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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14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콜베 성인은 1894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14세에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으며, 1918년 25세 때에 로마에서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평생을 선교사로 살았으며, 성모 신심 단체인 ‘성모의 기사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다. 어느 날 탈옥한 죄수 대신, 콜베 성인은 아사(餓死) 감방을 자원하였다. 콜베 사제는 1941년 8월 14일 이 감방에서 운명하였고, 1982년에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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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마태오 19,13-15)
"Let the children come to me,
and do not prevent them;
for the Kingdom of heaven
belongs to such as these."
말씀의 초대 ☆☆☆ 오늘의 묵상 ☆☆☆
정아는 올봄에 엄마를 잃었습니다. 이제 일곱 살 어린아이에게는 너무 가혹한 운명입니다. 고사리 같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코끝이 찡해집니다. 정아의 유일한 희망은 천국에서 엄마를 만나는 일입니다. “정아야 잘 있었니? 할머니도 잘 계시고?” 어린이 미사 때면 일부러 정아에게 말을 건네려 애씁니다.
☆☆☆ 어린이들의 특성은 순진함입니다. 그들은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말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지위 고하가 없습니다. 추기경이든 대통령이든 그들에게는 할아버지일 뿐입니다. 가난한 사람이건 부자이건 그들에게는 아저씨나 아주머니, 할아버지나 할머니일 뿐입니다. 친절한 사람은 누구나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아마 그들에게는 하느님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좋아하시는 것은 그런 순진함 때문이 아닐가요?
집단 윤리 의식은 한 세대가 예전 세대들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게 한다. 바빌론에서 귀양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선조들의 축적된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하여, 백성이 회개하고 예전의 윤리 의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말씀해 주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는 어린이가 무죄함이나 윤리적 완전함의 표본이라기보다는, 약하고 가난한 이들의 표상으로 제시되고 있다(복음).
어린이는 순진하고 이해타산이 적은 이들이지만, 그것보다는 사회적으로 약자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강자인 어른들은 약자인 어린이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해타산의 방편으로 삼으려 드는 경향이 짙고, 때로는 자신들의 노리갯감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랑은 우선 약하고 가난한 이들 편에 서는 것부터 출발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행하시는 중용(中庸)의 도(道)입니다. 중용의 도는 저울추와 같아, 모자라면 보태 주고, 넉넉하면 덜어 내어 균형을 맞추는 것입니다. 가진 사람들은 못 가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배운 사람들은 못 배운 사람들에게 배운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약자인 어린이들이 당신께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십니다. 주님의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모두가 잘났다고 나서며, 더 가지려는 욕심으로 얼룩진 어른들에게 보내시는 경고입니다.
승미는 아빠가 없습니다. 지난해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늘 어두운 그림자가 작은 어깨에 얹혀 있습니다. 주일 학교에서도 말이 없습니다. 어린것이 안쓰러워 만날 때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시키곤 합니다. 그럴 때면 쳐다보는 눈가에 목마름이 가득합니다.
미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흩어져도 승미는 가지 않고 기다립니다. 어깨를 안아 주고 잘 가라며 토닥거려야 떠납니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저는 승미의 아빠가 됩니다. 너무 빨리 삶의 슬픔에 적응해 가는 승미가 안타깝습니다. 시련이 은총이란 걸 언제쯤 깨닫게 될는지요?
세상에는 가슴 아픈 아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대부분 어른들의 잘못이 원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 아이들을 축복하신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축복하고 계십니다. 누군가 예수님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다가가 따듯한 빛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어릴 적 그분
온전한 의탁 ◆다섯 살인 한봄이는 제 친구이자 딸 같은 아이입니다. 수도자인 제게 딸이 있을 리 없지만 한봄이가 태어날 때부터 가까이에서 함께 살아온 까닭에 자연스럽게 가족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한봄이가 기어 다닐 때입니다. 꿈터로 들어설 때 목청이 터져라 울어대는 한봄이에게 달려가 보면 얼굴이 온통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곤 했습니다. 그렇게 엄마를 부르며 울다가도 안아주면 안도감이 느껴지는지 그칠 것 같지 않던 한숨 섞인 흐느낌이 잦아듭니다. 그러고는 장난감을 가지고 혼자 놀기 시작합니다. 다른 언니나 오빠들보다 저를 더 따르는 한봄이는 제가 가는 곳이면 어디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마치 엄마와 딸처럼 점점 얼굴도 닮아가는 듯했습니다.
어린이는
새벽을 열며 차를 수리하러 정비소에 들렀던 어떤 사람이 그 정비소에 붙은 현수막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수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하네요. 어린이에게 사랑을……. 빠다킹신부
어린이와 같은 사람 -김광태 신부- 초등학교 1학년 시절, 엄마와 떨어지는 게 싫어서 학교에 가는 걸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수업 끝나고 돌아올 때는 동네 초입쯤부터 달리기 시작하다 대문을 박차고 집에 들어가면서 “엄마” 하고 외칩니다. 어느 날, 엄마가 집에 안 계셨습니다. 부엌에도 뒤뜰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자주 가시던 옆집에도 안 계셔서 마침내 울음을 터트리며 온 동네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홀연히 어느 집에서 엄마를 만났고, 마치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난 양 엄마 치마폭을 붙들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없이 살던 때였으니 엄마가 과자를 준비해놓았다가 주시는 것도 아니었고, “우리 새끼 잘 갔다 왔어?”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는 일 말고는 특별한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울음을 멈출 때쯤, “왜 울었어?” 하는 엄마의 질문을 받고 정말 그땐 왜 울었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김흥주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아버지 하느님께 대해 자녀로서 겸손과 단순 그리고 신뢰심을 갖는 것을 말한다.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는 이를 가리켜 ‘영적 어린이의 길’이라고 했다.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영성적으로 어린이와 같은 삶을 산 분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어린이와 하늘나라 -강영구신부-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박상대 신부-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마태 19,13-15) -유광수 신부-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다. 정말 나는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마음을 고쳐야 한다. 어떤 마음으로 고쳐야 하는가? 오늘복음에서 모델을 제시해주신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즉 우리가 고쳐야할 마음은 어린이와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이와 같이 되는 것이다. 어린이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우선 순수하다. 아직 자기 생각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틀이 짜여져 있지 않은 마음이다. 미성숙한 마음이요,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는 마음이다. 무엇을 먹고 자라느냐에 따라서 예쁜 마음으로 자랄 수도 있고 악하고 나쁜 마음으로 자랄 수 도 이는 미완의 마음이다. 어린이의 마음은 누가 무엇을 주고, 먹이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자랄 수 있는 마음이다. 한 마디로 어린이의 마음은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어린이는 엄마의 사랑을 먹고 자란다."는 광고가 바로 어린이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이 큰 선물은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선물로 받을 수 있다. 엄마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어린이만 엄마의 사랑을 먹을 수 있듯이 하느님도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하늘나라를 선물로 주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하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축복해주신다. 그러나 아무나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와 같이 마음이 비어있고 순수하고 하느님께 의존하는 사람만이 받아들일 수 있다. 모두가 이 큰 선물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다. 못 받아들인다. 몰라서 못 받아들이고 알면서도 받아들일 마음이 없기 때문에 받지 못한다. 자기 마음 안에 도저히 하느님의 선물을 받아들일 자리가 없는 사람도 있다. 왜 그런가? 자기 자신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그 동안 자기만 먹고 자랐다. 자기 생각, 자기 욕심, 자기 고집, 자기 계획, 자기 취미, 자기 건강, 자기 미래 등 항상 자기 것으로만 가득 채우기 때문에 도저히 자기 것이 아닌 그 어떤 것도 하느님 아니라, 하느님의 할아버지라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런 사람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왜? 그 사람 안에 하늘나라에 관한 것이 있어야 들어가지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들어가는가? 취장암으로 3년간 고통을 겪다가 임종할 때가 가까이 다가 왔다는 것을 알고 고통 중에 지내야 했던 3년간의 생활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여 책으로 남긴 시카고의 교구장이신 베르나르딘 추기경의 저서의 마지막 페이지에 "평화의 선물"이라는 소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이 책을 끝맺으면서 나는 피로감에 지칠 대로 지쳐 있으나 한편으로는 큰 의미가 있는 이 책을 완성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 결말 부분을 써 내려가면서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하고 평온하다. 오늘은 11월 1일, 가을이 겨울에게 길을 내어주고 있다. 얼마 되지 않아 나뭇잎은 그 아름다운 빛을 잃게 되고 세상은 눈으로 뒤덮일 것이다. 땅은 휴식을 취하며, 사람들은 두꺼운 옷을 걸치고 걸음을 재촉할 것이다. 시카고의 겨울은 너무나 매서워 죽음의 시간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동안 어머니의 사진첩을 들여다보았기에 그곳의 산과 들 그리고 집과 그곳의 삶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그곳에 처음 들어섰을 때 나는 이렇게 감탄했다. "맙소사, 내가 아는 곳이예요. 드디어 고향에 왔어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것도 어쩐지 그와 유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로 그곳이 본향임을 알게 될 것이기에 말이다. 하늘 나라에 대해서 참으로 알아듣기 쉽게 적은 글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 하늘 나라는 나와 전혀 낮선 곳이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좋고 아름다운 곳이라 하더라도 낮선 곳은 나의 고향이 아니다. 우리가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에 가면 마음이 편안한 것은 그곳에 나의 어릴적 삶이 베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내 몸과 마음에는 고향의 흙 냄새가 베어있고 자연의 정취가 베어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고향의 흙과 바람과 물과 햇빛을 먹고 자랐다. 그런 것들이 나의 마음과 정신을 형성시켜왔다. 고향 사람들의 아름다운 정과 따뜻한 마음 그리고 구수한 이야기들이 나의 성장기를 도왔고 나는 그런 것들을 먹으며 자랐다. 그래서 고향에 가면 편안하고 고향을 떠나오면 고향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모든 산과 들, 바람과 나무, 구름과 물이 다른 곳엔들 없겠는가? 어쩌면 더 아름다운 자연들이 있는 곳도 많다. 그래도 그런 곳보다 고향이 더 좋은 것은 나의 몸에 고향의 정취가 베어있기 때문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복음중심)> : † 하늘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
어제도 미사가 끝난 뒤,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 주고 있었지요. 그런데 처음 보는 어린이가 저 뒤에서 쭈뼛쭈뼛 서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아마도 사탕을 받고는 싶은데, 아직 저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용기 있게 제 앞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얼른 사탕 하나를 아이의 손에 쥐어 주었지요.
바로 그 순간, 아이는 환한 미소를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기쁨에서 나오는 미소였지요.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쁘던 지요. 그리고 아이는 엄마에게 자랑을 하러 갑니다. 아이는 진심으로 제가 준 사탕을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렇게 큰 기쁨을 보여주는 아이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작은 사탕 하나가 아이와 저를 이렇게 기쁘게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제대로 말한다면, 저를 기쁘게 했던 것은 제가 준 사탕 하나가 아니라 아이의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가 저의 사탕을 정말로 기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지요. 사실 마치 맡긴 사탕 찾아가듯이 사탕을 달라고 하는 아이들도 있기는 합니다. 그때는 제 마음이 그렇게 기쁘지 않습니다. 줬던 사탕도 뺏고 싶어지지요.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는 즐겁게 선물을 받고 있는가?’
선물은 받는 사람만 기쁜 것이 아니라, 주는 사람도 기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받는 사람이 즐겁게 받으면 주는 사람도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잘 받는 것 또한 많이 주는 것만큼의 덕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잘 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얼마나 많은 것을 우리들에게 주고 계십니까? 그런데 우리들은 이 주님의 선물에 대해 감사하면서 기쁨을 표시하기 보다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오히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주님을 원망할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주님과 우리의 간격이 더욱 더 멀어지게 됩니다. 친밀하고 사랑이 넘치는 관계가 아닌, 무관심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기뻐하는 어린이를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곧 우리 역시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을 잘 받아야 할 때입니다. 즉, 작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주님께 ‘기쁨’이라는 선물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감사와 기쁨을 표시하면서 잘 받도록 합시다.
-김호균 신부-
유다인 학살로 많은 이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히틀러도 어릴 때는 평범한
아이들과 똑같았습니다. 그는 가톨릭 종교의 영향 안에서 자랐고 어릴 때에는
수도원에서 자주 놀기도 했습니다. 한때 성직자가 되려는 꿈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랬던 히틀러가 선동가로, 학살자로 변해갔던 그 밑바탕에는
그를 받아들여주지 않았던 아버지와 그 당시 성직자의 영향이 컸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한번은 냇가에 갔는데
잘사는 친구들이 주로 들고 다니던 물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먼 발치에는
퇴비를 준비하는 어른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때 저는 그 물통이 너무 탐이 난
나머지 그것을 훔쳐다 집에 몰래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고는 안 그런 척하고
냇가에서 다시 놀았습니다. 얼마 후 물을 마시려던 그분이 물통이 없어진 것을 보고
제게 물통을 ‘못 봤냐’고 묻길래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사람이 다녀간 건 너 뿐인데’ 하면서 다시 자신의 일을 하러 갔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제가 가져갔다는 것을 알고 계신 듯했습니다.
며칠 후 그쪽 동네를 지나가다가 그분이 교회에 다니는 집사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일 그분이 저의 잘못을 받아들여주지 않았다면 전 사제가 돼서도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데 지금보다 훨씬 인색했을 것 같습니다.
저를 많이 좋아하고 잘 따르는 한봄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엄마를 찾습니다. 아마도 아이에게 엄마는 그 누구도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요 관계인 것 같습니다. 넘어져 다쳤을 때나 두려움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엄마가 옆에 있으면 안심이 되나 봅니다. 아이들에겐 엄마가 온전한 보호처인 것입니다. 엄마의 사랑에 이렇듯 집중하는 아이들의 전적인 신뢰와 의탁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어른들에겐 쉽지 않은 전적인 투신과도 같습니다.
갈라지지 않은 마음으로 엄마를 온전히 신뢰하는 아이들처럼 우리도 예수님만으로 행복하고 충분한지 자문해 봅니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전부이듯 우리한테 예수님이 전부인지요? 이 물음은 세상을 살아오면서 온전한 신뢰와 의탁의 기쁨보다는 이리저리 따지고 분석하고 우리 힘으로 무언가 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데서 더 안정감을 느끼는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그 길로 초대하십니다. 어린이같이 갈라지지 않은 마음으로 하느님께 의탁하라는 초대입니다. 인간적인 궁리나 능력에 의지해 살지 말고 하느님께 전적인 신뢰를 가지고 살라는 초대입니다. 두 마음을 품지 말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그 길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길임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껍데기를 벗어버린 자유로움 속에서 온전한 우리 자신이 되는 삶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께 우리도 아이들처럼 단순한 마음으로 응답하고 온전히 의탁합시다!
-김찬선신부-
하늘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하는데
어린이란 어떤 존재인가?
어린이는
단순하다.
여러 가치가 충돌하지 않고
자아가 분열되어 있지 않고
사회적으로도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힘이 없고 의존적이다.
무엇이든 스스로 할 수 없다.
스스로 알아보고(See)
스스로 판단하고(Judge)
스스로 행동하지(Act) 못하고
의존적이고 부모에게 완전히 의탁한다.
어린이는
착하고 순종적이다.
自我意識이 형성되지 않았기에
自己를 고집하지 않고
自己 좋을 대로 하지 않고
늘 부모의 뜻을 따른다.
어린이는
잘 믿는다.
발랑 까지지 않은 아이라면
어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꼬임에 넘어가 유괴당할 정도로 순진하게 믿는다.
의심한다는 것은 악을 안다는 것인데
어린이는 욕심이 없고 도무지 악을 모르기에
의심치 않고 잘 믿는다.
<독서> :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신앙인
-경규봉 신부-
"못되면 조상 탓”이란 옛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그 탓을 다른 이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다. 특히 조상이나 부모의 탓으로 돌리려고 한다. 자신의 고통스런 상황에 대한 책임을 다른 이에게 돌림으로써 자신을 합리화하고 보호하려고 한다.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 안에서 문제점을 찾고 해결하려고 하기보다 자신 밖에서 문제점을 찾고 다른 이들이 그 문제점을 해결해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의 삶은 내가 사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겪는 고통 역시 내가 겪어야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대신 겪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곧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바빌론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유다 백성은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 대에까지 갚는다.”(출애 20,5)는 말씀에 따라 자신들이 받는 고통이 조상들의 죄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은 아무런 잘못과 죄도 없이 살았는데도 선조들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죄를 지어 자신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선조들과 선조들의 죄를 자신들에게 묻는 하느님을 원망하며 살았다. 선조들과 하느님에 대한 원망이 마음속에 가득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열심하고 의롭게 살더라도 계속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실의와 좌절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처럼 절망 속에 살아가는 당신 백성을 보는 하느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시겠는가!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사람이 죽는 것은 나의 마음에 언짢다.”라고 당신의 마음을 전하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선조들의 죄에 대한 책임을 후손에게 묻지 않는다고 확실히 말씀하신다. 죄에 대한 벌은 죄를 지은 그 사람이 받는다. 죄와 의로움의 문제는 그 사람이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 행동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판가름이 난다. 하느님의 계명에 순종하면 부모 세대의 죄와 연결된 고리가 끊어질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지은 죄의 사슬에서도 풀려난다.
그는 이제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께로 돌아와서 하느님께 순종하는 삶을 새롭게 살게 된다. 그러나 부모의 죄를 자식에게 책임지울 수 없듯이, 부모의 모범적인 삶을 자식에게 유리하게 끌어댈 수도 없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나는 너희 하나하나를 너희의 행실대로 다스리리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냉정하게 우리의 잘잘못을 심판만 하시는 재판관이 아니시다. 오히려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창조주이시다(1디모 2,4-6 참조).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살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 개인의 죄를 심판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벌하시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계명을 지키고 살도록 초대하시는 것이다. 자녀에 대한 사랑으로 회초리를 드는 부모의 심정이 곧 하느님의 마음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고치고 회개하기를 원하시기에 우리의 죄를 물으시는 것이다.
오늘, 비록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우리가 걸어야 하는 인생의 길, 예수님처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걷는 십자가의 길을 충실히 걷는 신앙인이 되자. 죄를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우리를 벌하시려는 마음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당신의 계명을 따르도록 하시는 사랑의 마음임을 알고 느끼자.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자녀가 되어야 하듯이,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신앙인이 되아야 하겠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는 언제나 신속, 친절, 저렴한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단 고객께서는 이 세 가지 중 두 가지만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이 분은 현수막을 보면서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이게 무슨 뜻이야? 신속, 친절, 저렴한 서비스 세 가지를 다 줄 수는 없고, 그 중에서 두 가지만을 선택하라는 것이 뭐야?’
그러다가 그는 무릎을 탁 치게 되었지요. 신속하고 친절하면 저렴한 서비스를 받을 수가 없고, 친절하고 저렴하면 신속한 서비스를 받을 수가 없으며, 저렴하고 신속하면 친절한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 현수막이 세상사의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모든 것을 다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모든 것을 다 갖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을 다 갖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면서, 끊임없는 욕심을 간직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렇게 모든 것을 다 가질 수가 있는 세상일까요? 적어도 어느 한 가지가 빠지는 것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삶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어린이를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으면서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오는 것을 막지요. 왜 그랬을까요?
사실 그 당시에 어린이들은 미천한 존재, 그리고 율법을 준수할 능력이 없는 자로 취급되었습니다. 따라서 약하고 아직 성숙되지 않은 아이들까지 돌볼 만큼 예수님께서는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즉, 어른들을 돌보느라 바쁜 예수님께 하찮은 아이들이 다가와 불편을 끼치는 것을 막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어린이들이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어린이는 부족한 면이 많지요.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아주 작은 것에도 크게 기뻐합니다. 하지만 어른은 스스로 완벽함을 내세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늘 그 완벽함을 위해서 많은 욕심과 이기심을 간직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어린이가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비록 부족함은 많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작은 것에도 크게 기뻐할 수 있는 순수함을 간직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앞서 이 세상은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께서도 이 사실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들의 부족함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완벽한 척 하는 것, 그래서 제자들처럼 부족한 사람들을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데 방해할 때에는 심한 꾸중을 내리신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저의 모습이지만,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과 부드러운 마음을 이 아침에 꿈꿔 봅니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누굴까? 착한 사람일까? 아니면 단순한 사람일까?
어린 시절 내 모습을 돌이켜 보면 이런 설명에 그다지 동의하고 싶지 않아서 뭔가 다른 측면이 있지 않나 많이 묵상했습니다.
그래서 떠올린 이미지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일화입니다. 엄마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행복한 아이처럼, 자기의 능력을 과신하거나 다른 어떤 것에 의미를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그분 안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녀는 오늘 복음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들여 하느님 앞에 가장 작은 자가 되기 위하여 어린이의 길을 택했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지했으며 모든 일을 하느님께 의탁했다. 성녀가 깨달은 진리는, 성화의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는 것이지 인간 편에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우리 인간은 어린이와 같이 작은 채로 남아 있으면서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인정하고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아무 걱정하지 않듯이 모든 것을 선하신 주님께 내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성녀는 ‘예수님의 팔’이라는 상징적 용어를 쓰며 성화시키시는 하느님께 대해 자신이 갖추어야 할 자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저를 하늘까지 들어올려 줄 승강기는 오, 예수님, 당신의 팔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저는 커질 필요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작은 채로 있어야 하고 점점 더 작아져야 합니다.”
성녀는 자신을 낮추는 이러한 겸손을 바탕으로 어린이가 부모 앞에서 단순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행동하듯이 하느님 앞에서 그러하고자 했다. 그래서 성녀는 겸손이나 희생 혹은 애덕과 같은 덕행의 실천에 있어서도 어떤 계획이나 방법을 따로 세우거나 특별한 기회를 만들어 행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아주 작은 기회나 사소한 것들 안에서 단순하고도 자연스럽게 실천했다. 또한 성녀의 생활은 모든 것이 하느님께 대한 자녀다운 신뢰로 넘쳐 있었다. 성녀는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겼으며, 설사 고통을 통해야 한다 하더라도 온전히 하느님을 신뢰했다. 더군다나 성녀는 자기 힘이 닿지 않는 일을 하더라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 충분했다. 그래서 자신의 약함·무능력함·작음·허물이나 미천함을 느낄수록 무한하신 하느님의 능력에 자신의 전존재를 맡기고 더욱더 신뢰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그대에게
<이현주 목사의 마르코 복음 읽기, 예수에게 도를 묻다>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정말 재미있는 책입니다. 마태오 19,13-15과 병행구절인 마르코 10,13-16의 대목을 예수께서 해설하는 부분 한 대목을 인용하려 합니다.
“어린아이의 순진한 마음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에게는 악과 선이 따로 없고 아름다움과 더러움이 따로 없으며 너와 내가 따로 없다. 그래서 악과 선이 따로 없고 아름다움과 더러움이 따로 없으며 너와 내가 따로 없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물이 물을 받아들이고 불이 불을 받아들인다....사람은 어른이 되면서 어렸을 때 지녔던 ‘순진한 마음’을 버리고 이것과 저것을 가려 좋은 것은 잡고 싫은 것은 버리는 ‘분별심’을 키우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고통과 절망을 가져다줄 뿐이다.”(예수에게 도를 묻다. 351-352쪽)
사족(蛇足)을 붙이자면 성(聖)과 속(俗), 선(善)과 악(惡), 명(明)과 암(暗), 미(美)와 추(醜), 호(好)와 오(惡)를 따지고 분별하는 마음(分別心)이 지옥(地獄)을 만들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기뻐하며 받아들이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般若智)이 하늘나라를 누립니다.
예수님은 어린이가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별심(分別心)을 버리라는 말씀이지요.
분별심을 버리려면 도리 없이 ‘나’(妄我)를 버려야 합니다.
지금 당신 곁에 어린아이가 있다면 아이의 눈을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거기 하늘나라(天國)가 있습니다.
오늘도 하늘나라(天國)를 누리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 깨끗한 빈손의 진리
갈릴래아에서 공동체설교(마태 18장)를 마치신 예수께서는 요르단강 건너편 유다지방으로 옮겨가셨다. 이제 예수님의 발걸음은 예루살렘으로, 당신을 잡아 심문하고 사형선고를 내릴 백성의 원로와 대사제들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직전까지의 활동기간을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라고 했다.
마태오복음은 대체로 마르코복음 10장을 따르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19,1-20,34)를 엮었다. 여기에는 마태오의 독자적인 사료로 보이는 ‘하늘나라를 위한 독신생활’(19,10-12)에 대한 가르침과 ‘포도원 일꾼에 관한 비유’(20,1-16)가 첨가되어 있다.
느닷없이 나타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의 결혼과 이혼에 관한 논쟁을 벌인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신 내용이다. 마태오는 마르코복음(10,13-16)을 그대로 따르면서 두 부분을 삭제하였다. 사건의 발단은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려와서 예수께 축복을 요청하자 제자들이 먼저 이들을 나무랐다고 한다.(13절)
마르코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14절) 하고 말씀하시기 전에 화를 내셨다고 했는데, 마태오는 ‘화를 냈다’는 부분을 삭제하였다. 마태오는 화를 낸다는 것이 예수님의 성정(性情)에 어울리지 않다고 보았을 것이다.
또한 마르코복음에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15절) 라는 말씀도 마태오는 뺐다. 그 이유는 마태오가 이 말씀을 이미 공동체설교의 첫 번째 규범(18,3)에 삽입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예수께서는 끊임없이 가진 것 없는 이들과 보잘 것없는 이들을 찾아 나서시고 그들을 가까이하신다. 이런 부류에 물론 어린아이들도 속한다. 어린아이들은 삶의 모든 부분에서 모자라고 불완전하며, 부모와 선생 등 그 사회의 성인(成人)들에게 전적으로 의탁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미성인(未成人)들이고 미성년자(未成年者)들이다.
어린아이들의 표본은 배움과 수용의 자세에 있다. 예수께서 축복을 청하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예수께 데려오려던 어른들을 제자들이 나무란 것에 화를 내셨다면(마르 10,14), 제자들로 하여금 어린아이들의 표본을 배우게 하시려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에 기대면 기대수록 다른 것을 믿거나 수용하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느님 나라는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믿음과 수용 외에 어떤 것도 이를 받을 수 없다. 바로 어린아이들의 가진 것 없는 빈손과 설레며 기대하는 마음이 하느님 나라를 향한 태도이다. 이 태도의 상징인 이마(머리) 위에 예수께서는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는 것이다.(15절)
가톨릭교회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어린아이들의 머리 위에 내리신 축복에 힘입어 유아세례와 첫영성체 신학을 정립하였다. 아이들이 비록 자신의 입으로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하고 자신의 지력과 능력으로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알아볼 수 없다고 하여 그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그들의 머리 위에 예수님의 축복이 깃들여 있고, 그래서 그들이 오히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도 한 때는 어린아이였을 것이다. 그러니 어른들도 늘 어린아이처럼 배움과 수용의 태도를 가진다면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14절)이 된다. 아이들의 미숙한 신앙 뒤에 어른들의 강한 신앙이 후견(後見)으로 자리하고 있음도 중요한 부분이다. 이렇게 어린아이들의 깨끗한 빈손과 설레며 기다리는 마음을 상업수단으로 삼거나 거기에 아무 것이나 가져다 주려는 어른들은 없어야 할 것이다.........◆
오늘 독서에서 "살려느냐? 마음을 고쳐라."(에제 18,32)는 말씀이 있다.
그러나 새 생명과 경이로움을 안고 봄은 또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는 새봄에 나는 이 세상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방법으로 나는 곧 새로운 생명을 경험하게 되리라. 내세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일생 동안 최선을 다해 봉사하도록 이 세상으로 나를 부르신 하느님께서 지금은 본향(本鄕)으로 부르고 계심을 확신한다.
많은 이들이 내게 천국과 내세에 관해 이야기를 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아는 것이 없기에 그저 미소로 답할 뿐이다. 언젠가 한 젊은이가 내게, 과연 하느님과 하나 되기를 고대하고 있는지 그리고 나보다 앞서 간 사람들과의 해후를 고대하고 있는지에 대해 물어왔다. 그때 나는 이 책에서 언급한 바 있는 젊은 시절의 경험과 연관시켜 말했다.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난생 처음으로 부모님의 고향인 북부 이탈리아의 토나디코 디 프리미에로를 방문했을 때, 나는 전에도 그곳에 가본 것처럼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어린이가 엄마를 그리워하는 것은 어릴 적 자기의 생명을 편안하고 안전하게 감싸주고 덮어주고 안아주며 키워주었던 엄마의 품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입에 생명의 음식인 젖을 갖다 주었고 몽실몽실한 젖을 만지게 해줌으로써 10개월 동안 안식처로 삼고 자랐던 엄마의 태반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체험이 없는 어린이는 엄마의 품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 엄마의 품속에서, 치맛자락에서 자라보지 못한 어린이는 엄마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가를 모른다. 오히려 자기를 키워주었던 할머니의 품속을 더 그리워 할런지 모른다.
천국 즉 하늘 나라는 하늘 나라의 선물을 받아본 이만이 하늘 나라의 그리움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정말 죽은 후에 천국에 갔을 때 마치 고향에 왔다는 안도감을 그리고 평화를 느낄 수 있으리라. 우리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하늘 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늘 나라의 선물을 그리고 축복을 받고 자란 이에게만이 고향과 같은 하늘 나라가 될 것이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즉 하늘 나라는 어린이가 엄마의 사랑을 받아먹고 자라듯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하느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사람만의 몫이리라.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임종을 1년 앞두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돌멩이를 모두 돈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재물을 물려받을 어린이들에게 좀 더 정성을 기울여 교육을 해야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올바른 자녀교육은 어떠한 재물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자녀들은 참 복된 환경 속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가난해서 못 먹고 못 입는 환경 속에서 자랐고 또 어른 곁에 가면 어른들이 저리 가라고 하는 좋지 못한 대우를 받아 가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자녀들은 얼마나 사랑을 받으며 자라는지 모릅니다.
예수님 때의 어린 자녀들도 어른들에게서 좀 별로 좋지 못한 대우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들이 자녀를 안고 예수님께 축복을 받으러 왔을 때에 제자들이 "나무라면서 내어 쫓았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어느 때든지 자녀는 가정에서는 참으로 귀중한 존재인 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파키스탄에 갔을 때에 미사참례를 마치고 교회 밖으로 나오면 시간이 있을 때 어머니들이 아이를 안고 와서 아이를 위해 기도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똑같은 심정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어린이들을 오라고 하시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안수하시고 보내는 모습을 성서 묵상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우리 예수님은 어린 자녀를 먼저 그들을 축복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은 우리에게도 자녀이지만 하느님에게도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자식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자녀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이 어린이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 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하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이라고 하셨습니다.
프랑스의 종교학자이었던 르낭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천국의 요소는 첫째로 어린아이이고, 둘째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 즉 소외된 자들" 이라고 하였습니다. 천국에서 어린이들의 소중함을 성서의 여러 분야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단편 소설가인 오 헨리는 풍자적인 소설을 많이 썼는데 그분의 글 가운데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부인을 잃었습니다.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딸은 아버지 밑에서 자라게 되고 아버지는 그 딸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퇴근한 후 집에 돌아오면 신문은 보았어도 딸의 질문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또 딸이 함께 놀기를 원해도 같이 놀아 주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이 딸은 자라서 불량아가 되고 거리의 깡패가 된 후 죽었습니다.
죽어서 천당문 앞에 갔는데 베드로가 말하기를 "너 같은 사람은 천국에 들어오지 못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 아이를 들어오게 하여라. 너무 바쁘다고 해서 자기 자녀를 돌보지 않은 저 아이의 아버지 같은 사람은 절대로 문을 열어 주지말고 지옥으로 보내라" 라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바빠도 자녀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날 자녀들의 교육 때문에 미국에 이민 간 사람들이 미국에 가서는 자녀를 돌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자신들의 자녀들이 다 다른 아이들이 되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얼마나 후회를 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어린이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귀중하게 여기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어린이들이 지금은 별 볼일 없는 것 같아도 그 아이들이 30년쯤 후에는 이 사회의 중요한 요직에서 일을 할 아이들이라는 것을 미리 내다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학창시절 기억을 되돌려보면, 누구나 한번쯤은 뜻이 맞는 친구들 대 여섯 명이 같이 모여서 "우리 앞으로 마음을 같이 묶어서 앞으로 공부도 잘 하고 열심히 노력해보자" 라고 약속해 보았을겁니다. 그리고 세월이 약 30년쯤 지난 후에 보니까 그 친구들은 모 신문사의 편집국장, 대학 교수, 사업하는 친구, 학교 교장 선생님, 목사 신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릴 때에 별 볼일 없는 것 같았는데 세월이 지나고 나니 다 훌륭한 인물이 되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을 볼 때에 그 아이들의 내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우리 주님께서 아이들을 귀하게 여기시는 이유가 하느님의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27편 3절에 "자식은 야훼의 선물이요, 태중의 소생은 그가 주신 상급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선물(개역성경 : 기업)이라고 하는 말은 "상속받은 재산"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물려 준 하느님의 재산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자녀를 볼 때에 내 자식이라고 하는 것은 성서적이 아닙니다. 자녀를 볼 때에 하느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하느님의 재산이라고 생각해야 하며, 그런 하느님의 재산은 하느님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을 살아 가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제일 먼저 묻는 질문이 분명히 이것일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맡겨 준 자녀를 어떻게 하고 왔는가?"...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업하는 사람의 최대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업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관심은 자나깨나 자녀에게 마음이 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관심이 우리에게 맡겨 준 자녀에게 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기를 때에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기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기업이요 선물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믿음으로 바르게 기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마땅히 따를 길을 어려서 가르쳐라." 라고 잠언 22장 6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육학자들은 사람의 사고와 인격이 대개 6살 이전에 형성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어릴 때 자녀들에게 가치관을 심어 주고 자녀들의 인생의 목표에 대한 어떤 그림자를 심어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렇게 하면 평생에 그것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섹스 스캔들 때문에 세계적인 망신을 당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신문에는 자세하게 기록이 되지 않았지만 외국 신문에는 그가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를 자세하게 발표하였고 그것을 전 세계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가 어린 시절에 자라났던 그의 고향이 핫 스프링스인데 유명한 온천 유원지이며 거리에 온통 여관이나 도박장들이 있는 곳입니다. 학교에서 집까지 2km를 다니는데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5번이나 가출을 하였고 클린턴은 어릴 때부터 좋지 못한 그림들을 많이 보며 자랐던 것입니다. 성장 후에도 그것이 그의 마음을 늘 지배했던 것입니다. 좋은 교육은 좋은 추억을 심어 주고 또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인 줄로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은 본 대로 마음속에 심어 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의 품에 있을 때에 전력으로 신앙 교육을 시켜야 하며 그리고 어떤 물질을 주는 것보다도 그들에게 좋은 추억을 심어 주셔야 합니다.
인격이 올바르게 형성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아도 그 지식은 별로 빛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어린 시절에 전 인격의 형성과 지력과 의지력과 감정이 90% 이상 형성된다고 합니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심성도 이 시기에 결정됩니다. 그리고 어릴 때 그 틀이 형성되면 평생을 지배합니다.
그러므로 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시작이 되어져야 합니다. 역사의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은 신앙을 가진 가정에서 다 자라났습니다. 구약 성서에서 모세는 이집트 왕궁에서 40세까지 자랐습니다. 그러나 젖먹이 때에 신앙의 어머니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40세가 될 때까지 그 마음 속에는 민족혼에 대한 그의 생각이 떠나지 않았던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가정 교육의 현실은 어디에 있습니까?
자녀들이 믿음의 사람들이 되고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보다도 돈 많이 벌고 잘 사는데 여러분의 교육의 목적을 두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요즈음 여러분들은 자녀들과의 대화가 무엇입니까?
몇 년 전에 서울에 있는 중 고등 학생들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했는데 부모와 나누는 주된 내용이 "공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어떻게 하는가?" 라는 질문에는 "친구나 혼자서 해결하고 부모와는 대화하지 않는다" 고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다니는 부모님들에게 실망을 느낀 적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60% 가 "실망했다" 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어떤 학생은 피정에 가서 은혜를 충만하게 받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엄마와 함께 전철을 탔습니다. 둘이 나란히 앉아 있는데 그 앞에 노인이 서 있었습니다. 아들이 일어나서 자기의 자리를 양보하려고 하니까, 엄마가 하는 말이 "얘야, 멀리 갈텐데 그냥 앉아 있어라." 라고 했습니다. 그 아이는 속으로 갈등을 하였습니다. 배우기는 그렇게 배우지를 않았는데 엄마는 배운 데로 가르치지를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큰 재목은 어릴 때부터 바르게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 교육의 목표를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자녀 교육의 목표는 이웃과 사회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인물의 양성에 두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육의 현 주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고등학생들은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수업시간에 묻지 않고 개인적으로 선생님께 찾아가서 묻는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다른 아이들이 그 문제를 알면 안 되니까 그렇고, 또 나만 알고 있어야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녀들 앞에서 분명한 교육의 목표와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녀를 기를 때에 다른 사람이 한다고 따라가지 마십시오. 자녀들의 개성을 존중해 주시고, 자녀들의 개성을 최대한 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잘못을 할 때는 자녀들을 진심으로 권고하고 책망을 해야 합니다.
제가 아는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는데 수준이 높고 잘 사는 지역일수록 체벌을 하면 부모들이 항의 전화가 많이 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잘못된 가치관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교육은 잡초를 제거하지 않은 밭과 같아서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을 눈으로 보는 관상수로 기르지 말고 열매를 맺는 유실수로 기르시기를 바랍니다.
열매를 맺는 유실수는 어떻게 됩니까?
자꾸 가지를 잘라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의 잘못된 나쁜 습관을 고치고 책망을 하면서 다듬어 져야 합니다. 재목이 되는 것도 어릴 때부터 다듬어 주어야만이 재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멋대로 자란 나무들은 절대로 재목으로 자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녀에게 꾸지람과 책망도 하면서 격려해 주시고 용기를 북돋아 주시고 힘을 주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녀들에게 말 한마디 잘못함으로써 일생을 그르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존파의 대부였던 청년이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가 죽을 때에 한 말이 있는데 "17년 전에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에 학교 선생님한테 미술 시간에 크레파스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꾸지람을 호되게 받았습니다. 나는 그 당시 너무나 가난해서 가지고 올 수가 없었는데 그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는 왜 말을 듣지 않느냐? 라고 하시면서 화를 내며 매를 때렸습니다.
나중에는 이 녀석아, 훔쳐서라도 가져와야 될 것 아니냐? 준비물을 왜 안 가져 왔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나는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의 그 한마디가 내 일생을 바꿔 놓았습니다. 그 때부터 물건을 훔치기 시작하였고 훔치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도적질을 시작한 것이 내 운명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어린 자녀들을 향해서 말 한마디 잘못 할 때에 이런 무서운 결과가 온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기를 때에 자녀들 앞에서 자녀들이 일류 고등학교, 일류대학교에 가야 한다고 교육시키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 해라. 너의 개성을 개발하여라." 라고 하면서 "일생의 축복은 하느님의 손에 있다. 네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아이가 되어야 한다." 라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아이들을 안고 나아와 축복해 주기를 빌었던 그 어머니들의 심정으로 여러분의 자녀들이 하느님 앞에서 축복 받기를 구하셔야 됩니다. 인생의 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요셉은 부잣집 귀염둥이 아들로 자랐습니다마는 하루아침에 이방 나라의 노예가 됩니다.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합니다. 그러나 마침내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됩니다. 성서에는 뭐라고 했습니까? "요셉은 야훼께서 돌보아 주셨으므로 앞길이 열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함께 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부 신자들은 주일날 공부를 시키기 위하여 교회의 중고등부를 보내지 않고 학원에 보냅니다. 주일날 미사참례를 위해 교회에 나가는 시간 조차도 너무나 아깝게 생각하는 부모님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렇게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우리 묵상공간 가족들은 이런 분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 믿음이라면 버리십시오.
학교에 안 가는 것은 큰 일 나는 줄 알지만 교회에 안 가는 것은 괜찮습니까? 피아노 레슨을 받지 않으면 돈이 아깝다면서 호통을 치면서 교회에는 가는지 안 가는지 모릅니다. 사제 엘리의 가정의 자녀교육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들들이 망하는 바람에 아버지도 망했습니다. 반면에 한나의 아들 사무엘은 하느님을 의지한 믿음 때문에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켰습니다. 자녀들을 신앙으로 잘 키울 때에 나라가 복을 받고 가정이 복을 받습니다.
오나시스의 아들은 백만장자이었습니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가다 추락해서 죽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아들도 백만장자였습니다. 그도 작년에 비행기 추락으로 죽었습니다. 저는 영국에서 토마스 선교사 고향 교회를 방문하고 오다가 길에서 그 사건을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신문에는 "케네디 가문이 망했다" 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믿음으로 바로 설 때에 하느님의 기업이며 선물인 자녀들을 하느님은 누구보다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고 지켜주실 것을 믿으시기를 바라며, 이 믿음 안에서 우리 자녀들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묵상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의 마음은 너무나 나쁜 것들을 많이 보아서 더러워져 있습니다. 이 마음이 깨끗해져야 어린아이같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18,3),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마태 5,8)" 라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세탁을 해서 깨끗해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어린아이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탁을 하는 것을 아시지요. 여러분의 세상에서 찌든 더러운 마음들이 고생으로 실컷 얻어맞고 하느님 앞에 실컷 문지르듯이 고생을 하고 난 후 "하느님 잘못했습니다" 라고 회개해야, 그 때 더러운 죄가 다 빠져나가게 되고 본래의 깨끗한 마음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하늘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이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천국의 시민이라면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을 가져야 됩니다. 겸손하고 깨끗한 마음,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가야 될 것이요. 우리의 자녀들이 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자라나도록 교육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두올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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