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5월 3일 월요일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필립보 사도는 갈릴래아 출신으로, 베드로 사도와 고향이 같다. 예수님의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로 간택된 그는 나타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한 분이다. 전승에 따르면, 필립보 사도는 그리스를 무대로 활동하였고 소아시아(터키)에서 순교하였다. ★★★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요한 14,6-14) "Have I been with you for so long a time 말씀의 초대
바오로는 자신이 전한 복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지만, 다시 부활하셨다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자신은 주님을 목격한 증인임을 고백한다. 따라서 복음의 핵심은 부활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구원이 가능하다고 외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께 가는 길이심을 설파하신다. 당신 안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으라는 가르침이다. 그렇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기에 필립보는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사고 청한다. 스승님의 도움을 간청하는 외침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아버지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는 감히 하느님을 보여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놀라운 발언입니다. 몰라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그만큼 예수님을 가깝고 정이 많으신 분으로 느낀 것일까요? 스승님께서는 따듯한 대답을 들려주십니다.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 최병조 신부- 우리는 실제로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분을 믿으면 무엇이든지 믿는 대로 된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이주사목을 처음 시작할 때 일입니다. 후원금이 한 달에 19만 원 정도밖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양승국신부- <실례지만 누구시죠?> 언젠가 정말 송구스럽고 "왕창피스런" 사건이 한번 있었습니다. 볼일을 보러 시내에 나갔다가 안면이 있는 한 형제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가물가물했기에 "누굴까?"하고 생각 중이었는데, 그분께서 먼저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양신부님. 건강하시죠?" 엉겁결에 저도 인사를 드렸습니다. "예, 덕분에 잘 지냅니다. 별일 없으시죠?" "길에서 이럴 게 아니라 안 바쁘시면 잠시 차라도 한 잔 하시죠?" 졸지에 찻집에까지 따라간 제 머릿속은 온통 "이 분이 누굴까? 어디서 뵈었더라?"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당시 온통 대통령 선거가 화제였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선거에 대한 이야기며 또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 "이분이 누굴까?"하는 생각에 저는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차까지 한잔 같이 마시고 30분 동안이나 대화를 나누었는데...이제 와서 "실례지만 누구시죠?"하면 더 큰 실례일 것 같아서 그냥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죄송스런 일이었지만 결국 이름도 본명도 어떤 분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작별인사를 나누고 말았습니다. 돌아볼수록 참으로 송구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제가 겪은 일 못지 않은 심각한 일을 한가지 겪으십니다. 예수님과 3년 동안이나 동고동락했던 제자 필립보가 아직도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백 번도 더 "내가 바로 너희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바로 그 사람이다"며 암시를 주고, 특별교육을 실시했음에도 불구하고 필립보는 "아버지는 어디 계십니까?"하고 질문합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힐 일입니다. 아버지를 바로 눈앞에 두고 아버지를 찾아내라니 환장할 노릇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참으로 슬퍼졌습니다. 속이 엄청 상했습니다. 분노를 꾹꾹 눌러 참으며 예수님은 다시 한번 필립보에게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임을 차근차근 설명해주십니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주님, 오늘 하루... 세상 만사 안에서 당신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저희에게 주십시오. 인간적인 눈을 감고 영적인 눈을 뜨는 저희이게 도와주십시오. 육의 옷을 벗고 영적인 옷을 갈아입도록 저희에게 당신 성령을 보내주십시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언제나 청춘> ‘깜빡’ 하고 한 이틀, 갓 심은 어린 모종들에게 물주는 것을 까먹었습니다. ‘큰일이다’ 싶어 밭으로 달려가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강렬한 초여름 태양열에 어린 모종들은 사나흘 굶은 사람들처럼 힘이 하나도 없이 시들시들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듬뿍듬뿍 물을 주었습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면서 한 녀석도 빠지지 않고 골고루 물을 다 주고 나서 잠시 앉아있는데, 정말 특별한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이 흙으로 다 스며들기도 전에 말라비틀어졌던 모종들 얼굴 색깔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방긋방긋 웃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고개를 축 늘어트렸던 녀석들이 다시 꼿꼿이 허리를 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하느님이라는 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부여받지 않으면, 우리 역시 모종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은 즉시 말라비틀어집니다. 우리의 나날은 황폐해집니다. 삶이 재미가 하나도 없고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과 사랑의 샘에 우리의 뿌리를 두고 있을 때, 우리 삶은 언제나 청춘일 것입니다. 우리의 나이는 언제나 방년 18세일 것입니다. 온천지가 초록빛으로 짙어가는 오월입니다. 주위를 찬찬히 돌아보면, 가던 발길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면 여기 저기 하느님 생명의 숨결로 가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간청합니다. 너무나 황당했던 예수님께서는 질책의 분위기가 담긴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뵙는 것, 하느님의 음성을 내 귀로 직접 듣는 것, 하느님을 내 두 손으로 직접 만져보는 것...‘지복직관’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가장 간절한 바람일 것입니다.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에 대한 확실한 체험 없이 그분을 믿는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어렵고 힘든 일이었나 봅니다.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분의 뜻을 파악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일은 사실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신학교 정규과정을 다 마쳐도 사실 불가능합니다. 죽기 살기로 머리 싸매고 하느님에 대해 공부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닙니다. 이런 우리의 고민을 해결해주시기 위해 강생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떤 분이신가 정확하게 알려주기 위해 나타나신 하느님의 분신, 하느님의 정확한 모상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사실 우주 전체가 다 하느님 섭리의 손길 아래 맡겨져 있습니다. 세상만사가 그분 품에 안겨져 있습니다. 나를 내려놓고, 욕심을 내려놓고, 그분 품에 푹 잠길 때 하느님은 더욱 우리 가까이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 때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 생명의 숨결 아래 놓여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체험이 부족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너무나 당연한 논리입니다만 세상만사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시지만,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너무나 우리의 시선이 몰두하고 있기에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평생토록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는 엠마오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비록 오늘 뚜렷이 그분을 체험하지 못한다하더라도, 끊임없이 그분을 바라보고, 지속적으로 그분을 향하며, 항상 감사와 찬미의 송가를 불러드릴 때, 하느님께서는 소리 없이 우리 옆으로 다가와 않으실 것입니다.
성 필리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김찬선신부- 전에 이산가족 상봉을 하는 장면을 T.V에서 볼 때
귀 기울이기 -백남해 신부- “입 나났다가 보리 숭년에 죽팔아 무끼가(입 놓아두었다가 보리 흉년에 죽으로 바꾸어 먹을 거냐). 함 물어 바바라!” 먼 길 나섰다가 길을 잃었을 때 하는
아낌없이 나누는 마음 -서영남-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만나는 이웃에게 길·진리·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다섯 해 전입니다. 2003년 4월 1일에 민들레 국숫집을 열었습니다. 그해 겨울 갑자기 늘어난 손님 때문에 쌀이 떨어질까 마음 졸였지만 지금껏 쌀이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우리 손님들이 배불리 드시고도 남은 쌀을 어떻게 하면 은인들의 뜻대로 이웃에게 나눠드릴 수 있을까 걱정할 정도입니다.
등불이신 예수님 -김동하 신부-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말은 가까이 있는 것이 도리어
현실의 고통은 미래의 영광 -고진배 수사- 누구에게나 자신만이 걸어온 길이 있습니다. 일생을 마리아께 봉헌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 위한 제 인생도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얼마나 열심히 복사를 했는지 거의 매일 미사 복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복사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주례 사제와 함께 신자들 사이를 들어가고 나올 때 들려오는 성가 소리가 저의 작은 가슴에 엄청난 감동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 감동의 기회를 갖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길은 오직 하나. 사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사제가 된다면 이런 감동을 매일 느낄 수 있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그것이 내 성소의 씨앗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 후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줄곧 복사를 했고,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주님 은총의 교회를 선언한 야고보 -경규봉 신부-
예수님 안에 완전히 일치하는 삶 - 이상일 신부-
"하늘 길"
-이수철신부- 마치 하느님을 찾는 우리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우리 내면 깊이의 간절한 소원이 아버지의 얼굴을 뵙는 것이 아닙니까? 늘 하느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 수도자들을 향한 말씀 같기도 합니다.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늘 주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신자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말씀이겠습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뵌 것이다.” ‘하느님의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뜻의 ‘임마누엘’이 아닙니까? 예수님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입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부활하신 주님의 다음 말씀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시어 아버지께 이르는 하늘 길이 되어 주십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하늘 길, 진리의 길은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떠나 길을 잃고 거짓과 죽음의 세계에서 방황하는 이들 얼마나 많은지요! 새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것이 우리의 영성생활에 얼마나 중요한 가 깨닫게 됩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아버지께 이르는 생명과 진리의 하늘 길 잘 가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강영구신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양승국신부-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진정 맑고 아름다운 한 영혼을 뵙고 무척 부러워했습니다. 비록 외형적으로는 극심한 고통으로 인한 피로의 기색이 완연했지만, 그분의 눈망울 안에 깃들어있는 신앙과 희망을 보았습니다. 이미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신앙의 눈을 활짝 뜬 그분이었기에 고통이 더 이상 고통이 아닌 듯 느껴졌습니다. 죽음도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으로 자리 잡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당당하고 의연한 그분의 신앙 앞에서 참으로 나약하고 유아기적인 제 신앙이 진정 부끄러웠습니다. 그분의 그 당당함, 거칠 것 없음, 두려움을 모르는 신앙, 그 이면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겠습니까? 그분 안에서 저는 뚜렷한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의 고통 그 한가운데 자리 잡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생일대의 과제는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뵙는 일입니다. 내 안에 생활하고 계시는 예수님, 우리 인간관계 사이에 함께 활동하고 계시는 예수님, 이 세상 한가운데 늘 머물고 계시는 예수님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우리가 매일 겪고 있는 고통과 방황, 가난과 비참함으로 점철된 인간조건을 마술사처럼 순식간에 없애주시지 않습니다. ‘제발 이 고통 좀 없애 달라’고 하소연하는 우리에게 당신 손에 남아있는 못 자국을 보여주십니다. ‘이 비참함, 이 계속되는 악습의 굴레, 이 지긋지긋한 악몽에서 제발 좀 건져 달라’고 울부짖는 우리에게 당신의 구멍 난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 우리 안에 현존하고 계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만사형통을 약속하시는 해결사의 모습이기보다 십자가 죽음을 극복하신 인내의 주님이십니다. 죽음의 고통을 잘 견뎌내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닌 갖은 인간적인 한계-결점, 고통, 질병, 실패, 죽음 등-를 꿋꿋이 극복하기를 바라십니다. 외적인 기적이나 일시적, 육체적인 기적보다는 참된 회심을 통한 내적인 변화, 내적인 기적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신앙의 눈을 뜰 것을 요청하십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그 옛날 필립보에게 하셨던 질책성 질문을 다시금 우리에게 하고 계십니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필립보 이 사람아, 제발 이제 그만 정신 좀 차리거라”는 질책입니다. “필립보야, 이제 제발 육의 눈을 감고 영의 눈을 뜨거라”는 간곡한 당부입니다. “필립보야, 외적인 것만 보려고 하지 말고 내면을, 영혼을 보도록 해봐라”는 요청입니다. “필립보야, 멀리서 찾지 말고 바로 네 안에, 네 삶 안에, 네 일상 안에 계시는 주님을 찾거라”는 간청입니다. 이 비참함, 지독한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이 아침,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셨다면 우리는 예수님 그분과 한 몸이 된 것입니다. 이제 그분은 멀고 먼 다른 하늘에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내 안에 사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또 다른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세상 앞에 성체입니다. 비록 우리가 비천한 몸으로, 죄 많은 몸으로 성체를 영하지만 예수님 그분으로 인해 더 이상 비천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성체로 인해 우리의 몸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통스럽고 비참한 인간 삶의 조건, 그 안에도 하느님은 항상 현존하시며 우리를 지켜보시고 계신다는 것을 자각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힘겨워도 다시 한번 그분 자비의 손길에 힘입어 힘차게 여행길을 걸어가길 바랍니다.
† 예수를 보는 자, 하느님을 본다.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14, 6-14) -유 광수신부- 그 때에 예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 "나는 000이다"라는 표현은 하느님이 당신을 계시할 때 사용하시는 표현이다. 모세가 야훼 하느님께 불리움을 받았을 때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고 말하면 그들이 '그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이냐?'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라고 하시는 그분이다'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고 말씀하셨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여러 가지 모습으로 계시하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생명이요 부활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이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등 여러 가지로 당신의 정체를 표현하셨다. 사람들이 당신을 모르니까 당신 스스로 당신의 정체를 밝히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한 두 마디로 당신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다양하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것이다. 이렇게 당신의 숨겨진 부분을 드러내는 것을 계시라고 한다. 즉 계시란 하느님 편에서 보여주시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하느님이 보여주시지 않고 가르쳐 주시지 않으면 볼 수 없고 알아들을 수 없다. 보여주셔야만 볼 수 있고 들려 주셔야만 들을 수 있고 가르쳐 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 그것이 계시이다. 그래서 카톨릭 교회를 계시 종교라고 한다. 즉 인간에 의해서 세워진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 즉 하느님이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주시는 교회라는 뜻이다. 가톨릭 교회의 창시자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가르쳐 주시고 진리를 가르쳐 주실 수 있다. 예수님만이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쳐 줄 수 있고 설명할 수 있고 인도해줄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이시고, 알아야 할 진리이시며 먹어야할 생명이시라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아버지께 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래서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왜 예수님은 길 진리 생명으로 계시하셨는가? 인간은 지성을 가진 존재이다. 파스칼이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말했듯이 인간만이 생각할 수 있는 존재요, 지성적인 존재이다. 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알고자 하고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이다. 이런 지성이 있기 때문에 발전하는 것이고 지구를 정복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만물의 영장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이다. 진리를 알 때만이 인간이 가야할 길을 올바로 걸어갈 수 있다. 진리를 모르면 얼마든지 잘못된 길로 갈 수 있고 결국 멸망의 길로 갈 수도 있다. 지난 4월 27일에 복자품에 오르신 알베리오네 신부님은 자주 "이 인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인간 대중은 어디로 가는가? 가기는 가고 있으나,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 자기의 목적지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지도 모르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과연 오늘날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 교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오늘 날 우리 사회와 가정 그리고 개인의 위기는 진리의 위기이다. 즉 무엇인 진리이고 거짓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혼돈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 좋은 머리를 가지고 얼마나 나쁘게 사용하고 있는가? 왜 그런가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즉 옳게 사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진리를 모르니까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고 가야할 길을 가지 않는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내가 가야하고 알아야할 진리를 알고 있는가? 골베신부님은 "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고 진리에 봉사하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셨다.그렇다면 진리가 무엇인가? 요한은 자기복음 서론에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들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1,35)고 하였듯이 예수님이 진리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진리를 아는 것이요,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을 때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를 알게 된다. 인간이 진리의 길을 걸어갈 때 그것이 곧 생명이다. 즉 생명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런 생명의 길을 걸어가려면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다. 인간이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시는 분이 곧 예수님이시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너희는 나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15,4-5)라고 말씀하셨듯이 생명이신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생명은 오직 예수님 뿐이시다. 모든 것은 생명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생겨났다. 예수님은 생명의 원천이시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3-4) 인간이 균형잡힌 발전을 하려면 인간의 세 가지 기능 즉 지, 정, 의가 골고루 그리고 올바르게 발전해야 한다. 우리의 신심도 마찬가지이다. 감정만 앞세워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도 위험하고 지성적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려는 것도 위험하다. 모든 것은 다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균형잡힌 인격자가 되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것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라고 말씀하신 대로 인간이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이다. 즉 우리의 완전한 모습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닮는 것이요, 그 아버지를 닮는 것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를 닮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유일한 길이시고 진리이시고 생명이신 분이시다. 진리가 곧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고 진리인 그 길을 걷는 것이 곧 나에게 생명이다. 진리인 그 길을 걸어갈 때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내 인생에 있어서 내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진리이시고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시며 내가 먹어야할 생명이신 분이시다. 생각해 보라. 이 세상에서 생명으로 가는 유일한 진리이시고 길이시고 생명이신 그분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모르고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길을 잃고 헤메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스도인은 길을 잃고 헤이는 길 잃은 양들을 찾아 나서는 이들이며 그들을 착한 목자에게로 인도해 주는 이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모르고 혼돈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진리를 전하고 증언하는 이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7-19)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무엇보다 먼저 진리로 거룩해져야 할 사람들이다. 그래야 올바른 길로 안내할 수 있고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 있어서 예수님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시다."라는 말씀을 항상 기억하며 생활하자.
† 길과 진리는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 †
야고보는 성경에 동명이인이 있는데, 한 사람은 제베대오의 아들이고 한 사람은 알패오의 아들이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로서 ‘작은 야고보’ 또는 ‘소(小) 야고보’라고도 불리는 야고보 사도를 말한다. 그렇게 불리는 것은 성경에 훨씬 더 많이 언급되고 있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하기 위해서다. 야고보 사도는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주교로 알려져 있다. 야고보의 영어식 발음은 ‘제임스’다.
and you still do not know me, Philip?
어떤 젊은이가 하느님을 애타게 만나고자 했습니다. 꿈속이라도 좋으니 한 번만 뵙게 해 주십사고 청했습니다. 응답이 없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정보를 주었습니다. 마을 끝의 수도원에 하느님을 보여 주는 수사가 살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그 수사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청했습니다.
그렇지만 수사는 웃기만 했습니다. 매일 그는 같은 부탁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강으로 목욕을 갑니다. 젊은이가 물속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수사는 그를 누르며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놀란 젊은이는 한참을 허우적거리다 간신히 물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수사가 물었습니다. “물속에 있을 때 무엇이 가장 절실하였소?” “숨 쉬는 거였지요.” “하느님도 그만큼 절실하오? 그렇다면 머지않아 그분을 만나 뵙게 될 것이오. 그렇지만 그런 절실함이 없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만나 뵐 수 없을 것이오.”
스승님께서도 따뜻한 답을 들려주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
세월이 흐르면서 필립보는 스승님을 하느님으로 깨닫고 모시게 됩니다. 함께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에 관한 일은 예수님과 함께해야 깨달음이 옵니다. 성경을 중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 성경을 멀리하면 그분을 깨닫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지식이 곧 신앙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떠난 지식은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필립보처럼 예수님과 함께 지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 읽기와 영성체를 통해 언제든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체를 모실 때마다 아버지를 깨닫게 해 주십사고 청해야겠습니다. 필립보의 마음이 되어 청해야겠습니다.
당시 상근하던 두 수녀님의 임금을 주고 나면 잔고가 바닥이 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주노동자들은 치료와 잠자리, 산재와 임금체불 문제 등을 해결해 주기 바라면서 찾아왔습니다.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인근 본당에서 홍보미사를 그리고 동료 신부의 도움을 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할 수 있는 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분께 기도하고 홍보하자 점차적으로 그분은 어려운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지금은 노동 상담소 일곱 군데와 다문화 센터 세 곳 그리고 쉼터 일곱 군데가 이주민들을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구하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아멘.
사실 이러한 게임이 그렇게 재미있는 놀이 같지 않습니다. 재미있고 신기한 장난감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닌데, 아이들은 그러한 고전게임을 더 재미있어 합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게임의 종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또 게임에 있어서 특별한 도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함께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재미없는 게임이라 할지라도, 또한 재미있고 신기한 장난감이 없는 게임이라 할지라도, 나와 누군가가 함께만 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 모습은 아이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른들 역시도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바로 나와 뜻을 함께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나를 지지해주고 나에게 힘을 끊임없이 불어넣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행복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들에게 이러한 분으로써 다가오십니다. 즉,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으로써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다가오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그분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나의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하는데, 세상의 기준과 판단으로 주님께 내 마음을 열지 못하면서 특별한 징표만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마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필립보처럼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그러나 그러한 특별한 징표는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작은 일까지도 관장하시는 분이시기에, 주님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이 세상 안에서 이미 무궁무진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특별한 징표를 요구한다는 것은 “저는 당신이 그 어떤 것을 보여주어도 믿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 아닐까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 그래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느끼셨으면 합니다. 그때 우리는 어떠한 일이 내게 다가오더라도 참 기쁨 안에서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 곳곳에 있는 주님의 사랑을 느껴보세요.
정말 안타까운 장면을 많이 봤습니다.
그 중에서도 찾던 부모나 형제가 이미 돌아가시어 만나지 못하고
대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조카를 만나는 경우,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부모나 형제를 보지 못하는 실망감이 클 텐데,
그래서 실망감으로 그냥 돌아서버릴 법도 한데,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조카를 보면서
대신 그렇게 반가워하고 기뻐합니다.
핏줄이 댕겨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아마 조카 안에서 부모와 형제를 만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너무나 사랑하고
그래서 너무나 보고 싶고
너무나 그리우면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거기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제 아버지 얘기를 또 하게 되는데
저는 아버지 얼굴도 모르지만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아버지가 입으셨던 야전 군복을 늘 입고 다녔습니다.
그것은 엘리사가 엘리아의 외투를 받아 지니게 되자
엘리야의 영이 엘리사에게 내린 것과 같이
아버지의 영이 그 옷을 통해 나와 함께 계시다는 마음으로
입고 다닌 것이지요.
저는 그 옷을 제 조카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제 조카는 한 번도 그것을 입지 않을 뿐 아니라
별 의미가 없는 듯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조카에게는 지 애비, 어미가 다 있고
도대체 아쉬운 것이 없으니 그리울 것도 없는 것이지요.
오늘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필립보에게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그것은 당신이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는
볼 수 있는 이런 눈이 필립보에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볼 수 있는 눈이 필리보에게 생겼고
주님의 열렬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돌아가시면서 주님께서 당신의 영을
필립보와 사도들에게 주셨기 때문일 것이고,
돌아가심으로 제자들이 주님을 더 사랑하고
그리워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不二이신 하느님을 둘이 아닌 하나로 볼 수 있는 눈은
둘을 관통하고 초월하는 하나의 영을 지닐 때에만,
진실한 사랑과
간절한 그리움과
보고픈 크나큰 열망이 있을 때에만 가질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말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이 말을 쓸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길을 알려주는
기계들이 너무나 발전하여 간단히 주소나 전화번호만 입력해도 안내를
잘해줍니다. 이제 더 이상 낯선 곳에서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저는 워낙 ‘길치’인지라 여러 번 간 곳이라고 쉽게 나섰다가 낭패를 보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어느 날 문득 의문이 일었습니다. ‘나는 왜
길치일까? 기억력이 그리 나쁜 편도 아니고, 아이큐가 낮은 것도 아닌데….’
가만 생각해보니 원인은 ‘잠’이었습니다. 제가 차만 타면 자는 체질인지라,
출발할 때와 도착할 때 외엔 가는 도중 내내 자기 때문에 출발한 곳과 도착한
곳은 너무나 잘 알지만 가는 과정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주 하는 말이 “가보면 어딘지 알 것 같은데…”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받을 때는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리라 굳게 마음을 먹지만 살다 보면 잠자기(냉담) 일쑤입니다. 그러다가 막상 주님께서 부르실 때가 되거나
급한 일이 생기면 잠에서 퍼뜩 깨서 주님 품에 매달립니다. 아버지께
가는 길에서는 졸지 않도록 깨워주는 신앙의 길잡이 교회에 귀 기울입시다.
동인천 전철역에 내려서 팔백 미터 정도 걸어오며 민들레 국숫집이 있습니다. 허름한 골목길에 있어 잘 보이지 않는데, 간판마저 흰색 바탕에 노란글씨여서 더욱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손님들은 밥 한 그릇 먹기 위해 서울·수원에서부터 전철을 타고 옵니다. 한두 시간씩 걸어서 오는 분들도 많습니다.
저는 손님이 늘어도 걱정이 없도록 소리 소문 없이 후원해 주시는 분들을 생각합니다. 민들레 국숫집은 정식으로 인가받은 사회복지시설이 아니기 때문에 후원을 해주셔도 소득공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도와주십니다. 저는 평생 돈이라곤 벌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제가 돈 걱정 하지 않고 마음껏 배고픈 손님들을 대접할 수 있도록 항상 채워주시는 마음 넓은 은인들이 계십니다.
민들레 국숫집의 첫 손님이었고, ‘민들레의 집’의 첫 식구인 대성 씨가 설거지를 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처음에는 쌀이 떨어질까 봐 걱정을 많이 했답니다. 국숫집에 쌀이 조금밖에 없는데도 달라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퍼주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요. 그런데 내어 주면 그보다 더 많이 들어오니 놀랍고 신기하기만 했다고 합니다.
알기 어렵다는 뜻으로 늘 함께하는 것의 가치를 다 헤아리지 못함을 말합니다.
등잔은 기름을 담아 등불을 켜는 그릇이기는 하지만 등불을 가리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등불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등잔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가리는 등잔이란 우리가 지니고 있는 그릇된 생각이 아닐까 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굳어지는 생각, 이웃을 함부로 얕잡아보는 생각,
잘못된 줄 알면서도 바꾸지 않는 생각 등등. 그릇된 생각은 예수님을
가려버리기에 나를 어둡게 하고 공동체를 어지럽게 합니다.
마음 안에 자리한 등잔은 등불로 걷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있는 곳에 언제나 어디나 함께하십니다. 마음에도 계시고 이웃에게도 계시고
보이지 않는 곳에도 계십니다. 늘 함께하시는 등불이신 예수님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면 우리의 등잔인 그릇된 생각은 삽시간에 물러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평범하고 자잘한 일상 안에서 늘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소의 씨앗은 고등학교로 이어졌습니다. 1학년 농번기 방학 때 어머니와 함께 보리 베기를 하는데 그날따라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운 날이었고 짜증도 많이 났습니다. 보리를 베다 말고 땅에 털썩 주저앉아 낫으로 땅을 콕콕 찍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고통이 오늘 하루, 지금 몇 분이 아니라 앞으로 10년, 100년, 수십 억 년, 그보다도 더 긴 영원까지 이어진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순간 소름이 끼쳤습니다. 지옥에서 받는 고통이 지금 당하는 고통보다도 더 심하고 무겁다면 어떻게 될까? 영원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결국 고통의 길을 벗어나 예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르기로 서원을 했습니다.
지금도 그날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나의 길을 열심히 갈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길을 보여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때로는 힘들고 험하지만 늘 그분이 함께해 주시고 밀어주시기에 오늘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이 길을 마다않고 꿋꿋이 걸을 수 있어 행복합니다. 나는 오늘도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8)라는 말씀을 묵상합니다.
12사도 가운데에는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두 분이다. 한 분은 제배대오의 아들로서 요한의 형이며 첫 번째로 부르심을 받은 4명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분으로서, 이분을 대(大) 야고보라고 부른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사도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로서 ‘주님의 형제’(마태 13,55)이며 ‘주님의 동생’으로서(갈라 1,19) 대 야고보와 구분하기 위하여 소(小) 야고보라고 부른다. 소 야고보 사도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우두머리였다(사도 12,17; 15,13 참조).
그리하여 지역 교회인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예루살렘 교회에 이방계 그리스도인의 할례 문제에 관하여 문의하였을 때 열린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론을 내렸다. 그는 “다음 몇 가지 긴요한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더 지우지 않으려는 것이 성령과 우리의 결정입니다. 여러분은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지 말고 피나 목 졸라 죽인 짐승도 먹지 마시오. 그리고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마시오. 여러분이 이런 몇 가지만 삼가면 다 잘될 것입니다.”(사도 15,28-29) 하고 비유대계 그리스도인에게 4가지 관행만을 실천하도록 편지를 보냈다.
후대의 전승에 의하면 야고보는 팔레스티나와 이집트에 정착해서 복음을 전하다가 이집트, 또는 시리아로 갔고, 그곳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그가 복음을 전파하는 중에 그의 설교를 들은 군중이 분노하여 그를 신전 지붕에서 내던지고 곤봉과 방망이로 때려 숨지게 했다. 그리하여 사도 야고보는 곤봉이나 방망이를 든 모습으로 그려지곤 한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곧 주님의 부활이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이 복음이다.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구원될 것이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인간을 얽어매는 여러 가지 율법의 제약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야고보 사도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체험했으며, 주님의 부활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짐을 믿음으로 확실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계 그리스도인이 굳이 할례를 받거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그리스도교는 율법의 종교가 아니라 은총의 종교임을 확인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주님을 굳게 믿고, 믿음으로 구원되는 신앙인이 되자.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그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6-18)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하느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자...............◆
사람은 저마다 살아가는 길이 다르며 나름대로의 진실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 살아가기 위한 힘인 생명력을 얻고 키우는 것도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름대로 각자의 길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서로서로 차이는 조금씩 있지만 생각과 마음의 진실을 담고 있는 우리에게, 세상과 나의 삶속에 놓여 있는 모든 것을 통하여 생명력을 얻는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은 도대체 무슨 뜻이겠습니까?
길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저마다 다른 길을 살아가는 것에 비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궁극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길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진리라는 것은 저마다 다른 각자의 진실이 향해야할 진리를 말씀하시는 것이며 생명은 각자가 나름대로 삶의 생명력을 얻는 것에 비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참으로 얻어야할 생명력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바로 예수님 당신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인간의 잘못으로 죄와 죽음이 물들어 있는 우리와 이 세상을 다시 회복시켜서 하느님과 인간이 일치할 수 있도록 해주신 분이십니다. 우리와 이 세상을 다시 부활시켜서 우리가 죄와 죽음에서 부활되고 세상을 어둠에서 빛으로 새롭게 해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예수님께서는 처음에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신 모습을 회복시키시고 완성되도록 해 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살아가는 길에서 궁극적으로 찾아가야할 길이 되셨고 각자의 진실이 추구해야 할 진리가 되셨으며 저마다 얻는 생명력의 원천인 생명 자체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하시기 위해서 꼭 필요하신 것이 있으셨습니다. 하느님이시지만 죄 말고는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시기 위해서 세상의 뜻 앞에 목숨을 걸고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셔야만 했습니다.
죄 많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일치하고 순명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방식 앞에 사람들의 생각 앞에 고통을 겪으셔야만 했습니다. 이 고통은 결국 당시 죄인들에게 행했던 십자가형의 죽음으로 이어졌고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인 사람들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서 다시 원래의 제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가져가셔야만 했고 또 죄의 결과인 죽음을 맛보아야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을 죽음으로 부터 부활시키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인간은 죄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수난 공로로 깨끗하여 졌고 예수님은 우리 삶에 있어서 가야할 길이요 추구하고 찾아야 할 진리이며 얻어야 할 생명이 되신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일치하신 예수님의 수난공로로 부활하신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사셨듯이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도 나와 있듯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헛되이가 아니라 제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 안에 계시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서 완전히 일치하셨듯이 이제 우리도 예수님 안에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해야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해서 구원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기 위해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활동하실 수 있도록 예수님의 뜻이 우리의 삶의 전부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각자의 생각과 마음과 의지에 얼마나 예수님의 뜻이 담겨 있는지 살펴보고 예수님이 가득 차도록 우리의 뜻을 내려놓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 늘 읽어도 새롭고 은혜롭습니다.
다음 필립보의 물음,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필립보뿐 아니라
이어 주님의 답변 말씀은
“필립보야,
그리스도 주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성경 말씀대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생명의 하느님께 이르는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은
푸른 오월에 맞는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당신은 싱싱하고 푸른 나무들과 눈부시도록 현란한 흰색과 붉은 색을 자랑하는 철쭉꽃을 보면서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感知)합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눈 뜬 사람입니다.
곳곳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하는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남편이나 아내, 자식을 보면서 그들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합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깨친 사람이자 예수의 제자입니다.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그들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어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작고 가난한 사람들을 당신과 동일시(同一視)합니다(마태10,40; 25,40).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당신과 동일시(同一視)하는 작고 가난하고 죄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습니다. 예수님의 동체자비행(同體慈悲行)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도 행복합니다.
그들이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필립보와 야고보가 하느님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 앞에 따로 보여줄 하느님이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이고,
하느님을 보고 싶어 하는 필립보와 야고보가 바로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려면 하느님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1요한4,16)
눈을 뜨십시오. 당신이 예수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당신이 하느님입니다.(一明)
-박상대 신부-
교회는 오늘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두 사도의 축일을 지낸다. 예수께서는 인류구원을 위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사람들을 제자로 불러 당신을 따르게 하시고, 그 중에서 열 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으니, 12사도의 이름은 시몬 베드로,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 야고보의 동기 요한,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나타나엘), 마태오, 토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데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가리옷 사람 유다이다.(마르 3,13-19; 마태 10,1-4; 요한 1,35-51 참조)
필립보는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고향인 베사이다 출신으로 처음에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예수로부터 직접 제자로 간택되었고, 나타나엘(공관복음의 바르톨로메오를 지칭함)을 예수께 인도하였다.(요한 1,43-47) 오천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에서 예수님의 첫 대화자로 등장하며(요한 6,5-7), 유다인의 명절에 예배를 드리려 예루살렘에 올라왔다가 예수님을 찾아온 그리스 출신 이방인들을 예수님께 소개도 하였다.(요한 12,21-23)
또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예수님의 수난 직전에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도 하였다.(요한 14,8-9) 구전(口傳)에 의하면 필립보 사도는 그리스를 무대로 전교 하다가, 62년 도미시안 황제의 박해 때 히에라폴리스에서 십자형의 죽음으로 순교하였다고 한다.
오늘 필립보 사도와 나란히 축제의 주인공석에 앉은 사도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사도이다.(마르 3,18) 이는 요한사도의 형제로서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는 다른 인물이다. 그러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주님의 형제로서(갈라 1,19), 야고보 서간의 저자인지, 예루살렘 첫 사도회의를 주관하면서 이방인들의 교화(敎化)를 주장한 야고보(사도 15,13-21)와 동일 인물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구전에 의하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도 필립보와 같은 해(62년)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늘 두 사도의 축일에 봉독되는 복음은 요한복음 제2부(13-21장), 즉 제자들 앞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가르침과 수난, 죽음, 부활에 해당되는 대목으로서 필립보 사도와 직접 관련이 있는 부분이다. 누구든지 이 대목이 오늘의 복음으로 채택된 이유가 단지 필립보 사도의 이름이 언급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극히 소극적인 사고(思考) 안에 머물게 된다.
오늘 복음에는 토마와 필립보 두 사도가 등장한다. 토마는 예수께서 이제 당신이 가야 할 곳으로 간다고 하시면서 "여러분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4절) 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 우리는 당신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5절) 하고 물었다.
이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6절)는 것이다. 이 대목은 예수님께서는 그 날 모세 앞에서의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자신의 신성(神性)을 밝히시는 "에고 에이미"(나는 ~이다) 방법을 사용하신다.(출애 3,14; 요한 6,20) 예수께서는 "에고 에이미" 방법을 통하여 스스로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 자체이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 인간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분명해진 것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인생(人生)에 있어서 두 갈래의 길을 놓고 고민할 필요가 없으며, 더 나은 진리(眞理)를 위한 학문적인 탐구가 목표를 얻었으며, 생명 과학적인 노력을 기울여 그렇게 갈구하는 참 생명을 찾게 된 셈이다. 예수께서 이른바 그런 것을 가지고 계신다기보다는 그분 자체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러한 하느님 계시의 진리를 밝힐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진 토마 사도에게 참으로 감사한다.
뿐만 아니다. 토마에 이어서 이번에는 필립보가 나서서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8절) 하고 청을 넣는다. 이 간청은 필립보가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바램이다. 즉, 토마스 사도의 질문으로 이미 얻어낸 "지상예수를 믿음으로 보는 자는 곧 아버지를 본 자"임을 필립보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한번 더 자신을 밝히신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9절)
이 말씀은 제자들이 지상예수와 함께 지낸 것이 사실 하느님과 함께 지낸 것임을 뜻한다. 예수께서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계심으로써 두 분은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과 행동은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문(愚問)은 없다는 말대로 토마나 필립보 사도의 우문(愚問)같은 질문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떡하겠는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하느님 아버지를 우리 두 눈으로 보려고 애쓰지 않겠는가? 사실 하느님은 인간의 시각적(視覺的) 능력을 벗어나 존재하신다. 따라서 아무도 하느님을 볼 수 없으며, 본 사람도 없다.(요한 1,18; 5,37; 6,46) 우
리는 예수님을 직접 본 사도들과 사도들을 계승한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봄으로써 이미 하느님을 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사실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된 자이다.(요한 21,29)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청원도 감사도 찬양도 드리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지성과 의지와 감정이 있다. 즉 인간의 구조는 지, 정, 의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 가지 기능이 균형있게 조화를 이룰 때 인격자가 된다. 어느 한 부분만 발달되어도 안되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서도 안 된다. 인간은 의지가 있기 때문에 무엇을 이루고자 한다.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길을 찾는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걷고 전진하고자 하고 진보하고자 한다. 그러려면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이 있어야 한다.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의지는 있는데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모를 때 헤메이게 된다. 따라서 의지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좋은 뜻을 이루는 길을 발견해야 하고 반드시 그 길을 가야 한다. 그래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잇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걸어가야할 길을 찾아야 하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즉 인간은 길을 찾는 존재요, 길을 걸어가는 존재이다. 그래서 求道者자라고 한다.
-두올묵상팀-
세상에는 길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길이 있는가 하면,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길도 있습니다. 바다에는 바다 사람들이 아는 뱃길이 있고, 하늘에는 국제 항공법으로 정한 비행기들의 항로가 있습니다. 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길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의 삶의 길입니다. 인간의 삶의 역사를 '여정'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인생행로'라고도 합니다. 이 길은 한 인간의 삶의 행동 양식과 사고 양식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길이 있습니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삶의 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체적인 모양새가 다른 것처럼 각자의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은 다 다릅니다.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 다르기에 사회적으로 가는 길도 모두 다 다를 수가 있습니다. 수도자로서의 길을 가는 사람이 있고, 평범한 샐러리맨의 길을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도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지고 각자의 길이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만물은 갈 곳이 있습니다. 창조된 모든 것 중 영원한 것은 없으니까요. 동해바다의 물도 밤 낮으로 바뀌고, 뜨고 지는 해와 달도 언젠가는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 토마는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하며 종착지를 모르는 인간의 불안을 고백합니다. 갈 곳은 있지만 그곳이 어디인지는 몰라 불안해 하던 인간의 역사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하시며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느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으로 인해 우리의 운명은 새로운 에덴동산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희망으로 채워줍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가 본향으로 가는 길 초입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길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지표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사랑의 삶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구나'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는 사랑의 삶을 실천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은은하게 풍기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타인들에게 삶의 길을 제시해 줄 때에 우리는 예수님을 거쳐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인들도 하느님께로 이끌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이정표가 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겠습니다.
이제 봄은 가고 여름이 오고 있고, 부활 축제도 이미 6주간에 들어섰고, 다음주 부활 7주간이 자나가면 부활시기도 끝납니다. 이처럼 시절과 축제가 가고 오는 까닭은 세월에 따라 한 켜씩 더해 가는 인생이라는 우리 삶의 이야기를 해마다 다시 찾아오는 시절과 축제라는 거울에 비춰서 돌아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때에 맞추어 우리의 삶을 돌아본다 함은 삶 안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나 아닌 다른 것과의 만남의 의미를 들여다보는 일일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우리 인간의 만남에서 드러나는 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세상의 질서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때에 맞추어 가만히 들여다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세상의 질서를 가능케 하는 그 ‘무엇’을 세상의 원리라고 부르고, 원리를 이해하는 방식을 ‘가치’ 라고 부릅니다. 가치가 세상의 원리를 따라서 가는 것을 세상의 법칙, 또는 ‘길’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길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만남이라는 말 안에 함축됩니다. 세상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만나고 우리가 그 세상을 찾아가서 만나는 것이 그 길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세상을 만나는 과정을 우리는 삶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을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 세상의 원리이시고,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심으로 인간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즉, 우리 앞에 드러난 세상의 원리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은 생명이라는 원리로써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이 생명의 원리를 자신의 삶 안에서 펼쳐 보이심으로써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과 하느님의 뜻을 묻는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이 “하느님의 진리이며, 생명이며, 길” 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우리가 우리 삶 안에서 지켜내고 드러내야 할 가치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하는 가치는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 안에서 드러낼 때만 지켜집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만남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하는 가치를 적극적으로 구현할 때에만 가능한 조건부적인 만남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믿는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또 그리스도이시라는 것, 그리고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실 약속된 구세주이시라는 것'을 의심 없이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말씀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들은 눈으로 보면 믿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당시에도 사람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날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이 때 베드로 사도가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이런 확신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믿음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믿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의 질문이나 필립보가 예수님께 질문한 것과 같은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이와 같은 질문에 대답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 봅시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접 주님을 뵈올 수는 없지만 그분의 행적은 예수님이 분명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합니다. 사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는 사람 중에도 주님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서를 통해서 예수님의 행적만을 살펴보아도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은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의심 없이 믿고 실천할 때 깊어집니다. 세속에 대한 열정보다 주님의 말씀에 더욱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야만 주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