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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윌리엄 헨리 스미스
(William Henry Smith)
매우 매우 긴 내용입니다.1부와 2부로 나뉘는데, 1부는 훈련과 일상생활, 2부가 전쟁 관련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은 1부 2부 다 보시는게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2부만 올리는게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또는 아예 안올리는게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폰은 어째서 투표기능이 없을까요?)
1941년 7월 21일
이 일기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여기다 쓸 수는 없겠지만, 시도는 해봐야겠지. 이 일기를 가능한 한 계속 꾸준이 쓰기로 어머니와 약속했으니까.
제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에다가 쓴다면 (제가 죽어도) 어머니의 정신은 멀쩡하겠지요.
그래서 나는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기를 쓰기로 결정했다.
나는 집을 떠났다.
우리는 12시에 할리팍스를 떠났다.
우리가 멀리 가면 갈수록, 점점 작아지는 도시를 보는것은 너무나도 힘들었다.
이 여정이 오래되지 않고, 뱃멀미에 걸리질 않기 빌며.
1941년 7월 26일
어젯 밤, 열 아홉살 짜리 꼬마애가 그의 침대에서 울기 시작했다.
모두들 잠에 빠져서 그가 우는걸 듣지는 못했을 것이다.
난 그가 우는걸 똑똑히 들었지만, 그를 도와주지 못했다.
침대가 너무 불편해서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분명 어머니와 그의 고향이 그리웠겠지.
그만 그러는 것이 아니였다.
우린 모두 그리워 했지만, 울진 않았다.
우리는 언젠가 다시 고향을 볼 수 있을것이다.
1941년 7월 29일
드디어! 8일이 지나 우린 안전하게 브리스톨 해협에 도착했다!
우리 길에는 아무런 독일놈들의 위협이 존재하지 않았다!
우린 이제 곧 에번마우스 라는 곳에 정박할 것이다.
나의 첫 유럽 땅밟기다!
1941년 7월 31일
우리는 알버헤라 막사에 가기 위해 엘더샷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휴가증을 준다고 했다.
많은 녀석들은 스코틀랜드로 갈 것 같았다.
나와 로드니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1941년 8월 5일
이제 슬슬 영국에 적응되기 시작했다.
고향과는 달랐지만, 그렇게 큰 차이는 느끼지 못했다.
(중략)
여기서의 로드니는 내가 전에 알고 지냈던 로드니가 아니였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친구로 지낸 21년간, 나는 아직도 로드니에 대해 완전히 알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로드니는 다섯잔의 맥주를 마시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우리는 통행 금지 시간이 되어서야 막사로 돌아갔고, 소령이 직접 우리한테 따지러 왔다.
나는 서있기도 힘든데, 로드니는 다섯잔의 맥주를 마시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서있었다.
만약 그가 거기에 없었다면, 내가 얼마나 빨리 군에서 퇴출될것은 오직 신만이 알고있을 것이다.
오랜 친구 로드니 없이 내가 뭘 할수 있을까?
1941년 8월 15일
아직 그렇게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나는 수많은 녀석들과 새로이 만났다.
만약 당신이 믿을수만 있다면, 녀석들은 마치 내 이웃과도 같았다.
난 몇몇 녀석들과 같이 학교(영창)에 가기도 했다.
몇몇 녀석들은 무언가 모자라보이기도 했지만, 난 내내 그녀석들과 같이 다녔다.
특히, 그랜트 호워드 라는 녀석이 있는데, 그녀석은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재미있는 사람이였다.
그는 과거에 자기가 겪었던 이야기와 예전 여자 친구들과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덕에 우리는 15분간 배꼽 빠지게 웃을 수 있었다.
너무 웃어서 그런지 내 배와 얼굴이 아프기까지 하다.
1941년 8월 28일
많이 쓰지 못해서 죄송해요 어머니.
이 일기를 쓰는걸 계속 잊고 있었어요.
이 일기를 계속 쓰기에는 너무 힘들단 말이에요.
진짜로 적을만한 새로운 것들이 없어요.
1941년 9월 9일
영국의 왕과 여왕이 엘더샷에 오늘 도착했다.
그들은 내 옆을 그냥 지나갔지만, 로드니한테는 어디서 왔는지 물어보았다.
로드니는 그들이 매우 친절하다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1941년 10월 10일
알아요, 더 써야겠지요.
이제 곧 훈련이 시작될거에요.
최근데 몇몇 녀석들은 막사 밖을 나갔지요
녀석들이 좋아하는 여자들을 잔뜩 만나고 올걸요.
그리 좋은생각은 아닌 것 같지만요.
많은 여성들이 그들에게 이끌리겠지만, 휴지 조각처럼 쓰이고 버려질걸요.
어떤놈은 2달동안 25명의 여자들이랑 놀아났다고 하던걸요, 뭐, 개소리에 가깝지만요.
1941년 10월 21일
랄스톤 대령이 와서는 우리를 감사하고 갔다.
그는 국제 방어 연맹의 장관이였다.
우리들 중 한명인 톰은 그와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톰은 랄스톤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었다.
게임을 네번이나 했는데 모든 답이 0 이였다. 모든 게임이 무승부로 끝났다.
1941년 10월 27일
오늘 브록스헤드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제 11 캐나다 전차 사단에서 만난 녀석들과 함께 훈련을 진행했다.
좋은 녀석들이였다.
훈련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나는 숨이 차지도 않은 체 훈련을 끝맞쳤다.
1941년 10월 29일
우리는 치체스터 구역으로 이동했다.
치체스터는 영국의 남쪽에 있는 곳이였다.
지도가 필요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자세히 모르는 마당이였다.
로드니는 우리가 여기로 온 이유가 어떤 종류든 독일놈들이 상륙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온 것이라고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해협 근처에 있었다.)
우리는 런던 아이리시 놈들과 런던 스코틀랜드 대대 놈들의 자리를 보충했다.
1941년 10월 31일
오늘은 할로윈이다.
내 귀엽고 조그만 동생 마우린에게 같이 할로윈 행사를 같이 하기로 했는데.
작년에 나는 마우린과 같이 있지 못했다.
나는 마우린과의 약속을 잊은 채 친구들과 함께 춤을 추러 갔다.
내가 그걸 잊어먹다니, 맙소사.
나는 마우린과 함께 할로윈을 같이 보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 너무나도 느껴졌다.
내가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우린은 내가 다음에 그녀를 볼 때까지
홀로 할로윈을 보내야할 것이다.
1941년 12월 10일
좋은 소식이다!
크리스마스 날, 몇몇 중대원들은 영국 고아 아이들을 위해 축제를 준비하기로 했다.
분명 아이들 중 몇명은 내 동생 마우린을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누가 들뜬 채로 날 일으켜 세우면 그건 바로 아이들일 것이다.
1941년 12월 15일
좋은 소식들이 계속 오고있다!
오늘 드디어 집으로부터 온 편지를 받았다.
편지 꾸러미는 온전한 채로 나에게 배송되었다.
내 편지는 아무렇게나 뒤섞인 채로 있어서 내 집에 도착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나는 어머니와 가족들이 8월달부터 나에게 쓴 10통이 넘는 편지를 받았다.
1941년 12월 16일
내가 없는 사이에 많은 일들이 집에서 벌어졌다!
처음 부터 말하자면, 마우린은 앞니 두개를 뽑았고 이빨 요정은 그녀에게 50센트를 주었다!
엄마가 말하길, 마우린은 그 날 이후로 마구 마구 뛰며 즐거워 했다고 한다.
그녀 말대로 엄마는 잘 하고 계셨다.
아빠가 돌아가신 5년간 매우 힘든 시간이였다는걸 난 알고있었다.
아빠는 기찻길에서 일하시고 계셨는데, 기차가 아버지와 충돌했다.
엄마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엄청난 우울증에 걸리셨다.
지금의 엄마는 5년 전보다 매우 활발하게 느껴졌다.
엄마가 말하길, 내 17살 남동생 데이빗은 나처럼 군대에 입대하고 싶어한다고 한다.
난 데이빗이 제발 그러질 않길 바란다.
그는 학교에서 매우 잘 하고있고, 똑똑하다.
난 그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길 바란다.
자, 이제 답장을 써야겠다.
1941년 12월 30일
지난 2주동안 진짜로 바빴다.
휴일은 최고였다!
내가 저번에 말한 것 처럼, 우리는 부모님들을 갖고 있지 않은 영국인 아이들을 위해 축제를 벌였다.
그들은 산타가 등장하자 매우 기뻐했다.
녀석들의 얼굴이 내 여동생 마우린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녀석들한테 줄 선물로, 그리 좋은 것들은 없었지만, 우리는 엄청난 양의 사탕을 준비했다.
내년에도 우리가 이 축제를 다시 할 수 있길 희망하며.
1942년 1월 7일
로드니 그리고 리차드와 함께 런던에서 돌아왔다.
우리는 몇일을 거기서 지냈다.
여자를 만나 거기서 몇주를 보냈던 리차드는, 그녀를 우리에게 소개시켜주고 싶어했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꽤나 괜찮았다.
나는 기지에서 주는 역겨운 진흙덩어리 같은 음식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가 직접 만들어 먹고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엄마가 직접만든 음식보다 못하겠지.
게다가 가장 날 병들게 하는건 이 감자 덩어리들이였다.
난 여기서 요리하는 놈들이 가장 싫다. 녀석들은 미각도 없나보다.
향수병에 걸린 것 같다.
1942년 1월 10일
조금 나은 것 같다.
로드니는 런던 길거리에서 여자를 한명 만났다.
로드니는 아직 런던에 있다.
난 아직도 여기에 홀로 있다.
1942년 1월 25일
로드니는 더이상 그의 여자랑 같이 보내지 않다.
그녀는 미국놈들한테 빠져 로드니한테 등을 돌렸다.
그 미국인은 '키작은 로드니' 보다 키가 컸다고 들었다.
나와 내 친구들은 로드니 때문에 웃음을 멈출수가 없었다.
1942년 2월 7일
최근에 너무나도 바빴다.
처음으로, 토요일에 적들이 폭격을 하러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람들은 안전지대로 뛰어가느라 바빴고, 폭격은 일어나지 않았다.
독일놈들은 다른 지역을 폭격했다.
우리는 이제 훈련을 2일 남기고 있다.
몇몇 녀석들의 축제분위기는 이제 끝났다.
이제 일하러 갈 시간이다.
1942년 2월 15일
우리는 몇일전에 첫 행군을 시작했다.
모든 군인들이 치체스터 성당을 향해 행군하는 모습은 보기 썩 좋았다.
게다가 지휘관도 바뀌었다.
내 생각에는 모든 중대들의 지휘관이 바뀌었을 것이다.
제발 지휘관이 멍청이만 아니길....
1942년 2월 27일
몽고메리 장군이 어젯날 도착했다.
좋은 사람처럼 보였다.
우리는 이제 모두 새로운 지휘관의 명령을 받는다.
내 새로운 지휘관은 로데니저 소령이다.
모든 중대원들은 로데니저 소령이 옛날 지휘관들과는 제발 다르길 빌고 있다.
1942년 3월 5일
완전 혼돈의 중심이다.
많은 녀석들이 나이 제한 때문에 군에서 고향으로 쫒겨나고 있다.
당연히 나는 나이 제한에 걸리지 않았다.
몇몇 녀석들은 진심으로 비탄에 빠졌다.
나와 로드니는 괜찮았다.
다행히 우리 둘을 갈라놓진 않았다.
나에게 무슨일이 벌어질지는 모르지만, 만약 무언가 벌어진다면.
엄청 끔찍한 일일 것이다.
1942년 3월 10일
엄마한테 또다시 편지를 받았다.
그녀는 역시 잘 하고 있다, 물론 내 여동생과 남동생도 말이다.
엄마는 내 동생 데이빗이 학교에서 매우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가장 높은 점수로 시험을 통과했다고 한다.
그에 대해 난 너무나도 기쁘다.
적어도 우리 가족들 중 누군가는 밝은 미래를 가지고 있겠지.
여기서 데이빗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아쉽다.
1942년 3월 13일
열 세번째 금요일.
놈들은 언제나 날 두렵게 만든다, 나는 미신을 잘 믿는 사람이다.
많은 일들이 그날, 열 세번째 금요일날에 벌어졌다.
12살 때 내 다리가 부러졌고
14살때는 내 손이 부러졌다.
그리고 난 17살때 말이 날 밟고 넘어갈 뻔 했다.
이것 참 재미있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1942년 3월 14일
13번째 금요일이 얼마나 악마같은지 증명해줄 수 있는것이 있다.
어젯 밤, 우리 막사에 소속된 일병 미췔 홈즈가 어제 기지로 귀환하다가 지프차에 치여버렸다.
죽지는 않았지만, 온 몸이 뒤틀린게 눈에 훤했다.
1942년 4월 1일
오늘은 영국에 대해 뭘 좀 알아냈다, 따뜻한 봄이 내 고향 캐나다보다 엄청나게 빨리 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셀세이 마을의 해변가로 이동했다.
우리는 서쪽과 동쪽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브랜스콤과 잇체노어(진짜 이상한 이름이군!)는 해변가 가까이에 위치해있다.
우리는 어젯밤 또다시 공중 경보를 들었지만, 여기로 오지는 않았다.
이제 곧 가벼운 훈련이 있을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앞으로 자주 일기를 쓰지는 못할것이다.
1942년 6월 3일
와우, 내가 자주 못쓴다고 하긴 했지만, 2달동안 우리가 한 것은 그저 행군 뿐이였다.
심지어는 내 꿈속에서도 행군한 장소가 나온다.
우리는 세븐 오크 주변 즉, 호르샴이라고 불리는 지역의 서쪽에 있는 곳으로 캠프를 옮겼다.
우리는 텐트속에서 지내고 있다.
몇일이 지나면 적응 될 것 같았다.
나와 로드니는 런던이나 다른곳에 (휴가를 받아)가기위해 발악을 하고있다.
우리는 하루종일 넓은 장소에서 훈련만 한다.
너무 많이 움직이는 것 같다.
이제는 훈련 몇개가 더 추가됬다, 그래도 지루함은 조금 덜어주는 것 같다.......
1942년 6월 23일
나와 로드니는 런던으로 돌아가 아주 좋은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춤추고 몇몇 여자들도 만났다.
그녀들 중 내가 만난 여자중 최고의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다프네였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고, 내가 그녀에게 술을 사기도 했다.
그녀는 키가 조금 작았지만, 그녀의 머리칼은 아름다웠다.
그녀는 내가 다시 자신을 찾아보길 원하는 듯 했다.
(일기에 꽂혀있던 꽃)
1942년 6월 30일
난 오늘 다시 그녀를 만났다.
우리는 하이드 공원을 걸었다.
하이드 공원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해는 화창하게 빛나고 있었고, 꽃들의 향기는 만발했다.
그녀는 주변을 안내 해주었다, 난 그녀덕에 런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되었다. (그녀는 엄청 똑똑하다)
그녀는 친구들 몇명과 함께 커다란 아파트에서 살며 학교에 통학한다.
그러나 그녀는 두시간밖에 있지 못했다.
그녀는 다른 장소에서 자랐고, 그녀의 가족 또한 여전히 거기에 살고있다.
몇 주 동안 그녀를 볼 수 없을것이다.
1942년 7월 3일
엄마한테서 편지가 왔다.
모든것이 괜찮았다.
마우린과 데이빗도 여전히 괜찮았다.
나는 주말에 외박증을 받기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래야만 다프네와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
1942년 7월 14일
나는 다프네를 사랑한다.
다프네는 완벽한 여자다.
다프네와 보냈던 주말은 내가 여태까지 겪었던 어떠한 주말보다도 값진 날이였다.
우리는 레스토랑에서 뭘 좀 먹었고, 다프네는 그녀의 친구 몇명을 나에게 소개시켜주었다.
모든일이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가능하면 빨리 다시 그녀를 보고싶다.
1942년 7월 17일
다프네로부터 돌아오는 주말에 날 보길 원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주말 근무를 뺐다. 그녀의 가족들과 만날 수 있을것이다.
난 너무 겁이난다, 그녀의 부모님들이 날 싫어하면 어떡하지?
난 절대로 그녀를 잃고싶지 않다.
준비를 해야겠군.
1942 7월 23일
이번 주말에 갈 수 있다.
그녀의 부모님이 날 싫어할 것을 대비해서 몇가지 이야기를 준비했다.
행운이 함께하길.
1942년 7월 28일
괜찮았다.
다프네가 그녀의 부모님들이 날 좋아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가 진짜로 날 인정해주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녀의 어머니의 손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내 엄마를 떠올리는 아주 상냥하신 숙녀분이셨다.
그녀는 계속 내 접시에 음식을 채워주시고 계속 먹게하셨다.
다프네의 아버지는 파이프 담배를 조용히 피시는 매우 정숙하신 분이였다.
그분께서는 나에게 캐나다의 정치는 어떻냐고 물어보셨다.
1942년 8월 20일
우리는 호르샴 근처로 다시 캠프를 옮겼다, 그덕에 런던과 다프네에게 좀더 가까워졌다.
다프네는 잘 지내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이의 관계가 점점 죽어가고 있다.
그녀는 학업 때문에 너무 바빠 서로간에 볼 수 있는 날이 점점 줄어들었다.
좋은 소식은, 나와 로드니는 둘이서 같이 런던에서 몇일을 보냈다는 것이다.
로드니는 나를 런던에서 가장 좋은 펍(영국 술집 겸 카페)으로 데려갔다.
내가 여태까지 그곳을 몰랐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너무나도 재밌게 지냈었다.
1942년 9월 5일
엄마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나는 엄마에게 다프네에 대해 무례하지 않게 격식을 차려 답장을 썼다.
엄마는 내가 다프네를 더이상 만나지 않길 바란다, 그녀는 내가 캐나다 여자랑 결혼하길 원하신다.
난 엄마가 그렇게 느끼질 않길 바랬다.
엄나는 나랑 수천 마일을 떨어져있으니 내가 다프네랑 잤는지 안잤는지도 모르실것이다.
잉글랜드의 왕에게 감사를!
1942년 9월 15일
오늘후로 나와 다프네는 끝났다.
「1부 끝........ 2부에서」
첫댓글 재밌네요정말.. 더부탁드립니다.
"게다가 가장 날 병들게 하는건 이 감자 덩어리들이였다.
난 여기서 요리하는 놈들이 가장 싫다. 녀석들은 미각도 없나보다."
영국요리...
엄마나라요리를 시로하는 아들나라 군인 ㅋㅋㅋ
2부도 써주세요 ㅎㅎ
아니 다프네와 잘 있다가 왜 10일만에 뭔일이 터진겿?!
내 이 결혼 반댈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