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투에 든 입학금 3만원, 그리고 편지 한통
기차 안에서 엉엉 소리내 울어…내 인생에서 가장 감격스러웠던 순간
이 글은 남문우(80) 전 검사가 쓴 자서전 ‘나의 삶 이야기’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는 “내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자식들만은 내가 많은 은인들 도움으로 인생을 살았다는 걸 알아야 할 것 같아 책을 썼다”고 했다. 비매품으로 1000부를 찍었는데, “가난에도 좌절하지 않은 인생 이야기가 감동적이다. 혼자 보기 아깝다”는 지인들의 권유에 최근 두 차례에 걸쳐 각각 500부씩을 더 찍었다. 그의 동의를 받아 책 내용을 발췌해 연재한다.
<편집자 주>
앞에서 나는 예산중학교와 예산농업고등학교의 특대생 제도와 예산중학교의 교비생제도 덕에 무사히 고등학교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문제는 대학을 진학할 수 있느냐였다. 당시는 한국전쟁 직후라 대학에 진학하면 병역연기 특혜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생들은 너나없이 대학에 들어가려고 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농업고등학교였지만 농업과목은 소홀히 하고 주로 대학입학 시험 준비에 주력하였다. 나도 그 덕분에 대학입학 시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훌륭한 법조인이 되겠다고 다짐했고, 만약 대학을 간다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연습장이나 맨땅 위에 ‘국립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합격’이라는 낙서를 수없이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집안 형편상 누구 도움 없이 대학을 진학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고민하던 중 1955년 1월 무렵 국립 체신대학 행정과 학생을 국비생으로 특차 모집한다는 신문공고를 보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구나 하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행정과에 들어가면 법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체신대 입학원서를 써서 상경했다. 서울에 가면서, 평소 꿈이었던 서울법대 입학시험이라도 한 번 치러 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서울법대 입학원서도 함께 써가지고 갔다.
다행히 체신대학에 합격했다. 그런데 국비생으로 모든 것이 무료라던 신문공고와는 달리 입학금이 무려 6만원이나 되었다. 입학금 납부 날짜도 서울법대 합격자 발표날짜보다 빨랐다. 나는 다시 절망감에 빠져 고민하던 중 서울법대 시험을 보고 나서 우연히 서울법대 정문 앞에서 서울법대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유일한 고교 선배인 김진우 선배(헌법재판관 역임하고 변호사로 계심)를 만나 체신대와 서울법대 시험 본 이야기를 하였다.
그 선배는 “왜 체신대학에 가려고 하나. 서울법대만 합격하면 얼마든지 고학할 길이 열리니 서울법대만 합격하라”고 했다. 선배 말을 듣고, 그런 줄 알았으면 서울법대 시험을 좀 더 열심히 잘 볼 걸 하는 후회를 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서울법대에 불합격되면 체신대학에라도 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체신대학 학장실로 찾아가 항의했다. “국비생 모집한다고 해서 시험을 보아 합격했는데 입학금을 6만원 씩이나 내라면 어떻게 합니까.”
학장은 나를 가상하게 생각했던지 입학성적표를 확인하고는 말을 건넸다. “학생은 3등으로 합격한 걸 보니 공부 잘했군. 학교에서 입학금 면제는 안 되고 기일을 연기해 줄 것이니 언제까지 낼 수 있나?” 나는 “시골에 내려가 땅을 팔아야 되니 두 달만 주십시오”라고 요청하고 학장실을 나왔다.
그런데 얼마 뒤 서울법대 합격 소식이 들려왔다. 꿈을 이뤘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입학금도 체신대학의 절반도 안 되는 2만5000원이었다. 나는 입학금이 마련된다면 서울법대에 입학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합격의 기쁨도 잠시, 입학금을 마련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남들은 너도나도 대학을 간다는데 명색이 중·고등학교 6년간 전체 수석을 하고도 단지 돈이 없다는 이유로 대학입학을 포기해야 하는 세상! 세상이 너무 원망스러웠고, 패배감과 절망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커져갔다.
어머니는 땅이라도 팔아서 대학에 가라고 하셨다. 하지만 일곱 남매의 장남인 내가 가족들의 식량줄인 논을 팔아 대학에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에겐 “도와주는 분이 계셔서 입학금은 이미 준비되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거짓말을 했다.
마음이 심란해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었다. 친구 집을 전전하다가 입학금 납부 마감 이틀 전에 자포자기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절망감에 혼자 흐느껴 울면서도 앞으로 대학을 포기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동생들을 가르치고 틈틈이 주경야독으로 공부해 목표인 고등고시에 합격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중 문득 서울법대에 합격한 뒤 인사차 교장실에 들렀을 때 교장 선생님께서 “입학금은 어떻게 준비되었느냐”고 걱정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교장 선생님께 하소연이라도 한 번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종건 교장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교장 선생님, 선생님께서 걱정하신 대로 내일 모레가 입학금 등록마감인데 아직 준비를 못하여 입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시면 꼭 성공하여 은혜를 갚겠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쓰면서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같은 학교 2학년 학생이던 동생 선우에게 편지를 건넸다. “이 편지를 가지고 예산에 가서 교장 선생님께 드리고 내일 아침 서울 가는 기차 편으로 와라. 나는 도고온천역에 나가 서울 갈 차표를 사 가지고 플랫폼에서 기다릴 테니 만일 빈손으로 오면 그대로 내리고 돈을 주시면 나에게 차에 타라고 말해라”고 이르고 동생을 예산으로 보냈다. 당시 장항선은 예산, 신례원, 도고를 거쳐 서울로 가는 노선이었다.
동생을 예산으로 보낸 후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에 어머님께 “돈이 준비되어 서울로 등록금 내러간다”고 말씀드리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아침 기차시간에 맞춰 도고역에 가서 기차표를 산 뒤 서울행 기차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당시는 전화도 드물었고, 서울 가는 교통수단도 오직 하루 한 번 운행하는 기차뿐이었다. 더욱이 입학 시즌이라 서울 가는 사람이 많아 출입문은 말할 것도 없고, 기차 지붕 위까지 매달려 가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편집자 주>
앞에서 나는 예산중학교와 예산농업고등학교의 특대생 제도와 예산중학교의 교비생제도 덕에 무사히 고등학교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문제는 대학을 진학할 수 있느냐였다. 당시는 한국전쟁 직후라 대학에 진학하면 병역연기 특혜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생들은 너나없이 대학에 들어가려고 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농업고등학교였지만 농업과목은 소홀히 하고 주로 대학입학 시험 준비에 주력하였다. 나도 그 덕분에 대학입학 시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훌륭한 법조인이 되겠다고 다짐했고, 만약 대학을 간다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연습장이나 맨땅 위에 ‘국립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합격’이라는 낙서를 수없이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집안 형편상 누구 도움 없이 대학을 진학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고민하던 중 1955년 1월 무렵 국립 체신대학 행정과 학생을 국비생으로 특차 모집한다는 신문공고를 보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구나 하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행정과에 들어가면 법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체신대 입학원서를 써서 상경했다. 서울에 가면서, 평소 꿈이었던 서울법대 입학시험이라도 한 번 치러 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서울법대 입학원서도 함께 써가지고 갔다.
다행히 체신대학에 합격했다. 그런데 국비생으로 모든 것이 무료라던 신문공고와는 달리 입학금이 무려 6만원이나 되었다. 입학금 납부 날짜도 서울법대 합격자 발표날짜보다 빨랐다. 나는 다시 절망감에 빠져 고민하던 중 서울법대 시험을 보고 나서 우연히 서울법대 정문 앞에서 서울법대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유일한 고교 선배인 김진우 선배(헌법재판관 역임하고 변호사로 계심)를 만나 체신대와 서울법대 시험 본 이야기를 하였다.
그 선배는 “왜 체신대학에 가려고 하나. 서울법대만 합격하면 얼마든지 고학할 길이 열리니 서울법대만 합격하라”고 했다. 선배 말을 듣고, 그런 줄 알았으면 서울법대 시험을 좀 더 열심히 잘 볼 걸 하는 후회를 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서울법대에 불합격되면 체신대학에라도 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체신대학 학장실로 찾아가 항의했다. “국비생 모집한다고 해서 시험을 보아 합격했는데 입학금을 6만원 씩이나 내라면 어떻게 합니까.”
학장은 나를 가상하게 생각했던지 입학성적표를 확인하고는 말을 건넸다. “학생은 3등으로 합격한 걸 보니 공부 잘했군. 학교에서 입학금 면제는 안 되고 기일을 연기해 줄 것이니 언제까지 낼 수 있나?” 나는 “시골에 내려가 땅을 팔아야 되니 두 달만 주십시오”라고 요청하고 학장실을 나왔다.
그런데 얼마 뒤 서울법대 합격 소식이 들려왔다. 꿈을 이뤘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입학금도 체신대학의 절반도 안 되는 2만5000원이었다. 나는 입학금이 마련된다면 서울법대에 입학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합격의 기쁨도 잠시, 입학금을 마련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남들은 너도나도 대학을 간다는데 명색이 중·고등학교 6년간 전체 수석을 하고도 단지 돈이 없다는 이유로 대학입학을 포기해야 하는 세상! 세상이 너무 원망스러웠고, 패배감과 절망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커져갔다.
어머니는 땅이라도 팔아서 대학에 가라고 하셨다. 하지만 일곱 남매의 장남인 내가 가족들의 식량줄인 논을 팔아 대학에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에겐 “도와주는 분이 계셔서 입학금은 이미 준비되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거짓말을 했다.
마음이 심란해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었다. 친구 집을 전전하다가 입학금 납부 마감 이틀 전에 자포자기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절망감에 혼자 흐느껴 울면서도 앞으로 대학을 포기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동생들을 가르치고 틈틈이 주경야독으로 공부해 목표인 고등고시에 합격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중 문득 서울법대에 합격한 뒤 인사차 교장실에 들렀을 때 교장 선생님께서 “입학금은 어떻게 준비되었느냐”고 걱정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교장 선생님께 하소연이라도 한 번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종건 교장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교장 선생님, 선생님께서 걱정하신 대로 내일 모레가 입학금 등록마감인데 아직 준비를 못하여 입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시면 꼭 성공하여 은혜를 갚겠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쓰면서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같은 학교 2학년 학생이던 동생 선우에게 편지를 건넸다. “이 편지를 가지고 예산에 가서 교장 선생님께 드리고 내일 아침 서울 가는 기차 편으로 와라. 나는 도고온천역에 나가 서울 갈 차표를 사 가지고 플랫폼에서 기다릴 테니 만일 빈손으로 오면 그대로 내리고 돈을 주시면 나에게 차에 타라고 말해라”고 이르고 동생을 예산으로 보냈다. 당시 장항선은 예산, 신례원, 도고를 거쳐 서울로 가는 노선이었다.
동생을 예산으로 보낸 후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에 어머님께 “돈이 준비되어 서울로 등록금 내러간다”고 말씀드리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아침 기차시간에 맞춰 도고역에 가서 기차표를 산 뒤 서울행 기차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당시는 전화도 드물었고, 서울 가는 교통수단도 오직 하루 한 번 운행하는 기차뿐이었다. 더욱이 입학 시즌이라 서울 가는 사람이 많아 출입문은 말할 것도 없고, 기차 지붕 위까지 매달려 가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 일러스트 김성규 기자
저 멀리 기차가 신례원 쪽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도고온천역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것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내 동생은 그 기차에 타고 있을 것이고, 그가 돈을 가지고 오느냐 빈손으로 오느냐에 따라 내가 대학에 등록할 수 있느냐 포기하느냐가 결정될 운명이었다.
나는 초조했다. 마음 속으론 만약 뜻대로 안 되더라도 운명이라 생각하고 현실을 받아들이자고 다짐했다. 기차가 역에 도착하자마자 동생이 꽉 찬 승객들을 비집고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형 빨리 타요!” 동생은 큰소리로 외치고는 두툼한 봉투를 건네 주었다. 나는 기차에 올라탔다. 봉투엔 3만원과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
교장 선생님이 쓴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남군이 입학금을 어떻게 마련할지 걱정을 많이 했는데 남군의 편지를 받고 야간에 학교 운영위원회를 긴급 소집하여 남군의 등록금을 도와주기로 결의했네. 적은 돈이지만 삼만원을 동생 편에 보내니 열심히 공부하여 성공하기 바라네. 학교 형편상 더 이상은 도움을 줄 수 없으니 앞으로 고학을 해서라도 꼭 학교를 마치고 성공하게.’
너무 고맙고 감격스러웠다. 기차 안에서 나는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이제 여든을 넘게 살았지만 내 인생에서 그 때처럼 감격스런 순간은 없었다. 나는 교장 선생님께서 주신 돈으로 서울에 올라가 그 다음날(등록마감일) 등록금을 내고 서울법대생이 되었다. 그때 선생님 도움이 아니었다면 등록금 마감 일자를 넘겨 서울법대를 다닐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선생님 당부대로 가정교사, 신문배달, 외판원, 책장사, 막노동 등을 하면서 고학으로 서울법대를 졸업하였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선생님 은혜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하지만 일곱 남매와 어려운 세상을 살다 보니 선생님의 크나큰 은혜에 만분의 일도 보답을 못하였다. 겨우 1년에 한 두 번 찾아 뵙거나 학교 후배들에게 장학금 몇 푼 쥐어 준 것이 고작이었다.
2004년 6월 18일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들었다. 선생님 영전에서 그동안 잘 모시지 못한 죄책감과 선생님을 잃은 슬픔으로 한없이 울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전화나 편지로 못난 제자가 잘 되기만을 바라시면서 항상 격려해 주셨던 선생님이었다. 이제 선생님은 떠나시고 그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어 한없는 후회와 그리움만 남아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