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mphony No.3 in e major, OP.55 - Er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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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a Drahos - Budapest Nicolaus Esterhazy Sinfon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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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의 새 기원을 이룩한 베토벤 교향곡 3번 에로이카 베토벤이 고향을 떠나 빈의 음악계에서 어느 정도 확고하게 기반을 닦은 시기가 26세 때였다. 이 무렵 그 보다 불과 한 살 위인 코르시카의 영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미 군 사령관으로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불란서 대혁명 이후 홀연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나폴레옹의 과감한 행동을 베토벤은 놀라움과 존경의 눈으로 지켜 보았다. 그는 나폴레옹이 인류에게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 줄 인물이라고 믿었다. 당시 빈에 주재하고 있던 불란서 대사 베르나도트 장군에게서 나폴레옹의 사람됨과 용기에 관한 이야기를 직접 듣고는 더욱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1803년 여름에 베토벤은 5년 전부터 준비해 온 교향곡을 코르시카의 영웅에게 바치려고 본격적으로 작곡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봄에 완성했다. 그의 나이 34세 때이다. 그는 완성된 악보 표지에 "보나파르트 교향곡"이라고 써 넣고 헌정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5월 18일,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베토벤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당장 헌사를 쓴 표지를 찢어 버리며 "그 역시 속인에 지나지 않았다. 자기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 폭군이 되려는가!"하고 외쳤다. 그 후 그는 이 곡에 "신포니아 에로이카-한 위대한 인물을 추념하기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고쳐 출판했다. 17년 뒤에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죽었을 때 "나는 17년 전부터 오늘을 예상해 왔다."고 하며 제2악장 "장송 행진곡(Marcia Funebre)"을 가리켰다고 한다. 어쨌든 당시 청중은 괴물 같은 교향곡과 마주쳤다. "이전에 작곡된 어떤 교향곡보다도 길고 작법이 복잡했다. 미묘하게 얽힌 화성, 거인 같은 힘, 흉포한 불협화음, 사람의 마음을 마비시키는 듯한 긴장감 넘치는 장송 행진곡을 지닌 교향곡"이었기 때문이다. 교향곡 제1번과 제2번에는 아직 선배 작곡가 하이든과 모짜르트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으나 제3번부터는 놀라운 큰 비약을 이루고 있다. 규모가 엄청나게 커지고 도처에 독창적인 수법이 번뜩이면서 베토벤의 개성이 앞으로 불쑥 튀어나온다. 가령 제1악장의 크기는 18세기 중기의 고전 교향곡 한 곡 전부가 그대로 쏙 들어가 버릴 정도의 규모이며 또 제2악장에는 전혀 상식 밖의 장송 행진곡을 담았는가 하면 마지막 악장은 크고 웅장한 변주곡으로 채운 점 등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또 전체의 구성도 강철처럼 단단하고 악기 편성 역시 확대되었다. 호른을 세개나 쓰고 있는 점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여러가지 면에서 이 교향곡은 혁신적인 작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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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이 곡은 1804년 봄에 완성 되었다. 신들러의 「베토벤 전」에 의하면 베토벤은 프랑스 초대 집정관이었던 나폴레옹에게 바치는 이 곡의 부본을 프랑스 대사관을 통해 파리로 보내려고 하던 차에 나폴레옹이 5월 18일 황제에 즉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분개해서 그 악보의 표지를 찢어버린 후 악보를 마루바닥에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그 표지에는, Bonaparte Ludwing van Beethoven 이라는 글이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은 1789년에 일어났다. 코르시카 섬 태생의 일개 포병 사관이었던 나폴레옹은 1795년 10월에 의회군을 지휘, 이 대혁명에 참가하여 반란군을 평정함으로써 일약 최고사령관 자리에 오르고, 마침내는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이 되어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신출귀몰의 위력을 떨친 나폴레옹이야말로 베토벤의 눈에는 자유정신과 인간 해방의 기수로서 새 시대를 고하는 세기적 영웅으로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1798년 2월부터 4월까지 빈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베르나도트 장군이 베토벤과 개인적 친분을 가지게 되면서 그는 베토벤의 예술을 높이 평가하게 되고, 베토벤은 그를 통해 영웅 나폴레옹에 대해 더욱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혁명의 풍운아, 영웅에게 바치는 교향곡이 탄생된 것이다. 베토벤의 제자였던 리스(Ferdinand Ries,1784-1838)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 『그 녀석도 결국 속물이었군. 그 녀석도 역시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민중의 권리를 짓밟고 그 누구보다도 더 지독한 폭군이 되겠지!』하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2년이 지나서 출판된 파트 악보에는 「신포니아 에로이카」라고 이탈리아어로 쓰여져 있었으며 역시 이탈리아어로 된, 「한 사람의 영웅에 대한 추억을 기리기 위해서」란 부제가 붙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 곡을 나폴레옹 일대기의 표제악으로 생각하고 들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교향곡 「제2번」까지 희미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던 소위 희유성은 이 「제3번」에서는 그 자취를 감추고, 한층 더 진실한 도덕성이나 윤리성 같은 그 어떤 상한 힘을 이 「제3번」은 지니고 있다. 베토벤 자신도 「제9번」이 완성되기까지는 이 곡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다. 「제3번」은 확실히 장대한 곡이다. 시간적으로도 종래의 상식을 벗어나 50분이나 소요되는 긴 곡이다. 그러나 이점에 대해서는 작곡자 자신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으며 1806년에 출판된 악보 중의 제 1 바이올린 파트에는, 『이 교향곡은 일반 다른 곡들보다 길므로 연주회에서 후반부 보다는 가능한 전반부에서 연주하는 것이 좋겠다. 즉 서곡 1곡에다 아리아 1곡, 또는 협주곡 1곡 다음에 연주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청중들은 앞 부분에서 이미 지쳐버리게 되므로 이 곡의 효과는 그만큼 상실하게 된다』라고 기술했을 정도다. 심지어 전술한 클레멘트 주최의 초연에서는 제2부의 첫 곡목으로 되어 있었다. 작곡 : 1803~4년 초연 : 비공개 초연은 1804년 12월 로프코비츠 후작의 사택에서, 공개 초연은 1805년 4월 7일 비엔나의 안 데어 빈 극장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짐. 출판 : 1806년 헌정 : 로프코비츠 후작 편성 :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바순 2, 호른 3, 트럼펫 2, 팀파니, 현악 5부 연주시간 : 약 50분 1st movement: Allegro con brio 2nd movement: Marcia funebre (Allegro assai) 3rd movement: Scherzo (Allegro vivace) 4th movement: Finale (Allegro molto) 인간의 해방을 부르짖던 베토벤의 일면을 찾아볼 수 있는 곡이다. 1789년 일어난 프랑스의 혁명에서는 코르시카 섬 출신의 일개 포병 사관이었던 나폴레옹이 반란을 평정하고 국내 최고 사령관 이 되었다. 민중의 권리를 옹호하고 자유의 정신에 불타 있던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을 흥미 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당시 빈에 주재하고 있던 프랑스 대사와 대사관의 비서이자 바이 올리니스트였던 루돌프 크로이쩌로부터 프랑스에 자유와 질서를 가져온 나폴레옹의 업적에 대해 자세히 들을 기회가 있었다. 플라톤의 '공화국'을 숙독한 바 있었던 베토벤은 이 시대의 영웅의 자태를 보여준 나폴레옹을 자신의 작품으로 찬미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33세 때인 1803년 여름 이 교향곡의 작곡에 착수하여 1804년 봄에 완성시켰다. 스코어의 표지에는 '보나파르트'라고 썼으며 밑에 자신의 이름 '루비트비히 반 베토벤'이라 적어 이를 프랑스 대사관을 통해 파리로 보 내려고 할 무렵,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이 빈에 퍼졌다. 이 소식에 분개한 베토벤은 그 사본의 표지를 찢어 버렸다고 한다. "저 사나이도 역시 속된 사람이었어. 그 역시 자기의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민중의 권리를 짓 밟고 누구보다도 심한 폭군이 될 것이야."
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이후 다시는 나폴레옹에 대해 언급도 안 했다는 그는 2년 뒤 이 곡을 출 판하면서 '한 사람의 영웅을 회상하기 위해 작곡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17년 후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었다는 보도를 듣고 비로소 '나는 그의 결말에 어울리는 적절한 곡을 써 두었다' 라고 했다는 베토벤. 이는 이 작품의 제2악장에 있는 '장송 행진곡'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작품해설 각 악장별 분석 하이든이나 모짜르트의 영향이 엿보이는 「제1번」이나「제2번」과는 달리 이 「제3번」부터는 음악적으로 일대 비약을 보여준다. 즉 규모가 엄청나게 방대해졌고 독창적인 수법이 대담하게 구사되어 베토벤의 개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제1악장의 길이만 하더라도 종전 교향곡의 전곡과 거의 맞먹는다. 또 제2악장에 장송행진곡을 사용했다던가 종악장에 장대하고도 호화장려한 변주곡을 넣은 것 따위는 당시로서는 커다란 모험이었다. 1악장 : 생기 있는 빠르기로 Allegro con brio 내림 마 장조 3/4 장대한 제1악장은 우선 그 당당한 구성에 압도된다. 이것은 소나타형식으로 쓰여졌지만 전개부들은 종래의 관념을 완전히 깨뜨리고 제시부의 배나 되는 규모를 갖는다. 소나타 형색의 권화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악장은 주제의 새로운 활용법, 활발한 운동성, 극적인 수법 등 그의 종횡무진한 테크닉과 다채로운 악상이 넘쳐 흐른다. 소나타 형식. 그러나 규모가 크고 두 개의 주제가 의외로 다양하고 풍부한 악상을 지니며 이들 재료를 낱낱이 구사하고 있다. 1주제는 첫 부분의 강력한 두 개의 화음 후에 저음역의 현악기에서 엄숙하게 등장한다. 2주제는 부드럽고 온화하게 클라리넷으로 연주되며 바이올린으로 옮겨간다. 발전부는 매우 정성스럽게 대위법적으로 짜여지며, 극적인 힘을 지니고 커다란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공식적으로 제시부의 재료를 다시 출현 시키는 재현부 후에 또 다른 새로운 발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충실한 코다가 나오고 이 당당한 악장을 마무리한다. 2악장 : 대단히 느리게 Adagio assai 다 단조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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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제2악장은 영웅의 이미지와 죽음이 합치된 서사시로서 종교적 정화를 느끼게 해준다. 또 장중한 장송 행진곡 부분도 훌륭하지만 마지막 심판 나팔을 연상케 하는 듯한 시그널로 시작되는 웅대한 푸가 부분도 마음을 울렁거리게 한다. 자유로운 3부 형식. {장송 행진곡}의 악장이다. 현의 주제가 나타나며 장중한 걸음걸이로 나아간다. 중간부는 다장조로 밝아지며, 영웅의 생전의 업적을 기리는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제1부의 주요 선율이 다시 나타나며 그에 토대를 둔 푸가토가 차례대로 펼쳐진다. 마지막으로 다시 주요 선율이 모습을 보이며 슬픔과 체념을 품은 채 곡을 중단하고 인상 깊게 마무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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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악장 : 스케르초. 빠르게 생기있게 Allegro vivace 내림 마 장조 3/4
Bela Drahos - Budapest Nicolaus Esterhazy Sinfonia A - B - A의 3부 구조를 취했으며, 「제 9 교향곡」제 3악장의 선구를 이루는 것으로 되어 있음, 본격적인 스케르쪼인 제3악장엔 트리오 부분에 호른이 사용되는 등 베토벤 특유의 발랄한 주제가 구사되어 있다. 3부 형식. 1부는 빠른 스타카토의 움직임으로 시작하며, 차츰 힘을 증대시켜 간다. 중간부 트리오는 호른의 선율로 매우 아름답다. 그리고 다시 1부가 반복된다. 4악장 : 매우 빠른 속도로 Allegro molto 내림 마 장조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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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분의 2박자의 짧은 도입에 이어서 현의 피치카토로써 저음 주제가 제시된다. 이것이 변주된 후에 목관 악기로써 주제 멜로디가 나타나는 것은 작품 35의 「피아노 변주곡」에 있어서의 주제 제시와 동일한 방법에 의한 것이다. 이 주제는 방금전에 언급했듯이 1795년에 작곡된 「12개의 콘트라탄쯔」의 제 7곡에 사용되었고, 이어서 1800년경에 작곡된 발레곡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종곡에, 또한 작품 35의 「변주곡」 주제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제 3의 교향곡」 종악장에 사용된 것이다. 제4악장(종악장)은 이 주제를 기초로 하여 일곱 개의 변주를 하며 그 후에 긴 코다를 두는 형태로(8개의 변주)로 이루어진 웅대하고 호쾌한 악장으로 이것은 <영웅>이란 이름에 어울릴 만큼 힘차고 늠름하다. 같은 베이스의 선율형을 자유롭게 몇 차례 반복하여 그 위에 변주를 쌓아나가는 파사칼리아와 비슷한 형태를 취한다. ff로 격렬히 연주되는 서주 후에 피치카토의 1주제를 중심으로 하여 베이스에서 몇 차례 반복된다. 이것은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끝 곡에 베이스에서 빌려온 것이다. 이윽고 가볍고 평온한 2주제가 등장한다. 전체적으로는 푸가토와 그 밖의 대위법적인 기교들이 나타나며 커다랗게 정점을 향해 진행한다. 거기에 긴장이 풀리고 마지막에는 다시 한 번 압도적인 코다로 전곡을 마무리하게 된다. 베토벤이 음악계 선배들의 영향을 받아 모방적인 음악을 만들던 시기를 벗어난 첫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곡은 그만의 강한 개성과 힘의 균형이 훌륭하게 나타나는 곡이다. 후에 바그너는 이 곡의 4개의 악장을 '활동, 비극, 정적의 경지, 사랑'이라고 평하면서 참된 베토벤의 모습이 이 곡 안에 다 있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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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 교향곡 빈의 제19구의 데부링에 있는 베토벤 하우스는 특히 [영웅]의 집으로서 알려져 있으며, 그 가까이에는 '[영웅]의 거리'라고 명명되어 있는 도로가 있다. 베토벤은 33세의 1803년 여름, 데부링에서 교향곡 제3번 영웅]의 작곡에 몰두했다. '[영웅]의 거리'는 그것을 연관지어 명명한 것이다. 베토벤은 전부 9곡의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그 중 [교향곡 제3번]은 특히 중요한 의미를 뜻하고 있는 작품의 하나로 그는 이것을 나폴레옹에게 헌정할 것을 생각하고 작곡했던 것이다. 자유의 정신에 불타 민중의 권리를 옹호한 인간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자기보다 1세 연상의 '코르시카의 영웅'인 나폴레옹이 인류에게 자유와 평화를 초래할 구세주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교향곡 제3번]은 그와 같은 나폴레옹을 포함한 영웅들의 행위를 교향곡의 형식으로 나타내려고 했던 것이다. 베토벤은 악보가 완성하자 [제3번 E장조 교향곡] 총보 속표지 상에 '보나파르트' 아래에 '루트비히 반 베토벤'이라 적어 헌정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황제로 즉위하자 베토벤은 크게 실망하였다. "그 놈도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던가, 머지 않아 그 놈은 틀림없이 온갖 인권을 짓밟고 자기의 야심을 만족시킬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고 그는 총보의 속표지를 찢었으며 그 뒤에 영웅의 추억을 기리기 위해 [영웅 교향곡]이라고 적었다. 그 이래로 베토벤은 나폴레옹에 대해서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이 [영웅]은 연주시간이 약 50이 걸리는데, 그때까지 그렇게 긴 곡이 없었으므로 너무 길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이에 베토벤은 "50분이 길다고? 두고 보게, 너무 짧다고 불평들 할걸세" 하며 자신있게 말했다고 한다. 이 곡은 나폴레옹과 매우 관계가 깊은 작품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나폴레옹의 생애나 업적을 그린 것은 아니다. 다만 17년 후에 나폴레옹이 몰락해서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토벤은 "나는 이런 날이 올 것을 알고 미리 결말에 적절한 음악을 써 두었다"라고 했다. 그것이 이 곡의 2악장에 있는 [장송 행진곡]이다. 이 곡은 1805년 4월 7일 빈에서 초연 되었을 때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 당시 전례가 없던 장대한 음악이었으므로 청중들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후 이 작품에서는 지금까지 그의 선배들의 영향인 모방기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것으로 그의 감정을 나타내는 강한 개성의 힘과 양식의 균형으로 훌륭한 곡임을 증명하였다. 전부 4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제2악장의 [장송행진곡]은 유명인이 죽었을 때 흔히 단독으로 연주되는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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