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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1승 제물'이라고 지목했던 알제리와의 경기는 전반에만 3골 실점하면서 허무하게 패배로 막을 내렸다. 전반의 무기력했던 경기력과 달리 후반에 투지 넘치고 공격적인 축구를 보면서 희망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작은 위안이 될 것이다. 승패병가지상사라는 말이 있듯 매 경기 승패가 갈리는 축구 경기에서 지는 일 또한 일상적인 일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지는가, 그리고 진 경기에서 무엇을 얻어갈 수 있는가이다. 누구보다도 패배의 아픔을 곱씹고 있을 선수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 말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새벽부터 글로서 패배의 슬픔을 달래려는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알제리전 리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1. 축구는 정신력의 스포츠이다.
사실 개인적으론 알제리전에 대한 불안감이 컸던 것이 사실이고, 그 때문에 정신력에 대한 글을 쓰려고 준비하는 중이기도 했다. 주말에 노는 데 시간 쓰느라고 작성하지 못했는데, 그 글은 이미 쓸 시기를 지난 것 같다. 대신 간략한 이야기를 여기서 풀어놓겠다. 오늘의 패배는 '정신력'에서 갈렸다. 축구에서 정신력이라는 말은 흔히 투지나 투쟁심, '지쳤을 때 한발 더 뛰게하는 것'이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축구에서 정신력이란 것이 그런 단순한 차원에만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의미의 정신력은 경기에 임하는, 그리고 상대를 대하는 자세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나보다 강한 상대를 이겨보겠다는 '투쟁심'만이 '정신력'이 아니라 나보다 약한 상대 혹은 비슷한 상대들을 얕보지 않고 그들을 인정한 채 승부에 임하는 것 역시 '정신력'이다. 약자를 앞에 두고도 상대를 인정하고 겸손한 자세로 최선을 다해 부딪혀 볼 필요가 있었다. 이번 알제리 전에서는 상대를 얼마나 인정하고 경기에 임했는지 선수들 스스로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애초에 벨기에 전보다 알제리 전이 걱정되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벨기에는 H조의 시드 배정국으로 에당 아자르를 비롯하여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선수들이 즐비한 명실상부 H조의 최강자이다. 이러한 벨기에에게는 선수들의 마음이 '도전'하는 자세를 보이기 쉽다. 우리보다 강한 상대에게 승패는 상관없이 최대한의 힘으로 맞부딪힐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알제리는 객관적인 전력에서 우리와 비슷하다. 알제리의 객관적인 전력이 가장 떨어진다고도 했다. 네티즌을 비롯한 언론들도 한국의 우세를 점쳤던 상황이다. 이것은 이겨야 된다는 압박과 동시에 우리 스스로도 느끼지 못할 '방심'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세간에 '어쨌든 알제리는 이기겠지 뭐...' 이런 반응이 일반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방심 자체는 경기가 순조롭게 풀리다보면 자신감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하지만 경기가 초반부터 꼬이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예상보다 강한 상대에게 긴장하게 되고 그것은 실제 경기력 측면에서 불안함을 노출하게 된다. 애초에 강팀을 상대로라면 약세를 면치 못했을 것을 예상했으므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데, 우리보다 아래라고 생각한 팀이 강한 모습을 보이면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러시아전 리뷰에서와 마찬가지로 리더의 부재가 또 아쉽게 다가오는 순간이기도 했다. 경기장 내에서의 리더란 지고 있는 경기에서도 희망을 느끼게 하는 존재이다. 26분 첫 실점까지 우리는 최악의 경기력을 보여주긴 했지만 무너지진 않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또 버티는 상황이었는데 이를 반전시켜 줄 이가 없었다. 쌍용은 오늘 대체적으로 무기력했고 어린 손흥민 혼자 무언가를 반전시키기엔 무리가 있었다. 주장 구자철은 부지런히 뛰긴 했지만 무너진 수비진을 컨트롤할 순 없었다. 이런 때 중원에서 무게감을 잡아줄 선수나 수비진의 대형 수비수의 존재가 아쉬웠다. 단 한골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내 조국 대한민국의 축구 대표팀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당황한 팀의 정신력을 추스를 리더가 없었다는 것 역시 전반의 졸전의 이유가 되기에 충분하다.
2. 최악의 전반전 - 그렇지만 최소한의 희망은 살렸다.
오늘 대한민국의 문제는 주로 전반에 노출되었는데 상대가 예상보다 강한 압박과 훌륭한 기술을 보여주자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으며 간단한 볼도 처리하는 데에 애를 먹었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는데 발이 제대로 움직일 리가 없다. 전반의 모습이 당황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후반의 훨씬 나아진 경기력을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수비진의 부진이 안타까웠다. 러시아 전에서 무난한 경기력을 보여주었던 이용 역시 오늘 전반 내내 상대를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황한 나머지 스스로 생각이 너무 많은 듯 한 박자 늦은 움직임으로 계속 우리의 우측에서 상대에게 돌파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용은 AFC 챔피언스리그 등 국제 경험이 있는 선수로 자신보다 빠르거나 기술력 좋은 윙어들을 상대할 경험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그였기에 더욱 그의 전반의 부진이 뼈아팠다. 더불어 평소 센터백 듀오는 훌륭한 기술을 바탕으로 한 차분한 빌드업, 수비에 있어서도 침착한 공 처리가 강점이었는데 오늘은 당황한 나머지 공격과 수비 양 측면에서 제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세 번째 골 실점 장면에서 김영권과 홍정호가 겹치는 장면은 오늘 대한민국 팀 수비진이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우측면에서 시작된 수비진의 균열은 결국 팀 전체를 잡아먹고 말았다. 여기에 정성룡의 상황 판단 미스로 너무도 허무하게 내준 두 번째 골은 결정타가 되었다.
오늘 알제리는 대한민국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전반에 너무도 맥없는 경기를 하던 팀이 후반에 아예 다른 팀이 돼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정도 실력을 가지고 전반에 3골이나 허용하고 슈팅을 0개 기록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후반과 같은 경기력을 보고 나니 오히려 전반의 부진이 너무나 속상하다.
하지만 희망은 보았다. 아니 칭찬해주고 싶은 점이 있다. 이번 월드컵에서는 유난히 강팀들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다. 스페인이 네덜란드에, 카메룬이 크로아티아에, 독일이 포르투갈에, 스위스가 프랑스에 큰 점수차로 패하고 말았다. 스위스가 경기 막판 프랑스에게 두골을 득점한 것을 제외하곤 내리 실점만 내주면서 무너졌다. 연속 실점 이후 경기를 반전시키지 못한 채 급격히 무너져 내린 팀들이 많았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우리는 달랐다. 이를 악물고 뛰었다. 경기를 뒤집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결과는 나빴지만 그들의 자세는 훌륭했다. 정신력의 또 다른 차원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때도 최선을 다해 움직이는 것이다. 아마추어 대회라도 출전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3골이 주는 압박감이 상당하다는 것을. 특히나 후반 45분에 3골을 따라붙어야 된다는 것은 참 부담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것을 시도했고 비록 실패했으나 2골을 기록하고 후반에는 상대보다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포기하지 않는 ‘정신력’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작은 희망이었다.
이제 우리에겐 사실상 한 경기가 남아있다. 콜롬비아를 이기겠다고 하는 일본을 비웃던 우리나라 역시 같은 처지가 되었다. 우리도 벨기에를 일단 이겨야 한다. 객관적으로 열세인 상태에서 벨기에를 상대로 두 골차 이상 승리를 기록해야 희망을 가질 수 있다.(알제리가 이긴다면 100골 차 승리를 해도 탈락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정신력’은 중요하다. 슬램덩크의 채치수는 산왕과의 경기를 앞두고 경기에 대한 부담감 자체를 받아들인다. 긴장하는 것 자체도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그것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강팀과의 경기이고 사실상 16강 진출이 어려운 상태에서의 경기지만, 강팀에 위축되지 않고 이길 수 있다는 투쟁심을 가진 채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세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하프타임에 반전을 만들어냈던 홍명보 감독과 대한민국 대표팀이라면 이러한 반전을 이뤄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3. 대한민국의 미래 손흥민과 지나간 과거 박주영
러시아 전에서손흥민은 몇 차례 아쉬운 슛을 날렸다. 움직임 자체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골을 기록해줘야 할 상황에서 골을 기록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명실상부 에이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오늘 후반에 대역습을 시작하게 된 데에는 손흥민의 공이 컸다. 부지런한 움직임으로 골을 노렸으며, 주변 선수들이 나쁜 움직임들을 보여주고 있는 가운데 적극적인 1대1 돌파로 팀의 사기를 올려줄 움직임을 취했다.(경기가 말리고 상대가 겁이 날 때는 1대1에서 이기기 시작하면 자신감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매우 소중한 한 골을 기록했다. 지난번에 쓴 글에서 손흥민이 알제리 전에서 골을 넣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피력했는데, 그 소망과 기대에 즉시 응답해버렸다.
그의 어린 나이와 첫 월드컵 무대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대한민국 축구의 미래라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폭발적인 드리블과 정확한 슛이 좋은 선수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강한 정신력을 지닌 선수인지는 몰랐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휘슬이 울리는 순간까지 부지런히 움직였다. 찬스를 놓칠 때마다 자기가 실수를 할 때 마다 땅을 내리치며 분해하는 모습은 그가 가진 투쟁심과 열정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기술과 신체적 능력 뿐 아니라 훌륭한 정신력까지 갖춘 혹은 갖추게 될 손흥민은 앞으로 한국이 만나게 될 상대팀에게 지속적인 위협요소가 될 것이며, 차범근-박지성의 뒤를 잇는 한국 축구의 카리스마적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손흥민은 대한민국 축구의 미래임에 분명하다. 패배에 분해서 흘리는 눈물에 감동을 느낀 팬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나도 오늘부턴 손흥민의 '빠돌이'가 되겠다.
떠오르는 스타가 있으면 이제 자리를 후배들에게 물려줘야 할 선수도 있는 법이다. 이번 월드컵으로 박주영이 그러한 선수가 되고 말았다. 사실 박주영의 발탁 자체를 이해하고 홍명보를 흔들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글도 쓴 적이 있는데, 그 말을 번복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여전히 박주영의 발탁 자체는 이해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박주영의 경기력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싶은 것이다. 러시아 전에서도 무기력한 움직임을 보여주더니 이번 알제리 전에서도 나아진 모습은 없었다. 경기 감각이 무뎌진 게 느껴질 정도로 둔한 움직임을 보여주었고 강점 중 하나였던 높이마저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신체 컨디션 자체도 좋지 않은 듯 발도 느렸고 몸싸움도 좋지 못했다. 패스 스피드는 개탄을 금치 못할 만큼 떨어져 있어서, 상대 수비를 허물기 위해서 공 전개 속도가 빨라야만 하는 높은 위치에서 오히려 팀 스피드를 떨어뜨리는 주범이었다. 연계 플레이가 장점으로 꼽히는 박주영에겐 이러한 약점을 노출시키는 것 자체가 팀 내 그의 존재가치를 깎아먹는 일이다. 상대의 압박 위치가 높을 때는 뒷공간으로 연결시키는 공격으로 상대에게 겁을 줄 필요도 있었다. 그러나 박주영은 뒷공간을 노리는 움직임을 취해주지 못했다. 이전에 뒷공간으로 침투하는 박주영의 기가막힌 움직임들을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가 경기력 및 경기감각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라고 밖엔 생각할 수가 없다. 팀 내 고참급 선수로서 팀이 무너지려 할 때 팀을 추스르는 역할 역시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전반의 3골 허용이 박주영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에게 기대했던 경기력 외적인 면에서 팀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박주영은 아스날 이적 전까지 대한민국의‘현재’였다. 박지성 이후 대형 스타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었고 경기력 또한 훌륭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때와 같지 않다. 실력 측면에서 성장은 고사하고 오히려 퇴보했고 병역 관련 문제 및 특혜 논란으로 축구팬들의 비난을 받으며 팀 내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박지성의 은퇴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이자 대한민국의 중심 선수 중 한명이었던 박주영은 이제 그 자리를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그가 다시 ‘회춘’하여 훌륭한 선수로 돌아올 수도 있고, 개인적으론 그렇게 되기를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그는 당분간 대한민국 팀에 있어 특별한 선수가 아니다. 그의 전성기 시절 능력을 회상하며 대표팀에 합류시킬만한 경기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면 이제는 초심으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손흥민의 눈부신 활약을 보며 2006년 월드컵 지역예선 당시 맹활약하던 박주영의 모습이 떠오른다. 영원한 것은 없다. 이제 피나는 노력이 따르지 않는다면'과거'의 스타가 되고 말 것이다.
4. K리그의 힘 - 대한민국 축구의 기반
개인적으로 이번 경기 대한민국의 MVP는 손흥민이라는 생각이 든다.(아마도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내겐 그보다 더 눈에 띄는 선수가 한명 있었다. 사실 어디가도 큰 키와 넓은 어깨 덕에 눈에 잘 띄는 선수긴 하다. 바로 김신욱이다. 후반에 교체 투입 이후 한국의 우세를 만들어 낸 결정적인 선수였다. 큰 신장을 이용해 머리로 떨어뜨려주는 공에서 찬스가 연속적으로 나왔다. 두 번째 골에 간접적으로 기여하면서 투입의 이유를 스스로 증명해냈다. 코너킥 상황에서 알제리 수비진이 어떻게든 김신욱을 막아보려고 여러 명이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경기는 졌지만 그래도 자그마한 위안이 되었다. 헤딩이 단순히 키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김신욱의 능력을 알 수 있다. 빠른 움직임으로 자리를 선정하고 등지는 모습도 훌륭했고 점프 자체도 훌륭했다. 수비적으로도 도움을 주었고 몸싸움에서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월드컵 득점자 중에 최저 연봉자라는 이근호 역시 교체 투입 후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빛나는 선수 중 한 명이다. 빠른 스피드와 저돌적인 드리블로 경기의 활로를 열었다. 움직임 자체도 훌륭하고 컨디션이 가장 좋아보이는 선수 중에 한명이다. 두 번째 골 과정에서도 침착하게 구자철에게 볼을 연결시켰다. 사실 보이는 것만 보면 구자철이 차 넣었다기보다 이근호가 구자철을 잘 맞춰서 골대 쪽으로 보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편 '쌍용'의 모습은 평소에 미치지 못했다. 이청용은 평소답지 않게 볼터치가 길었고 평소의 재기발랄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크로스는 번번이 상대수비에게 걸리는 모습이 보였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보였다. 결국 이근호와 교체 되었고 그 이후에 오히려 한국 팀의 경기력은 나아졌다. 기성용 역시도 뭔가 무거운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기성용의 경기력 자체는 무난했으나 그가 대한민국 팀에서 갖는 위치와 기성용이 최고의 컨디션에서 보여주는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았을 땐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는 이야기이다.(사실 본인부터가 기성용 팬이라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투쟁심 넘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평소처럼 수비에 도움을 주지도 못했다. 패스타이밍은 평소보다 다소 늦었고, 도전적인 패스들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물론 손흥민에게 기가막힌 롱패스를 연결하긴 했다.) 지고 있는 마당에서도 몸이 무거운 듯 적극적인 움직임은 보여주지 못했다.
사실 대한민국 대표팀을 둘러싸고 해외파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을 다시 문제를 삼을 필요는 없지만, 아무래도 해외파를 우대하는 팬들의 분위기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고, 현재도 해외파들이 팀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시즌을 마치고 온 유럽파 선수들은 아무래도 몸이 최고의 상태는 아닐 수밖에 없다. 반면 시즌이 한창인 중에 월드컵에 출전하게 된 K리그 선수들은 몸이 상대적으로 좋다. 컨디션이 나쁜 해외파보다는 컨디션이 좋은 K리거들이 훨씬 좋은 경기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오늘 경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해외파들을 중심으로 출전한 전반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후반에 K리거들이 투입되자마자 반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다시 해외파와 K리거들의 싸움을 부추기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해외에서 뛰는 선수들뿐만 아니라 K리그가 대한민국 축구의 기반이라는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것이다. 해외파가 부진할 때 이를 보완할 수도 있는 것이며, 또한 훌륭한 경기력으로 해외파들에게 자극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K리거들 역시 해외파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다 오늘 보여주었듯 K리그 출신 선수들 또한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지금은 해외파라는 대접을 받고는 있지만 기성용, 구자철, 이청용, 홍정호 등도 K리그 출신이다. 해외리그만 찾아볼 것이 아니라 머리로 알제리의 장신 수비수 밭을 쑥대밭으로 만든 ‘시누크’ 김신욱과 빠른 발로 상대를 교란하던 육군 병장 이근호의 경기는 국가대표 경기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K리그에서 지켜볼 수 있다. 앞으로 월드컵 때에만 축구에 대한 관심을 쏟을 것이 아니라, K리그가 더 많은 사랑을 받아 더욱 훌륭한 리그가 되고 또 선수들은 더 훌륭한 선수로 성장해 나갈 수 있길 바란다. 그것이 대한민국 축구를 더욱 강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4. 홍명보의 용병술
홍명보의 용병술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우선 그는 상황판단을 비교적 정확하게 내리는 감독인 것으로 보인다. 새롭게 투입한 선수들이 결과를 내는 경우가 많다. 이번 경기 역시 김신욱과 이근호 투입은 팀에 활기를 불어 넣을 수 있도록 했다. 경기 중에 필요한 것을 즉각 인지하고 교체를 단행하기란 쉽지 않다. 필요한 선수들이 적시에 들어가서 한 건씩 해준다는 것은 홍명보 감독이 경기를 정확히 읽어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최근의 문제는 선발 명단에 늘 크게 변화가 없는 상태로 임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진한 선수들을 제외하지 않은 것이다. 늘 선발명단에 변화를 주어 팀의 일관성을 떨어뜨리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다. 출전 선수 한 명이 바뀜으로 해서 팀 전체가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은 오늘 교체 투입으로 경기가 풀렸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즉 교체 투입으로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선발로 나서는 선수가 바뀌었을 때도 팀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선수를 다르게 기용하여 팀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좋다 혹은 나쁘다의 개념을 포함하지 않는 사항이다. 감독이 어떤 선수를 기용하는가에 따라서 선발 명단에 변화를 주는 것에서 긍정적인 영향도, 부정적인 영향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홍명보는 2012년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선발명단에 꽤 잦은 변화를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합 당일까지도 선발 명단을 공개하지 않은 채로 팀 내의 경쟁심리와 긴장감을 유지하여 팀의 전체적인 향상을 노렸다고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번 대표팀에서의 경쟁은 사라졌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팀 내에서 선발 명단을 숨기는 것으로 긴장감을 유지할 수도 있겠지만, 선발 선수들에 변화가 없다면 선수들도 어떤 선수가 선발로 뛰게 될지 느끼게 되고 말 것이다. 선발 선수와 후보 선수로 나눠진 것은 팀 분위기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 힘들 것이다.
특히 부진한 경기력에도 항상 선발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박주영은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평가전에서의 부진에 더하여, 예선 첫 경기 러시아전에서도 박주영 교체 이후 대한민국의 공격이 살아났다는 점을 지켜보면 그를 굳이 이번 2차전에서 선발로 내세울 필요가 있었나 싶다. 사실 이것은 지나간 일에 대한 평가일 뿐이고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준비하느냐가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된다. 마지막 경기에서의 선발명단 변화는 홍명보 감독에게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었다고 보인다. 남은 3번째 경기는 H조의 최강인 벨기에와의 경기이다. 벨기에가 강팀이라고 해서 또다시 안정적인 선택을 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자력 진출이 이미 좌절된 상태이다. 벨기에와 같은 강팀과의 경기에서 이전에 선택해서 실패했던 패를 또다시 들고 나설 필요는 없다. 오늘 알제리전의 패배때문에 다음 경기에서 패한다고 해도 돌아올 비난은 크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16강 진출의 분수령이 된 것은 오늘의 경기였으며, 드라마같은 반전을 바라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부담을 줄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고민해서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다소 도박같이 느껴지거나 뉴페이스가 등장한다고 해도 홍명보 감독이 비난 받진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줬지만 국가대표팀에서는 아직 기회를 잡지 못한 선수들의 출전을 기대해본다. 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팀은 절망적인 결과를 맞으며 탈락했지만, 이동국의 혜성 같은 등장으로 미래를 기약하며 설렜던 것처럼 새로운 기대주가 월드컵 무대에 나타날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지막 경기에서만큼은 다소 파격적이더라도 새로운 시도를 해보길 기대한다.
5. 정성룡 - 팀의 수호신이 그 힘을 잃다.
이번 경기 패배의 원흉으로 정성룡을 뽑고 싶은 것은 아니다. 정성룡을 탓하기엔 수비라인에서 총체적인 문제점을 노출했기 때문이다. 결정적 실수로 허용한 두 번째 골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골 중에 막아야만 하는 것인데 실수한 장면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역설적으로 정성룡이 갖고 있는 한계라고도 할 수 있다. 팀을 위기 상황에서 살리는 것은 슈퍼 세이브이다. 우리나라 경기가 끝난 후 벌어진 미국-포르투갈 전에서 슈퍼세이브를 연이어 보여주는 미국의 하워드 골키퍼를 보면서 우리의 골키퍼가 생각났던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네티즌들이 비난하는 것처럼 정성룡이 형편 없는 골키퍼는 아니다. 다만 안정적이고 무난한 경기력도 괜찮지만 오늘과 같이 팀이 밀리는 상황에선 슈퍼세이브로 팀의 분위기를 추스르고 반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경기력의 열세를 뒤집는 경기를 보면 대부분 골키퍼들이 펄펄 날아다니는 경기가 많다. 정성룡이 보여준 플레이는 지극히 평범한 골키퍼의 모습이었다. 16강 또 그 이상의 성적을 노리고 있던 대한민국 팀에게 어울리는 플레이는 아니었다. 오늘 맥없이 허용한 세 번의 득점 찬스에서 한번이라도 막아줬더라면 경기 분위기는 반전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의 책임은 첫 골 실점 이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서 실수를 연발한 센터백 듀오에게도 있다. 그렇지만 골키퍼라는 특수 포지션이 갖는 중요성 그리고 그가 현재 대표팀 내에서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고참급 선수라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슈퍼세이브로 분위기를 반전시키지 못한 것 그리고 센터백 듀오를 다잡지 못한 것도 큰 아쉬움이다.
사실 김승규라는 제 2옵션이 정성룡보다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마지막 경기에서는 김승규의 출전에 힘을 실어 주고 싶다. 정성룡이 지난 두 경기에서 썩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마지막 경기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김승규의 출전은 그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의 미래 대표팀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월드컵 경기에서 장갑을 끼고 선발로 나서는 것은 생각보다 큰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 일이다. 현재까지 정성룡이 기대에는 못 미치더라도 적당한 수준의 경기력을 유지했을지 모르지만 4년 후에도 훌륭한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란 보장은 없다. 어린 나이지만 빠른 반사 신경으로 슈퍼세이브에 강한 김승규가 4년 후엔 새로운 수문장이 될 가능성은 크다. 확실히 그는 차기 주전 경쟁에서 가장 앞서 있다. 마지막 경기에선 그의 출전으로 새로운 주전 골키퍼로서의 잠재력을 시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 경기적 측면에서 고려해봐도 그의 출전은 다른 선수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될 가능성도 많다. 슈퍼세이브를 종종 보여주기에 수비선수들의 부담을 더는 한편, 정성룡과 다른 스타일의 젊은 패기 넘치는 골키퍼의 투입은 수비진과 팀 전반에 적당한 수준의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김영권, 홍정호는 김승규보다 나이도 많고 대표팀 경력도 오래된 선배들이다. 여지까지 정성룡이란 선배에게 의지했다면, 김승규의 투입에 따라 선배로서 주도적인 위치에서 후배를 이끌어 주려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마음가짐의 변화는 경기력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마치며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다시 한 번 경기를 한다면 알제리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월드컵 2번째 경기는 막을 내렸다. 잘못한 것처럼 보이는 점들도 많고 우리의 맘에 들지 않는 점도 많다. 하지만 축구란 인생사와 같다. 나도 재수까지 하고 친 수능 시험에서 나도 모르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평소 가장 잘하던 과목인 세계지리 시험을 터무니없이 망쳤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자각하지 못했고 결과는 처참했다. 내가 스스로 분석하기엔 그 날 1, 2번 문제가 너무 어려웠다는 것이다. 잘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면서 초반부터 문제가 어렵자 당황해서 결국은 허둥대다가 평소와 같은 결과를 내지 못한 것이다. 다행히 나는 우리나라와 달리 남은 시험들은 잘 처리해서 성적 상으론 어느 정도 수습을 하는 행운을 가졌다. 그리고 그 때 한 과목을 잘 치지 못한 덕에 지금은 더 나은 인생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운이 없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사실 더 확실히 준비를 못한 우리 스스로의 잘못이다.
하지만 오늘의 패배가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돌아올지는 모르는 일이다. 억울하고 또 속상한 결과지만 우리는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더 나은 경기력을 앞으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남은 한 경기에서 작은 희망을 위해 최선을 다해 경기하는 일만이 남아있다. 지나간 경기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가 핵심이다. 98년에 5:0으로 네덜란드에 참패했던 우리나라는 4년후 4강 신화를 이뤄냈다. 98년 대표선수들 중에 많은 이들이 2002년까지 주축으로 활동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번 패배가 약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팀은 특히나 젊은 나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4년 후엔 많은 선수들이 전성기에 올랐을 시기기도 하다. 축구팬들도 오늘의 부끄러운 패배는 잊지 않되 그것에 연연해하며 비난의 수위를 높여 마치 축구대표팀을 역적처럼 대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단지 축구 게임에서 한 번 패배한 것뿐이다. 우리네 인생사를 보면 항상 이기는 것이 좋은 것만도 아니다. 패배는 나름대로 배울 점이 있으며, 우리가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사실 일반인인 우리의 인생에서 월드컵 한 경기가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다. 길어야 월드컵 마칠 때까지 우울해하고 나면 4년 후의 월드컵을 기대하며 또 설레기 마련이다. 대한민국의 축구팬으로서 적절한 비판과 질타가 따라야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렇지만 화딱지가 난다고 일시적 기분에 분노할 필요는 없다. 건설적인 비판은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난 후, 대한민국의 2014 브라질 월드컵이 끝나고 해도 늦지 않다. 아직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응원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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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무엇보다 필자님도 상심이 매우 크실텐데 이렇게 리뷰를 쓰셨다는 점에 박수를 보내고 싶네요. 저도 때때로 글을 올리고 있지만 ... 이번 경기는 칼럼은 커녕 정말 입안에서 욕만 맴놀더군요. 이번에 찾은 한줌의 희망이 앞으로 한국축구의 미래를 밝게 만드는 시발점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ㅠ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글은 나름대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네요. 앞으로는 좀 더 나아진 모습도 기대해 봅니다. 이번 경기에서의 패배가 앞으로 약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매우 좋은 리뷰이네요
특히 박주영선수와 손흥민선수 언급하신 부분이 매우 공감이 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