에이스 등 70년대 인기가수들도 모두 이 노래를 리메이크했다.
조용필은 매우 창의적으로 왕성하게 신곡을 짓고 부른 가수이지만 흘러간 옛 노래도 많이 불러 취입했다.
그가 부른 ‘봄날은 간다’(1984)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보석이다. 이미 우리는 ‘일편단심 민들레야’나 ‘허공’ 같은 곡에서 그의 트로트적인 기교를 충분히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노래의 마지막 구절
‘봄날은 간다’ 부분에서 소리를 너덧 번씩 굴려내는 그 기교는 정말 일품이다.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인상적인 리메이크는 한영애의 ‘봄날은 간다’(1999)다.
한국에서 가장 블루지한 목소리를 내는 한영애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가수가,
이렇게 청승스러운 옛 노래를 부른다는 것 자체가 매우 신선했다.
한영애의 리메이크를 듣고서야 비로소 이 노래가 블루스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은 노래임을 새삼 깨닫는다.
이 노래가 50년대에 인기를 모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익숙한 트로트적 선율과 잘 뽑아낸 향토적 이미지,
여기에 당시로서는 신선한 양풍 음악인 블루스를 리듬과 반주 편곡에서 결합시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잘 있거라 나는 간다’로 시작하는 안정애의 ‘대전 부르스’ 역시 트로트 선율에 블루스 리듬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성공한 노래다. 한영애의 ‘봄날은 간다’는 독특한 퍼커션으로 예스러운 이미지를
다소 걷어내고 한영애스러운 몽환적 분위기를 만들어내었다.
더 어린 후배 예술인들은 이 노래에 다른 방식으로 존경을 표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명대사를 남긴 영화 ‘봄날은 간다’의 주제가인 김윤아의 ‘봄날은 간다’는
백설희의 노래와 전혀 다른 곡이면서도, 묘하게 몽환적인 그 분위기는 매우 닮았다.
인생의 봄날을 맞은 남자와, 그 봄날이 속절없이 지나가버린다는 걸 알아버린 여자의 어긋난 사랑을
이 노래는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 꽃잎은 지네 바람에”라고 노래한다.
그런가 하면, 휘성의 ‘제발’은 부제가 ‘봄날은 간다’이며, 캔은 ‘내 생애 봄날은’에서 ‘저 하늘이
외면하는 그 순간 내 생애 봄날은 간다’라고 노래했다.
그러고 보면 이 노래에서 가장 잘 지은 부분은 바로 제목이다.
여름과 겨울이 지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간다’라고 아쉽게 탄식하게 되지 않는다.
그런 아쉬움은 오로지 봄뿐이다. 공기에 향긋한 냄새가 묻어나고 야들야들한 연녹색 이파리들이
아름답게 반짝이는 계절, 봄바람에 날리는 흙먼지에 눈 몇 번 쓰라리고 눈물 몇 방울 흘렸을 뿐인데,
벌써 이 좋은 봄이 끝나버리다니! ‘봄날은 간다’란 제목은, 이 모든 아쉬움을 단 한마디로 압축해준다.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올해의 봄날은, 또 이렇게 속절없이 간다.
ㅡ이 글을 쓴 이영미는 대중예술평론가
『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와 『광화문 연가』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