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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8일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가서 하늘나라가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은 고쳐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주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As you go, make this proclamation: without cost you are to give.
말씀의 초대 호세아는 주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로 여기고 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지은 죄 때문에 벌을 내리셨지만, 오히려 당신 사랑으로 용서하신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에게서 멀어져 가도 당신의 사랑을 거두시지 않는다. 당신은 하느님으로서 사람을 결코 멸망시키시지 않는다고 선언하신다(제1독서). 사도들이 받은 사명은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나라의 현존의 표지를 구체화하는 활동으로 실현된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과정에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서 필요한 것들을 얻게 될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주님께서 뽑아 파견하신 사도들은 인간 생활 안에 이미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게 됩니다. 복음은 주님께서 거저 주셨으니, 그 복음을 들은 사람들 또한 다른 사람에게 거저 나누어 주어야 할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데에서는 많이 가졌다고, 많이 배웠다고,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암울한 시대에 얼마만큼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께 의탁하며, 주님과 함께,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순간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뜻밖의 말씀입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떠났다가 사고라도 당하면 어떻게 할는지요? 누구든지 일을 앞두면 준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를 생략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저것 물건을 챙기려던 제자들은 어리둥절하였을 것입니다.
☆☆☆ 여행을 잘 하려면 가방을 꼼꼼히 챙겨야 합니다. 그런데 불필요한 것들을 무겁게 넣고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다음에는 간단히 짐을 꾸려야겠다고 마음먹지만 늘 그렇지 못합니다.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주고 마귀는 쫓아내어라.
(마태오 10,7-15)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Cure the sick, raise the dead,
cleanse the lepers, drive out demons.
Without cost you have received;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당신께서 지니신 권한을 똑같이 나누어 주십니다. 복음 선포는 주님과 같은 운명의 길을 걸어가는 행위이며, 주님께 거저 받은 사랑과 축복을 세상 사람들과 두루 나누는 것입니다. 그 일은 오늘 미사에서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신 우리가 해야 할 사명입니다.
현대인들은 소유를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이 가지면 자동적으로 강해질 것이라 착각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인의 눈을 지니면 달라집니다. 소유 자체가 힘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소유를 허락하신 분의 보증이 ‘힘의 실체’임을 깨닫게 됩니다.
재물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주님께서 주셨기에 가능합니다. 그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오래갑니다. 자신의 당연한 몫으로만 생각한다면 하늘의 보호가 사라집니다. 그러기에 악한 기운이 덮치면 서서히 무너지고 맙니다. 부친의 엄청난 재산이 아들 대에서 사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지만 힘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버팀목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살아야 합니다. 어떤 물질과 소유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그렇게 살도록 세상에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돈 없이는 여행을 할 수 없습니다. ‘무전여행’이란 일종의 모험을 즐기는 취미로 여겨집니다. 어떻든 오늘날 선교를 위한 여행일지라도 가방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지침을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선교 여행은 결코 휴가 여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것만을 최소한으로 챙길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먼저 챙기도록 합시다.
죄를 용서하는 능력 - 강신모 신부- 첫 보좌신부 때의 이야기입니다. 선배 신부님이 안부를 물었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나 ?” 저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습니다. “신부 생활이 생각보다 힘드네요.” 그런데 그 신부님이 정색을 하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임기는 채워야 해.”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까짓 임기 채우는 것이 뭐 그리 힘들까 ?”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 신부님의 말씀이 정말로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신부의 임기 중 전반부는 대체로 무난합니다. 신부나 신자가 서로 탐색전을 벌이는 기간이므로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후반부가 되면 그동안 벌려놓은 일도 있고, 관계가 깊이 형성되면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빨리 이 본당을 떠나 새로운 본당에서 새롭게 출발하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첫 보좌 때의 선배 신부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이것을 유혹이라고 단정 짓고 죽이 됐건 밥이 됐건 임기만은 꼭 채우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소극적이고 도피적이던 마음이 적극적으로 변하는 것을 체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한 집에 머물러라 !” 신부만이 아니라 신자들도 같은 유혹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의욕을 가지고 어떤 단체 책임을 맡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심지어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한 것을 후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혹입니다. 무조건 임기는 채워야 합니다. 결혼은 임기가 없기에 더 어렵기는 하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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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의 어떤 신부님께서 ‘어린이 성무일도’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성무일도를 바치고서는 성당의 어느 벽면에 기도를 바쳤다고 동그라미 표시를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봐도 아이들을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에요. 그래서 지나가는 초등학교 4학년 꼬마 아이에게 물었지요.
“너 왜 기도를 바치지 않니?”
그러자 이 꼬마아이가 놀라운 답변을 했답니다.
“바빠서요.”
하긴 저의 입에서도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불쑥불쑥 나오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더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안일한 마음을 갖게 하는 등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옛날 히말라야 산 기슭에 한고조라는 새 한 쌍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둥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밤이면 너무 춥고 떨려서 암컷이 이렇게 말하곤 했지요.
“아이 추워, 아이 추워. 나 죽어!”
이 말에 수컷은 암컷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야 조금만 참아. 내가 날이 새면 따뜻한 집을 지어 줄게.”
하지만 낮이 되면 기온이 올라가면서 이 새는 이렇게 말한다고 하지요.
“이렇게 따뜻한데 애써 집은 지워서 모해?”
그리고 또다시 밤이 되면 다시 후회를 하지요.
우리들도 이 한고조라는 새처럼 후회만 계속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바로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를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이유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갈수록 바쁘고 다변화된 사회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지 먼 훗날 시간이 날 때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즉,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입니다. 더군다나 그 일이라는 것은 내가 거저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써 하는 것이기에 아까워하거나 어떤 보상을 바라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예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내가 파견되었음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의 빽 믿고 힘차게 생활해야 할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을 뒤로 절대 미루지 마십시오.
‘바쁘다’는 말 하지 않기.
-장경선 수사-
수도자들은 가난을 서원합니다. 물질적인 소유뿐 아니라 내적인 가난함까지도
서원합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청빈의 소중함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신자들도 많습니다. 가난을 산다는 것은 물질적 궁핍 속에서
불편하게 살라는 요청이 아니라 영성의 실재적 삶을 위해 외적,
내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복음의 정신을 보다 깊게 살 수 있으며 오직 하느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삶이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받는 행위는 쉬울 수 있으나 주는 행위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나에게 가장 귀한 것을 내놓기를 원하실 때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씩 있게 마련이니까요.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자의든 타의든 그것을 내어주는 순간이 있습니다.
자신의 전 생애를, 심지어 생명을 내어주는 이들도 있습니다.
보상이나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묵묵히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는 이들은 자신이 받은 모든 것도 거저 받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삶의 이 순간도 끊임없이 은총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 내면에 하느님의 나라가 끊임없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하느님 나라의 참 모습이 우리 가운데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준다면 분명 이 세상은 맑고 깨끗한 빛줄기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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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발걸음
-송동림 신부-
본당에서 사목하던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께서 성당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아버지는 전화로만 가끔 안부를 묻곤 하셨는데 그날 제가 사목하는 곳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셨습니다. 미리 연락을 하면 혹시라도 “몸도 불편하신데 오지 마십시오.” 할까 봐 조용히 오신 듯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투병 중이셨는데도 불편한 몸으로 혼자 버스를 타고 오셨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뵙자마자 마음과 달리 “가능하면 다음에는 오지 마십시오. 제가 집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고향 집에서 제가 사목하는 곳까지는 제주도 내에서 가장 먼 거리였습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아침 일찍 출발했을 것이고, 차도 여러 번 갈아탔을 것입니다. 저는 내심 ‘아버지의 병환이 더 심해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본의 아니게 섭섭하게 들리는 말씀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신부님 얼굴을 보러 왔는데, 이제 보았으니 됐습니다.” 하면서 서둘러 발걸음을 돌리셨습니다. 사제관으로 모시려 해도 굳이 사양하며 돌아서시던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먼 길을 마다 않고 힘든 몸을 이끌고 아들을 보러 오셨는데, 아들한테서 들은 첫마디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무척 죄송합니다. †♡†♡†♡†♡†♡†♡†♡†♡†♡†♡†♡†♡†♡†♡†♡†♡†♡†♡†♡†♡†♡†♡†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양승국신부- <수도원 담을 따라 걸으면서>
탁월한 대 영성가께서 한 수도공동체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하루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공동체 문을 나서 교회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수도원 담 안으로부터 크게 다투는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깜짝 놀란 스승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안으로 들어가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평소에 늘 옥신각신하던 두 형제가 오늘도 아무것도 아닌 일로 언성을 높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싸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건만 아침부터 크게 다투고 있는 두 형제를 보자 스승까지도 덩달아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저 같았으면 그 순간 당장 달려가서 이렇게 혼냈을 것입니다. “이 쫌생이들아! 너희들 그렇게 할 일이 없냐? 아침부터 싸움질이나 하고 있게. 너희들, 그 작은 것 하나 양보 못하면서, 도대체 뭣 하러 수도원 왔어? 그러려면 당장 짐 싸라!” 그러나 스승은 다시 발걸음을 밖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는 길고도 긴 수도원 담을 따라 천천히 걸었습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담을 세 바퀴나 돌고 난 후에야 안으로 들어간 스승은 평화로운 마음으로 두 형제를 타일렀다고 합니다. 스승은 제자들의 문제에 개입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분노나 화로부터 자유롭게 했습니다. 수도원 담을 따라 천천히 돌면서 자신의 감정을 정리했습니다. 스승이 담을 따라 돌던 시간은 어쩌면 다투고 있던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스승은 다투고 있던 형제들로부터 받은 부정적인 감정의 영향을 수도원 담을 따라 걸으면서 최소화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조금도 잃지 않은 채 자신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갓 수도생활을 시작한 햇병아리 수도자가 스승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스승님, 제 마음이 이토록 고통스럽고 슬픔에 가득 차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스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바라보지 말고, 누구도 판단하지 말며, 누구도 비방하지 말게. 그러면 주님께서 평화를 주실 것이네.”(안셀름 그륀, ‘하늘은 네 안에서부터, 분도출판사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복음전도 여행’에 파견하시면서 몇 가지 당부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 가운데 평화의 사도가 되라는 당부말씀이 있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복음 선포자로서 지녀야할 중요한 자세 중에 하나가 ‘평화’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복음 선포자 자신이 내적으로 평화로워야 합니다.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한다는 사람이 내면의 불안정으로 인해서 얼굴이 어둡거나 침울하다면 복음 선포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복음을 선포한다는 사람이 어딜 가나 분열을 조성한다면 그게 옳은 일이겠습니까? 복음선포자는 마음이 늘 잔잔한 호수 같아야 합니다. 그 어떤 바람 앞에도 흔들리지 않는 내적 평정을 유지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삶의 중심에 자리하시니 그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참평화가 복음 선포자에게 필요합니다. †♡†♡†♡†♡†♡†♡†♡†♡†♡†♡†♡†♡†♡†♡†♡†♡†♡†♡†♡†♡†♡†♡† 빈 손으로 계획 없이 †♡†♡†♡†♡†♡†♡†♡†♡†♡†♡†♡†♡†♡†♡†♡†♡†♡†♡†♡†♡†♡†♡†
<독서> : 간장이 녹을 정도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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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나서 유품을 정리하는데, 아버지께서 드러나지 않게 우리 가족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장례 후 제 휴대전화에 저장된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지우면서 제게 보여주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슬픔을 가누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휴대전화에서 아버지의 전화번호는 지워질지 모르나 생전의 아버지 모습은 기억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더불어 깨닫는 것은, 세상에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때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 일을 위해 발걸음을 서둘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과감하게 길을 재촉해야 한다는 겁니다. 특히 그 길이 사랑을 전하는 길, 화해하러 가는 길, 위로하는 길, 용서하는 길, 용기를 주는 길, 격려하는 길이라면 다른 일을 무릅쓰고서라도 나서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길을 떠나는 제자들이 해야 할 구체적인 일들을 제시해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따라 나서는 길은 복음의 길이고, 우리가 길에서 해야 할 일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며, 그 여정 자체가 복음의 여정이어야 할 것입니다.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바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파견되어 간 제자들이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지만
그보다 먼저 어떤 자세로 가야 하는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길 떠날 때의 우리는 많은 준비를 합니다.
단순한 여행을 위해서도 많은 것을 챙기는 우리이기에
사업이나 어떤 Project의 완수를 위해서는
더 꼼꼼히 그리고 더 철저하게 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실무적인 준비보다 마음의 준비일 것입니다.
이것이 세속적인 일의 성공 비결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Project는 영 다릅니다.
아무 준비를 하지 말아야 하고
아무 것도 지니지 말아야 합니다.
준비를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준비하느라 떠나는 것이 번거롭거나 지체되지 않기 위해서
또는 준비하다 마음이 바뀌거나 못 가게 되지 않기 위해서
즉 즉각적으로 확실히 떠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준비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준비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준비한 것들,
그래서 가지고 간 것들이 필요 이상으로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한 번이라도 무전여행을 떠나본 사람,
한 번이라도 무전 순례를 떠난 사람은 이것을 알 것입니다.
어느 해 여름,
비상금으로 2만 원을 가지고 보름 순례를 떠났습니다.
내내 유혹이 너무 많았고 순례가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완전한 가난의 순례라는 취지를 근본적으로 훼손한 것입니다.
관구 봉사자 직무를 마치고
모처럼 기회를 얻어 한 달 순례를 떠날 때는
5월이기도 하고 나이도 더 먹어서
잠만이라도 따듯이 자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침낭 하나를 가지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침낭 하나가 그렇게 무겁고
그렇게 거추장스러운 짐이 될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제는 그날그날의 머무름이
주님이 마련하신 집에서의 머무름이 못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런 준비도 말아야 하고
아무 것도 지니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의 준비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떠날 때는 떠나는 것이 그렇게 망설여집니다.
싫어도 떠나야 하고 시간에 맞추어야 하는 사업 여행과는 달리
순례 여행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떠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떠나야겠다는 마음이 들면 즉시 떠나야 합니다.
목표를 가지고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보통은 목표가 있을 때 목표성취를 위해 계획을 세우는 것인데
하느님의 Project는 목표는 있지만 계획을 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목표는 계획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표가 있어도 결과는 모르고,
어찌 될지 모르는 결과에 집착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순례의 목표가 평화를 빌어주는 복음의 선포이기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발의 먼지를 털고 떠나면 그만입니다.
평화를 주는데 왜 받느냐고 싸운다면 아주 웃기는 모순일 것이고
평화의 전달이 목표가 아니라 자기 성취가 목표일 것입니다.
이때 복음 선포는 자기 성취에 대한 집착일 뿐입니다.
복음 선포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싫다는데 억지로 권하였기 때문입니다.
열성은 좋지만
그 열성이 상대를 위한 순수한 사랑인지
나를 위한 것인지 의심이 가는 대목입니다.
-경규봉 신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돌보시는 모습을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사랑하고, 농부가 가축을 사랑하듯이 표현한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있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아비가 아들에게 하듯이 그들을 사랑하셨다(출애 4,22-23) 걸음마를 가르치고 안아 키워주고 죽어가는 것을 살려주셨다. 또한 농부가 자신의 소를 정성스럽게 돌보듯이 사랑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겼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 애쓰신 모든 것이 헛일이었다. 율법에 따르면 그처럼 반항하는 아들은 돌로 쳐 죽여야 마땅했다(신명 21,18-21).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 대한 불타는 사랑 때문에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실 수가 없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그처럼 깊은 상처를 입으셨으므로 진노하시는 것이 마땅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진노를 억누르신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출애 21,24)라는 말이 있다. 동태복수법 내지는 동형복수법으로 불리는 이 원칙은 사람들이 만든 법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도록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누가 나에게 잘해주면 나도 그만큼 잘해주고, 나에게 해를 끼치면 나도 그만큼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내가 이만큼 하느님을 예배하고, 기도, 헌금, 선행, 희생과 자선을 행했으니, 하느님께서는 그만큼 갚아주셔야 하며,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갚아주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악한 사람은 그의 악행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선인이 받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악인이 누리는 편안함과 풍요로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이 고통을 받고, 악한 사람이 잘살도록 하시는가 하면서 하느님을 원망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처럼 인간적인 하느님이 아니시다. 우리처럼 계산하고 따지는 하느님이 아니시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다. 자녀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베풀고 희생하는 아버지이시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옛말처럼 부모는 자녀를 모두 사랑한다. 착하고 효도하는 자녀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자녀들, 비난받고 손가락질 당하는 자녀들, 악행을 일삼는 자녀들에 대해서 부모는 더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그들을 사랑한다. 그처럼 자녀를 사랑하고 염려하며 자녀의 행복을 비는 마음이 부모 마음이다. 사람이 이럴진대 하느님께서는 오죽하시랴!
하느님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마태 5,45) 하느님이시다. 왜냐하면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잃었던 아들의 비유(루가 15,11-32)에서 보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집에서 열심히 일하며 나쁜 짓을 전혀 하지 않은 큰아들이나 유산을 모두 탕진하고 창녀들과 놀아나다 돌아온 작은아들 할 것 없이 모두를 사랑하신다. 하느님은 그처럼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이시기에 악행을 일삼는 자들도 회개하기를 기다려주신다.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고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만일 하느님께서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그 대가를 치르도록 하신다면, 과연 살아남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가 지극한 아버지이시다. 우리의 죄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끊임없이 참고 기다리시며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시다.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며 우리의 손을 잡아 이끌어주시고, 인도하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오늘, 우리가 “너무 불쌍해서 간장이 녹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도록 기도하자. 하느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하자.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느끼도록 기도하는 하루가 되자...........◆
-전 열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에게 갈릴래아에 복음을 선포할 때 지켜야 할 지침에 대해서 알려 주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읽다 보면, 야훼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하신 창세기의 사건을 연상하게 합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은 신앙의 아버지가 되었고,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한 첫째 조건으로 아브라함의 그 신앙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바로 ‘하느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이것이 파견되어 가는 제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마음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가 되기 위한 이 전적인 신뢰는 곧 자신의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힘으로는 못하는 것이 없음을 믿는 것이며, 그와 같은 하느님의 권능이 내 안에 계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파견되어 가는 제자들과 세상속에 파견된 우리들에게 다음의 시편은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주님은 너의 그늘, 네 오른쪽에 계시다
낮에는 해도, 밤에는 달도 너를 해치지 않으리라.
주님께서 모든 악에서 너를 지키시고 네 생명을 지키신다.(시편121.5-7)
2. 그리고 오늘 복음 말씀 중에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 8)하신 말씀을 묵상하고 싶습니다. ‘거저 준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은총입니다.”하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아주 잘 알려진 말이죠! 꽃동네란 말만 들어도 우리는 이 말을 떠올립니다. 이 말을 떠올릴 때면 우리는 무척이나 행복하고 많은 것을 가진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실상 이 말을 잊을 때가 더욱더 많습니다. 늘 무엇인가 부족하고 늘 무엇인가 더 가졌으면 하는 생각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느냐고 오히려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는 아무것도 받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거저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요?
지금 자신을 한 번 둘러보십시오. 아무리 간편한 복장을 한 우리도 자신을 둘려보면 어딘가 치장이 있고 주머니 속에는 몇 가지의 물건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의미가 있고, 나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타인에게 나누어 줄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나비효과’입니다. ‘나비효과’는 기상학에서 카오스 이론의 하나로, 기상의 이변을 설명하는 이론입니다. 즉, 북경 하늘에서 나비가 날개짓을 한 만큼의 미미한 상황이 일어나도 그게 연쇄반응을 일으켜 뉴욕에서 태풍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이론입니다. 아주 미소한 것도 기상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 효과는 ‘나비효과’처럼 불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머니의 것을 거저 주어 보십시오. 커다란 은총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움켜쥐면 그것 밖에 얻을 수 없지만, 움켜쥔 손을 펴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거저 주는 것은 이익을 남기지 않고, 거저 주는 사람은 이윤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냥 선물로 주는 것입니다.
나아가 교회가 예수께서 맡기신 일을 하면서, 이익을 생각하고 이윤을 추구한다면 교회는 하나의 기업이 됩니다. 그리고 그 봉사는 장사가 되어 버림을 잊지 맙시다.
끝으로 다음에 읽어드리는 ‘그’는 누구일까요?
[그는 에스컬레이터를 타도 급한 사람을 위해, 가운데 서지 않고 한쪽 옆을 비워둡니다. 고속도로에서도 추월할 때만 추월선을 잠시 이용하고 바로 주행선으로 되돌아 옵니다./ 그는 많은 차들이 앞에서 끼여들기를 하든, 줄을 새로 만들든 묵묵히 자기 줄을 지키며 순서를 기다립니다. 유턴을 할 때도 순서대로 차를 돌립니다. / 그는 화장실에서 화장지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다음 사람을 위해 화장지를 조금이라도 남겨둡니다. / 그는 자기가 마신 일회용 종이컵을 재활용 쓰레기통에 제대로 버릴 뿐 아니라, 누군가 무심코 버린 종이컵과 휴지도 함께 주워서 버립니다./ 그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남을 배려해주려 애를 씁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즐겁게 삽니다.
이런 사람들 덕분에 이 세상이 이만큼이나마 돌아갑니다. 아직은 그와 같은 사람을 자주 만나기가 어렵지만, 이 글을 듣는 ‘나’가 동참하면 그런 사람이 또 한 사람 늘어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바로 여러분입니다.]................◆
-조욱현신부-
열 두 제자들의 파견
예수님은 하느님의 능력을 주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세 가지를 말씀하신다.
1.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2. 전대에 여행비를 가지고 다니지 말라
3.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 당시에는 유대인들의 선생을 랍비라고 했는데 랍비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일에 금전을 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율법이 란 모세가 하느님께 거저 받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모세를 무상으로 가르치신 것과 같이 그대도 그렇게 가르쳐라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서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은 고쳐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 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주고 마귀는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신 것은 바로 유대인들의 관습에 있는 말을 하신 것이다. 즉, 우리가 하느님과 구원에 대해 알고 있는 풍부한 은혜를 다른 이에게 가르칠 때 거저 가르쳐 주라고 하신 것이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주님을 아는 이의 특권이 기도 하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신의 삶의 기쁨 때문에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체험한다.
2. 전대라는 것은 허리띠를 말한다. 유대인들이 띠고 다니던 허리띠는 폭이 넓어서 그 속에 돈을 넣고 다니곤 했기 때문에 허리띠란 곧 전대, 여행 주머니를 말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 자루나 여벌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하신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는 사람의 첫째 관심사는 물질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것을 태도로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인간적인 것에 마음을 쓰지 말고 하느님만을 온전히 신뢰하라는 말씀이다.
3. 일꾼이 자기가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랍비는 율법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보수를 받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을 참으로 듣는 이들이라면 그 랍비의 생활을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그들의 규정을 보면, 랍비를 후원하는 것은 모든 유대인의 사회적 의무다. 랍비가 하느님의 일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자연히 자기의 일에 등한히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후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즉 하느님의 사람은 물질적인 것에 결코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된다는 사실과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합당하게 돌봐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사와 백성에게 동시에 다같이 의무를 부과하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마음으로 이러한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지 나 자신을 성찰하면서 또한 우리 전체 공동체가 이러한 자세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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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저 주어라
-김경식 몬시뇰-
사도들은 앓는 사람을 고쳐주고, 나병환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등 여러 가지 권능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진리임을 입증하는 수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권능을 감탄하면서 사도들을 부러워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권능을 사고 싶어 돈을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8).
복음선포에 있어서 물질에 대한 탐욕은 금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밤에는 호구지책으로 일하고 낮에는 복음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내가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한다는 이 긍지만은 아무도 빼앗지 못할 것”(1고린 9,15)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선교사는 아무런 대가없이 일한다는 원칙이 사도시대부터 있어왔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신자들이 알아서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줍니다. 선교사가 돈에 욕심을 부리면, 구설수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신자들은 자기들이 못 하는 것을 선교사들이 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대에 어긋날 때는 실망합니다. 깨끗한 양심으로 하느님 나라를 외치는 선교사들의 생활이 설득력을 갖습니다.
예수께서 선교사들이 돈에 욕심을 낼까 걱정이 되셔서, 배낭, 여벌옷, 신발, 지팡이도 가져가지 말라(9)고 하십니다.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지할 때, 하느님께서 책임을 지신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는 것도 금하십니다. 여러 집을 다닌 만큼 구설수는 더 많아질 것이며, 한 집에 있으면 사람들이 필요할 때 선교사를 쉽게 찾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전파에 방해되는 어떤 요소도 다 배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다 챙기면, 하느님께서 하실 일이 없어집니다.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맡기는 것이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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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어느 날 다윗 왕이 궁중의 한 보석 세공인을 불러 명령을 내렸습니다.
“나를 위하여 반지 하나를 만들되 거기에 내가 매우 큰 승리를 거둬 그 기쁨을 억제하지 못할 때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어라. 그리고 동시에 그 글귀가 내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는 나를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하느니라.”
보석 세공인은 명령대로 매우 아름다운 반지 하나를 만들었지요. 그러나 그곳에 적어 넣을 적당한 글귀가 생각나지 않아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혜롭다는 솔로몬 왕자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지요.
“임금의 황홀한 기쁨을 절제해 주고 동시에 그가 낙담했을 때 힘을 복돋워 드리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떤 말을 써 넣어야 할까요?”
그러자 솔로몬은 곧바로 대답했습니다.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
“임금님이 승리의 순간에 이것을 보면 곧 자만심이 가라앉게 될 것이고, 임금님이 낙심 중에 이것을 보면 이내 표정이 밝아질 것입니다.”
솔로몬의 지혜가 돋보이는 순간이 아닌가 싶네요. 정말로 모든 것은 다 순간이고, 곧 지나가 버리는 것임을 알 때, 우리는 성공이나 승리의 순간에도 지나치게 흥분하거나 교만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패나 패배의 순간에서도 지나치게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그 순간에 얼마나 집착을 하고 있는지요? 분명히 곧 과거의 한 사건에 불과한 일들인데도 불구하고, 그 과거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지요?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병자를 치유해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시지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바로 제자들의 교만을 염려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병자를 치유하고 마귀를 쫓는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따라서 이렇게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한다고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거저 받았음’을 분명히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절망도 염려하셨던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세상의 기준으로 봤을 때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지요. 따라서 그들의 출신 성분을 알고 우습게 보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날 때 얼마나 힘들까요? 바로 그 순간에는 발의 먼지를 털어냄으로써 그 사람과 그 마을에 상관없음을 표시하라고 하시지요.
주님께서는 우리들 모두가 과거에 연연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느님 나라라는 확실하고 분명한 미래를 위해서 지금 이라는 현재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이 말을 기억하면서 지금을 행복하게 만드는데 최선을 다 하십시오.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
과거에 연연하지 맙시다. 지난 일일 뿐입니다.
빠다킹신부
평화
-여성국 신부-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나면 나누는 인사말이 바로 평화, 곧 ‘샬롬’입니다.
배고픈 시절 “식사 하셨습니까?”라는 말이 일상적인 인사였던 우리들처럼
수백 년간 나라 없이 떠돌아다닌 그들에게는 평화가 가장 절실하기 때문에
그런 인사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샬롬’이라는 단어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샬롬’이라는 단어를 평화의
인사말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억압받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본다면 ‘샬롬’은 평화의 인사가 아니라 그들을 약탈해서 얻은 평화를 의미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들에게 ‘샬롬’은 억압을 요구하는 인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사용하는 ‘평화’라는
단어에 이중성이 있음을 진즉 잘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평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저 편하게 대충대충 사는 것이 평화라고 생각하는데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치열한 영적인 싸움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평화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평화를 받아들이는 이들의 조건을 말씀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평화를 원합니까? 시련과 어려움이 뒤따르더라도
참된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원해야겠습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백남국 신부-
그런데 어느날 성체 앞에 앉아 있다가 ‘적게 지니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이처럼 적게 가지고도 홀가분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필시 저처럼 혼자 사는 사람이거나 다른 사람을 부양할 의무가 없는 사람이겠지요. 아니면 가는 곳마다 필요한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 사람이거나.
그러고 보면 적게 가졌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 비해 참 팔자 좋게 사는 부끄러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게 지녔다고 흐뭇해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요구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제대로 지니고 살아야겠습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삶만이 온전히 주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음을 강조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주님, 제 삶이 가식적인 가난함이 아니라 진정으로 청빈의 정신을 알고 살아가는 하루가 되게 도와주십시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도 돈도 지니지 마라.”
-양승국신부-
<우리가 가장 예수님을 닮을 때>
한 피정 강의를 가서 느낀 것입니다. 오신 분들 얼굴을 쭉 한번 훑어보니 금방 필이 오더군요. 많은 분들께서 나름대로 ‘한 사연’씩, ‘한 십자가’씩 지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마음 터놓고 하소연할 곳은 하느님뿐이라고, 최종적인 해결책은 그분만이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안 분들이었기에 다들 편안해보였습니다.
열심히 하느님께 매달리는 모습들, 간곡히 부탁드리는 모습들, 간절히 하느님의 은총을 기다리는 모습들 앞에 저도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분들 앞에 어쩔 수 없더군요. 원칙만을 되풀이해서 강조할 수밖에.
“여러분들, 부디 힘내십시오. 그리고 십자가가 너무 무겁다고 느껴질 때 마다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면 질수록 우리는 가장 예수님을 빼닮은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비록 힘겹지만 지금 우리가 지고 있는 이 십자가야말로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가장 큰 은총의 도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부부는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닮습니까? 매일 같은 음식을 먹어서? 같은 비누를 써서? 같은 아파트에 살아서?
닮는 가장 큰 이유는 동고동락(同苦同樂)하기 때문입니다. 같이 울고 같이 웃고, 같이 고통당하고, 같이 십자가를 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십자가 불평불만하지 말고 꿋꿋이 견뎌나갈 때,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얼굴은 거룩하신 주님의 얼굴로 변모되어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대전에 나아갔을 때, 당신과 꼭 빼닮은 우리의 얼굴을 보신 예수님께서 엄청 기뻐하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목실습의 현장으로 파견하시면서 몇 가지 중요한 지침과 행동강령을 전달하십니다.
복음 선포를 하면서 절대로 민폐 끼치지 말 것을 당부하시는가 하면, 복음 선포에 장애가 되는 사람들과 싸우거나 다투어서 분란을 일으키지 말 것도 당부하십니다.
그리고 복음 선포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이렇게 요약해서 전달하십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쫒아내어라.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교회가 취해야할 노선이 무엇인지 아주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 받은 사람들, 너무도 큰 십자가 앞에 어쩔 줄 몰라 서성이는 사람들, 환자들과 임종자들에 대한 치유 활동 및 위로, 봉사, 이를 통한 하느님 나라의 선포, 바로 그것입니다.
보다 적극적인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위해, 가난하고 불행한 백성들을 위한 투신을 위해 교회는 늘 자신의 발밑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몸집이 비대해지면 비대해질수록, 소유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청빈생활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자기 한 몸 챙기기에 바빠집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봉사, 복음 선포와도 같은 본질적인 사명에서 멀어집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도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존재 자체의 선물
-이수철신부-
좋아하는 사람은 빈손으로 와도 반갑습니다.
존재 자체가 참 좋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좋아하지 않는 이는
아무리 큰 선물을 갖고 와도 그다지 반갑지 않습니다.
오히려 짐스럽기까지 할 겁니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선물보다
마음이 담긴 따뜻한 말 한마디가 백배 낫습니다.
문득 아주 예전에 어는 분에게 동양란을 선물 받고
즉시 써드린 글이 생각납니다.
“당신 존재의 향기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존재 자체만으로 향기롭고 평화로운
난(蘭)같은 당신입니다.”
그렇습니다.
존재 자체가 최고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고 원하십니다.
하느님 앞에 가지고 갈 건,
우리의 존재 자체인 믿음, 희망, 사랑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당신을 배신한 백성들을 향해 호소하시는,
일방적 짝사랑에 지친 하느님의 호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끊임없이 존재를 선물하시는 하느님이요,
그 선물이 거부되었을 때 하느님의 실망은 얼마나 크겠는지요?
무한한 연민과 인내의 하느님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고,
다만 존재 자체만 선물하라 하십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은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은 깨끗하게 해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주님으로 충만한 내 존재가 바로 하늘나라요,
이런 존재를 선물할 때 발생하는 기적이요 치유입니다.
주님께 거저 받은 내 존재의 선물이니,
이웃에게 거저 내 존재를 선물하라 하십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내 존재의 선물과 더불어 주님의 평화를 선사하라 하십니다.
사실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가진 것 없어 주지 못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선물로 존재하는 한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내 존재를 선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유에 덮여 보이지 않는 우리의 존재 같습니다.
소유에의 집착이 존재를 상실케 합니다.
알게 모르게 소유에 오염되고 변질되어가는 마음들 같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존엄한 인간의 ‘존재 가치’가 ‘상품 가치’로 전락된
오늘날 자본주의의 현실입니다.
소유냐 존재냐, 돈이냐 하느님이냐,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선물은 존재 자체의 선물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 말씀과 성체로 당신 존재를 온전히 우리에게 선물하시며,
우리 역시 전 존재를 주님께 봉헌합니다.
“주님, 주님의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주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시므로
우리 모두 치유 받아 구원되는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아멘.
† 그리스도의 얼굴이 없는 교회는?
-박상대 신부 -
많은 제자들 중에서 12명이 특별히 선발되어 사도로 임명되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와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가나안 사람 시몬과 가리옷 사람 유다가 뽑혔다. 사도행전은 추가로 유다를 대체한 마티아(사도 1,16-26), 그리고 바울로와 바르나바(사도 13,2)를 사도로 소개한다. 그들은 학생의 신분과도 같은 제자(弟子)였다가 이제는 전권대사의 의미를 가진 사도(使徒)로 임명되어 파견되는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사도들이 파견되는 장소는 이방인들이 사는 곳도 아니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도 아닌, 오직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길 잃은 양들에게로 국한되었다. 그들에게 가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마태오복음의 독자(讀者)가 우선적으로 유다인, 또는 유다인 계통의 그리스도인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열한 제자들에게 온 세상의 모든 사람과 세상 끝까지를 대상으로 한 복음선포를 지상 최대의 명령으로 주실 것이다.(마태 28,19)
사도들에게 대한 예수의 파견설교(10장)가 계속된다. 제자들이 나가서 해야 할 일은 스승인 예수께서 해오시던 일과 같다. 우선 하늘나라의 도래와 그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그 표지로 구마기적과 치유기적을 행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행하게 될 기적의 능력은 예수께서 거저 주신 것이므로 그들도 거저 베풀어야 한다. 그들은 성과도 얻겠지만 실패도 맛보아야할 것이다.
아울러 예수께서는 아주 엄한 여장규칙(旅裝規則)을 제시하신다. 이 규칙에 의하면 어떠한 여벌의 것은 아무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가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의 철저한 청빈(淸貧)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공동체의 의무도 암시하신다.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 자격은 철저히 복음선포에 메여있다.
복음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예수의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복음을 수용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선물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비는 평화의 인사는 단순한 예의의 표현이 아니라 복음의 수용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은 초창기 그리스도교의 성장시기에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00년이 지난 오늘날 현대의 그리스도교에도 똑같은 의미를 가질까 하는 의문이 든다. 사실 그리스도교의 전성기를 맞이한 중세시기 이후 교회 안에서는 오늘 복음이 제시하는 선교규칙(宣敎規則)을 언급하기를 꺼려하고 있다. 그 원인은 전적으로 교회 안에 있다. 교회는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기는커녕 거저 받은 것을 미끼로 부(富)를 축적하였다.
가난하고 길 잃은 양들을 찾기보다는 있는 자의 편을 들어 그들의 정치와 경제에 크게 관여하였다. 사도행전의 기록이 보여주듯이 신약성서 시대까지 있었던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몰아내며,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 살려내는 능력도 사라져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권력에 복종하지 않는 무리들에게는 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 발에 묻은 먼지를 터는 일만큼은 잘했다는 것이다. 단죄하고 파문하는 일이 교회의 일상(日常)이 된 셈이다.
현대의 교회 모습도 중세기 이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첫째, 오늘날 대부분의 복음선포자들에게 구마의 능력도 치유의 능력도 없어 보인다.
둘째, 선교상의 철저한 무소유(無所有)원칙이 자기 합리적인 이유로 거세(去勢)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가톨릭교회의 2,000년 역사를 통틀어 이 원칙을 신중하게 받아들였던 사람은 몇 안 된다.
셋째,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릴 정도까지의 단죄(斷罪)’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오늘날 선교방법은 선교대상의 문화적 수용과 더불어 타협적으로 이루어지며, 오히려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신자(信者)들과 ‘냉담자(冷淡者)’들에 대한 내부지향적 사목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교회이며, 누구로부터 파견된 교회인지?” 교회는 오늘 복음의 선교규칙을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지 않도록 다시금 깨우쳐야 한다.
교회는 오늘 복음에 자신의 방향을 다시 설정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복음을 입에서 입으로 전하기보다는 손에서 손으로 전해야 하며, 병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려는 기적보다는 인간을 존중하고 생명을 사랑하며,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려는 노력으로 가진 바를 서로 나누면서 세상에 정의와 사랑의 기적을 일으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잃게 될 것이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10,7-12)
-유 광수신부 -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 내어라.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열 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분부하신 말씀이시다. 즉 사도들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그들의 사명을 알려주신 말씀이다.
과연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면 그 소식을 듣고 기쁘게 받아들일까? 가끔 전철에서 "예수를 믿으십시오. 예수 믿고 천당에 가십시오."라고 외치는 사람을 볼 때가 있다. 그러나 나를 비롯하여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혀 관심이 없이 지나쳐 가거나 아니면 이상한 사람이라는 눈빛을 주면서 지나간다. 사실 "하늘 나라"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끌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사는 일도 바쁜데 무슨 하늘 나라에 대해서 생각할 틈이 어디 있느냐는 반응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관심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지 하늘 나라에 가서 행복하게 사는 일이 아니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하루 24시간을 지내면서 하늘 나라에 대해 생각하고 지내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또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거의 이 세상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를 생각하며 살지 하늘 나라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두고 있으며 하늘 나라에 가서 산다는 것을 갈망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이처럼 "하늘 나라"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큰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 이처럼 하늘 나라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한다는 일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인가?라는 회의를 갖을 때도 있다.
그렇다면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과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사실 우리 자신들도 하늘 나라에 대해 말하면서 이 세상에서 좀 착하게 사는 이야기 이외에 새로운 것을 이야기 하지 못한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 대해 사람들이 호감을 갖을 수 있도록 재미있고 기쁘게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우리 자신들도 아직까지 하늘 나라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그리고 가까이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서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눈으로 확인되고 기뻐하고 놀랄 수 있는 일들을 하라고 분부하셨는지 모른다. 즉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표지로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살려 내고 불치의 병이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나병 환자들을 깨끗이 고쳐 주고 마귀들을 쫓아 내도록 하셨는지 모른다. 정말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에 대해 기뻐할 것이고 놀라워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만 두더라도 아마 복음을 선포하는 우리 자신부터도 놀랄 것이다. 그러니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살려내며 나병환자들을 고쳐 주는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라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할 수 있고 또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믿을 것이다. 정말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면 오늘 복음을 전하는 일은 얼마나 신이 나고 보람있는 일이겠는가?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면 아마도 교회는 사람들로 넘쳐날 것이고 예수님이 음식을 먹을 겨룰 조차 없었다고 할만큼 성직자 수도자들은 교회를 찾아 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눈코 뜰새없이 바쁠 것이다. 교회를 짓는 일도 쉬울 것이며 시노드 같은 번잡스러운 일도 필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오늘 날 교회가 또 복음을 선포하는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지만 앓는 이들을 고쳐주지도 못하고 죽은 이들을 살려내지도 못한다는 데 있다. 이런 기적이 일어나야 할터인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도 힘 빠지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아무런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또 놀라지도 않는다.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니 하느님한테 받은 은혜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못한다. 그래서 모두가 맥빠지고 조금 교회에 나오다가 이런 저런 핑계를 되고 떠나가고 있다. 이것이 오늘 우리 교회가 안고 있는 어려움이다. 아니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선포해야하는 하늘 나라란 무엇인가? 무엇을 선포한다는 것인가? 과연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살려내고 나병환자들을 깨끗이 고쳐 주고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하늘 나라란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의 법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이고 그 하느님의 법은 복음이다. 따라서 하늘 나라를 선포한다는 것은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이다. 하늘 나라란 이 세상의 법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법인 복음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이다. 지금까지 이 세상의 가치관, 행복관에 의한 삶에서 복음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나라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 선포하신 복음에 의해 내 삶의 의미를 깨닫고, 내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 지를 깨닫는 삶이다. 복음을 모르는 것이 지금 우리가 앓고 있는 병이며, 복음에 의한 새로운 삶을 살지 않고 세상 것에 얽매여 살고 있는 것이 죽은 이들이며 나병 환자들인 것이다. 반대로 이 세상 것에 의한 삶이 아니라 복음에 의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 받는 것이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남이며 나병에서 깨끗이 치유 받는 것이다.
사도들은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가까이 온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각자가 해야할 일이다. 소를 강가에까지 끌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하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사도가 하늘 나라를 가까이 가져다 줄 수는 있지만 그 가까이 와 있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각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가까이 와 있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선포된 복음을 깨닫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복음을 내 마음에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그 때부터 서서히 그 동안 내가 앓고 있던 병들이 치유되고 죽었던 내 영혼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할 것이며 나병이 깨끗이 낫고 마귀가 나가는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오늘 우리 안에서 이런 기적이 일어나도록 복음을 올바로 알아듣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해보자. 그러면 반드시 하늘 나라란 어떤 나라인지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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