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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세례
오늘은 예수님 세례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을 묵상할 때면,
예전에 어떤 수녀님이 제게 말씀해 주신 것이 생각납니다.
그 수녀님이 예전에 시골 어떤 본당에서 실제로 경험하였던 일이라고 합니다.
어느 본당이나 예비자 교리를 가르치는 일은 대개 수녀님들께서 하시는 것이어서,
그 시골 본당에서도 그 수녀님께서 늘 하던 대로 예비 신자 교리를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수녀님이 애쓴 덕택에 예비 신자들 대부분이 교리 공부를 잘 마치고,
이제 세례를 받기 전에 마지막 면담을 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수녀님께서 예비 신자들과 면담을 하시는 중에
약 90세 정도의 할아버지 한 분이 오셔서 갑자기 눈물을 흘리시더라는 것입니다.
당황한 수녀님은 “할아버지! 왜 그렇게 슬퍼하세요?” 하고 여쭈어 보았는데,
그 할아버지 대답이
“제가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면서도 그 독한 일본 사람들이
창씨개명을 하라고 하는 것을 듣지 않고 부모님이 주신 제 이름을 잘 지켰는데,
이제는 제 이름을 버리게 되었으니…….
그것이 너무 슬프고 부모님께 죄송스러워서 우는 것입니다.” 하더랍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은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겠지만,
우리가 받은 세례의 소중함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일화라고 하겠습니다.
약간은 새삼스런 말이지만,
새해를 맞이한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으므로 이참에 우리가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교회가 허락한 세례성사의 기쁨을 잠시 되찾아 보아야 합니다.
누구나 새해를 맞이하면서 각자 나름대로 자신의 소망을 마음에 새겨보듯이,
지난해를 떠나보내면서 저는 새해에
‘제가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무엇을 더 해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여러 날을 고민하여 보았습니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신자 분들도
저와 같은 고민을 하면서 지난해의 마지막을 보냈을 것 같습니다.
그런 고민을 해결하는 하나는
아무래도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즉 올해를 살아가면서 우리 신자들이 앞으로 더 충실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는 묵상을 해야 합니다.
오늘 루카 복음에서 세례 받은 예수님을 살펴보면,
요즘 열심인 신자들이 자녀들을 세례 받게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는데,
그때 예수님 부모님은 어린 예수님께 세례를 받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요셉 성인이나 성모 마리아께서
어린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기회를 빼앗겼다고 말하기도 곤란합니다.
즉 광야에서 고독하게 수행 생활하면서 하느님 복음을 선포하였던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기 전에는 엄밀한 의미의 세례식이라는 것을
예수님 부모님은 찾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성장하시고 3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서 세례를 받으시지만, 이것마저도 이름 없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시면서 악마의 유혹을 극복하신
(요즘 우리가 세례를 받기 위해서 6개월 동안 ‘예비자 교리’를 받으면서 준비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정도로) 강도 높은 준비를 하신 후의 일입니다.
그 덕분에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부담스러워하시는,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정하시는 가장 완전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가 적어도 6가지는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모든 인간은 누구나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동시에,
만민에게 세례의 모범을 보이시기 위한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게’하기 위한 것입니다.
셋째는 세례자 요한이 베푸는 세례를 인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넷째는 세례자 요한을 통해 성부와 성령께서
예수님께 베푸시는 사랑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회개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섯 번째는 예수님께서 발하시는 신비로운 힘으로 요르단 강물을 축성함으로써
세례의 물에 하느님 능력을 부여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섯 번째로 이 세례로써 유다인의 할례를 폐지하고,
새로운 그리스도의 세례를 설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예수님처럼 세례를 받기 위해서
광야에서 고독하게 기도하거나 단식하는 준비는 하지 못했지만,
하느님께서 우리가 세례 받기를 원하셨기에
부족한 가운데서도 이 귀중한 세례성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모범을 따라 이미 세례를 받은 것이므로,
우리 모두는 세례를 받는 그때부터
예수님처럼 살아가기 위한 출발을 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즉 이 세례를 통해서
우리 모두는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가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찾아갈 줄 아는 이타적인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가족을 지금보다 더 사랑하고,
마음으로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강송수 에지디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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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생각과 달리 이기적인 언행이 앞서 후회를 하곤합니다. 행동과 의사표현 전에 한번 더 예수님의 뜻에 벗어나지 않을지,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표하는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습관을 들이겠습니다. 주님 온유함을 잃지 않는 은총을 주옵소서, 신부님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