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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15일 목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보나벤투라 성인은 1218년경 이탈리아 바뇨레아에서 태어났다. 20대 초반에 프란치스코 수도회인 ‘작은 형제회’의 수도자가 되었으며, 파리 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이후 철학과 신학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성인은 알바노의 추기경이 된 후 1274년에 선종하였다. 성인은 중세의 뛰어난 철학자이며 사상가로서 존경을 받았으며, 1482년 식스토 4세 교황이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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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마태 11,28-30)
Come to me,
all you who labor
and are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말씀의 초대
백성의 상황이 위기에 놓이고, 모든 계획과 시도는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심판을 앞당겨 주시도록 주님께 간구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을 믿고, 그 계획의 실현을 위하여 몸 바치는 백성은, 현재의 상황이 제아무리 전망이 없어 보여도,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주님과 그분의 정의를 찾아 나서는 백성이 장차 있을 부활의 신비를 맛보게 되리라는 것이 예언의 신탁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불행한 사람들의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시고 자유를 주시어 온전히 쉬게 하신다. 삶이 고단하더라도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은 편안한 안식을 누릴 것이다. 주님께 오롯이 순명하는 것은 새로운 멍에이며,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것은 신앙인들의 가벼운 짐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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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모든 생명은 참으로 살려면 제대로 쉬어야 합니다. 숨을 쉰다고 할 때의 ‘쉼’은 숨(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숨을 살리는 것입니다. 사람도, 모든 생물도, 땅도, 장기(臟器)도 쉬어야 합니다. 돼지도 건강 상태가 나쁠 때는 스스로 단식한다는 것을 농민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병은 영양 부족, 일 기피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과로와 과식이 병의 큰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생명을 쉬지 못하게 하는 짓은 생명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
시련은 늘 은총입니다. 그렇지만 시련이 은총임을 깨달으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왜 이러한 시련이 주어지는지, 어찌하여 이러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 신앙을 짐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가끔 신앙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짐을 지우려고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에누마 엘리쉬’라는 서사시에 따르면,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신들이 그들의 귀찮은 잔심부름을 시킬 수 있도록 사람을 창조하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작가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당신이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에덴 동산에서 동물들을 다스리며 행복하게 살도록 하시려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인간의 참된 행복입니다. 주님을 위해 봉사해 본 사람들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짐스러운 것이 아니라 기쁨이요 은총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신앙은 짐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을 우리 신앙인 모두가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쉼은 틈, 여유, 여백, 비움입니다. 쇠붙이도 늘었다 줄었다 하기에, 철길을 만들 때 빈틈을 냅니다. 빈틈이 없는 사람은 친구도 없습니다. 숨을 쉬는 것도 빈 구멍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비울 때,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실 수 있고, 이웃이 내 안에서 편히 쉴 수 있습니다. 비운다는 것은 욕심에서 해방한다는 것이며, 이웃과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쉼은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쉬시는 분, 하느님과 함께 있을 때 참으로 쉬는 것이며, 하느님 안에서 쉬는 사람이 성인(聖人)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정호경 신부, 『해방하시는 하느님』, “쉼은 무엇인가?” 중에서).
그러려면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애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여쭈어 보면, 어느 날 내 몫으로 주어진 시련을 깨닫게 됩니다.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고통의 본질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시련은 아픔이 아닙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는, 오늘 복음에서 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선물을 주실 때 늘 고통이라는 보자기에 싸서 주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보자기를 풀다가 그만둔다고 합니다. 조금만 참고 견디면 보자기 속의 선물을 만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미리 실망하고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주님께서는 선물을 거두어 가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기다리십니다. 사람들이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그러니 시련은 진정 은총입니다. 주님의 선물을 감싸고 있는 포장지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시련의 의미를 축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요? 은총이라기보다는 꾸중으로 받아들이며 살았던 것은 아닌지요?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주시는 분이지 징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고통스럽고 힘들 때일수록 - 나명옥 신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주님께서는 과연 우리에게 어떤 분인가를 묵상해 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 스스로 고통을 이겨낼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무엇보다 이 말씀에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났고,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이 있었음에도 어떤 원망이나 불평 없이 묵묵히 성실하게 제 갈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늘 함께해 주신 주님은 저에게 늘 힘과 위로가 되어주었습니다.
아무리 고달프고 힘들고 먼 길이지만 즐겁게 곧장 갈 수 있는 방법은 사랑하는 사람, 마음이 맞는 사람과 그 여정을 함께 갈 때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가벼운 것도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삶 자체가 멍에와 짐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고통스럽고 힘들 때일수록 예수님을 초대하고 그분께 의지할 때 나도 모르게 그 모든 문제들을 이겨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의 경우에는, 별것도 아닌 문제를 가지고 오랫동안 지치고 힘들어 한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것을 바라시지 않으십니다. 단지 어렵고 힘들 때 당신 앞에 겸손하게 나와 도움 청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것들에서만 위로를 찾으려 하기 때문에 더욱더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
†♡†♡†♡†♡†♡†♡†♡†♡†♡†♡†♡†♡†♡†♡†♡†♡†♡†♡†♡†♡†♡†♡† 긍정의 힘 - 기정희 수녀- 최근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 중에 「시크릿」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은 오프라 윈프리 쇼 홈페이지를 마비시키고 해리포터 시리즈를 묶어버린, 세계인이 경탄한 책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과연 무엇이 이 책을 이렇게 유명하게 했을까? 제목 그대로 비밀의 문을 열면 과연 인생을 뒤바꿀 마법 같은 법칙이 존재할까? 우리 내면에 잠재된 숨겨진 힘을 이해하고 모든 측면에서 기쁨을 발견하게 될까? 자신의 삶에서 이 법칙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멋진 이야기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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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잠자리 날개보다 더 가벼운> 멍에란 소나 말의 목에 얹는 구식 농기구입니다. 요즘도 시골에 가면 소의 힘을 빌려 밭을 가는데, 그때 꼭 필요한 것이 멍에입니다. 우선 멍에를 소의 목에 걸고, 거기에 쟁기를 연결해서 밭을 가는데, 기계보다야 못하지만, 사람이 하는 것보다는 수십 배의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멍에란 것, 소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말만 들어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져오는 물건입니다. 멍에를 메야하는 소 측에서 보면 멍에는 ‘쌩고생’의 원인입니다. 주인이 멍에를 얹는 순간, ‘오늘도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들겠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녕 내 멍에는 편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속박, 불편함, 고생의 대명사인 멍에를 보고 편하다고 하시니 어찌된 말씀입니까? 이런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백성들의 목 위에는 엄청난 무게의 멍에가 하나씩 얹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지상주의였습니다. 위선적 신앙이었습니다. 당시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율법을 통해 백성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기보다는 율법으로 인해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지나치게 세부적인 율법조항들을 끝도 없이 제정해서 백성들의 어깨위에 얹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뒤에서 채찍질까지 해댔습니다. 견디다 못해 터져 나오는 백성들이 신음소리가 하늘까지 닿았습니다. 종교를 갖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율법이나 계명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실 하느님께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보다 자유롭고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종교로 인해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메시아로,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런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즉시 백성들의 목 위에 걸쳐져 있던 형식적이고도 위선적인, 철저하게도 이중적이면서도 그야말로 ‘웃기는’ 율법주의라는 멍에를 끌러주십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무거웠던 멍에로 인해 상처 난 목 부위를 어루만져주십니다. 치료제를 발라주십니다. 그리고 잠자리 날개보다 더 가볍고, 솜털보다 더 부드러운, 착용감이 너무 좋은 새로운 멍에, ‘사랑의 멍에’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토록 우리의 예수님은 정녕 참된 해방자 주님이셨습니다. 참 위로자요, 참 치유자셨습니다.
그 모습을 곁에서 늘 바라보던 조지의 기억에, 어머니는 언제나 열심히 일하며 불평 없이 삼 남매를 키우신 성실한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어머니는 어린 조지에게 늘 이렇게 당부했었다고 합니다.
“나는 나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을 위해 일한단다. 너도 크면 너 자신을 위해 일하지 말고 남을 위해 일해라.”
조지는 어머니의 말씀을 한시도 잊지 않고 가슴에 담아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작은 사진관에 취직해 성실하게 일하면서 기술을 익혔지요. 얼마 뒤 단골손님이 제법 많아진 조지는 독립해 필름 연구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곧 그는 간편한 휴대용 필름을 만들어 특허를 받았고 1888년에는 새로운 카메라도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조지 이스트먼이 바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코닥 필름’을 세운 사람입니다. 그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지요. 그러나 재산의 대부분을 대학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이는 어린 시절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어머니의 모범이 결국은 자녀에게 옮아갔고, 그 자녀의 실천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한 사람의 모범이 많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모범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셨지요. 그리고 오늘 복음을 통해 이렇게 전해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바로 우리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는 모범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모범을 우리가 배우고 따를 것을 명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이러한 안식을 얻어야 할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만이 그 안식을 얻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과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베풂은 당신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단순히 나에게 끝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 곳곳에 울려 퍼지는 사랑, 변하지 않고 영원한 사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바로 나에게서 끝내려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모범을 어떻게 하십니까? 안식을 주신다는 그 모범은 내 사랑의 또 다른 모범을 통해서 더욱 더 완성됩니다.
주님의 모범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도록 합시다.
이 책은 이렇게 주장한다. 1단계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구하라. 2단계로 믿어라, 당신이 원하는 것을 이미 받았다고. 3단계는 받아라! 그리고 이미 받았을 때 느낀 감정을 느껴라. 이 원리는 이미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열망하라, 믿어라. 우주의 원리, 끌어당김의 법칙, 우주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구심점으로 그분께서 끌어당김의 중심에 계신 분이심을 우리는 믿는다.
이 책을 통해 배운 행복, 성공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긍정의 힘’이다. 죄는 죄를 낳고, 유혹은 유혹을 낳고, 거짓은 거짓을 낳듯이 부정은 늘 부정을 낳는다. 그러나 긍정해 보라. 내가 달라지고 주변이 달라지고 세상이 달라진다. 되는 일이 없다고 짜증내기보다는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기대와 희망과 호기심을 발동해 보라. 모든 시간이 기적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 기적이 얼마나 감사한지 알게 될 것이다.
긍정의 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예수님의 삶은 실패의 삶이며 십자가는 치욕이요 실패의 상징이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라. 십자가는 역설적인 긍정의 힘을 내포하고 있다. 전폭적인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의 상징이요, 인류에 대한 사랑의 절절한 응답인 십자가야말로 비밀 문의 열쇠가 아닐까? 목숨을 건 사랑의 힘은 우주의 어떤 끌어당김의 법칙보다 강력하다.
주님께서 주신 그 강렬한 사랑으로 오늘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삶의 짐을 어떻게 지고 있는가? 어떤 마음이 내 안에 있는지 들여다보자. 긍정의 힘이 나를 움직이는지, 부정의 아우라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지 살펴보라. 예수님은 철저한 긍정의 힘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신 예수님께서는 나날이 지치고 긴장하며 삶의 무게를 진 우리를 당신께 오도록 초대하신다. 당신 안에서 위안과 휴식을 얻도록.
상징으로 쓰여왔습니다. 율법(613가지 계율)의 멍에에 짓눌려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멋진 제안을 하십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계율들을 짧고 단순하게
바꿔놓으셨습니다. 바로 황금률(7,12)과 사랑의 이중 계명(22,34-40)입니다.
의무의 짐을 사랑의 짐으로 바꿔 놓으신 것입니다. 사랑 앞에서 짐은
더 이상 짐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은 멍에 자체를 악으로 여기시거나
아예 없애주시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온유하고 겸손하신 목자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몸소 멍에를 지십니다.
사랑이 그런 거라는 것을 보여주시듯 먼저 멍에를 지셨습니다.
수도생활의 규칙들을 멍에로 여겼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외를 좋아하고,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 장상 수녀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구속들이 오히려 예수님께로 나아가도록 자유를
주었음을 깨달아갑니다. 의무기도 시간들이 내가 일에 끌려 다니지 않도록
도와주고, 봉쇄구역이 마음의 고요를 지켜주고, 장상에게 순명하는
일이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는 욕망들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하느님과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멍에가 주는 기쁨을 체험할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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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주시는 멍에
-조욱현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하시면서 결론으로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시며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러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들"이란 어떠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가? 그런 사람들이란 무엇보다 하느님을 찾으며 가까이 하고자 노력하다가 어려워서 자포자기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하지만 그렇게 생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지 않아 절망해 버린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또한 자신의 약함과 죄의 짐으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초대하시는 말씀이다.
이러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유대 스승들은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모습을 심판하시고 벌주시며 수백 가지의 율법을 매일의 생활 속에서 강요하시는 그런 모습이셨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참다운 모습을 찾기도 힘들고 따르기에도 크나큰 짐이 되었던 것이다(마태 23,4). 율법은 백성들로 하여금 죄의식만 느끼게 하였고, 율법에 매인 삶을 살게 되었다. 더욱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죄인으로 취급되었고 얼굴도 들지 못하던 처지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제 "내 멍에는 편하다"고 하신다. 이것은 그리스어의 Chrestos인데 "몸에 잘 맞는다"라는 의미가 있다. 팔레스티나에서는 소가 메는 멍에를 나무로 만들었는데, 소에게 멍에를 메우고자 할 때는 목공소로 데리고 가서 치수를 정확히 재고 멍에가 만들어지면 다시 소를 데리고 가서 멍에를 소에 잘 맞게 지웠던 것이다. 그래야 목과 덜미가 스쳐서 벗겨지거나 아프지 않았던 것이다. 즉 소에게 편하고 잘 맞게 만들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며 가까이 가고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예수께서 우리의 짐을 덜어주실 뿐 아니라 우리 몸에 잘 맞는 짐을 지도록 살펴 주신다는 것이다. 그 짐은 바로 사랑의 짐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소년이 절름발이 소녀를 업고 가는 것을 보고 지나가는 어른이 그 모습이 하도 기특해서 "얘야, 아이를 업고 가니 퍽 무겁겠구나!" 하니까, 그 소년이 대답을 하는데, "아닙니다. 무겁지 않습니다. 이 아이는 제 동생인 걸요!" 하였단다. 이와 같이 사랑의 마음으로 지고 사랑의 마음으로 운반하는 짐은 언제나 가벼운 것이고 기쁨과 보람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맞은 짐을 지게 하시며 그것을 충분히 이겨나갈 수 있는 힘도 주시는 분이다. 그것을 우리의 능력 밖에서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기에 이 소년과 같이 사랑의 마음으로 정성껏 천국의 짐을 지도록 해야 하겠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그러한 삶을 주시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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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히 시비하지 마라
-김찬선신부-
오늘의 복음은 이미 여러 차례 말씀 나누기를 하였기에
오늘은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볼까 합니다.
안식.
이 말에는
평화,
평안,
쉼이 내포된 듯합니다.
요즘 저는 시달리고 있습니다.
모기에 시달리고
더위에 시달리고
소음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특히 소리에 민감한 저인데 옆 집 공사로 새벽부터 시끄러워
창문을 다 닫아놓고 있으니 더위가 견디기 힘듭니다.
대야에 발을 담그고 부채로 더위를 식혀도
감당키 어려워 마침내 선풍기를 틀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모기와 더위와 소음이 아닙니다.
여름에 더울 수밖에 없는데
“왜 이렇게 더운 거야?”
공사를 하는 한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데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하고
거부하고 따지는 저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이미 그러한데 왜 그런 거야,
앞으로도 그럴 건데 왜 그런 거야 하고 한심스럽게 따지고 있으니,
이것이 문제입니다.
가만있으면 될 것을 제가 공연히 시비를 걸어
마음의 안식이 없습니다.
모기와 더위와 싸우고
소음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런 쓸 데 없는 고단한 싸움을 그만 두고 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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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호 신부
요즈음 well-being을 지배하고 있는 종합이미지는 “부드러움” 곧 “온유” 입니다. 많은 이들이 부드러운 음식, 색상, 느낌, 배경, 구조 등을 선호하고, 심지어 술까지 순한 것을 즐겨 마시고, 사람마저 부드러운 꽃미남 꽃미녀가 인기입니다.
부드럽고 순함은 많은 매력이 있습니다.
1) 포용력이 높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감싸주고, 안아주고, 품어줍니다.
2) 따뜻합니다. 무엇이나 녹여주고, 풀어주고, 데워줍니다.
3) 생명을 줍니다. 생명체를 싹트게 하고, 자라게 하고, 뿌리내리게 합니다.
4) 느낌이 좋습니다. 언제나 감미롭고, 편안하고, 여유롭습니다.
이런 부드러움과 순함은 예수님의 전유물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그렇게 대하셨습니다. 특히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 병든 자, 굶주린 자, 고통받는 자에게 더욱 온유하셨습니다. 결코, 어떤 상황에서도 성내거나, 분노하거나, 역정을 내지 않으셨습니다. 그 누구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거나, 억압하거나, 강제하거나, 공포스럽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버이처럼, 친구처럼, 누이처럼, 언제나 온유하고 친절하셨습니다. 부드럽고 자상하셨습니다.
이런 “부드러움”은 “겸손”에서 나옵니다. 겸손이란 무작정 남 앞에 자신을 숙이는 비굴함이나 아첨이 아닙니다. 불가항력적으로 자신을 포기하거나, 진리를 외면하는 실패나 무능도 아닙니다.
겸손은 진리를 진리대로,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신감이고, 당당함입니다. 용기이고 힘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겸손하셨습니다. 기쁨과 행복의 순간은 물론, 절망과 고통의 순간에도 그랬습니다. 언제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아버지께 단 한번도 시기나 질투하지 않았고, 거짓이나 위선, 꾸밈이나 가식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까지 그랬습니다. 부모 앞에, 동료 앞에, 이웃 앞에 한번도 거들먹거리거나,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틈나는 대로 섬기고 봉사했습니다.
너나없이 잘나고, 높이 오르고, 큰 자리 잡고, 많이 차지하고 그래서 마음껏 누리려는 세상입니다. 닥치는대로 이기고, 앞지르고, 뭉개고, 누르려는 세상입니다.
참으로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부드럽게 살아야합니다. 하느님 앞에 더 겸손해지고, 사람들 앞에 더 온유해져야 합니다. 특히 가족, 동료, 이웃에게 더 부드럽고 순해져야 합니다. 겸손하고 온유할 때 이사야 말씀처럼 “정의 알게 되고, 인생길 환하게 트여, 만사형통하게 되고, 잘 살게 될 것입니다.” 겸손하고 온유할 때, 무겁고 허덕이는 인생짐 덜어지고, 그 짐 가벼워 질 것입니다.
모든 성인들은 하느님 앞에는 겸손하고 사람들 앞에는 부드러웠습니다. 그래서 강해지고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에게 그 길을 배우고 익혀, 내 인생길을 바로 합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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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가는 신앙
-경규봉 신부-
회중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을 깊이 신뢰하면서 기도드린다. 하느님께서는 의인의 앞길을 닦아주시고 악인을 벌하심으로써 당신의 의를 드러내실 것임을 굳게 믿는다. 때문에 회중은 오직 하느님께 희망을 두며 하느님의 심판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그들이 받는 고통과 어려움은 크고, 이로 인하여 괴로워하지만, 이를 하느님께서 주신 채찍으로 받아들이며 견디어낸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언젠가 주님의 백성이 다시 살아날 희망을 가지며 어려움을 이겨낸다.
고통을 좋아하며 즐기는 사람은 없다. 누구든지 행복을 원하며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한다. 고통이 극심할 때에는 죽음을 택할 생각까지도 한다. 특히 미래가 암담한 현실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기를 바란다.
이처럼 사람이 고통을 피하기를 원하지만 고통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고통은 인간 존재 조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고통은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사람이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하며, 고통을 이용하여 자신을 얼마만큼 승화시키는가에 달려 있다.
또한 고통은 사람에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통해서도 인간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인간의 문제점을 알며, 인간의 자리를 찾게 하시기 때문이다. 고통을 통하여 사람은 자신이 부족하고 나약하며 허약한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다.
자신이 문제점을 많이 가진 존재라는 점을 알게 하고, 교만과 오만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만일 사람이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고 산다면 어떨까? 아마도 하느님을 찾지 않을 것이며, 사람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할 것이다. 병고를 통해서 병을 알듯이 사람은 고통을 통해서 자신을 알게 된다.
수많은 전쟁에 시달림으로써 고통을 겪어왔고, 또다시 강대국 아시리아의 침략을 받은 유다 백성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들이 겪는 고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겪는 고통은 그들이 하느님께 불충실했기 때문에 그들을 채찍질하는 하느님의 사랑의 매였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그 고통을 피해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죽음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고통스러울 때 오히려 하느님께 더욱 매달렸다. 하느님만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하느님만이 그들을 구해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고통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정화시키고 회개함으로써 하느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갔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당신께 희망을 두며 매달리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심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자리를 찾았고, 사람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던 것이다.
오늘날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고통을 당하고 방황하며, 그로 인해 삶을 포기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신앙인은 그러한 고통의 의미를 잘 아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상의 고통을 받으셨음을 잘 아는 사람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 1,24)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처럼 고통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는 사람이다.
고통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허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깨닫는 사람이다. 또한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참 인간의 자리를 찾을 수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고통을 통해서 오히려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이다.
오늘 우리가 겪는 고통을 통해서 자신을 보고, 하느님을 보며,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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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강호성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하느님의 크신 사랑 안에서 좋은 하루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살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무거운 짐이 되고 있었습니다. 근본정신인 사랑과 자비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율법은 힘겨운 짐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태 23,4를 보면, 예수님은 율법학자와 바리세이들에 대하여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모세의 율법이나 아론의 제사법이 당시에 그만한 이유와 그 의의가 따로 있었겠지만 평범한 서민들에게는 크나큰 짐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무거운 짐 진자는 다 내게로 오라!” 하시며, 그 모든 무거운 짐을 당신이 우리에게서 치워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미로운 말입니까!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같이 점점 힘들어져 가는 세상살이 속에서 오늘의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도 희망을 안겨줍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무거운 삶의 무게들을 당신께서 함께 나누어지고 편하게 해 줄테니 당신께 와서 머물고 함께 하자는 초대이지 않습니까? 당신과 함께 하면 그 무거운 짐, 우리를 괴롭히는 갈등과 힘든 생활도 가벼워진다는 초대이지 않습니까? 바리사이와 율사들이 억지로 지워주던 죄의 무게를 덜어주듯이 우리들의 죄의 무게도, 삶의 무게도 덜어 주신다는 말씀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하느님과 함께 하면 현실의 이 어려움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평화로운 날들만 계속됩니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우리가 성당에 가서 기도하거나 수도자나 성직자와 면담을 하면 다 해결이 됩니까? 기도를 해도 응답이 바로바로 오던가요? 혹시 참고 기도하자에서부터 하느님의 뜻을 기다려보자는 답까지는 나오되 현실적인 대답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차라리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서 복채를 좀 내어놓으면 현실적인 예와 아니오가 나오기는 합니다. 때로는 부적까지도 나옵니다. 물론 그런 대답과 부적이 마음의 평안을 주기는 합니다만 그것이 마지막까지 옳은 대답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용하다는 점쟁이, 철학관의 점괘들 또한 우리의 현실을 바꾸어 주지 않습니다. 그저 잠시간의 안정을 줄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당신의 멍에는 편하고 당신의 짐은 가볍다는 그 말씀들이 지금 우리에게는 어쩌면 그냥 이상에 불과 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또는 하나의 최면에 불과 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정한 하느님 체험 없이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않고서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몸으로 살아내기 전에는 오늘 이 말씀들이 하나의 이상이나 최면에 불과할 수 도 있습니다. 용하다는 점잼이 집에서 나오는 말들보다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멍에를 메고 당신에게 배우라고 권고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실상 스승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이의 죄의 짐을 한 몸에 지니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스승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 또한 당신과 당신을 닮은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그 모습으로 살아낼 수 있을 때 진정한 예수님의 멍에가 무엇인지를 알고, 느끼고, 배우고, 살아낼 수 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리스도 예수의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 우리는 어디로 많이 기울어지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겠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때에, 삶의 무게에 짓눌려 허덕일 때, 그 힘든 상황을 이겨내기 위하여 하느님께 매달리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그 무엇들에 기대고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다른 그 모든 것들 위에 하느님을 두고 하느님께 의지한다면 그 어떠한 일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체득하고, 하느님을 따라 산다면 말입니다. 하느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그저 손만 비비고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현실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넘지 못할 산은 없다 했습니다. 하물며 마지막까지 함께 해 주시는 그분이 계신데 이겨내지 못할 십자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스승 그리스도 예수의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볍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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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어제는 동창 신부 모임이 있었습니다. 원래 정기모임은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인데, 어제는 긴급 모임을 하게 되었지요. 왜냐하면 중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신부가 병원 문제로 인해서 잠시 들어왔거든요. 따라서 시간 되는 사람들 모이자고 해서 어제 급하게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는 2명의 신부를 제외한 나머지 9명의 신부가 하나도 빠짐없이 모인 것입니다. 중국에서 공부하느라 힘든 동창을 만나기 위해서 자신의 바쁜 일들을 모두 뒤로 한 채 나온 것이지요. 저 역시 비록 밤에 모이는 것이 무척 부담되지만 오랜만에 동기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약속 장소로 갔고, 12시 넘어서야 간신히 집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피곤했습니다. ‘이제 잠시 뒤면, 곧 일어날 시간이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몸의 피곤함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너무나도 좋네요. 왜 그럴까요? 바로 제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동창들과의 모임이었기 때문에 그 여운이 아직까지도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요?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을 친구와 함께 간다는 것. 이것만큼 행복한 길이 있을까요? 그래서 비록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상황이 놓일지라도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위해서 어떻게든 노력하려고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시지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문득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차별하실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만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조금 여유 있고 편한 짐을 진 사람은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는 안 될까요? 그러나 저의 경우, 즉 동창신부들과의 모임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제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그 행동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겠네요.
바로 당신께서 먼저 이렇게 힘든 삶을 안고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힘없고 빽 없는 사람들과 처음부터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 더욱 더 당신께 가깝게 느꼈던 것이지요. 마치 신학교 때부터 함께했던 동창 신부가 그 누구보다도 편하고 가까운 사람으로 느끼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렇게 많은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어렵고 힘들 때 당신 앞에 겸손하게 나오기를, 그래서 주님 앞에서 참된 위로를 얻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엉뚱한 곳에서 그 위로를 얻으려 합니다. 이 세상의 것들에서만 위로를 찾으려하기 때문에 더욱 더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어렵고 힘들수록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살 길입니다.
그리운 학교 동창과 전화 통화라도 하세요.
빠다킹신부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백남국 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듣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성경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씀이고,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잘 아는 성경 구절입니다. 이 힘들고 피곤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안식을 준다는 말에 혹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꼭 사기당하는 기분이 드는 것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주님을 믿으면 만사가 다 잘 풀리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분께 다가가도 고통은 있기 마련이죠. 예수님을 알고 하느님의 사랑을 알았다 하여 이 세상의 슬픔과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괜한 기대감만 지녔다가 계속되는 고단한 삶에 실망만 더 크게 찾아오기도 합니다.
사실 주님 말씀의 강조점은 그뒤에 나오는 구절이겠지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주님께 다가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당신의 멍에를 메고 배워야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주님의 멍에는 무엇일까요? 사랑의 멍에입니다.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 그 사랑이 당신의 멍에겠지요. 그렇습니다. 똑같은 삶의 무게라 하더라도 당신의 사랑 안에서 그것을 지고 간다면 그 짐이 한결 가볍게 느껴지고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저는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기보다는 이런저런 번뇌에 흔들리는 것을 보니 당신의 멍에를 메는 법을 한참이나 더 터득해야 하나 봅니다. 더 깎이고 깨져서 당신의 십자가 사랑을 더 배워야 되겠지요.
내 멍애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그분과 나 둘만이 남아있는 감미로운 순간> 안식(安息)이란 무엇입니까? 말마디 그대로 ‘편히 쉼’을 의미합니다. 편안한 안락의자에 거의 몸을 파묻다시피 깊숙이 앉아 좋아하는 비디오 한편 보는 것도 좋은 안식이 될 것입니다. 시원한 계곡 흐르는 물 위에 차양을 친 다음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있어도 엄청 편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쉬는 것도 한 두 시간이지 계속 그러고 있다 보면 슬슬 무료해집니다. 지루하고 심심해집니다. 더 의미 있는 휴식이 되려면 그 ‘누군가’ 필요합니다. 결국 가장 좋은 휴식, 그간 쌓였던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안식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그 자체가 가장 효과적인 휴식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경치나, 분위기, 주변 상황은 더 이상 그리 절대적인 요소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면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요, 다른 것 안 해도 괜찮습니다. 그의 옆에 있는 그 자체로, 그의 존재 자체로 가장 감미로운 휴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가장 좋은 안식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 결코 변치 않는 영원한 연인, 다른 모든 사람이 다 변하고, 다 떠나가는 반면 우리가 백발이 되더라도 우리를 떠나가지 않으시는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사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성체 앞에 앉아있는 순간, 미사에 몰입하는 순간, 하느님을 찬미하는 순간, 영적독서에 깊이 심취하는 순간, 깊은 묵상에 잠기는 순간, 이 세상 모든 대상이 내 앞에서 사라지고 그분과 나 둘만이 남아있는 감미로운 순간, 그 순간이야말로 참된 안식의 순간입니다.
- 김대성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멍애는 편하니 내 멍애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멍에라는 표현이 영 귀에 거슬립니다. 멍애가 무엇입니까? 달구지나 쟁기의 채를 잡아매기 위하여 소나 말의 목에 가로얹는 나무....라고 국어사전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멍애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멍애는 부자유스럽게 하여 짐을 잘 지고가도록 강제로 얽어 매는 장치인데, 누가 그것을 스스로 원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멍애를 풀어주겠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 멍애를 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지어주는 멍애가 편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애를 매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멍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우리는 멍애를 싫어하지만 멍애 없는 삶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어떤 형태로든 멍애를 메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지워준 것일 수도 있으며, 가족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의도했건 안 했건 간에 우리 모두는 멍애를 메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어떤 멍애를 메고 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좀 편해 보이고 수월해 보이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는... 이내 사라지고 말 그런 것들에 매달리는 멍애를 맬 것인가, 아니면 참 행복과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그런 멍애를 맬 것인가....우리들은 매일매일 성찰해야 하고 또 선택해야 합니다.
내 멍애를 매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애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이 주신 멍애를 기쁘게 매고 가겠다고 결단했으면서도, 어느새 저는 다른 멍애를 매고 가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때 저는 제자신이 소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독하게 말을 듣지 않고 고집스럽습니다.
예수님의 멍애를 팽개쳐버렸을 때,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멍에에 갇히고 마는 제자신을 봅니다. 멍애에서 벗어나는 길은 멍에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멍애 속에서 평안하게 머무르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내 멍애를 매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애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묵상할수록 깊고 넓은 예수님의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진정으로 주님이 주신 멍애를 기쁘게 매고 갈 수 있는 은총을 다시 한번 간청해봅니다. 그 멍애 안에서 평안하게 머무르고, 안식을 얻을 수 있기를 마음모아 기도드립니다.
-양승국신부-
우리의 지친 마음과 영혼의 치료소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이사 26,7-9.12.16-19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
복 음 : 마태 11,28-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사람은 몸이 아프면 병원을 찾아갑니다. 어디가 아프냐에 따라서 병원도 여러 과목들로 나뉘어지지요. 이가 아프면 치과에, 눈이 아프면 안과에 가고 배가 아프면 내과를 찾는 등 신체 부위에 따라 다양한 진찰과 치료를 받습니다. 그런데 마음과 영혼이 아프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여러분은 마음이 아프면 어디로 갑니까? 마음이 아플 때 어디를 찾아가느냐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마음의 병이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마음이 아프면 몸이 아프게 되어 있지요. 간혹 이 병원 저 병원 아무리 쫓아 다녀보아도 의사는 별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 본인은 아파서 죽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에 병이 난 것이지요.
사람과 짐승의 차이점은 사람에게는 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정신과 영혼이 있지요. 그 정신과 영혼이 병들고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수시로 병원에 들락거리며 치료를 받지만 마음의 병은 치료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심란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은 미아리로 점을 보러 갑니다. 불안하고 어찌해야 될지 모른다며 길을 묻지요. 그런데 대부분 점쟁이들은 나쁜 것을 하나씩 지적하고 넘어갑니다. 불안해진 사람들을 더욱 의지하게 만들어 다시 찾게 해야 하니까요. 예를 들어 결혼을 앞둔 남녀 두 사람이 소위 말해서 궁합을 보러오면 안 맞는 것이 있어서 어느 한 쪽이 크게 다치니 결혼은 안 되겠다고 말하면 그 말을 들은 당사자나 부모들은 쉽게 그 말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다시 가서 그 불운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의논하고 의탁하게 되지요. 결국 점치는 사람의 궁극적인 목적은 돈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어리석은 행위가 지금도 곳곳에서 행해지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점쟁이를 만나서 해결이 되겠습니까? 한편 어떤 사람들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갑니다. 갈 수 있지요. 그러나 정신과 의사들이라고 불안한 마음을 다 치료해 주고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이처럼 만물의 영장인 사람의 정신과 영혼은 어디에서 어떻게 온전히 치유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11,28.29)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당신께로 오라고, 당신이 편히 쉬게 하겠다고, 우리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힘들어하는지 다 알고 있으니 어서 와서 안식을 누리라고 말씀하고 계시지요. 그런데 엉뚱하게도 다른 곳으로 가서 헤매고 다니다가 이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안타까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우리는 이제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다 나에게로 오너라.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느님께로 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먼저 갈 터이니 ??죽음이여, 어서 오라.?‘ 이런 뜻일까요? 아니지요. 하느님께 간다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생각하고 하느님 안에서 쉰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방법은 구약과 신약성경에 잘 나와 있지요. 바로 ??기도?‘를 통해서 입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자들과 성현, 성인들은 조용한 공간에서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세상의 모든 왕국 위에 당신 홀로 하느님이십니다. 당신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2열왕19,15)
유다 왕 히즈키야가 아시리아의 공격 앞에서 하느님께 올린 기도입니다. 이런 고백은 구약성경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구절이지요.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뜻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확인하고 실행하실 때 외딴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다음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1,35)
그것이 바로 하느님 안에서 쉬고 하느님 안에서 길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가장 현명한 방법이지요. 제일 미개한 것이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이고, 가장 지혜로운 길이 참 진리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나에게 오너라.?“고 하신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지요. 그 말씀의 힘은 지난 이천 년 동안 끊임없이 발휘되었고 지금도 한결같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쉬는 사람의 모습은 다릅니다. 편히 지내서 살이 붙고 성형으로 가꾼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는 달리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에서 오는 편안하고 넉넉한 모습은 따로 있지요. 그들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여유가 있습니다. 깊은 기도 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은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지요.
우리는 성인 성녀들의 모습에서 안식을 얻은 사람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습니다.
?’신부님, 저는 기도할 줄 모르는데요.?“
기도 얘기만 나오면 주눅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기도학교>를 통해 계속해서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배우는 것은 시작입니다. 끊임없이 스스로 연습하고 실행해야 하지요. 제일 좋은 방법은 성체 조배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성체 조배실에 들어가면 금방 나올 수도 없고 숨도 쉴 수 없는 분위기가 편치 않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럴 수 있습니다. 금방 나와도 괜찮습니다. 차츰차츰 익혀나가는 것이 중요하지요. 하다보면 자리잡기 시작할 것입니다.
조배실에서 기도하는 좋은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성경과 노트, 펜을 가지고 들어가 천천히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어떤 단어나 구절이나 상황에서 뭔가 다른 느낌이 올 때 거기에 머무르십시오. 사람마다 느낌이 오는 부분은 다 다릅니다. 불안한 사람은 평화가 와닿고, 지금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용서가 와닿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머무르고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 때의 느낌을 적을 수 있으면 그대로 솔직히 적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면 10, 20분 시간이 금방 지나가지요. 그 말씀이 좋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큰 분심 없이 들어온다면 계속 머무십시오. 이런 식으로 기도 생활을 서서히 준비해 가면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체험하게 되고, 그것이 쌓이면 이제 밤이 늦어도 조배실을 떠나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머지 않아 그는 하느님 안에서의 안식과 평화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이지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
좋은 성당이란 잘 지어진 건물이나 세상의 명성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느님 안에서 쉬고 지혜를 찾는 개인과 공동체가 얼마나 많은가에 달려 있습니다.
몇 년 전 폴란드에 갔을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유서 깊은 성당들을 둘러보는데 가는 곳마다 기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곳 신자들은 지나가는 길에 성당이 있으면 낮이고 밤이고 상관없이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래서 ??공산 국가인 폴란드에서 교황님이 나셨구나.?‘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지요. 반면에 이태리에 들어서니 로마의 성당들은 화려한 예술품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그 웅장함과 규모에 많은 사람들이 경탄하며 찾고 있지요. 그러나 그 곳에는 신자는 없고 관광객들만 가득했습니다. 왜 그곳이 공동화되는지를 알 수 있었지요.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11,28)하시며 지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치료소가 바로 예수님이시지요. 그렇습니다. 어떤 의사도 고칠 수 없고 찾아낼 수 없고 치료할 수 없는 모든 아픔을 예수님께서는 순식간에 어루만져 치료해 주십니다. 이는 문둥병자를 치료해 주시고 버림받은 과부와 고아를 치료해 주신 이천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쉬는 사람이면 누구나 체험할 수 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기적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매번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천 년 전 옛날 이야기 속의 예수만을 기억할 뿐입니다. 참 쉼은 시골을 찾아가는 것도, 찜질방을 가는 것도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차원이 다르지요. 하느님 안에서 쉬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지혜로운 사람인지요?
예수님의 멍에는....
정 호 신부-
오히려 이 세상에 가장 평범한 사람으로 오셔서 그 사람의 모습으로 사신 분,
사람답다는 표현의 중심에서 살아가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셨고, 항상 놀림감이나 표적이 되곤 하셨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 대해 말하면서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은총이나 축복에 대해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을 전하는 이가 항상 죄인들과 함께 지내고 그들과 말하는 것을 즐기고 생활도 항상 구차하기 짝이 없는 가난한 모습이었으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어떻게 '하느님의 사람'이라 인정할 수 있었겠습니까 ?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한 술 더 떠서 오히려 당신은 그렇게 사실 수 밖에 없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당신에게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고생하 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가난하고 죄인으로 낙인찍혀 평생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겹게 살 수 밖에 없다고 운명지워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 에서 제외된듯 여겨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에게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과 늘 함께 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면 왜 편히 쉬게 되는지 말씀은 이어집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과 함께 해서 얻게 되는 두 가지 선물. 그것은 온유함과 겸손함입니다.
무엇인가를 두고 마음에 품어 생각하고 참을 수 있는 온유함과 모든 것에 자만하지 않고 자신을 잘 알고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겸손함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할 때라도 자신을 생각하지 않게 하는 참 사랑의 조건들입니다.
그러니 그 일이 멍에와 같다 하더라도 억울하거나 싫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가시는 동안 우리와 함께 하셔서 한 순간이라도 불행하다고 생각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
그러나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죄 많은 사람들 그 누구와 함께 하시더라도 그들을 품어 생각해주시고, 그들이 회개할 때를 기다려주시고, 당신의 최선을 다해서 모든 것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이기적인 사람에게는 더 없이 어리석게만 보여 함께 할 수 없는 조건이지만 사실은 가장 하느님의 사랑에 충 실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난한 죄인들과의 삶은 사실 그분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느님을 그렇게 대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좋아합니까 ? 그래서 그분의 멍에를 맬려고 합니까 ?
이 질문이 우리에게 고통이 되어 버린다면 우리는 지금 주님과의 거리, 그리고 사람답다는 말과 우리 자신의 거리를 재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
† 법의 멍에와 예수님의 멍에
-박상대 신부 -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사회는 양심과 도덕, 풍습과 관습, 그리고 법률과 헌법의 조화로운 지배를 받는다. 올바른 양심과 도덕은 좋은 풍습과 관습을 만들어 주며, 이는 또다시 정감(情感)과 평화(平和)가 넘치는 사회를 만들어 준다. 사람들의 양심과 도덕이 개인적인 차등(差等)을 보이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법률과 헌법이 등장한다.
법(法)이란 몇 사람의 생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또는 모든 사람들의 뜻을 모아 제정되는 것이기에 다같이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준법정신(遵法精神)은 법을 실제로 지키려는 의지(意志)이며, 그 나라 국민들의 문화수준을 나타내는 척도라고 한다. 선진(先進) 국민일수록 준법정신이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문화수준이 높다는 말이다. 그러나 문화수준을 높이자고 법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법 이전에 사람은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양심과 도덕을 먼저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그러므로 법이 있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로는 우리 인간의 양심과 도덕이 인간적이고 보편적이지 못한 현실을 폭로하는 것과도 같다. 법을 제정해야만 하는 현실을 한편으로는 통탄해야 하겠지만, 이왕에 제정된 법은 다른 한편으로 모두가 준수해야할 의무를 요구하는 것이다.
법(法)이란 무릇 한자어가 뜻하듯이 ‘물(水)이 가는(去) 것’이다. 절대 거꾸로 가지 않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가며, 막히면 머물고, 넘치면 다시 가는 물의 흐름이 곧 법이요, 법은 극히 자연스런 이치(理致)라는 말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양심과 도덕에 따라 자연스럽게 법의 이치를 꿰뚫을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법은 인간의 양심과 도덕에 따른 자연스러움을 제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법은 어떠한가? 어느 변호사의 말을 들으니 우리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법은 다 모아 놓았다고 한다. 독일, 미국, 일본의 좋은 법은 다 갔다 놓았다는 것이다. 법이 좋다는 말은 사람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법 이전에 사람은 자신의 양심과 도덕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했다. 양심과 도덕, 올바른 양심과 보편적인 도덕에 따라 행동한 사람이 법(法)을 잘 몰라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유린(蹂躪)당하고, 경제적 손해를 보며, 사회적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 국민이 있다면 대한민국의 법은 이 국민 앞에 잘못을 빌어야 한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비현실적인 법조문 하나 때문에 손해를 보고 이로 인해 심적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강한 자에게는 법을 피할 길을 가르쳐주고 약한 자에게는 이 법, 저 법으로 올가미를 씌워 길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그런 조국의 현실을 보면서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613 가지의 율법을 짊어지고 살았다.(금령 365개, 명령 248개) 이런 율법 때문에 고생하고 허덕이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당신께로 초대하신다. 예수님께서 편히 쉬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께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법의 멍에를 벗겨주시고, 당신의 멍에를 지워주시고자 하신다. 예수님의 멍에는 법이 아니라 가르침이며, 최종적으로는 사랑으로 요약된다.
그것은 올바르고 보편적인 양심과 도덕이며, 훈훈하고 정이 넘치는 관습과 풍습이다. 이는 자기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해주는 것(황금률: 마태 7,12)이며, 하느님과 이웃을 동시에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것(사랑의 이중계명: 마태 22,34-40)이다. 물론 이 사랑은 나중에 십자가의 신비로 그 알맹이를 채우게 된다. 누구든지 사람은 법의 멍에든 십자가의 멍에든 하나를 지고 가며 살아야 한다.
법의 멍에는 사람을 노예로 만들지만, 예수님의 멍에는 사람을 겸손하고 온유하게 만든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예수님의 멍에를 지고 예수님께 배우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유광수 신부 -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진단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치고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한 분도 안 계실 것이다. 한결같이 우리 모두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다. 이것이 인간이다.
그럼 언제부터 왜 이렇게 인간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기 시작하였는가?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께 죄를 지어 에덴동산을 떠나면서부터다.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상태가 바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모습이다. 이런 인간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시는 분이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인간을 구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곧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시다.
"구원하다." 라는 말은 라틴어로 Salvare라고 하는데 이 말은 " 구하다, 구출하다, 구조하다. 생명을 구하다, 구제하다, 위험으로부터 지키다. 보호하다"라는 뜻이다. 즉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말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인간을 구조한다, 구출한다, 해방시킨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런 고통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나를 구해주시는 분이시라는 뜻이다. 얼마나 고마운 분이신가.
우리 모두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는 것은 아는데 누가 우리를 이런 고통에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는가? 구해 줄 수 있는가? 대통령이 할 수 있는가? 학교 선생님이 구해 줄 수 있는가? 아니면 부모님이 구출해 낼 수 있는가?
이 세상의 그 어느 인간도 내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에서 해방시켜 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한결같이 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무거운 짐에서 나를 해방시켜 줄 수 있고 고통에서 나를 건져 줄 수 있는 분은 단 한분 뿐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분 이외에는 그 누구도 내가 당하고 있는 고생과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게 해 줄 수 없다. 그래서 그분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고생과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려면 예수님의 이 초대에 응해야 한다. 이 초대는 바로 나를 위한 초대요, 나에게 안식을 취할 수 있게 해주는 초대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초대이기 때문에 이 초대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자기가 당하고 있는 고생과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사실 우리 모두의 간절한 원의는 바로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생과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고 싶은 것이 아닌가? 이런 원의가 있기 때문에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우리는 일하고 공부하고 있다. 고생과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간절한 원의는 있으면서도 어디에서 어떻게 하면 이 고통과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수 있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거기에서 헤메이고 있다. 그러나 결국 돌아오는 것은 허무요, 무기력함이요, 절망뿐이다.
오늘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신 이 말씀은 참으로 오늘 우리에게 들려 주는 복음이다.
조용히 이 말씀을 음미해보자. 누가 우리에게 이런 초대를 하겠는가? 나의 아버지가 아니면 그리고 사랑이신 하느님이 아니면 그 누구도 이런 말을 하지 못한다.
우리들에게 구원은 무엇인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벗어버리는 것이다. 오늘 나의 구원은 그동안 나를 얽메어 놓고 있는 무거운 짐을 벗어 놓고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구원은 무엇인가?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원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만 누리는 축복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서 누려야 한다. 예수님이 구세주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부터 구원받게 해주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생과 무거운 짐은 우리가 죽은 다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벗어버리고 해방되어야 한다.
정녕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벼워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받는 은혜이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이런 구원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 해답은 간단하다. 즉 "나에게 배워라."는 말씀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수 있기 위한 방법이 오늘 복음에서 분명히 제시되었다. 먼저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는 말씀대로 배워야 한다.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여 예수님께 가기는 하면서 그 다음에 배우는 일을 소홀히 한다. 그냥 에수님께 가서 청하기만하면 되는 줄 안다. 물론 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배우지 않으면 어떻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벗어 놓을 수 있는지 모른다. 그 방법을 모른다.
~ 집회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아, 나에게로 와서 내 학교에 들어오라. 어찌하여 지혜를 갖지 못한 채 불평만 하고 너희 영혼의 갈증을 풀 생각을 하지 않느냐! 나 이제 결론삼아 말한다. 지혜를 돈으로 살 생각은 말아라. 네 목에 지혜의 가르침을 받아라. 지혜는 바로 네 곁에 있다. 눈을 바로 뜨고 보아라. 내가 얼마나 적은 노력으로 큰 평화를 얻었는가를!"(집회 51, 23-27)
내가 아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신다. 이 할머니는 내가 어디에서 어떤 강의를 하든 어떻게 알고 나타나시는지 그 자리에 반드시 와 계신다. 이 할머니와의 인연은 99년도 마르코 복음 강의를 사당동에서 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때부터 이 할머니는 내가 어디에서 강의를 하든 줄기차게 쫓아다니신다. 지난번 논현동에서 강의를 할 때였다.
남보다 항상 일찍 오시는데 하루는 저에게 다가 오셔서 "신부님, 저는 요즈음 생기가 납니다. 이 노인네가 생기가 나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것이 다 신부님 덕분이예요. 신부님의 강의를 통해서 복음에 눈을 뜨니가 모든 것이 신비롭고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어요.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할머니가 편안하게 지낼 형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그 할머니는 소대변을 다 받아내야 하는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고 계신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할아버지 병 간호를 해야 하는 어려운 형편에서 생활하신다. 그런 형편이지만 그것을 고생이라거나 아니면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편하고 가벼운 짐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예수님한테 그 멍에를 메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는 말씀을 가슴에 품고 음미해보자. 감사로움을 느낄 것이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참된 음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다.
즉 하느님을 참된 아버지로 알고 우리는 그분의 참된 자녀라는 것을 올바로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에게 사는 법을 배우고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참된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맺는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늘 우리를 당신에게로 오라고 초대하신다. 왜냐하면 인간의 불행은 아버지의 품을 떠났기 때문에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달라고 하여 그 재산을 갖고 아버지를 떠나 멀리 다른 지방으로 가서 방탕한 생활을 하였고 마침내 거지가 되어 온갖 고생과 굶주림을 겪고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려고 할만큼 아버지 아들의 자격을 상실하여 마치 돼지처럼 살아가는 비참한 모습이 바로 아버지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항상 작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듯이 오늘도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에게로 돌아오라고 부르시고 애타게 기다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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