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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31일 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성모 마리아께서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한 일을 기념하는 오늘 축일은 루카 복음(1,39-56)의 기록에 따라 생겨났다. 이 축일은 13세기 중엽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어 14세기 말부터 로마 전례력에 도입되었다. 5월 31일을 축일로 정한 것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6월 24일) 사이에 기념하기 위해서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루가 1,39-56)
Blessed are you who believed
that what was spoken to you by the Lord
would be fulfilled."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용서하셨다. 그들에게 내리시려던 벌을 거두시고,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주님의 크신 자비다. 그러니 예루살렘은 기뻐해야 한다. 두려움을 떨치고 찬미의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이제 주님께서는 영원히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실 것이다(제1독서). 마리아께서는 엘리사벳을 방문하신다. 기적을 체험한 두 여인의 만남이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이끄심으로 ‘주님의 어머니’께서 오셨다고 외친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크신 은총에 감사드리신다. 그분의 위대하심과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노래하신다. 바로 ‘성모의 노래’(마니피캇)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중학생 때의 일입니다. 역사 시간이었는데, 공부하기가 싫었던 아이들이 엉뚱한 질문을 했습니다. “지나간 역사를 배워서 뭘 합니까?” 대충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얼마나 고생하며 오늘을 이루었는가! 이것을 배우는 것이 역사다.’
고통 없이 이루어진 문화는 없습니다. 찬란한 문화일수록 처절한 투쟁의 역사를 안고 있습니다. 성숙한 인생 또한 아픔을 전제로 합니다. 좌절을 만나고 극복해 보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만의 시련이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엘리사벳을 방문하십니다. 결코 놀러 가신 것이 아닙니다. 기적의 아이를 가진 ‘중압감’을 나누러 가신 것입니다. 두 분이 내리신 결론이 ‘감사와 찬양’입니다. 그 길을 통해 두 분은 보통의 여인에서 성경의 ‘위대한 여인’으로 변화되셨습니다. ‘성모의 노래’는 초대 교회 교우들이 ‘외워서’ 불렀던 찬미가입니다.
어머니는 누구나 위대합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상처와 아픔을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끝난 것이 아닙니다. 갈수록 세상은 ‘능력 있는 어머니’를 찾고 있습니다. 정작 계셔야 할 분은 ‘신심 깊은 어머니’이건만, ‘똑똑한 어머니’만 바라고 있습니다. ‘환상’을 깨고 넘어서야 합니다.
★★★ 마리아께서는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십니다. 석 달가량 그녀와 함께 머무시며 말씀을 나누십니다. 엘리사벳 역시 기적의 아이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께서는 예수님의 잉태를 아시게 된 순간부터 엘리사벳을 떠올리셨을 것입니다. 그녀와 함께 벅찬 마음을 나누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두 분의 대화는 감사와 찬양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해 주는 ‘마리아의 노래’가 그것입니다. 특별히 비천한 이를 높이신 하느님을 찬양하고 계십니다. 사실 두 분은 무명의 시골 여인입니다. 궁중의 여인도 부잣집의 따님도 아닙니다. 신분과 지위에서 그저 보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의 위대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기적으로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든 어머니가 된다는 사실은 위대한 일입니다. 고귀한 신분으로 바뀌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은 일은 그 신분에 어울리게 사는 일입니다. 그것은 성모님처럼 주님의 위대하심을 알리고 노래하는 일입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갈수록 ‘능력 있는 어머니’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분은 ‘거룩한 어머니’입니다. 똑똑하고 재주 많은 어머니보다 성실하고 신심 깊은 어머니가 더 필요한 시대입니다.
마리아, 마리아 !
- 김혜경-
임신을 해본 사람이라면 임신 초기가 얼마나 예민하고 부담스럽고 힘든 시기인지 잘 알 것이다. 몸이 새 생명을 잉태하면서 원래의 습관에서 벗어나 새 생명을 중심으로 전면 개편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몇십 년간 해오던 습관을 버리고 의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달라져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입덧 · 변비 · 메스꺼움 · 울렁증 · 신경과민, 심하면 우울증까지. 이런 모든 것은 몸이 충격을 받고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임신 초기의 모든 증상이 마리아한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 고충이 여간 힘들지 않았을 텐데, 그 몸으로 나이 든 사촌 언니를 생각해 먼 길을 떠난다. 어쩌면 힘든 경험을 하고 있기에 나이 들어 임신한 언니가 더 생각났을 수도, 그래서 지체하지 않고 떠났을 수도 있다. 아무튼 자기도 힘든 상황에서 마리아는 언니 집에 석 달가량이나 머물렀다고 한다. 열흘 있기도 힘들 텐데 석 달씩이나 사촌 언니의 가사 도우미로 있었단다.
여자가 임신을 하면 가장 편한 곳을 찾아 안정을 취하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친정어머니를 찾고, 어떤 사람은 집에만 머무르기도 한다. 그런데 마리아는 자처해서 불편한 곳을 찾아 나선다. 그것도 자기가 안정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봉사하려고 말이다. 전체 임신 기간에서 가장 민감한 시기를 포함하는 거의 삼분의 일을 봉사에 매진했다는 뜻이다. 그동안 봉사에 인색해 이 핑계 저 핑계로 미꾸라지 빠져나가듯 했던 내게 오늘 마리아는 어떤 상황에서도 봉사는 할 수 있는 것이라며 내 입을 틀어막고 찬물을 끼얹고 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양승국신부-
<내년에는 꼭>
오늘 복음은 교회 안에서 가장 대표적인 찬미가로 손꼽히는 두 노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모님을 환영하는 사촌 엘리사벳의 찬가는 우리가 눈만 뜨면 습관처럼 바치는 기도, 때로 고통이나 위험 중에, 때로 기쁨과 환희에 가득 차서 바치는 "성모송"에 그대로 인용되고 있지요.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에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도다."
진심으로 환영하는 엘리사벳의 노래를 들은 성모님의 응답이 그 유명한 마니피캇(성모의 노래)입니다. 매일 저녁 세상 곳곳의 셀 수도 없이 많은 수도원이나 수녀원, 신학교나 사제관에서 불려지고 있는 아름다운 노래가 성모의 노래입니다.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 무렵, 형제들이 함께 모여 고운 선율로 "성모의 노래"를 부를 때의 감동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성모의 노래는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한 평생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잘 제시하고 있습니다. 마니피캇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 여행중인 우리들을 위한 가장 뛰어난 가이드이자 가장 간결하고 탁월한 교리서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보십시오. 성모님의 노래에는 성모님께서 한평생 간직하셨던 참신앙인의 자세가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단순함과 기쁨, 겸손과 감사, 의탁, 하느님께 대한 신뢰...신앙인으로서 지녀야할 모든 바람직한 자세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에 우리는 갖은 인간적인 고통과 불행을 영적인 마음으로 잘 극복해내고 오히려 비약적 신앙의 성장을 일궈낸 두 위대한 신앙의 선조를 기억합니다.
신앙의 눈이 아니라 인간적인 눈으로만 바라봤을 때 두 사람이 보여준 만남은 참으로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상황,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모습, 너무도 웃기는 한편의 개그콘서트였습니다.
16세 밖에 되지 않는 나이에 이미 미혼모가 되어버린 마리아는 자신에게 다가온 너무도 난감한 사건, 너무도 급작스런 일 앞에 어떻게 손도 써볼 수 없어 황당해 합니다. 마음이 너무도 혼란스러워졌겠지요. 사람들의 눈도 피할 겸, 상황을 수습할 겸해서 마리아는 사촌 엘리서벳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마리아를 맞이한 엘리사벳의 모습은 더 가관이었습니다. 엘리사벳과 즈가리야는 나름대로 자타가 인정하는 열심한 신앙인 부부였지만 결정적인 약점을 한가지 지니고 있었는데, 후손이 없다는 것이었지요.
이 부부는 당시 하느님 사랑과 축복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이었던 후손이 없었습니다. 당시 후손이 없다는 것처럼 서글픈 일은 다시 또 없었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내년에는 꼭..."하던 게 벌써 50년째였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극도의 서운함, 아쉬움, 안타까움을 접고 엘리사벳 부부는 마침내 후손을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 나이에 무슨...그냥 이대로 살다 죽지"하는 순간, 엘리사벳 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아기를 가진지 6개월이나 지난 60대 할머니 엘리사벳이 16세 미혼모를 향해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미혼모 마리아는 그 이상한 할머니의 노래에 응답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두 여인의 상봉 장면을 바라본다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너무도 불행한 일이고, 창피스런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하신 만남이었기에 그 모든 인간적인 불행과 오해와 고통과 두려움은 행복과 이해와, 기쁨과 평화로 변화됩니다.
아무리 비참하고 불행한 한 인간의 삶일지라도 하느님께서 개입하시면 그 정반대의 삶이 됩니다. 천국의 삶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하루 하느님으로 인해 행복한 삶, 하느님으로 인해 기꺼이 견디는 삶, 하느님으로 인해 이겨내는 모든 삶의 십자가를 기쁘게 직면하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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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회사 신입사원 면접 시험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응시한 수험생 나름대로 추천장을 하나씩 들고 의기양양하게 면접에 임했다고 합니다. 교수님의 추천장, 어떤 유명인의 추천장, 성당 신부님의 추천장도 있었지요. 서로들 자기가 가지고 온 추천장이 최고라고 생각했는지, 그들은 거의 합격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이 회사 사장은 추천장을 가지고 온 수험생은 모두 불합격시키고 추천장이 없는 한 젊은이만을 합격시키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심사의원들은 의아해했지요. 물론 사적인 감정이 여기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추천장을 가지고 있는 응시자 중에서 재능이나 실력에서 볼 때 추천장이 없는 사람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심사의원들은 사장님께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에 사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젊은이야말로 행동으로 추천장을 보여 주었소. 첫째 그는 문에 들어서기 전에 구두에 묻은 흙을 털고 들어 와서 문을 조용히 닫았으며, 둘째 노인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즉시 앉았던 자리를 양보해 주었고, 셋째 내가 미리 시험장 바닥에 휴지를 떨어뜨려 두었는데 그 젊은이는 보자마자 얼른 주웠으며, 넷째 옷을 보니 낡은 옷이었는데 깨끗이 빨아 입었으니 그보다 훌륭한 추천장이 어디 있단 말이오?”
남이 써준 추천장도 중요하겠지만, 본인 스스로 보여주는 행동의 추천장이 더욱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신앙인들 역시 모두 추천장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으로 들어가는 추천장을 받았으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통해서 사랑의 추천장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내가 스스로 보여주는 적극적인 행동의 추천장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그러한 추천장을 만들어내기란 말처럼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과 집착이 그리고 내 자신만 늘 우선시되는 생활의 모습이 남의 추천장만을 원하지 내가 만드는 추천장을 생각하지도 않게 합니다. 그러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오늘 아침 수영을 마치고 본당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시간은 사람들이 출근 시간으로 피곤한 얼굴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가 있지요. 그런데 제 맞은편에서 아주 멋지게 차려 입은 아가씨가 걸어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는 바로 제 앞에서 갑자기 하마처럼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하더군요. 그 모습이 보기 좋았을까요? 아무리 예쁘고 멋진 몸매를 가졌다 할지라도, 또한 사람들의 관심을 살만한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다하더라도, 입을 가리지도 않고 하품을 입 찢어져라 하는 그 모습이 예뻐 보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에 누구나 다 동의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가씨는 왜 제가 빤히 쳐다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품을 크게 했을까요? 바로 저와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만약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이러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보다 더 잘 보이기 위해서 노력하지요. 그리고 행동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또 성모님을 사랑한다면 흉한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말도록 합시다. 대신 적극적으로 사랑의 실천을 하는 자가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름다운 성모의 밤, 은총의 성모의 밤을 지내면서 우리 모두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그래서 직접 행동하는 추천장을 받을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았으면 합니다.
그 사랑의 마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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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이상각 신부-
성모님의 방문은 엘리사벳과 그 태중에 있는 세례자 요한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찾아가 엘리사벳을 도와주셨던 것처럼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엘리사벳처럼 성모님의 방문을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아, 그때 성모님이 나에게 오시어 나를 도와주셨구나.’ 하고 뒤늦게 깨닫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는 사람들한테서 “신부님은 어떻게 성모님의 일을 하게 되셨어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내가 성모님께 내 삶을 봉헌하며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한국 교회를 위해 성모님을 위한 일을 꼭 하겠습니다.’라고 약속드리게 된 것은 죽음의 위험에 빠진 나에게 찾아오셔서 다시 살게 해주신 분이 바로 성모님이라는 강한 확신 때문이다.
1987년 5월 18일 나는 덕유산 무주구천동에서 물에 빠진 교우를 구하려고 물속에 뛰어들었다가 죽음 직전까지 갔다. 수영도 못하는 내가 긴팔 티셔츠와 청바지에 등산화까지 신은 채 5월의 차가운 물속에 뛰어들었고 몇 번을 들락날락하다가 간신히 구조되어 물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아마 몇 초만 더 물속에 있었더라면 나는 죽었을 것이다. 그날 내가 살 수 있었던 것은 내 어머니께서 바친 묵주기도의 은혜요, 성모님의 도우심 덕분이다. 이 체험을 계기로 나는 성모님을 위한 일을 하게 되었다.
그 뒤로도 성모님은 내 삶의 중요한 순간순간에 나를 찾아오셔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셨다. 물론 그 당시에는 잘 모르고 지나갔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그때 일을 돌이켜 보니 분명 그랬다. 성모님은 1987년 죽음에서 나를 구해 주심으로써 내가 당신의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셨고, 1997년에는 당신이 발현하시는 곳으로 나를 부르시어 깊이 울며 회개하게 하시고, 사제로서 내 삶을 새로운 변화로 이끌어 주셨다.
그리고 2007년, 그분은 또다시 나를 부르셨고 여전히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확신을 심어주심으로써 다시 한 번 당신과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해주셨다. 이러한 경험은 내 삶에 큰 기쁨과 희망,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마치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찾아가시어 엘리사벳과 세례자 요한을 기쁘게 해주셨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성모님의 도움을 청할 때, 그분의 사랑과 자비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고자 할 때 성모님은 언제라도 우리를 찾아와 주실 것이다. 엘리사벳에게 향하셨던 그 발걸음으로, 당신의 마음과 입에 넘쳐흐르던 주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 노래, 마니피캇을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시기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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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석 달 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양승국신부-
<새벽별 성모님>
매주일 미사에서 합송하는 사도신경 때 마다 우리는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서 잉태되어 나시고’라는 부분에서 머리를 숙입니다.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졌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무조건 수용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모님을 통한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강생하심, 이는 너무나 심오한 신비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성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인간의 언어로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육화강생’이란 너무나 큰 신비 앞에 열심히 이론적으로 연구했습니다. 증명해보려고 기를 썼습니다. 결국 지쳐 떨어졌습니다. 최종적으로 자신들의 코 앞으로 다가온 하느님과 그분께서 무상으로 주시는 구원이라는 귀중한 선물을 뿌리쳤습니다.
하느님은, 육화강생의 신비는, 신앙은 연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증명의 대상도 아닙니다. 추론의 대상도 아닙니다.
열렬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렁찬 응답이 필요합니다. 충실한 따름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언젠가 반드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리라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의 나날이 힘겨워도 언젠가 반드시 하느님께서 좋은 날을 허락하시리라는 낙관주의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앞에 나이 많은 사람들, 경험 많은 사람들, 재산 많은 사람들, 가방끈이 길었던 사람들,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 큰 인물들은 대체로 이 엄청난 사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봤을 때 대단해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장해물이 된 것입니다.
반대로 성모님을 보십시오. 어린 시골처녀였습니다. 맑았습니다. 진지했습니다. 순박했습니다. 단순했습니다. 순수했습니다.
엄청난 초대였지만, 있는 그대로 믿었습니다. 앞 뒤 따지지 않고 그냥 대답했습니다. 한 평생 충실히 하느님의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으십니까? 구원의 기쁨을 만끽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순수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단순해지셔야 합니다. 맑아지셔야 합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이해의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정복의 대상도 아닙니다. 학문의 대상도 아닙니다.
승복의 대상입니다. 경탄의 대상입니다. 찬미의 대상입니다. 관상의 대상입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몸을 통한 구세주의 육화강생이란 너무나 엄청난 사실 앞에 그저 침묵하셨습니다. 한 평생 간직하셨습니다. 예수님이란 해와 같은 존재가 점점 밝아지도록 서서히 자신을 감춘 새벽별 같은 존재가 성모님이셨습니다.
기존의 랍비들은 말들이 많았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신학에 대해서 다들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말싸움의 대가들이었습니다. 입을 한번 열었다 하면 몇 시간이고 이야기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침묵의 스승이셨습니다. 놀라운 하느님의 신비와 사랑 앞에서 늘 고개 숙이며 그렇게 기도하며 살아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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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방문 축일
-김찬선신부-
오늘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을 기념합니다.
그런데 저는 가끔 두 분의 만남을
불경하게도 우스꽝스럽게 상상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상상을 할 때면 웃음이 입가에 배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주름이 쭈글쭈글한 늙은 할망구가 배를 내밀고 나와
젊은 처녀의 방문을 받는 것입니다.
순전히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면 보기에 민망한 노인의 임신.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경이로운 救援事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눈으로
두 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두 분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 봅시다.
마리아께서는 엘리사벳을 왜 만나러 가셨을까?
가브리엘을 통해 들은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려함인가?
믿음이 부족하여,
다시 말해서 긴가민가하여 확인하러 가신 것인가?
이에 대해 루카복음은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 답을 줍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마리아께서 믿으셨다고 칭송하면서
그래서 행복하시다 합니다.
그러므로 두 분의 만남은 들은 말의 확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서로에게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같이 찬미하고
기쁨을 같이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놀라운 일을 하셨을 때 우리는 어찌할까?
시치미 뚝 떼고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하느님의 그 놀라운 힘이 우리 안에서 마구 설치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우리 중에 누가 잠잠히 가만히 있다면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內攻이 대단하여 그 대단한 힘을 누르고 있거나
하느님의 놀라운 힘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언젠가 한 자매님이 아주 분개하여 저한테 전화를 하셨습니다.
대학시험을 앞두고 저에게 기도를 부탁하였던
두 자매님 중 한 분이었는데
한 분의 아들은 붙고 다른 한 분의 아들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붙은 자매님이 너무 기쁜 나머지
떨어진 자매님에게 당신 아들이 붙었다고 전화 한 것입니다.
그래서 떨어진 자매님이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나에게 염장 지르려고 작정하고 전화를 한 것이 아니냐고
화가 난 것을 저에게 대신 막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대학에 붙은 자매님은 얼마나 기뻤으면
그것을 누르지 못하고
쪼르륵 떨어진 자매의 전화로 달려갔을까요?
그까짓 대학에 붙는 기쁨도 이러 할진데
하느님께서 자기들 안에서 이루신 큰 일들을 경험한 여인들이
어찌 잠잠할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성모 마리아는 앞에 얘기한 자매와는 달리 이성을 잃지 않고
자기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경험한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이때 엘리사벳은 성령에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당신의 인사말이 들리자 태 안의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다고.
마리아도 노래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뛴다고.
다시 한 번 망측한 상상을 해 봅니다.
늙은 할망구가 배가 불러가지고
젊은 처녀와 기뻐 어쩔 줄 몰라 팔짝팔짝 뛰고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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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반갑게 맞이하고 방문합시다.
-박장근 신부-
제 어머님께서는 일찍이 홀로 되셔서 어머님 혼자서 4남매를 키우셨습니다. 당신에게 맡겨진 자식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억척스럽게 살아오셨습니다. 이제 그 후환으로 당뇨에 고생하고 계시고, 아랫이빨 모두가 빠졌습니다.
이렇게 살아오신 어머님에게는 동네 친구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혼자 살아가시는 어머님께는 도움도 되시고 힘도 되셨나 봅니다. 그러나 어린 저에게는 그분들이 어머님께 힘이 된다는 사실보다는 집으로 놀러오시는 것이 싫었습니다. 집에서 편히 누워있고 텔레비전도 보고, 놀고 있는데, 그분들이 오시면 더 이상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예의를 갖추어야 되었기에 그분들 오시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늘 속으로 투덜대는 저의 모습이 있었음을 기억해 봅니다. 크고 나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이웃 아주머님들의 우리 집에 대한 방문이 참으로 큰 기쁨일진대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께 참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홀로 된 어머님에게 힘이 되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런 저의 못난 모습에 상반되는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는 엘리사벳과 성모님의 만남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임신 중인 엘리사벳에게 성모님의 방문은 귀찮은 일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방문을 귀찮은 것이 아닌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그분의 방문을 성령으로 가득차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과연 무엇이 성모님을 이렇게도 기쁘게 맞아들이게 했는가를 우리는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엘리사벳 또한 늘 하느님을 생각하며 주님이 주신 은총으로 아이를 잉태하였기에 하느님의 구원사업의 협조자인 성모님을 알아보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당신의 방문을 반기는 엘리사벳에게 성모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같이 성모님의 노래를 함께 기도하도록 합시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를 들어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성모님의 노래에서 주된 내용은 결국 하느님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느님께서 어떠하신 분이라는 것을 세세히 고백하며 그런 하느님은 너의 하느님이 아니라 바로 나의 하느님을 성모님께서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서로가 서로를 반갑게 맞이하고 방문하는 것입니다. 이 안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하느님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만남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서로를 반갑게 맞이하고 방문해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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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예수님의 길에 동참합시다.
-이성주 신부-
성모성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5월이 시작되면서 우리는 많은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올해는 성모님께 우리 가정을 봉헌하면서 묵주기도를 더 열심히 바쳐야지, 그리고 어머니처럼 더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지, 어머니의 사랑을 나도...
열심히 살아간 5월 그 마지막 날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축일을 기념합니다.
환희의 신비 제 2단, 가브리엘 대천사로부터 예수님의 잉태소식을 전해들은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여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을 오늘 전례는 기념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 사람은 이미 아기를 가지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고, 한 사람은 처녀의 몸으로 잉태를 한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그냥 소문 퍼뜨리고 수군거리기에 딱 좋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이 일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걱정하고 불안해하기 보다 서로를 격려하고 함께 하려 한 것입니다. 먼 길을 마다않고 마리아는 달려가서 엘리사벳과 함께 임마누엘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이 찬양이 우리가 즐겨 기도하는 성모송과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동정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고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엘리사벳은 지나치게 의심하여 벙어리가 되어버린 남편 즈가리야와 달리 불안과 걱정을 믿음으로 극복한 마리아를 칭송한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겸손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은근히 자기 자신을 자랑할 만도 할 것인데 마리아는 이 인사말을 참으로 겸손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구원의 역사에 협력할 것을 고백합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면서 저는 어떤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 일에 대한 걱정만 하는 제 자신을 반성해 보았습니다. 걱정보다는 그 일 역시 하느님이 계획하신 일이고, 하느님의 일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순명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러기 보다는 나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 했던 잘못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역시 성모님은 우리 믿음의 모범이심을 느꼈습니다. 마리아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모범이심을 오늘 복음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인간의 가장 큰 모범이시기에 정녕 복되신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믿음을 함께 나누고 엘리사벳에게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성모님 같은 방문이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듦을 함께 나누면서, 함께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이 우리들의 이웃방문을 통해서도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입당송에서 선포되는 “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아, 다 와서 들어라. 주님께서 내게 하신 큰일들을 들려주리라.” 는 시편 65장의 말씀이 신자들끼리의 가정방문을 통해 믿음으로 선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하느님을 제대로 두려워하는 믿음으로 하느님의 구원사업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불안과 걱정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일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생각만 하면 기뻐서 마음이 설레여야 됩니다. 이것이 겸손한 마음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생활성가 중에 ‘기대’라는 것이 있습니다. 비천한 여종의 신세를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 그리고 그 부족한 입술로 구세주 하느님을 고백하는 마리아의 모습이 묵상되는 가사입니다. 우리 안에서도 하느님이 계획하신 일 그리고 행하실 일을 기대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순명을 합니다.
주 안에 우린 하나 모습은 달라도 하느님 한 분만 바라네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격려해 따스함으로 보듬어가리
주님 우리 안에 함께 하시니 형제자매의 기쁨과 슬픔 느끼네
네 안에 있는 주님 모습 보네 그 분 기뻐 하시네
주님 우릴 통해 계획하신 일 부족한 입술로 찬양하게 하신 일
주님 우릴 통해 계획하신 일 너를 통해 하실 일 기대해
우릴 통해 하실 일 기대해................◆
여인 중에 복되시며
-강영구신부-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그대에게
가정의 달, 어린이의 달, 어버이의 달, 성모님의 달 오월이 떠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성당에서는 ‘성모의 밤’이 열립니다.
오늘 우리는 오월 한 달을 장미꽃다발과 함께 성모 마리아님께 바쳐드릴 작정입니다.
우리는 성모송을 바칠 때마다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십니다.’하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저는 성모님께 물어봅니다.
“성모님, 당신은 어떤 복을 받으셨기에 이토록 ‘복된 여인’이라 칭송 받습니까?”
성모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출세한 남편, 잘나가는 아들이 복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큰 집에서 호사스럽게 잘 먹고 잘 입고 편하게 사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이름을 날리며 무엇이든지 제 하고 싶은 대로 다하고 사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런 것을 복이라고 한다면 나는 가장 불행했던 여인이다.
나는 폭풍우 몰아치는 광야(廣野) 같은 세상에서 큰 십자가를 지고 고통스럽게 살았다. 그러나 나는 한 순간도 하느님 자비의 손길을 잊은 적이 없다. 혼전임신으로 파혼의 위기를 맞았을 때에도, 베들므弔?동굴에서 아들 예수를 낳았을 때에도, 헤로데의 손길을 피해 멀고 먼 이집트로 피난살이를 떠났을 때에도, 열두 살 예수를 잃고 사흘 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다시 찾았을 때에도, 서른 살 장성한 아들 예수가 어느 날 홀연히 집을 떠나 광야로 종적을 감추었을 때에도,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아서 그를 뒤 쫓아다닐 때에도,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하며 아들 예수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할 때에도, 피투성이가 된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언덕을 오를 때에도, 손가락처럼 굵은 대못이 예수의 손발을 꿰뚫을 때에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숨을 거둘 때에도 나는 흔들린 적이 없다. 죽어 십자가에 매달린 아들이 산 어미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그때 나는 깨달았지만 그 순간에도 하느님의 손길은 나를 부축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복이다.”
당신도 성모 마리아님처럼 복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양승국신부-
<한 아이 한 아이가 다 꽃입니다>
지난 주말, 저희 집에서는 작고 소박했지만 참으로 흥겹고 정겨웠던 ‘성모의 밤’ 행사가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수사님들이 준비한 프로그램을 지켜보면서 성모님께서도 흐뭇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계시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도예과 아이들은 참석하신 모든 분들에게 자신들의 손으로 빚어 만든 초가 담긴 컵을 드렸습니다. 봉헌 예절 때, 저희 모두는 초심지에 정성과 마음의 불을 붙여 성모님께 드렸습니다.
봉헌예식에 익숙하지 못한 아이들이었기에 봉헌예식은 혼란했습니다. 불을 붙인 초컵을 들고 나오다가 계단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컵을 깨는 아이, 일단 앞으로 나오기는 나왔는데 뭘 해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는 아이, 축구하다가 인대를 다쳐 목발 짚고 나오는 아이, 장난을 너무 지나치게 치다가 발목이 삐어 기브스를 한 채 쩔룩거리며 나오는 아이...앞에 앉아서 보고 있노라니 웃겼습니다.
웃겼지만, 다른 한편으로 가슴 뭉클했습니다. 타오르는 초에 비춰진 아이들의 얼굴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예뻐 보였습니다. 한명 한명이 다 꽃처럼 보였습니다.
관구장 신부님께서 한 식탁에 앉은 한 아이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아이는 얼마 전에 만기 귀가했다가 이곳을 애타게 그리워하다가 다시 들어온 말썽꾸러기 꼬마였습니다.
“집에 있지 않고 다시 이곳으로 왔니?”
관구장 신부님의 질문에 아이는 지체 없이 대답했습니다.
“저 선생님 때문에요.”
“그 선생님이 어떤데?”
“저 선생님은 제 엄마예요.”
아이의 대답을 들은 우리는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다들 감동을 먹었습니다.
상처받은 아이의 마음을 친엄마 이상으로 보듬어주는 선생님의 마음에서 성모님의 마음을 봅니다.
오늘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친척 엘리사벳이 노년에 될 때 까지 자식이 없다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부터 마음씨 착한 마리아는 늘 이런 마음을 먹었겠지요.
“연세도 많으신 분이 아이를 가져 얼마나 힘드실까? 주변의 눈도 만만치 않을텐데,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실까? 부족하지만 내가 찾아가서 위로도 해드리고 보살펴드려야지.”
그러나 그 동안 시간이 나지 않았습니다. 6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짬을 낸 마리아는 꽤 먼 거리에 있던 엘리사벳의 집을 찾아 길을 나선 것입니다.
이처럼 성모님의 한 평생은 오로지 타인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들 예수님과 세상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시선은 자신에로가 아니라 언제나 예수님에게로, 이웃에게로, 세상에로 쏠려있었습니다. 성모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어떻게 하면 아들 예수님과 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줄 수 있을까?’ 노심초사한 결과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모님은 사랑에 굶주린 상처투성이인 우리들의 위로자인 성모님이십니다. 우리 죄인들의 마지막 의지처인 성모님이십니다. 부족한 우리들의 조력자인 성모님이십니다.
오늘도 성모님께서는 걱정 가득한 눈으로 부족한 우리 죄인들을 굽어보십니다. 죄와 상처투성이인 우리들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잘 변호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십니다. 그저 안쓰러운 눈빛으로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독하게도 외로운 순간,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순간, 세상살이가 너무 힘겨워 어찌할 바 모르는 순간, 다른 무엇에 앞서 모든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님 앞에 그 사연을 털어놓은 우리, 성모님께 의지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정복례 수녀 -
◆성모성월 마지막 날, 교회는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을 기념한다. 천사의 알림을 통하여 사촌 언니 엘리사벳이 그 늙은 나이 에도 아기를 가졌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마리아는 나자렛에서 유다 산골까지 힘든 여행을 떠난다. 마리아의 인사를 받은 엘리사벳은 성령의 감도를 받아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마리아를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되다고 칭송한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칭송에 화답하며 ‘마니피캇’을 읊는데 이 노래는 예언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를 연상시킨다. 마리아가 부른 이 노래는 그 당시 가난하고 소외된 모든 이들을 포용하는 구원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마니피캇, 마리아의 노래는 이미 나의 노래가 된 지 오래다. 이 노래 를 부를 때마다 내 영혼이 마리아의 영혼과 일치됨을 느낀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 구절을 노래할 때마다 나는 영적인 전율에 휩싸인다. 말 그대로 주님께서 비천한 나를 매순간 돌보아 주시어 오늘 이 자리에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고 약속하셨고, 또한 그 약속을 결코 잊지 않으 신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지혜의 시작이고, 이 두려움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자녀다운 순종으로부터 나온다.
유학중에 나는 갑자기 심장수술을 받게 되었다. 1996년 6월 25일 오후, 기침이 심해서 엑스레이라도 찍어볼 양으로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는 손으로 등을 몇 번 두드려 보더니 폐는 이상이 없고 심장이 의심스럽다면서 당장 초음파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세 시간 정도 초음파 검사를 한 후 컴퓨터상의 사진을 10여 장 뽑아 보여주며 설명했다. 귤만한 크기의 스폰지 같은 혹이 좌심방의 문을 막아서 혈액순환이 안 돼 기침이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내일 아침 8시까지 입원하라는 통보였고, 나는 갑자기 응급환자가 되어 명령에 따랐다.
입원하던 날 하루 종일 검사를 받고 다음날 수술을 했다. 모든 것이 너무 빨리 진행되어서 꿈이런 듯 아련했으며 이상하리만큼 평온했다. 전혀 두렵 거나 떨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어떤 포근함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백하건대 그때 나는 성모님의 품에 안겨 있었던 것이다. 내가 수도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끊임없이 해오던 기도가 있었는데, 바로 묵주의 9일기도이다. 가능한 한 끊임없이 연이어서 이 기도를 드려왔다. 그러는 사이에 성모님은 어느새 나의 모든 시간과 공간에 함께하시는 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성모 마리아! 그분은 어머니다운 지혜와 사랑으로 당신의 모든 자녀들을 언제 어디서나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주신다. 반항하는 자녀 들은 그들의 반항을 순종으로 바꾸시는 사랑의 마술사이시며, 또한 순종하는 자녀들은 그들이 사랑의 단맛을 한껏 즐길 수 있는 기묘한 감각을 얻어주시는 참으로 좋으신 어머니이시다. 오늘 마니피캇을 부르며, 어머니 당신을 꼬옥 껴안으며 나의 사랑을 속삭입니다. “사랑해요, 어머니!” ●
-박상대 신부-
두 여인의 노래에 담겨진 세상과 하느님의 만남
가장 아름다운 계절 5월, 성모성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엘리사 벳 방문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이 축일은 주님을 잉태하신 마리아께서 세례자 요한을 잉태 중에 있는 친 척 엘리사벳을
찾아가신 루가복음의 보도(1,39-56)에 근거한다.
엘리사 벳과 마리아의 만남은 그들의 태중에 있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상봉(相逢)이기도 하다.
성모 마리아의 문안으로 세례자 요한이 엄마의 뱃속에서 성화(聖化)된다.
이 상봉 을 보도하는 성서의 이야기는 많은 신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게 되었고
이 사건을 전례 안에서 기념하려 는 움직임이 있었다.
우선 5 세기경 비잔틴 동방교회가 "성모님의 거룩한 옷" (블라쉐르느)을 안치 한 것을 기념하는 미사에서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한 복음을 봉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동 방교회는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6월 24일)의 팔일축제 다음 날인 7월 2일을 축일로 지냈다.
서 방교회에서는 1263년 보나벤투라(1221-1274) 성인이 성모님의 중재로 시대적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도 를 가지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이 축일을 도입하면서 파급되었다.
100년 후 우르바노 6세(1378-1389) 와 보니파시오 9세(1389-1404) 교황에 의해 축일이 공인되었고,
바젤 공의회(1431-1447)는 축일 고유미 사 기도문을 제정하여 더욱 장려하였고,
비오 5세(1566-1572) 교황을 통하여 가톨릭교회의 공식 전례축 일로 자리를 잡게 된다.
17세기에 와서는 이 축일이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이라는 정식 명칭 을 얻게 된다.
1969년 개정된 로마 전례력은 이 축일을 시기적으로 합당한 "주님 탄생예고 대축일"(3월25 일)과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6월 24일) 사이에, 즉 성모성월의 마지막 날인 5월 31일로 옮겨 놓았 다.
두 여인의 만남을 보도하는 오늘 복음은 두 곡(曲)의 아름다운 노래 를 담고 있다.
하나는 마리아의 문안을 기뻐한 엘리사벳이 성령을 가득히 받고 마리아를 칭송하는 노래와
이에 응답하는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 Magnificat) 이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문안을 받고 다음과 같이 칭송한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42-45절)
이 노래는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던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말(1,28)과 함께 후에 가톨릭교회의
주요 기도문 중 "성모송"의 첫 부분으로 자 리를 잡게 된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 며,
태중의 아들 예수 또한 복되시나이다."
엘리사벳의 마리아에 대한 칭송은 구약성서에도 같은 유형으로 발견된다.(신명 28,4; 판관 5,24;
유딧 13,18 참조)
Annunciation and Visitation - UNKNOWN MASTER, Flemish
c. 1525 Oil on oak panel, 99 x 33cm(each) Groeninge Museum, Bruges
"마리아의 노래" (막니피캇, Magnificat)에 대한 학설은 분분하다.
신약성서 학계의 통설은 "마리아의 노래"가 실제로 마리아의 노래라기보다는
루가복음이 집필되던 시기 에 유행하던 노래라는 것이며, 내용상 많은 구절이
구약성서를 본 딴 것이라고 한다.
마리 아의 노래(Magnificat)의 전체적인 구조는 한나가 사무엘을 야훼께 바친 후 불렀던
감사찬양 노래와 흡사하다. 그때에 한나가 이렇게 기도를 올렸다:
"내 마음은 야훼님 생각으로 울렁거립니다.
하느님의 은덕으로 나는 얼굴을 들게 되 었습니다.
이렇듯이 내 가슴에 승리의 기쁨을 안겨 주시니 원수들 앞에서 자랑스럽기만 합니다.
야 훼님처럼 거룩하신 분은 없으십니다. 당신밖에는 없으십니다.
우리 하느님 같은 바위는 없으십니다.
잘난 체 지껄이는 자들아, 너무 우쭐대지 말아라. 거만한 소리를 입에 담지 말아라.
야훼는 사람이 하는 일을 다 아시는 하느님, 저울질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힘있는 용사의 활은 꺾이고 비틀거리던 군인 은 허리를 묶고 일어나게 되리라.
배불렀던 자는 떡 한 조각 얻기 위하여 품을 팔고 굶주리던 사람은 다 시 굶주리지 않게 되리라.
아이 못 낳던 여자는 일곱 남매를 낳고 아들 많던 어미는 그 기가 꺾이리라.
야훼께서는 사람의 생사를 쥐고 계시어 지하에 떨어뜨리기도 하시며 끌어올리기도 하신다.
야훼께서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가멸지게도 하시며 쓰러뜨리기도 하시고 일으키기도 하신다.
땅바닥에 쓰러진 천민을 일으켜 세우시며 잿더미에 뒹구는 빈민을 들어 높이셔서
귀인들과 한 자리에 앉혀 주시 고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땅의 밑동은 야훼의 것, 그 위에 세상을 지으셨으니 당신 을 따르면 그 걸음걸음을 지켜 주시지만
불의하게 살면 앞이 캄캄해져서 말문이 막히리라.
사람 이 제 힘으로는 승리하지 못하는 법, 야훼께 맞서는 자는 깨어지리라.
지존하신 이께서 하늘에서 천둥소 리로 우렁차게 호령하신다.
야훼는 땅 끝까지 심판하신 분, 당신께서 세우신 왕에게 힘을 주시며
기름 부어 세우신 임금의 이름을 떨치게 하신다."(1사무 2,1-10)
이 와 같이 "마리아의 노래"는 구약성서에 기록된 "한나의 노래"를 그 기 본구조로 하고 있다.
나아가 "마리아의 노래"는 이스라엘이 처한 시대적 위기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하느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신실함과 그분의 종말론적 통치에 의한 도덕적(51절), 사회적(52절),
경제적(53절) 혁명을 신앙(信仰)하고, 이스라엘의 남은 "가난한 이들"(아나윔)의
구원을 희망(希望)하 는 노래라고 볼 수 있겠다.
"마리아의 노래"는 내용상 전편(46-50절)과 후편(51-55절)으로 구분되 는데,
전편은 개인(個人) 차원에서의 감사찬양이며, 후편은 집단(集團) 차원에서의 감사찬양이 다.
루가복음사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지막 신앙과 희망을 "엘리사벳 -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마리아-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될 것을 내다보며 마리아의 입에 담아
노래로 불렀던 것이 다.
마리아는 석 달 가량 엘리사벳의 집에 머물면서(56절) 이미 만삭이 된 엘리사벳에게
봉 사하였을 것이다.
만삭이 된 여인이 필요로 하는 것이 어디 한, 두 가지이겠는가.
그것도 한 번의 출산 경험이 없는 엘리사벳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고 동정녀인 마리아가 무슨 경험 이 많아서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래서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상봉은 인류의 역사 안에 더 큰 의미를 가진다.
마리아의 엘리사벳에 대한 봉사는 그녀의 뱃속에 있는 요한에 대한 봉사이기도 하다.
이는 예수를 잉태하심으로써 하 느님의 어머니가 된 마리아와 인간이 되실 하느님 스스로의
인간에 대한 봉사이기 도 하다.
얼마 있지 않아 요한은 하느님이신 예수께 빚진 은혜를 되 갚을 것이다.
결국 찬미 의 노래로 엮어진 두 여인의 만남은 세상과 하느님의 만남,
죽음과 생명의 만남, 파 멸과 구원의 만남, 절망과 희망의 만남을 의미하며,
이 만남은 세상의 구원이 시작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
◆ 2004년 ◆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장면은 살아 움직이는 듯하고 또 매우 흥분된 분위기가 감돈다. 마리아는 "걸음을 서둘러" 엘리사벳에게 문안을 드렸다. 그랬더니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으며" 엘리사벳은 큰 소리로 외치며 마리아께 감사를 표시한다. 이 방문은 단순한 방문으로 끝나는게 아니다. 메시아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엘리사벳을 통하여 드러났기 때문이다. 루가 복음서에서는 맨 처음으로 "주님"이란 칭호가 사용된다.
1. 하느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요한과 예수의 탄생이 서로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는 것으로 표현한, 이 방문 기사는 하느님의 말씀이 지닌 효력을 증명하는 첫번째 무대인 셈이다. 마리아에게처럼, 즈가리야에게 대한 통보는 엘리사벳에게 모성을 확립시켰고, 이 모성이 엘리사벳으로 하여금 "주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를 즐거이 맞아들이게 만들었다. 이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성취되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근본적인 축복을 선언할 때 이미 그 사실을 인식하고서 분명히 말한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1,45). 또 이 말씀은 요한을 두고 즈카리야에게 하신 말씀의 성취도 암시한다(1,15).
2. 요한의 예언적인 축성
구약을 보면, 아직 당신 모친의 태중에서 있을 때 예레미야가 예언적인 축성을 받는다(예레1,5). 이와 비슷한 축복이 있었던 요한은, 마리아가 인사하는 순간에, 그 어머니의 태중에서 기뻐 날뛰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런 반응이 방문 기사의 첫 부분을 구성하는데, 바로 이 반응은 메시아 시대에 가장 적절한 반응이자 하느님의 종말론적 구원의 서두로 나타난다(참조. 요한8,56 묵시19,7). 또한 이 반응은 요한과 예수의 특별한 유대를 표현한다: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면 기쁨에 넘친다"(요한3,29).
예레미야처럼, 요한은 예언자의 정신으로 가득해진다. "성령의 가득히 받았던"(1,41) 그의 모친의 말씀을 통하여, 그는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어, 주님보다 앞서 와서 그의 길을 닦으며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길을 주의 백성에게 알리게 되리니..."(1,76).
3. 예수에 관한 새로운 계시
루가의 이 모든 기사는 전적으로 예수의 신비에 집중되어 있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았다" 그녀는 "큰 소리로 외쳤다"(구약의 이 표현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다: 참조. 1역대 16,4 5,12).
또 그녀는 "주님"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데, 이 칭호는 부활하신 천주 성자의 놀라운 "칭호"이다(사도2,36 요한20,13 필립3,8). 그녀는 이중의 축복을 말한다: 1)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1,42) 이 말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기의 성성을 반영하며, 가브리엘 천사의 예언을 반향한다. 2)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1,32. 35).
4.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동시에,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축복받은 이유와 마리아의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마리아의 신비는 전적으로 "태중의 아기"와 일치한 당신 모성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엘리사벳이 인사한 원래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태중의 아드님이 복되시기 때문에 당신은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십니다"라고 고쳐보면 알 수 잇다. 아들의 복되심과 거룩함이 어머니 안에 반영되었다. 말하자면, 아들이 그 어머니의 거룩함의 제일 원인이다. 복음사가들과 초대 신자들의 생각에는 "예수의 어머니"(참조. 요한2,1) "주님의 어머니"보다 더 아름다운 마리아 칭호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모성은 무엇보다도 마리아의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엘리사벳의 찬사가 이를 보증한다. 즈가리야가 의혹을 가졌던 반면에,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에 "예"하고 대답했던 가장 뛰어난 믿음의 여인이었다. 루가는 결국 마리아의 모성과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을 같은 선상에 올려놓고 보는 셈이다.
5. 마리아의 감사
방문 장면은 곧이어 마리아의 놀라운 감사가로 이어진다. 마리아는 구세주 하느님의 놀라운 개입에 대하여 찬미 노래로 화답한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1,49).
그러나 마리아의 시각은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전 역사로 옮겨간다. 그리고 마리아의 감사도 이스라엘 전체의 사건에 집중하면서 하느님의 위업을 노래한다. 과연 이 여인은 "여인 중의 여인"(참조,유딧13,18)이다.
<성모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에 대한 '마리아회'의 연구자료 중에서>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엘리사벳 성녀 †
일년 중 '가장 좋은 시절'인 5월은 성모님의 달이고, 해마다 5월 31일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이다. 묵주기도의 해를 살고 있는 올해, 우리는 이 축일을 지내면서 환희의 신비 2단의 깊고도 오묘한 뜻을 헤아리게 된다.
"마리아께서 엘리사벳 찾아보심을 묵상합시다." 이는 곧 '이웃사랑'을 의미한다. 이웃과 하나가 되어 줌으로써 사랑 안에서 완전해지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2년 10월 16일 '묵주 기도의 해'를 선포하면서 발표한 교황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에서 "성모님께서 엘리사벳과 만나시는 장면도 환희의 신비입니다. 성모님의 목소리와 그분의 태중에 계시던 그리스도의 존재는 요한을 '기뻐 뛰놀게' 했습니다.
하느님이신 구세주 아기의 탄생을 천사들이 노래하며 목자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알리는 베들레헴의 광경도 환희로 가득 차 있습니다."(제20항)라고 설명하고 있다.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마을, 어느 작은 집에 사는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기뻐하소서!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라며 주님의 탄생을 예고한다.
이 사건을 우리는 환희의 신비 1단에서 묵상한다. 그로부터 석 달째에 접어들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축일'을 맞게 되는데, 환희의 신비 2단의 묵상이다.
마리아가 사촌 언니 엘리사벳도 아기를 가졌다는 말을 듣고 언니를 찾아가 보기 위해 짐을 챙겨 유다 산골을 찾아간다. 즈가리야와 엘리사벳 부부가 살고 있는 집에 도착한 마리아가 언니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고, 바로 이 순간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요한이 성모님의 태중에 계신 아기 예수님을 반겨 기뻐서 뛰노는 장면은 루가 복음(1,39-56.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에 기록된 대로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큰 소리로 외쳐 말했다.
"당신은 여자들 가운데서 축복 받았으며 당신 태중의 아기 또한 축복 받았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내게로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이 인사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자 아기가 내 태내에서 신명이 나 뛰놀았습니다."라고 한 다음, "복되어라, 믿으신 분!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들이 이루어지리니." 하고 진심으로 축하해 준 것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네"라고 응답한 데에 따른 찬미인 것이다.
그러자 마리아도 감격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저 유명한 '마니피캇(Magnificat)', 즉 '마리아의 노래'이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노래, 마니피캇
그 중에서도 다음 구절은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적절한 교훈으로 다가온다.
"그분이 당신 팔로 힘을 행사하시어 / 그 심사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도다. 권세 부리는 자들을 권좌에서 내치시고 / 비천한 이들을 들어올리셨으며 굶주린 이들은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고 / 부유한 자들은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도다."
이 세상은 권력과 무력과 금력으로 다스려지는 곳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돌보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이 '찬미의 노래'를 통해서 성모님은 우리에게 일러주고 계시는 것이다. 신앙의 새 옷으로 갈아입은 우리라고 한다면, 마땅히 세상의 권력에 휘둘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무력이나 폭력으로 남을 억압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나 전쟁은 가당치 않다.
불의로 재산을 축적하거나 남의 재물을 탐내는 일도, 하느님을 첫 자리에 모시는 사람들이 할 일이 아니다.
마니피캇, 이 노래를 일부에서는 '엘리사벳의 노래'로 간주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리아의 노래'로 보고 있다. 5월 31일을 엘리사벳 성녀의 축일로 기리는 경우도 있으나, 실제로는 11월 5일에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아버지 즈가리야의 축일을 지내고 있다.
성모께서 자신을 도구로 해서 이룬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과 인류 구원 역사에 감사하며 부른 마리아의 이 노래는, 라틴어 '찬미하다'의 뜻을 지닌 '마니피캇'으로 시작되는 까닭에 그냥 '마니피캇'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톨릭을 뛰쳐나간 마르틴 루터 같은 이도 <마니피캇 주석>에서 마리아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겸손과 하느님 경외심의 표본"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웃사랑의 진정한 모범
마리아는 석 달 동안 엘리사벳을 도와서 부엌일과 바느질, 집안 치우기 등 바쁘게 일을 하고, 함께 기도하며 장차 태어날 아기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엘리사벳에게 마리아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자, 마리아는 다시 지루하고 먼길을 걸어 나자렛 집으로 돌아온다.
바로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이웃사랑의 전범을 보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스승인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확언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성호를 긋고 '아멘'이라 응답하며 '알렐루야'를 부르고, 모두 세례를 받아 교회에 나가게 되고 대성당을 지었다 할지라도, 단지 사랑만이 하느님의 자녀와 사탄의 자녀를 구별 지어 준다.
다시 말해 사랑을 지닌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났으며, 사랑이 없는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모든 것을 다 지녔다 해도 단 한 가지, 이것이 부족하다면 가지고 있는 그 어느 것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다른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더라도 만일 이것을 가지고 있다면 할 일을 다 한 것이다."
누가 내 이웃인가? 스치고 지나가는 모든 이가 내 이웃이고, 함께 생활하거나 전화로, 인터넷으로 이야기하는 상대가 내 이웃이다. 멀리 이라크에서 목말라 신음하고 있는 이들도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다. 어떻게, 얼마만큼 이웃을 사랑할 것인가? 구체적으로, 목숨을 내어줄 만큼 사랑해야 한다....◆
[두올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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