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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20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20-26)
"I pray not only for these, who will believe in me through their word,
but also for those
so that they may all be one
말씀의 초대
바오로는 유다인의 최고 의회에서 증언한다. 그의 발언을 두고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은 서로 논쟁한다. 바리사이파는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만, 사두가이파는 부정하기 때문이다. 군인들은 바오로를 보호하며 지켜 준다. 주님께서도 그날 밤 바오로 앞에 서시어 격려하신다(제1독서). 스승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그들이 하나가 되어 살아가기를 바라신다. 이렇듯 일치는 예수님의 뜻이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의 일치는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운전 학원에서 도로 연수를 전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학원에서는 자상하다고 소문이 난 사람입니다. 어느 날 그의 아내는 ‘어차피 할 것이라면’ 하는 마음에서 남편에게 운전을 배우기로 했습니다. 그렇지만 첫날부터 부부는 싸우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상냥하다는 남편이 아내를 윽박지르고 무시하는 말을 한 것입니다. 아내의 말입니다. “더 잘해 달라는 것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만큼만 하면 된다는 거지.” 남편의 말입니다. “그게 안 돼. 왜 당신에게는 화부터 먼저 나는지 나도 알 수가 없어. 다른 사람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는데, 당신에게는 못 참겠어. 정말 미치겠어.” 아내와 자신은 ‘하나’라는 무의식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운전 잘하는 ‘내가’ 운전 못하는 ‘다른 나’를 꾸짖는 것이지요. 일치는 이렇듯 어렵습니다. 알고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론과 지식은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늘이 개입해야 가능해집니다. 일치 또한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일치하여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 되려는 노력에는 언제나 힘을 보태 주십니다. 일치는 내 쪽에서 시작됩니다. ‘당신이 바뀌어야 내가 바뀔 것 같소.’ 이래서는 안 됩니다. ‘내가 바뀌어 당신에게 가겠소.’ 이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힘이 함께하십니다.
☆☆☆
아버지,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이들도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일치보다 분열이 많습니다. 공존하려는 조직보다 떨어져 나가려는 조직이 더 많습니다. 말 많고 탈 많은 인간이 일치를 이루며 산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 “하느님께서는 일치를 원하시고, 사람은 분열을 원한다.” 서양 속담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일치는 귀하고 분열은 흔하다는 말입니다. 역사 안에도 갈라서는 인간들의 이야기는 수두룩합니다. 일치는 언제나 희망일 뿐, 틈만 나면 대립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와도 같습니다. 지금도 모든 국가는 어떤 형태로든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일치는 상대방을 받아들일 때 가능해집니다. 상대방의 ‘모순’까지 받아들이면 더욱 확실한 일치가 됩니다. 사랑과 감동을 바탕으로 하면 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식도 권위도 재물도 순간입니다. 잠깐의 일치는 가능케 해도 영원한 일치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본모습은 두 얼굴입니다. 인간의 양면성은 본질인 것이지요. 아무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어이없는 행동’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행동’도 좋게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받아들이는 것’의 첫 행동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늘 일치에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일치해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가 되려는 노력에는 ‘힘’을 보내 주십니다. 일치는 내 쪽에서 시작됩니다. ‘당신이 바뀌면 나도 바뀌겠다.’는 것은 늘 유혹일 뿐입니다. ‘내가 바뀌어 당신께 가겠다.’는 마음일 때 은총이 함께합니다.
그러므로 일치를 위한 노력은 하느님의 행위입니다. 갈라진 이를 화해시키고 보복에 눈먼 이를 인도한다는 것은 은총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힘을 지닌 자만이 가능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사람들이 하찮은 일로 갈라져 나가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대부분 실패하고 맙니다. 주님의 힘이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뜻은 언제나 일치에 있습니다. 어디서나 일치해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가 되고자 노력하는 이에게는 주님께서 늘 당신의 힘을 보내 주십니다. 일치는 내 쪽에서 시작됩니다. ‘당신이 바뀌면 나도 바뀌겠다.’ 이건 아닙니다. ‘내가 바뀌어 당신에게 가겠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힘이 함께합니다.
사랑의 도구
-정순옥 수녀-
이주민들의 어려움을 함께하면서 여러 번 타종교인들, 특히 회교도들이 ‘왜 그리스도인인 당신이 우리를 돕느냐 ?’, ‘왜 누나(sister)는 남편이 없느냐 ?’ 고 궁금해할 때마다 예수님에 대해 말할 수 있어 기뻤다.
지난해 여름 수녀회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에 체류하게 되었는데, 그 시기에 함께 일하는 르베르애덕수녀회 바울라 수녀님도 프랑스 본원에 체류하게 되었다. 그 수녀님의 기꺼운 초대 덕분에 르베르에 있는 수녀원을 방문해 1박 2일 동안 머물면서 벨라뎃다 성녀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성인이 받은 은사에 잠길 수 있는 행운이 주어졌고 그곳 수녀님들한테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르베르애덕수녀회는 1680년에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고풍스럽고 매우 아름다운 수녀원이었다. 이 수도회는 루르드의 벨라뎃다 성녀가 입회하여 길지 않은 수도생활로 삶을 마감한 곳으로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는 유명한 순례지다. 그 수녀원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자 커다란 대형유리 속의 벨라뎃다 성녀가 순례자들을 맞았다. 그리고 잠시 후 성녀가 사라지고 곧 이어서 루르드의 성모님이 그 자리에 나타나더니 사라지고 또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나타났다. 참 아름다운 장면이고 또 의미심장했다. 성인들은 자신의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이신 주님의 얼굴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낸다, 성녀 벨라뎃다처럼.
세상과 다른 가치를 살거나,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아본다. ‘아 ! 어쩐지 뭔가 다르다고 했는데 신자였구나 !’ 라고. 교회의 다양한 구성원들 모두 사랑의 도구로 살 수 있는 은총을 청해 본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텔레비전과 컴퓨터를 켠다고 하지요. 특별히 볼 것과 할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습관적으로 이러한 행동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가족 간의 대화는 점점 줄어듭니다. 실제로 어떤 연구 조사에서는 한 지붕 밑에 한 가족이 함께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화하는 시간이 1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는 놀라운 발표를 했습니다.
텔레비전을 보고 컴퓨터를 하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나면서, 사람이 아닌 기계가 나의 파트너가 되고 있는 상황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따뜻한 인간성은 사라지고 대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되어갑니다.
지금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일치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뜻을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어 사랑의 만남을 계속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치를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즉, 자기한테만 맞추는 일치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나에게만 맞추는 일치, 그래서 흑백논리를 내세워 나와 다르면 거부하고 비판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일치의 모습이 분명히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 됨은 하느님 아버지 아래에 하나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주님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얻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현상으로 하느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나’를 채우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완전히 하나 되기를 기도하셨던 주님을 기억하면서, 우리 각자 각자도 그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기계를 파트너로 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나의 소중한 파트너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기준이 되어 이 세상 안에 사랑이 넘쳐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의 하나 되기를 바라셨던 기도는 진정한 완성을 이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넓게 퍼져나가는 기도
-이준석신부-
삼일째 예수님의 ‘대사제의 기도’를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사도들의 복음 선포 활동 위에 세워진 교회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한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천 년 전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2010년을 사는 우리를 위해서까지
기도하셨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이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폭넓게 퍼져나갑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분은 진정
참다운 ‘대사제’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그분을 닮아가기를
원하는 우리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과 가족, 가까운 이웃만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나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지구 반대편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가난까지도 내 기도의 주제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더불어 우리 세대뿐 아니라 미래에 이 세상에서 살게 될 형제자매들의 복리도
생각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게 될 때 우리의 시야가
넓어지고 세상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살면서 가난과 재난과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해,
그리고 다음 세대에 태어날 후손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팀플레이 합시다.
-김기현신부-
프로 야구 감독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프로야구 경기는 피를 말리는 접전일 때가 많은데, 그렇게 접전을 벌이다
가 1점 차이로 지면 무척 속상하고 마음이 아프다고 합니다. 그런데 감독이 ‘아! 감독 생활 못 해 먹겠다!’ 하고 회의
를 느낄 때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1점 차이로 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자기 선수 가운데 하나가 아내나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말할 때입니다.
“경기는 졌는데, 나 오늘 홈런 쳤다!”
이런 식으로 선수가 안타나 홈런을 쳤다고 개인 성적을 자랑하는 말을 들으면 감독은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끊어 오
른다고 합니다. 개인성적도 중요하지만, 팀 경기에서는 팀플레이가 중요합니다. 감독의 입장에서는 홈런을 친 선수
보다 꼭 필요한 때 희생번트를 대주는 선수가 훨씬 귀합니다. 1점이 아쉬운 때, 타자가 희생번트는 절대 안 하고 홈
런을 칠 기회만 노리다가 아웃된다면, 그것만큼 감독에게 아쉽고 속상한 일은 없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들도, 각자가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의식 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면, 머리이고 감독이
신 예수님이 속상해 하실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의 팀플레이는 어떤 걸까요? 그 구체적인 모
습에 대해서 삼위일체 하느님이 잘 보여주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먼저 나서야 할 때와 물러나야 할 때를 아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보면 이렇습니다. 하느님이 구약에서 전면에
드러나 활동하실 때는 예수님과 성령님이 함께 하시지만 전면에는 드러나지 않으시고, 신약에서 예수님이 전면에
드러나 활동하실 때는 하느님과 성령님이 함께 하시지만 전면에 드러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님의 시대가 왔을 때는 성령님이 전면에 드러나 활동하시고 하느님과 예수님은 함께 하시지만 전면에 드러나지
않으십니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느님은 서로를 위해서 자신이 드러나야 할 때와 물러나야 할 때를 지키는 팀플레이
를 잘 보여주셨습니다.
또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능력이 있으신 하느님이십니다. 얼마든지 자신의 영광
을 위하여 무언가를 할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에게서 본 것과 들은 것을 전하고 선포하면
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희생해야 할 때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고 희생하여, 하느님의 영
광을 드러내는 일을 하셨습니다.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시지 않으셨죠. 예
수님에게서 받은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심으로써,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또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신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팀을 위해서 내어주고 희생하고 드러나지 않으셨던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범을 우리도 배울 수 있어야 하겠
습니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우리 공동체가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일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하루, 내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
고 실천해 봅시다.
목요일-하나 되기를!
-김찬선신부-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이 우리 안에 있게 해주십시오.”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나가 아닌 여럿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둘이 하나가 되고, 셋이 하나가 되는 그런 것입니다.
여러 존재가 하나가 된다는 것, 쉽지 않습니다.
다른 존재가 하나가 된다는 것, 더 쉽지 않습니다.
싫은 존재가 하나가 된다는 것, 그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상황은 지금 참으로 좋지 않습니다.
천안함 사건으로 남과 북이 서로를 극도로 증오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과 북이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할 국민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 주님께서 하나 되게 해주시기를 청하심은
연인들이 서로에 대한 열망으로 하나가 되고,
친구들이 서로에 대한 호감으로 하나가 되는,
그런 낭만적인 상황이 아니라
바로 이렇게 극단적으로 대치되는 상황에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천안함 사건이 나고 얼마 후
저는 젊은 한우리 회원들과 임진각까지 자전거 Hiking을 했습니다.
물론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염원하는 행사였지요.
마지막 파견 미사 때 자유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때 새터민 젊은이가,
20살도 안 된 아주 여리디 여린 새터민 여자 아이가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번 천안함 사건이 북한이 한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아이는 남과 북,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
남과 북, 모두를 사랑하고 하나 되기를 바란 것이지요.
우리 중에 이런 기도를 하는 분들이 얼마나 될지 궁금합니다.
제가 지금 남과 북이 하나 되기를 기도하자고 하면
그렇게 기도하실 분 얼마나 될까요?
그렇게 기도하자고 하면 대단히 욕을 먹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 하였어도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을 수없이 들었어도
미움의 의지가 사랑의 의지보다 훨씬 강하고
이데올로기가 신앙보다 훨씬 강하다는 표시입니다.
얼마 전 신자들과 한 술자리에서도 그것이 확인이 되었습니다.
제 앞이라 대 놓고 말은 못하였지만
남북이 하나 되기를 바라기 보다는
천안함이 북한의 소행이기를 바라고
그런 소행을 한 북한에 대해서
강력하게 응징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우리에게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고
아버지께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2인 3각 경기로 말하자면,
서로 너무도 싫어하는 두 사람이 발을 묶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하나 되기를 바라는 주님의 뜻에 싫어도 순종하려는 사람은
하나 되려는 의지를 가지고 발을 묶을 것이고,
그럴 순종의 의지가 없는 사람은 자기의 싫은 감정을 따를 것입니다.
저는 지금 아주 궁금합니다.
남북이 모두 출전하는 월드컵이 곧 시작될 텐데
북한이 경기를 할 때 북한을 응원하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양승국신부-
<나를 깨지게 만드는 형제>
초세기 교회가 직면했던 가장 큰 어려움 중의 하나가 유다인들과 로마황제의 종교 탄압과 박해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신자들은 그렇게 의연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구성원들간에 이루어진 끈끈한 일치였습니다.
이렇게 교회 구성원들간의 우선적인 일치는 교회건설의 바탕이었습니다. 그 일치는 세속적이거나 물리적 일치이기에 앞서 복음정신에 입각한 일치, 사랑과 이해를 기초로 한 영적 일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 공동체가 철저하게도 이상적인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수용력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한 이상적인 공동체 말입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유식한 사람도 무식한 사람도, 갈릴래아 시골사람도 예루살렘 도시인도, 건강한 사람도 병자도, 의인도 죄인도 모두 받아들여지고 서로 친교를 나누는 공동체를 예수님께서 간절히 원했습니다.
신약성서 안의 몇몇 흔적들과 초대교회 공동체의 생활상을 바탕으로 우리는 일종의 "공동체 정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 정신은 무엇보다도 "서로 함께"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지요.
서로 앞장서서 남을 존경하십시오(로마 12, 10), 서로 합심하십시오(로마 12,16), 서로 받아들이십시오(로마 15,7), 서로 충고하십시오(로마 15,7),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인사하십시오(로마 16,16), 서로 기다리십시오(1 고린 11,33), 서로를 위하여 같이 걱정하십시오(1 고린 12,25), 서로 사랑으로 남을 섬기십시오(갈라 5,13),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갈라 6,2), 서로 위로하십시오(1 데살 5,11), 서로 화목하게 지내십시오(1 데살 5,15), 서로 선을 행하십시오(1 데살 5,13), 서로 사랑으로 참아주십시오(에페 4,2), 서로 친절하고 자비로운 사람들이 되십시오(에페 4,2), 서로 순종하십시오(에페 5,2), 서로 용서하십시오(골로 3,13), 서로 죄를 고백하십시오(야고 5,15), 서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야고 5,16), 서로 진심으로 다정하게 사랑하십시오(1 베드 1,22), 서로 대접하십시오(1 베드 4,9), 서로 겸손으로 대하십시오(1 베드로 5,5), 서로 친교를 나누십시오(1 요한 1,7), 서로를 위하여 같이 걱정하십시오(1고린 12,25), 서로 건설하십시오(1 데살 5,11).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말은 공동체가 살아있는 공동체가 되도록 일으켜 세우는 노력입니다. "공동체를 건설한다"고 말할 때 이는 공동체 구성원 모든 이들이 상호 간에 서로를 책임지는 것입니다.
한 형제가 공동체에 소속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공동체와 그 사람이 계약을 맺는 것입니다. 마치도 결혼 서약문에서 결혼하는 한 쌍의 부부가 서약하듯이 서약하는 것입니다. 기쁠 때나 성할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괴로울 때나 절망의 나락에서 허덕일 때도 역시 형제이기를 서로에게 약속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때로 공동체내 형제들이나 아이들이 걸림돌로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육신적인 눈에서 봤을 때 걸림돌이지 영적인 눈으로 바라다보면 나를 성장시키는 가장 고마운 선물로 변화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성장의 도구로 자주 어려운 형제들, 성격상 맞지 않는 형제들을 꼭 제게 보내주십니다.
비록 우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고 나를 비참하게 만들고 깨지게 만드는 그 형제는 분명히 선물이지요. 더없이 고마운 선물입니다.
마음을 크게 먹는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오늘 이 순간도 지속적으로 어려움을 주는 이웃들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를 보다 깊이 있는 겸손에로 우리를 초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시기는 진정으로 형제를 형제로 받아들이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한 형제를 받아들인다면 그 공동체는 일치와 기쁨의 장이 될 것이며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는 부활의 장소요, 새 인간으로 변화되는 가장 소중한 장이 될 것입니다.
“아버지, 오늘 저에게 참으로 감사한 일이 생겼습니다.”
“무슨 일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주님께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래? 무슨 일인데 그러니? 어서 말해 보아라.”
“오늘 성당에서 집으로 오다가 차가 일곱 바퀴나 굴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상처 하나 없이 말짱합니다.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쳐다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세요.
“나는 너보다 훨씬 더 감사하다.”
“아니, 아버지도 사고가 나셨었어요? 얼마나 큰 사고였는데요? 아버지는 여덟 바퀴 굴렀나요?”
이에 아버지께서는 손을 모으고 하늘을 쳐다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나는 한 바퀴도 안 굴렀다.”
아들은 큰 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다치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고 있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사고가 전혀 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사고가 난 것이 감사할 일일까요? 아니면 사고가 나지 않은 것이 감사할 일일까요? 당연히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감사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만 감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특히 자신에게 많은 이득이 있을 때에만 감사를 드리려고 하지요. 그러다보니 감사하기 보다는 불평불만이 더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내용 중에서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은 하나도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당신 자신보다는 우리들을 위해서 기도하시지요. 우리 모두가 하나 되기를 바라는 기도.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을 받아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미리 알고 계셨지요. 따라서 당신 자신에 대해 더 많이 기도할 만도 한데, 그보다는 우리들을 위한 기도에 더 집중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의탁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완전히 일치된 삶을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나를 위한 기도보다는 남을 위한 기도를 우리 역시 바쳐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된 삶을 살 수가 있고, 그래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이름
-김우성 신부-
내가 처한 환경이나 상황 등을 바꾸기는 그리 쉽지 않지만, 그러한 것에 맞서는
나의 태도는 늘 새롭게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하느님의 지혜를
간직하면, 그 지혜가 나를 밝게 하고 사랑의 행위를 하도록 권합니다. 거기에서
파생된 지혜로운 태도는 처한 환경을 스스로 변화시키게 하는 묘한 힘을
갖기도 합니다. 마치 막혀 있는 한쪽이 뚫릴 때 주변의 모든 물 흐름이 그쪽으로
몰려오는 이치와 같다 할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을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하는 것이기에
그가 하는 모든 일은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 안에 놓여 있게 됩니다.
그분 섭리의 은총으로 되돌려드립니다. 일하는 그의 마음은 오로지
아버지의 말씀에 귀 기울이려는 몫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렇게 일하는 마음은
아버지의 이름을 통해 아버지 안에서만 빛을 발합니다.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하나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놓여져 있음을 알고 받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느 것 하나 있는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할 때 우리는 그대로 아버지의 사랑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부르는
아버지의 이름은 우리 모두를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로 이끌어가는
아버지의 권능이기도 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하나로(not alone but as one)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제자들을 위한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입니다.
주님이 제자들, 즉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바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바라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첫째로 당신을 매개로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신비한 것입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우리가 크신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은 당연하고
그 크신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주님께서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가 그런 관계이기를 기도하십니다.
물리적인 크기로만 얘기하면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은 가능하고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사랑으로 얘기하면
우리와 하느님이 서로 안에 있는 것이 너무도 당연합니다.
하느님과 우리가 서로 안에 현존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시어 현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사랑이 아니고
물리적인 점령이고 폭력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서로 안의 현존은 사랑의 현존이기에
사실은 서로에 대한 갈망이고
서로에 의한 채워짐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크기로 치면
큰 하느님 사랑이 우리를 채우고
우리의 작은 사랑은 하느님을 채울 수 없을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입니다.
마치 어미의 큰 사랑이 자식의 작은 사랑으로 충만하고
자식의 작은 사랑은 어미의 큰 사랑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듯
우리가 당신들 안에 현존하길 주님께서 더 바라시고
그렇게 만족하십니다.
사랑만큼 그가 내 안에 현존하길 갈망하고
갈망하는 만큼 작은 사랑의 현존으로도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두 번째로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고
어떻게 하면 완전히 하나가 됩니까?
그것은 우리가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역시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개인으로 당신 안에 현존하길 원치 않으십니다.
혼자가 아니라 하나로 현존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때부터 하느님은 우리가 혼자 있는 것을 좋지 않게 보셨습니다.
같이 있고 하나로 있는 것을 좋게 보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본질이고
사랑하는 존재만 그러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그런 말을 못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시며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주십시오.
우리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자식들에게 말하지 못합니다.
굳이 말한다면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너희라도 서로 사랑하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있자고는 할 수 없습니다.
행복이란 말이 행복한 사람에게서만 나오듯
사랑이란 말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사랑이다
-전삼용신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네로황제는 로마 빈민촌에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형편없는 집들을 불태워서 멋진 건물들로 영원한 로마를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백성의 원성이 예상보다 커지자 네로는 당시 소수 사람들이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화살을 돌리기로 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방화주범이라고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사실 그런 종교가 있는 줄도 모를 정도로 소수 사람들이고 밤마다 모여서 어린이를 잡아먹는 예식을 행한다는 등의 안 좋은 소문까지 있었던 터라 좋은 희생양이 될 수 있었습니다. .
당시 로마에선 베드로와 바오로가 열심히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심해지자 베드로는 교회의 수장으로서 교회를 위하여 로마를 떠나기로 합니다. 혹은 목숨을 바치기 겁이 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베드로는 십자가를 지고가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너를 대신해 내가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간다.”
베드로는 이제 그리스도를 따를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깨닫고 다시 돌아가 순교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스승과 같은 모습으로는 죽을 수 없다고 하여 머리가 땅으로 가도록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하게 됩니다.
이렇게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가장 가까운 형태로 순교하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십자가로 보답한 것입니다. 생명을 주신 사랑을 생명으로 보답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표로 당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놓으셨습니다. 사랑하는 만큼 주는 것이라 사랑 자체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란 바로 생명이신 성령님입니다. 생명을 주지 않는다면 아직 온전한 사랑은 아닌 것입니다.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랑이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만의 사랑으로는 둘이 한 몸이 될 수 없습니다. 둘이 서로의 전부를 주어야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 모든 것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것, 모든 권한을 주셨음을 여러 차례 말합니다. 모든 것을 주시면 아버지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채 남게 됩니다. 우리는 아들만이 모든 것을 버리고 아버지께 순종하여 목숨까지 바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아버지도 아들을 위해 보이지 않게 십자가에 못 박혀 생명까지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모든 것을 주시는 것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은 그 모든 것, 즉 성령님 안에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아버지와 당신과의 한 몸이 되는 관계를 우리와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분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시고 당신의 모든 것, 즉 피와 물, 생명과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그 분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으셨습니다.
한 몸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도 모든 것을 그 분께 드려야합니다. 처음엔 자신들의 목숨부터 챙겼던 사도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에 응답하였는지 간단히 봅시다.
전승에 의하면 안드레아는 그리스에서 X형 십자가에서 며칠 동안 매달려 설교를 하다가 돌아가셨고, 큰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헤로데에게 목이 잘리셨으며, 요한은 끓는 물에 넣어졌지만 죽지 않아 파트모스 섬에서 유배하다가 에페소에서 돌아가셨고 필립보성인은 기둥에 매인 채 맞자 돌아가셨으며, 바르톨로메오는 산 채 가죽이 벗겨져 돌아가셨으며 토마사도는 인도에서 쇠몽둥이와 창에 찔려 돌아가셨고, 마태오는 이집트에서 칼에, 타대오는 페르시아에서 활에 맞아 돌아가셨으며 작은 야고보는 역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성전에서 밀쳐진 뒤 돌과 망치에 맞아 돌아가셨고 시몬은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결국 열 두 사도는 모두 그리스도의 모든 것에 대한 보답으로 모든 것을 드리며 그 분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아래 오늘 복음의 성경 구절의 ‘영광’을 ‘모든 것’, 혹은 ‘성령님’, 혹은 ‘생명’으로 바꾸면 밑의 구절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또 아들이 아버지께 모든 것, 생명, 성령님을 주시는 사랑으로 한 몸을 이루듯이, 우리도 예수님께 또 이웃에게 조금 더 주는 사랑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 이영석 신부-
수련원 시절, 매일 잔디밭에 나가 잡초를 뽑을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잔디밭에 있는 잡초만 뽑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자라고 있는 보이지 않는 잡초를 제거하도록 도와주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수련원의 잡초 제거 프로젝트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잔디의 마음을 그 누가 알겠습니까? 잔디는 민들레와도 함께 어울리고 싶어할지도 모르고, 토끼풀이과도 더불어 자라고 싶어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잔디는 아무 말이 없건만, 그것을 보는 인간은 서로 다른 것이 어울려 함께 있는 것을 못 견뎌 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다른 생각, 다른 종교, 다른 민족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이 나와 다른 누군가와 조화롭게 어울려 살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듯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자기 내면 안에 있는 다양한 감정과도 통합적으로 살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특히 자기 내면의 한 부분인 나쁜 면을 인정하지 못한 채, 때로는 그것을 감추고 때로는 억압하면서 좋은 면만을 자기라고 생각하고 편을 나누고 있으니까요. 자신 안에 있는 잡초, 곧 나쁜 면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신과 화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자신과도 화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내 안에 있는 나쁜 면을 인정할 때, 우리는 하느님 앞에 나아가 진실한 마음으로 고개 숙일 수 있습니다. 고개 숙이는 그 순간,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실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도 같은 생각, 같은 이념, 같은 믿음만을 가지라고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다양한 것들을 인정하듯이, 내 밖에 있는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 속에 하나가 되는 길이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모임에 갔다가 기억에 남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갓난아기의 똥 싼 모습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갓난아기의 똥 싼 것을 치우는 엄마의 모습이지요. 사실 이 갓난아기의 응아(새벽부터 자극적인 단어를 쓰면 안 될 것 같아서 이제부터 ‘응아’로 표현하겠습니다.) 냄새는 정말로 지독했습니다. 변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순수하고 귀여운 아이의 모습과는 달리 제 코를 자극하는 그 냄새는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지요. 그래서 차마 코는 막지 못하고(혹시 아기엄마를 곤란하게 하는 것이 될까봐), 숨을 최대한 쉬지 않으면서 그 자리를 버티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기엄마의 표정입니다. 그렇게 냄새가 지독한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웃으면서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도 부족했는지, 가까이 얼굴을 대고 응아 색깔까지 살핀 뒤에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이 아닙니까?
결혼해서 아기를 가지면 코가 막혀서 냄새를 맡지 못할까요? 아니지요. 아기가 너무나 사랑스럽기 때문에, 아기와 관계되는 모든 것이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심지어 응아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여기서 엉뚱한 상상을 한번 해봐요. 만약 아기가 냄새나고 지저분한 응아를 해서 엄마를 괴롭힌다고 생각하면서, ‘이제 응아 하지 않겠어.’라고 다짐하고는 응아를 꾹 참는다면 어떨까요? 만약 아기가 이러면 엄마는 “에구, 우리 새끼……. 엄마 생각해서 응아도 꾹 참고, 너무 예쁘고 착하네.”라고 말할까요? 아니지요. 제때에 응아를 하지 않으면, 어디 잘못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병원에 데리고 갈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지 않을까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이 갓난아기보다도 더 철없고 어릴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죄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하느님을 어려운 분으로만 생각하며, 죄책감으로 하느님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엄마 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응아를 참는다고 그것이 효도가 되지 않는 것처럼, 죄책감으로 인해 고개만 푹 숙이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하느님께 충실한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 됨은 바로 하느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와 주님과의 관계는 과연 어떤가요? 혹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는 노래 제목처럼, 주님을 내게서 멀리 떨어진 분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아주 가까이에서 가장 큰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조그만 노력으로도 주님과 충분히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어린이를 사랑합시다.
행복은···
모니카는 제 딸입니다. 조그만 공부방 ‘민들레의 꿈’을 맡아서 합니다. 저녁에는 사회복지 공부를 합니다. 청송교도소에도 함께 다닙니다. 잡지「가족이야기」의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 모니카가 기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기자님, 행복이 무엇인지 아세요? 행복은 나를 너에게 줄 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래요.”
며칠 전 청송교도소에서 열다섯 명의 천주교 형제들과 성경 공부를 할 때 행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행복은 나의 생명을 아낌없이 너에게 나눠줄 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니, 소유하려는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결코 누릴 수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귀여겨들었던 모양입니다.
지난해부터 모니카는 매달 청송에 갈 때마다 저와 동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청송에 가는 날은 새벽 네 시에는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네 시 반에 출발할 수 있습니다. 인천에서 청송까지는 참 먼 길입니다. 오전에는 청송 3교도소 형제들을 만나고, 오후에는 청송교도소 형제들을 만납니다. 그런 다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더욱 멀게 느껴집니다. 길이 많이 막히기 때문입니다. 모니카는 제가 졸지 않도록 종달새처럼 종알거리기도 하고, 잠시 운전을 해주기도 합니다.
“아빠, 청송이 참 멀긴 멀어요.” 그래도 콜베 삼촌과 호근이 삼촌, 영선이 삼촌, 인영이 삼촌이 반갑게 맞이해 줘서 고맙다고 합니다. 자기보다 한 살 많은 스물여섯 살 상민이와 옥진이가 징역을 오래 사는 것이 안타깝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사람은 욕심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립니다. 행복은 자기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때 선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좌우로 밀착
-백남해 신부-
복지관에서 사목을 하다 보면 다양한 직업을 가진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예루살렘과 로마에서 -오상선신부-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우리가 남이가? ‘공동체와 성장’이라는 책에서였던가,
경제적 정신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도우려는 분들을 만나다 보니 그렇습니다.
도움을 주시는 분들 중에는 자신의 직업과 연관 지어서 도움을 주시기도
합니다. 제빵사는 맛있는 빵으로, 미용사는 멋진 미용기술을 통해서….
이외에도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이웃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참 착한 분들이 많습니다. 도자기 굽는 분들을 몇 분 만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명장”이라는 높은 경지의 도공도 뵈었고, 아직 서툴지만 열정으로
그릇을 굽는 젊은이도 만났습니다. 그러던 중 진흙을 구워서 작품(흔히 보는
도자기가 아닌)을 만드는 미술가를 알게 되어 작품전에 갔습니다.
라면 상자만한 수십 개의 작품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작품의 규모가 대단해보여서 가장 힘든 일이 뭔지 물어보았습니다. “반죽하는 게 제일 힘듭니다. 제대로 안 하면 기포가 생겨서 작품이 깨져버리거든요.”
진흙을 제대로 밟고 두드리고, 들고 내리치고 해서 서로 밀착시키지 않으면
기포가 생기고 구울 때 깨져버린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해, 고난으로 내리치시고, 사랑으로 밟아 다져
불신의 기포를 없애주시니, 고통조차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예루살렘 방문일정을 마치고
로마에 도착해서
독서를 읽으니,
마치 나에게 하듯이 위에 말씀이 있었다.
기가 막힌 일이다.
아니, 내가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온 것을 어떻게 알고
이 말씀을 주시는 걸까?
이번 예루살렘 방문은 정말로 의미 있었다.
공식방문차 그곳에서 봉사하고 있는
형제들을 만나 함께 지낸 것도 큰 기쁨이었지만,
1년에 한번 있는
<성 십자가 발견 축일>을 함께 할 수 있는 행운이 있었다.
축일 전날의 장엄행렬과 저녁기도, 그리고 장엄 밤기도,
그리고 축일 장엄미사...
특히 장엄미사에서는 손님으로서
수많은 형제들을 대표하여 성지관구장과 합동미사를 봉헌하였다.
나와 우리 한국 형제들의 현존은
성지관구의 모든 형제들과
그곳에 함께한 모든 이들에게
주님을 위한 증언이 되었을까?
저 극동의 작은 나라에도
프란치스칸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주님의 제자들이 있음을 증언한 것이리라.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그곳 형제들은 한국의 젊은 형제들을
더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함께 주님을 증언하자는 바램이리라.
이제 로마방문을 시작한다.
형제들과의 만남과
우리 프란치스칸 가족 형제자매들과의 만남,
그리고 총본부에서의 연합회 회장단과 총평의회와의 만남도
예정되어 있다.
이 로마에서
주님을 증언하라신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조용히 기도하며
그분께서 바라시는 대로
그분께서 가르쳐 주시는 대로
그렇게 증언하리라.
로마에서 지내게 될
성령강림대축일이 그 기회가 될것인가?
주님,
내가 가는 곳 어디서나
용기를 잃지 않고 주님을 증언하게 하소서!
-김찬선신부-
아주 오래 전에 읽어서 제목이 잘 생각나지 않지만,
일치가 목표여서는 일치될 수 없다는 말을 본적이 있습니다.
맞는 말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일치를 목표로 일치하자고 할 때마다
일치하지 않고 있다고 느낄 것이고
우리의 불일치를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치하지 않으니까 일치하자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자는 말도 듣기 싫어합니다.
사랑하자는 말은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일치와 사랑은 목표로 삼고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일치를 드러내고 확인하는 부정적인 방법보다
서로의 일체성을 발견하고 확인하고 긍정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지역 색이 어떻고,
이념이 어떻고 하면서 싸우다가도
일본과 무슨 시합을 하면
그때 우리는 일체성을 발견하고 확인하고는
온 국민이 하나가 됩니다.
다른 점도 있지만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이고 같습니다.
우리는 서로 많이 다른 인간이지만
인간이라는 면에서 하나이고 같습니다.
만일 외계인이 있어서 우리를 쳐들어온다면
우리는 인간으로서 하나이고 같음을 발견하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하나이고,
하느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이와 같은 확신과 긍정이 필요합니다.
전에 아주 우스운 말이 유행한 적이 있어지요.
정치적, 지역적으로 똘똘 뭉치기 위해
경상도 사람들이 썼던 말입니다.
"우리가 남이가"
비록 좋지 않게 쓰인 예이지만,
이런 확인, 확신, 긍정이 필요합니다.
-장용진 신부-
.
오늘 복음은 어제의 복음에 이어 대사제의 기도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믿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하나됨을 위해서 기도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만이 아니라 제자들의 말을 듣고 당신을 믿는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계시고 당신이 아버지 안에 있듯이 믿는 이들도 아버지와 당신 안에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어제의 강론대로라면 이 기도 역시도 예수님께만 맡겨 드리지 말고 예수님과 함께 나의 기도인 것처럼 절실하게 열심히 바쳐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이 기도는 그 옛날 이뤄졌던 것처럼 오늘도 똑같이 이뤄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앵무새마냥 예수님의 기도를 반복했다가는 쉽게 질리고 하다가 그만두게 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자신이 직접 만든 기도를 바쳐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그래서 한번 만들어 보았습니다. 제목은 이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이의 기도”
“하나이신 하느님께서는 하나가 부족하게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하나뿐인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인간이 하나가 부족하게 창조된 이유는
오직 하나이신 당신으로만 그 부족함을 채워야하며
그럴 때 당신과 함께 하나일 수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자주 자주 아버지 이외의 것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으로 저를 채우고자 하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부디 제가 당신의 그 사랑, 저와 하나되고자 하시는 그 사랑,
저와 함께 하시고자 하는 그 사랑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잊어버리고 산다는 것은
당신이 아닌 세상을 사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사람들 앞에서 하는 말과 행동이 일치를 이룰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나된 저의 언행 안에서 당신의 사랑과 이름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 삶의 매 순간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새 날 새 하루가 매일매일 저에게는 선물이며 새로운 시작을 꿈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쓸만한 기도인가요? ^^ㅋ
독서 : 적수들이 반박할 수 없는 지혜를 주시는 주님
사실 기도가 쓸만하지 아닌지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훌륭한 말로 이뤄진 감동적인 기도라고 할지라도 그 기도의 내용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가치 없는 글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이뤄진 하나의 기도를 바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내 안에서 하나됨의 체험이 이뤄질 때 너와 나의 하나됨도 가능해 짐을 알아야겠습니다.
-경규봉신부-
파견대장은 바울로가 로마시민이라는 것을 알고 바울로를 함부로 심문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바울로를 박해하는 진상을 규명하고자 대사제들로 하여금 의회를 소집하도록 했다. 이 의회에는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 두 파의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로는 의회에서 자신을 변론하면서, 자신은 바리사이파에 속하며, 자신이 박해받는 이유가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바울로를 두둔했고, 서로 대립해 있던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사이에 격한 분쟁이 벌어졌다. 파견대장은 진상을 규명하지 못하고, 바울로를 다시 병영으로 보냈다. 주님께서는 그날 밤 바울로에게 나타나시어 용기를 내고, 로마에서도 당신을 증언하도록 말씀하신다.
바울로는 자신이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의회에서 자신을 노골적으로 적대하자 자신이 박해받는 원인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자신을 박해하는 것은 곧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과 같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로가 지닌 믿음의 문제를 가지고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사두가이란 이름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대사제 사독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들은 순수 유대적 전통만을 고수하고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했다. 이들은 성전을 중시하며, 죽은 자의 부활, 영적 세계, 천사와 마귀 등도 전통적인 것이 아니라고 거부하며, 현세 지향적이고 로마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체제를 유지하려는 지배적인 귀족 집단이었다.
바리사이파는 당시 사두가이파와 쌍벽을 이루던 종교적 귀족 집단이다. 이들은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후 유대를 개혁한 대사제 에즈라로부터 시작된 유대주의에 충성하는 경건한 집단으로 모세 오경 외에도 각종 구전과 전승을 권위있는 정경으로 인정하며, 성서를 중시하였다. 이들은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 천사나 마귀 등의 영적 세계를 믿었고, 율법과 선조들의 전통에 충실함으로써 이스라엘을 개혁하고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처럼 서로가 믿음이 달랐기 때문에 바울로의 말을 듣고 의회의원들은 갈라졌으며, 결국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바울로에게서 아무런 잘못을 찾을 수 없다고 선언하며, 바울로를 두둔하였던 것이다.
사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부활을 전하는 사도들을 박해했다. 그들이 믿는 부활은 바울로가 믿는 부활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렇지만 바울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였다(1고린 9,23). 그에게는 장차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중대한 사명이 주어져 있었다.
그는 복음 전파를 위하여 자신이 바리사이파 사람이며 자신이 박해받는 원인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믿음 때문임을 밝혔다. 그럼으로써 자칫 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에서 “뱀 같이 슬기롭게”(마태 10,16) 대처하여 어려움을 해결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잡혀서 박해를 당하고 회당에 끌려 가 마침내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며 나 때문에 임금들과 총독들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 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때이다. 이 말을 명심하여라. 그 때 어떻게 항변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마라. 너희의 적수들이 아무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루가 21.12-15)라고 말씀하셨다. 그 주님께서 바울로에게 지혜를 주심으로써 어려움에서 벗어나도록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언제 어떠한 상황일지라도 결코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자.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의지하는 깊은 믿음을 구하자..................◆
'하나가 되는 것'
-홍성만 신부-
하나가 되는 것이 곧 구원의 차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너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제자들과 그들의 말을 듣고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일치의 기도를 드리시는 예수님이십니다. ~ 성경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들려줍니다. '하나가 되는 것', 수난과 죽음의 길에 앞서, 남아 있는 제자들과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을 향해 드리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 그만큼 '하나가 되는 것'은 주님의 큰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큰 뜻에 부합하고자 늘 부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주 만나 대화의 시간을 갖기도 하고, 잔잔한 축제를 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가 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자주 깨닫습니다. ~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 복음의 끝 부분에서 이에 대한 해답의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주었고 앞으로도 알려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바로 우리들 안에 있게 하시고, 예수님 자신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알려 주시는 이유는 아버지의 사랑이 바로 우리들 안에 있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아버지를 알려 주는 그 이유를 믿지 못하거나 흑은 체득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궁극적인 원인이 됩니다.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은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그 하느님의 사랑이 내 몸과 마음 안에 깊이 자리하고 있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릴 때만이 가능합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알려주시는 그 이유인,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바로 그 사실이 꽃피워지는 것입니다. 나와 이웃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나의 인생의 커다란 열매입니다. 하나되는 것, 그것은 '구원'의 차원입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박경수신부-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하나 되게 하소서’라는 가톨릭 성가가 떠오릅니다. 요한복음 17장의 내용을 담은 이 성가를 노래할 때면 예수님의 아버지께 드리는 간곡한 기도와 우리를 향한 깊은 사랑에 가슴이 젖어듭니다.
-박장근신부- 오늘 복음말씀은 예수님의 마음을 잘 담아놓았습니다.
오늘의 복음묵상(2006년)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새벽을 열며 한 인디언 추장이 나이가 들어 후계자를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추장은 부족들 중에서 가장 용감하고 덕망이 높은 세 명의 용사를 불렀지요.
우리 모두가 하나 되기를 기도합시다. 빠다킹신부
몸을 이루는 지체들
-김동하 신부- 세상을 떠나시기 전날 저녁에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위하여 줄기차게
배려하는 마음, 하나 되는 마음 -김민수 신부- ◆"신문 대신 던져주는 시간 6초. 어르신과 함께 횡단보도 건너는 시간 23초. 후배에게 커피 타주는 시간 27초. 버스 벨 대신 눌러주는 시간 4초.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시간 하루 1분이면 충분합니다." 한국방송광고공사가 최근 지상파를 통해 내보내는 공익광고 '타인에 대한 배려' 편이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다. 거창한 봉사가 아니라도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게 배려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작은 사랑의 실천으로 주위를 훈훈하게 하고 살맛 나게 만든다.
“이 사람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나궁렬신부-
-장현우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부분으로, 당신의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장면입니다.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고 계시다. "나는 이 사람들만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믿음을 가질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의지는 이미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당신의 자녀들을 보시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또한 바오로 사도께서도 밝히고 있는 것이다(에폐 1,4 참조)
사랑을 고백한 첫 마음으로 -이봉하수사- 2004년 영화배우 멜 깁슨이 제작을 하여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양승국신부- <일치의 기쁨> 대부분의 기업이나 조직이 그러하듯이 수도공동체에도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면서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핵심구성원들이 있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같은 경우 사목전반에 대한 책임자인 원장, 사목의 재정분야 및 살림을 담당하는 재정담당자, 그리고 사목의 직접적인 실무를 담당하는 실무책임자가 있습니다. 은혜롭게도 저는 이 직무를 골고루 경험해보았습니다. 때로 이빨이 잘 맞아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서로를 존중하면서 자신들의 역할을 잘 수행하던 때도 있었는데, 그 때 공동체는 한 송이 향기로운 꽃처럼 활짝 꽃피어나면서 그 향기를 주변으로 퍼트리니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반대로 서로 일치하지 않을 때 즉시 갈등이나 오해, 충돌이 발생하더군요. 서로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즉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적절한 역할분담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서로 존중하고 배려해주는 분위기가 사라질 때 즉시 불협화음이 발생하는 것을 여러 번 봐왔습니다. 그 결과 결국 피해를 보는 사람은 공동체 구성원들이요 아이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때로 ‘일치하기가 정말 힘들구나, 어쩌면 이렇게 사사건건 충돌할까, 정말 함께 일하기 힘들구나, 방법이 없겠는가’ 고민하던 끝에 결국 가장 좋은 해법은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느님께서는 참된 일치가 무엇인지 가장 좋은 모델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삼위께서는 언제나 서로 굳게 결속되어 계십니다. 늘 긴밀한 의사소통 안에 현존하십니다. 상호간의 완벽한 일치 속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성부께서는 성자께 대한 극진한 사랑을 지니고 계십니다. 성자께서는 성부의 극진한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철저한 순명을 계속하십니다. 협조자 성령께서는 미풍처럼 감미로운 사랑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인류구원사업을 계속해나가십니다. 하느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이 아닐까요? 언제나 방황하고 늘 흔들리는 나약한 우리 인간이기에, 삼위께서는 각자의 역할을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때로 관대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때로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때로 감미로운 바람처럼, 때로 장엄한 석양처럼, 때로 향기로운 꽃처럼 그렇게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매일 몸담고 살아가는 가정, 직장, 교회 공동체 안에서 늘 체험하는 바입니다만, 나와는 철저히 다른 남들과 일치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살아온 성장환경이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른 이웃들과 일치하려니 얼마나 피곤한 일이겠습니까? 달라도 철저하게 다른 남과 내가 일치에 도달하기까지 주고받는 상처는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닙니다. 상처로 인한 통증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때로 일치하자는 말만 들어도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립니다. 차라리 포기하자는 유혹도 큽니다. 그럴 때 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돌아갈 곳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성삼위께서 지니고 계신 굳센 상호결속력, 상호인내, 상호헌신, 상호배려, 상호대화의 모습을 어렵지만 다시 한 번 일치의 모델로 끌어가시길 바랍니다.
대사제의 기도 제3부 : 미래 제자들의 일치를 위해 간구함 -박상대신부-
-유광수 신부-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십시오." 예수님은 오늘 "아버지, 그들이 모두 하나게 되게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신다. 나는 수도 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공동체 생활이다. 공동체 생활만 하지 않으면 수도생활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잘 할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생활해보면 어쩌면 모두 다 그렇게 제 각각인지 참 하느님께서는 오묘하게 창조하셨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주님은 이렇듯 각기 다른 사람들을 한 공동체에서 살라고 불러주셨으니 그것 또한 신비이다. 몸을 섞는 부부도 살다보면 서로 맞지 않는다고 이혼하는 세상인데 다 나름대로 한 가닥 하겠다는 남자들이 모여서 함께 산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가족간에도 하나되기가 어려우며 같은 직장인끼리도 하나되기가 어렵다. 사랑의 공동체라는 수도 공동체 안에서도 하나된다는 것이 정말 어렵다. 같은 하느님을 믿는 교회 공동체도 하나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본당신부님과 신자들간에 하나 되지를 못하며 같은 단체 안에서도 하나 되지를 못하고 끼리끼리 지내기를 좋아한다. 왜 이렇게 하나되기가 어려운가? 서로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꽃을 보면서도 각자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느끼는 것이 다르다. 즉 우리는 저마다 자기 생각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다. 남편과 함께 있으면서도 외롭다고들 한다. 가족과 함께 있으면서도 늘 혼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외롭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영광이란 무엇인가? 영광이란 하느님의 빛나는 광채이다. 즉 하느님의 속성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하느님의 능력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하느님이 가만히 계시면 우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모른다.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가만히 있으면 그 피아니스트가 얼마나 피아노를 잘 치는지 모른다. 그가 유명한 피아니스트인지는 피아노 연주를 통해서 그의 실력이 밖으로 표출될 때야 비로서 그가 유명한 피아니스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아무리 그분이 전능하시고 사랑이시고 선하신 분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보지 않고 말로만 들어서는 하느님이 얼마나 사랑이시고 능력이 있으신 분이신 지를 알 수 없다. 하느님의 속성이 밖으로 표현될 때 비로서 사랑이신 지를 알 수 있고, 전능하신 분이시지를 알 수 있고, 선한 목자이시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 하느님의 이런 속성을 우리에게 드러내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즉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의 전능하심을,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이신 가를 그리고 아버지의 자비가 얼마나 크신 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즉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밖으로 표출하신 분이시고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아버지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될 수 있는 비결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을 우리가 실천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즉 우리가 하나되기 위해서 우리의 뜻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신 예수님처럼 철저하게 사랑을 실천하고 자비를 베풀고 봉사할 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만일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하고, 자비를 베풀고, 봉사하는 삶을 산다면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음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예수님이 보여주신 아버지의 영광을 우리가 사는 것이 예수님 안에 사는 것이며 또한 아버지 안에 사는 것이고 그래서 모두 하나가 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삶을 사는 것이 곧 예수님이 있는 곳에 함께 있는 것이며 그렇게 살 때 창조 이전부터 예수님께 주신 아버지의 영광을 우리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 내가 하나되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과 하나되기 위해서 내가 드러내야할 아버지의 영광은 무엇인가? 우리 모두가 하나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는 너무 갈라져 있다. 하나되기 위해서 모이지만 또 다시 갈라지고 있다. 지역별로 갈라지고, 성격대로 갈라지고, 이념 때문에 갈라지고 있다. 부부간이 쉽게 갈라서고, 그로 인해 부모와 자식이 갈라지고 있다. 재산 때문에 형제간이 갈라지고 뜻이 맞지 않는다고 본당신부와 신자들이 갈라진다. 어디를 보나 지금 우리 사회는 마치 모래알 처럼 흩어지고 있다. 우리가 하느님을 모르면 하느님의 생각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될 수 있는 길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를 때만이 가능하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가 하나되게 하는 은혜로운 날이 되도록 우리 함께 노력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영광을 준 이유도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이며,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 주님의 이 큰 뜻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아버지, 즉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하셨으며, 또 앞으로도 아버지의 사랑을 알리는 데 힘을 다하실 것입니다.
지난 2002년 월드컵 축구를 응원하면서 우리의 뇌리에 새겨진 표어가 있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 이제 6월 10일부터 한 달간 독일 월드컵 본선에서 또다시 외치게 될 구호를 떠올립니다. ‘대∼한∼민∼국!’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꿈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 모두가 ‘파견된 사람(선교사)’으로 살아간다면 세상은 진정 아름다울 거라는 꿈 말이지요. 그 꿈이 이루어지려면 가장 먼저 내 생각을 바꾸고, 그러고 나면 말과 행동이 바뀌고, 가정·직장·사회 그리고 세상 전체가 복음화되겠지요. 요원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지상에서 하셨던 일을 우리에게 맡기시고 우리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일 때마다 큰소리로 격려해 주시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우리를 재촉합니다. “내가 세상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스포츠에 열광하는 그 열정이 우리 삶의 열정이 될 수는 없을까요? 꿈은이루어진다고 하는데, 하늘나라의 꿈은 어떨까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 한국교회의 순교자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바쳤던 안중근 토마스, 지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와 헌신으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이분들의 그 열정을 우리 것으로 삼을 수는 없을까요?
이제 미사 중에 성체성사로 힘을 얻은 우리가 직접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로서 삶의 현장에서 우리 자신을 사랑과 헌신의 제물로 바쳐 성체성사를 이루고, 그분의 승리하는 지체가 되는 천상의 꿈을 새롭게 그려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지상 활동 중에는 아버지와 기도를 통해 만나셨음을 기억하며, 오늘도 삶에 대한 감사기도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 핵심은 바로 당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 된다는 것이 참 쉽지 않음을 우리는 일상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1독서에서 바오로는 부활논쟁 때문에 심판대에 섰습니다.
두 가지의 이견이 대립되고 있습니다.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어떤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아주 첨예하게 대립될 때가 많습니다.
니가 옳느니, 내가 옳느니 하면서 양보를 하기 보다는
서로의 마음을 다쳐버리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난관들을 잘 극복하기 위한 도움서들이 많이 나와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랜 기간 인기를 끌고 있는 것 중에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내용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보면 개인의 승리와 대인관계의 승리로 되어 있습니다.
개인의 승리라는 부분에서는 세가지 습관을 익히라고 합니다.
1. 자신의 삶을 주도하라.
2. 끝을 생각하며 시작하라
3. 소중한 것을 먼저하라.
대인관계의 승리로 익혀야 될 습관은
4. 승-승을 생각하라.
5. 먼저 이해하고 다음에 이해시켜라.
6. 시너지를 내라.
마지막으로 끊임없이 쇄신하리라는 습관을 익히면 성공하는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습관 중에서 네 번째의 습관을 오늘 제시해 주고 계십니다.
내가 이기고 너는 지는 그러한 습관이 아니라 나도 이기고 너도 이기는 습관을 익히라고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일치를 위해서 우리가 갖추어야 될 것은 바로 이 네 번째 습관을 잘 익히면
예수님의 오늘 바치신 기도를 실현하는 공동체로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네 번째 습관은 나도 이기고, 상대방도 이기는 승-승의 패러다임으로서
모든 대인관계에서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승-승이라는 것은 합의나 해결책이 양쪽 모두에게 유익하고 만족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승-승의 해결방안을 갖게 되면 모든 이해당사자들이 결정에 대해
기분 좋게 느낄 뿐만 아니라 결정된 활동 계획에도 헌신하게 됩니다.
이 같은 사고는 인생을 경쟁이 아닌 협력의 장으로 보는 데서 나옵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한 형제 자매라는 것에서
우리는 일치를 향한 화합의 장으로서는 최적의 조건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경쟁 상대가 아닌 협력자라는 것을 먼저 인지해야 되겠습니다.
승승적 사고방식은 모든 사람에게 돌아갈 만큼
모든 것이 넉넉하게 있다고 보는 패러다임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즉 한 사람의 성공이 다른 사람의 실패를 초래하거나
다른 사람의 성공기회를 박탈하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즉 우리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양하게 당신을 만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승-승의 사고는 제3의 대안이 있다고 믿는데서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하는 방식이나 너가 하는 방식이 아닌 더 나은 방식,
더 높은 차원의 방식이 있다고 믿는데서 출발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기도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일치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당신 제자만을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을 믿는 이들 모두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청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모든 일을 획일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같은 마음으로 다양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서로에게 대한 인정이 우선임을 우리는 전제해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일치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바치신 이 기도를 함께 올리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아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실 수 있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게 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일치하여 계신 예수님만이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실 수 있는 동시에 당신께서는 하느님과 일치하시는 분이시므로 우리도 그분과 일치하면서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아는 것은 구약 성경에서 생명과 연결된 중요한 주제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지혜는 붙잡는 이에게 생명의 나무”(잠언 3,18)가 된다고 하였고, “당신을 앎은 온전한 정의이고, 당신의 권능을 깨달음은 불사의 뿌리”(지혜 15,3)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자손이 하느님을 아는 예지가 없기에 망할 것이라 하고(호세 4,1.6 참조), 살고 싶으면 하느님을 찾으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고 있습니다(아모 5,4 참조).
오늘 복음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시고 또한 우리와 일치하시면서,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알려 주심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 앎은 단순히 ‘하느님에 대하여’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느님을 진정으로 아는’ 지혜로서 우리에게 참생명을 가져다주는 참된 진리입니다.
“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표적이 될 만한 것을 하나씩 가져오너라. 그러면 너희들 중 한 사람에게 추장직을 물려주겠다.”
용사들은 전력을 다해 정상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산꼭대기에서 중요한 물건들을 찾아서 다시 내려왔습니다.
우선 첫 번째 용사는 아름다운 꽃을 추장에게 바쳤습니다. 두 번째 용사는 기암괴석을 표적으로 제시했지요. 그러나 추장은 아무런 말이 없는 것이었어요. 마지막으로 세 번째 용사는 빈손으로 내려와 추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추장님, 산꼭대기에 올라보니 건너편에 기름진 평야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곳으로 거처를 옮기면 지금보다 훨씬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추장은 세 번째 용사에게 추장직을 물려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사람은 자신의 명예만 바라보며 산에 올랐으나 이 용사는 우리의 미래와 행복을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보다는 ‘나’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의 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우리를 만들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각자의 우리이다 보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안에는 상처와 아픔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들은 행복해하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계셨던 주님께서는 그 해법을 바로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욕심에서의 탈출로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이렇게 기도하시지요.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하지만 ‘십인십색’이라는 말도 있듯이, 사람마다 다 제 각각이어서 도무지 누구와 하나가 되어 산다는 것이 어렵기만 합니다. 심지어 일심동체라고 말해지는 부부관계에서도 그렇고, 피와 살을 나눈 부모와 자식 형제간에도 그렇지요. 물론 저마다 일치된 가운데 평화롭게 살고 싶어 하지만 살다 보면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는 하나 되기가 더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기대와 욕심이 높고,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방을 재려 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내가 옳고 남은 그르다는 생각도 여기에 한몫을 하지요.
진정으로 하나가 되려면 저마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과 처지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줘야 합니다. 사람은 다 제 잘난 멋에 산다는 말도 있지요. 그 제 잘난 멋을 인정해주어야 그 사람도 마음이 열리고 다른 사람의 잘난 멋을 인정해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원하시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바쳤던 기도의 내용처럼 서로 하나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요?
하느님을 부릅니다. 마지막으로는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기를
빕니다. 나아가서 믿는 이들을 씨앗으로 삼아서 세상이 아버지를 믿고
사랑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몸의 지체들은 모두 한 지체는 아니지만 더 요긴하고
덜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1코린 12,12-31). 믿는 이들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몸의 지체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다 하는 것입니다.
우선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찾아 계발하는 데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자신의 몫을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고 소중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자신이 받은 몫을 다른 지체를 위하여 써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방식대로 몸을 짜 맞추시면서
지체들이 분열하지 않고 서로 돌보기를 바라십니다.
어느 고등학교에는 학생들을 위해 매일 붕어빵을 굽는 선생님이 있다고 한다. 학생들이 밤늦게까지 공부하면 배고프니 간식으로 붕어빵을 구워 나누어 준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처지에 관심을 갖고 무언가 나누고 싶은 마음, 배려하고 싶은 선생님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짱"임에 틀림없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고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배려다. 짐 든 사람을 위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는 아이, 초보 운전자에게 양보를 해주는 사람들, 독거노인에게 도움을 주는 자원봉사자들. 바로 이들이 베푸는 배려 때문에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서로 마음을 열고 하나가 된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하나 되기를 기도하신다.
- 신동원 신부 -
오늘은 불교신자들의 가장 큰 축제요, 기쁨의 날인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그들의 믿음과 신앙 안에서 이날을 함께 축하드리며, 또한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그들이 본받아 세상 안에서 함께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 가길 저 또한 작음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어제 사랑하는 제자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신 것에 이어서 제자들의 활동으로 믿음을 가지게 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해 주십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시며, 제자들을 통해 믿음을 가지게 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한마음 한 몸이 되어 일치의 공동체를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한 형제요 자매가 되었습니다. 한분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에 알려진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살아가며, 우리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와 예수님을 알아 모시고, 그 사랑 안에서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 사랑 안에 항상 머물며 살아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일치를 이룬다는 것. 하나된 믿음의 공동체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우리는 때때로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참으로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에서 처럼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의 일치를 위해 하나된 믿음의 공동체를 위해 아버지께 기도 해 주시는 모습안에서 지금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사명’임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의 하나된 사랑의 모습은, 죽음까지도 감히 갈라 놓을 수 없는 우리 신앙 공동체의 큰 힘이며, 본질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가 된 우리는 그 사랑을 본받아 서로의 사랑으로 하나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와 모든이에게 당신 안에서 하느님과 당신이 이루신 사랑으로 하나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된 공동체는 그 어떤 어려움과 시련이 다가 오더라도 결코 좌절하거나 쓰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일생을 바치셨다.
본당 사목을 하다 보면 신자들이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상처를 받아서 신앙생활을 계속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특히 본당에서 신자들을 대표해서 봉사하는 분들이 상처를 주고받는 아픔을 겪는 경우도 있다. 이분들에게 아쉬운 점은 사회에서 봉사하는 것과 성당에서 봉사하는 것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회에서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봉사하는 경우가 많지만 성당에서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드러내는 봉사여야 한다. 자신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하느님은 작아지고, 자신을 감추면 감출수록 하느님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일생을 바치셨다. 예수님은 나를 보는 것이 아버지를 보는 것이며 당신의 모든 행동은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바로 아버지이고 아버지가 바로 예수님이셨다. 그분은 당신은 모두 감추시고 아버지를 세상에 알리시려고 노력하신 것이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셨다. 이렇게 예수님이 아버지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분은 아버지가 당신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기도로써 파악하여 그분이 원하시는 일만 하신 것이다. 결국에는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 길을 택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신을 죽이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사신 분이다. 당신을 감추면 감출수록 아버지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예수님과 아버지가 하나인 것처럼 나와 주님이 하나가 되면 나는 죽고 그분이 내 안에서 사시게 된다. 이런 신앙인이 성당에서 봉사를 하게 되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신앙 공동체에 일치를 이루는 데 공헌을 하게 된다. 내 힘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하느님이 하시면 내 안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요한 복음사가가 전하는 주님의 마지막 만찬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잘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과 용서에 대해 가르치시는 스승의 모습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만찬을 통해서는 지극한 사랑으로 그들의 벗이 되어주셨고, 또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종의 모습까지 보여주셨으며, 끝내는 그들과 언제나 함께 계시기 위해 당신의 몸과 피를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내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제자들 곁을 떠난다는 사실에 못내 아쉬워하면서, 지금껏 가르쳐 왔던 것들을 다시금 되새겨 주십니다. 또한 단 하나의 계명, 새로운 계명을 주시며, 당신께서 그들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그들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 계명을 지켜, 모두가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그들에게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남기시고, 이제는 아버지께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사실 제자들은 타볼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을 드러내신 주님을 기억하고 있었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스승을 바라보며, 군중들과 함께 환호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나라가 곧 이 땅에서 이루어지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언제나 자신들과 함께 계시리라 생각하고 있었고, 이제 드러나게 될 스승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을 걱정하시며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는 제자들보다 주님께서 오히려 더 많이 걱정하고 아파하시는 듯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현실적인 기대가 꺾이고, 희망이 사라져, 뿔뿔이 흩어졌을 때, 오늘의 이 모습을 기억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들이 온전히 하나가 되어, 당신과 아버지의 일치 안에 머물기를 바라시며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당신과 함께 있기를 바라십니다. 함께 있는 것을 뛰어 넘어, 하나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부활 시기를 마무리 하고 있는 교회가, 주님의 만찬 이야기를 다시금 들려주는 것은, 이 만찬을 통해 보여주신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여 부활을 체험한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뜻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을 체험하기 전에는 이 만찬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희망의 메시지를 듣고도 희망을 잃었지만, 부활을 체험하면서 다시금 그 순간을 기억하고 주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부활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기도하셨던 사실을 잊고 지냈지만, 부활을 체험한 우리는 다시금 주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활을 체험하기 전의 두려워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분의 부활로 말미암아 언제나 기쁘고 희망 찬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진 고통과 시련 속에서 그분의 말씀을 잊고 절망하기 보다는, 언제나 우리와 하나 되시고자 하시는 주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아멘.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할 것이 여기 있다. 예수께서는 이미 그 때 구체적으로 우리 각자를 위해 기도하셨다는 점이다. 그분은 이미 당신의 기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위하여 아버지께 기도하셨던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마음 든든한 일인가? 우리를 위해서까지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모든 사람을 향한 당신의 사랑은 당신의 피 흘리는 고통과 죽음으로써 사랑하시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아들여 우리 안에서 그 기도가 결실을 맺도록 하여야 한다. 그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도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때로는 마음 조리면서, 아프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그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 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21-22절)하신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최대의 소망이었다. 하나가 된다는것은 제도적인 일치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에서의 일치이다. 예수님께 나타난 아버지와의 일치는 사랑과 죽기까지의 순명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은 사랑안에 하나라는 것이다 그 사랑의 관계가 성령이며, 성령 안에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인 "나"와 아들인 "너" 사이의 완전한 사랑의 관계이다. 완전히 자신을 주고받는 그런 관계로 하나이다.
이제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어떠한 모습인가? 우리 각자는 모두 다르다. 모든 것에 있어 다른다. 이 다른 우리들이 하느님 안에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살고있는 그 곳에서 지금 내가 무엇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가도록 순간순간을 살아 간다면, 비록 우리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한 몸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으로 결국 나타나게 될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모두가 하느님 안에 하나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똑같이 되는 것이 일치가 아니라, 여러 모습을 통한 하나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주님 안에 살아있는 삶이 되어, 예수님의 이 마지막 기도가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은총을 구하자.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영화에 대해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영화 도입 부분의
올리브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져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울었고 저도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깊이 묵상하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던 것은, 영화 전체가 주는 강한 메시지와
더불어 무엇보다도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주 강하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도 이 영화를 DVD로 몇 번을 보면서 수도생활 안에서 내 영성생활과
공동생활을 통해 느끼는 고통뿐 아니라, 현재 교회가 겪는 많은 어려움에 대해서도
묵상하면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해 저는 이스라엘 구석구석을 순례할 기회가
있었는데 여러 성지를 순례하며 은총도 많이 받았지만 특히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와 예수님의 무덤에서 오늘의 복음을 읽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습니다. 예수 성심 성월의 첫날, 복음은 예수님의
마음뿐 아니라 교회의 마음을 깊이 깨닫게 해주며 어떠한 마음으로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줍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는
자녀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늘 한결같다’라는 것,
그리고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대사제의 기도 제2부(17,9-19)는 남아있을 제자들을 위한 간구로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남아 있는 제자들도 하나 되게 하시며, 그들을 세상의 악으로부터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그들도 진리를 통하여 거룩해지게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오늘은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20절)라는 말씀을 시작으로 남아있는 제자들이 세상에 파견됨으로써, 이들의 복음선포와 증언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될 사람들, 즉 미래의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
대사제의 기도 제3부(20-26절)의 내용은 제자들의 파견을 통하여 얻게 될 미래의 제자들 역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임을 본받아 하나가 되는 것이며,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깨달아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비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들도 제자들의 무리와 하나가 되어 같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된다. 그들이 제자가 되면 자동적으로 대사제의 기도 제2부의 기도내용을 적용 받게 된다.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도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서로 하나 되게 하시며, 이들을 세상의 악으로부터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이들을 진리를 통하여 거룩해지게 해 달라’는 대사제의 기도(제2부)를 그 날 만찬석상의 현장에서 스승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듣는 효과를 얻는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 또한 11제자와 같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세상에 파견되어 예수님을 증언할 것이며, 우리의 증언을 통하여 또 다른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믿음 공동체’의 성장원칙이다. 이 원칙은 마태오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으로 더욱 더 확실해진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세상 사람들을 모두 예수님의 제자로 삼아야 하는 목적은 모든 사람들이 아들이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기 위함이며, 아버지께서 천지창조 이전부터 아들에게 주신 그 영광을 그들도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24절)
예수님께서는 미래의 자기 교회를 내다보시면서, 모든 세기를 통하여 당신께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이들의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모두가 하나 되길 청하시는 예수님의 기도에 서명(署名)하지 못할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과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세상은 서로 상반된 체제와 이념으로 말미암아 소위 '동서의 장벽'으로 갈라져 있고, 빈부의 격차와 극단적인 가난과 낭비로 말미암아 소위 '남북의 장벽'으로 갈라져 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장벽은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일치의 충만함은 좀처럼 느껴지지 않고 있다. 고위 성직자와 일반 성직자 간, 주교와 사제, 사제들 상호 간, 사제와 신자, 그리고 신자와 신자 사이의 불신과 분열의 양상이 적지 않게 드러나고 있는 실정이다. 바닷가 모래알만큼 많은 교회들 또한 저마다 각각이다.
오늘날 예수님을 주님이요 구세주로 믿는다는 그리스도 교회는 그 안팎으로 적지 않는 분열과 다툼, 시기와 질투, 긴장과 대립, 불만과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평화와 일치를 갈망한다. 혹자는 일치(一致)를 부르짖고, 혹자는 다양성(多樣性)을 운운한다. 그러나 교회는 대사제의 아버지께 대한 애틋한 간구대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들의 일치는 주님께서 간절히 바라시는 일이며, 또 기도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이며, 교회자체의 본성적 특성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분열은 교회 본성에 대한 커다란 위반이요 범죄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십시오.>(요한 17, 20-26)
이번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평화방송을 통해 오늘의 말씀에 대한 강론이 방영되고 있다.어제 어떤 개신교 자매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신부님 말씀이 너무 좋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면서 나보고 "친구 좀 되어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물론 친구들은 많이 있지만 자기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진실한 친구가 한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 친구가 한 사람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신부님 같으면 자기 속마음을 다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친구가 되어주시면 좋겠는데 너무 바쁘셔서 어려우시겠죠? 더군다나 메스컴을 탔으니 얼마나 더 바쁘시겠느냐고 어려운 내 사정까지 말해주는 것이었다. 남편이 있지만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 마음이 병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어디 이 자매뿐인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될 수 있는가?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기도 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그 영광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되기 위해 그 영광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산다면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하신 내용이 무슨 말씀인지를 알아듣게 될 것이다.
이렇게 가정이, 사회가, 교회가 공동체가 하나되지 못하고 갈라지는 것은 우리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주신 예수님의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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